< 111. 우승 청부사 (4) >
스트라이커는 골로 말한다.
축구의 오래된 격언이다.
팀에 도움이 되는 플레이라도 스트라이커에게 남는 건 득점 기록이다.
경기를 승리로 가져가는 득점을 터트릴 수 있다면 스트라이커는 영웅이 된다.
"스트라이커는 골로 말하는 법이지."
세비야 FC의 감독, 훌렌 로페테기(Julen Lopetegui)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세비야의 유로파 우승을 막는다면, 세비야 팬들이 좋아하지 않겠어요?]
제퍼슨 리의 인터뷰는 상당히 수위 높은 비판이 담겨 있었다.
세비야의 이적시장 정책 비판과 동시에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과 어조.
"어리고, 또 하필 미국인이지."
미국인에 대한 유럽인의 일반적인 선입견이 있다.
"너무 티내고 다니고, 거만하고, 시끄럽지."
물론 선입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퍼슨의 인터뷰는 충분히 그렇게 느껴졌다.
"건방진 자식. 경기에서 골을 넣어야지. 입을 털어?"
하기야, 프리미어리그의 8관왕이라던가.
심지어 19살의 나이에 말이다.
뿐만 아니다. 우승 커리어는 운이 따라야 한다. 그 대단한 해리 케인도 우승커리어가 별로 없다. 한데도 제퍼슨은 벌써 빅리그에서의 우승 커리어를 두 개나 갖게 됐다.
"그렇지만 저 자식은 골로 말하지 않습니까?"
곁에 있던 전력 분석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 말도 맞다.
"리그 43골이던가? 거기에 각종 대회를 포함시키면······."
"58골입니다."
"······확실히 골로 말하는 스트라이커가 맞군."
한 시즌에 60골을 넣는 스트라이커가 몇이나 있었나.
메시와 호날두가 그러했다.
둘을 제외하면 최근에는 수아레스와 네이마르가 그러했던가.
하나같이 프리메라리가를 지배했던, 그리고 군림하는 선수들이다.
제퍼슨은 기록만 봐서는 그들에 필적하는 선수다.
아니, 오히려 그 괴수들도 19살의 나이에 저런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 저 녀석이 적어도 지금의 메시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
메시에 비견되는 잠재력을 지녔음은 인정하다.
하나, 현 시대를 군림하는 리오넬 메시와 비견되는 건, 아직 너무 이르다.
적어도 로페테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세비야는 신으로서 군림하는 메시를 한 시즌 동안 최소 두 번에서, 네 번까지는 상대하는 팀이다.
"월드 클래스의 선수가 있다고 한들, 무조건 무패 우승을 차지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축구란 그렇다.
월드클래스 선수로 무장한 바르셀로나도 결국엔 진다.
천하의 메시도, 공격 포인트를 못 올리고 패배할 때가 있다. 세비야는 정말 조금이지만, 간혹 바르셀로나를 격침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제퍼슨 리를 막을 방법이 있다고 여겼다.
"축구에 절대적인 건 없어. 절대적인 승리자는 더 없는 법이야. 세비야는 강하다. 심지어 여기는 우리 홈구장이니까."
결의가 가득한 목소리.
코치진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유로파리그 결승전 경기장은 세비야의 홈구장이다.
유로파리그가 시작되고 전에 선정된 결승전 경기장. 그리고 천운인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세비야가 결승까지 올랐다.
유로파 역대 6회 우승이란 기록을 세우기에 가장 알맞은 조건이 아닌가.
"보여 주자고. UEFA 배지 오브 아너를 가진 단 7개 팀만의 저력을!"
***
세비야FC의 명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내가 이학현일 때 생각하면, 그팀에서 뛰는 건 꿈만 같았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프리메라리가에서 늘 상위권을 유지하는 팀은 아니다.
어쩔 때는 중위권까지 곤두박질치는 경우도 있다.
완벽한 폼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한다.
"많은 선수가 떠났으니까."
다니엘 알베스, 이반 라키치티, 알렉시스 비달, 세르히오 라모스 등등.
세비야를 떠난 선수들의 이름값은 과연 대단하다.
뭐, 이런 이유다.
우승을 차지하고, 팀의 핵심 멤버를 팔아넘기는 것.
선수를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넘기는 거상이었으니까.
핵심 선수가 떠나면 팀의 색채와 전술 자체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성적 역시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토너먼트, 그것도 유로파리그에서 만나는 세비야는 어쩌면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보다 더 까다로운 강적일지도 모른다.
"유로파 우승을 밥 먹듯이 하는 놈들이니까."
"유로파 DNA라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유로파에서 만나는 세비야는 진짜 무시할 수 없는 상대야."
세비야로 도착해 훈련장에서 몸을 푸는데, 선수들의 잡담도 다 그런 내용이다.
경기 전에 이미 세비야의 경기 분석을 마친 상태.
선수들 대부분이 세비야의 전력을 파악했다.
이번 시즌 세비야의 리그 순위는 8위.
하지만 세비야는 챔피언스리그를 나가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런 자신이 어디서 나왔겠나.
"유로파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거지."
"흠."
"뭐, 실제로 유로파의 세비야는 다르잖아?"
난 세비야의 경기를 10경기 이상 비디오로 돌려봤다.
신기하게도, 이 팀은 리그와 유로파에서의 경기력이 완전히 갈렸다. 유로파에선 자신감이 넘치는지, 환상적인 플레이가 자주 나왔고 리그에서는 꾸역꾸역 무승부를 만들어 내는 조금은 답답한 경기력이다.
적어도 유로파에서만큼은.
"바르셀로나인 줄 알았다니까."
"어이, 친구들. 걱정하지 말라고. 유로파의 진짜 제왕은 나니까."
지루가 웃으며 다가왔다.
뭐, 세비야가 유로파의 제왕이라지만,
우리도 유로파의 제왕이 있긴 하다.
유로파 득점 1위 지루가 있으니까.
"제프."
"?"
"이번 경기 살살해. 골을 넣으려면 딱 해트트릭까지만. 오케이?"
아, 그러고 보니 내가 4골 넣으면 득점 동률이었나.
경기 출장 수는 내가 적으니까, 득점왕은 내가 되겠군.
일반적인 견해라면, 4골 차이면 득점왕이 확실하다.
한데도 지루는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넌 일반적인 놈이 아니잖아. 이 괴물 자식아."
나도 사람인데.
조금 서운해질 뻔했다.
***
"쟤가 그 녀석인가?"
"그 엿같은 인터뷰를 한 녀석이지?"
"한 시즌 60골을 넣어 버린 괴물 미국인 스타?"
"맞아. 물론 거기에 챔피언스리그는 없어서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기야 하지만."
"그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 43골을 집어넣은 괴물이야."
"우리 수비진이 잘 막을지 모르겠군."
세비야 팬들은 필드 위에 올라온 제퍼슨을 바라보며 걱정을 토로했다.
비록 다른 리그지만, 제퍼슨에 대한 소문은 유럽에 자자했다.
"그러나 여기는 우리의 홈그라운드지."
"에스타디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
"우리 경기장이 유로파 결승전 경기장으로 확정됐을 때, 그리고 우리팀 이 결승전에 오른 순간 깨달았어."
"우리의 우승은 운명이야!"
세비야 홈팬들은 선수들이 모두 필드위에 올라오자 열렬한 응원을 펼쳤다.
반면, 첼시의 선수들이 보일 때마다 야유를 쏟아 냈다.
"우우우우우우우!"
"꺼져! 니네 섬으로!"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리는 경기장.
4만 5천 석의 비교적 작은 경기장이기에,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소리가 선수들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야유에 주눅 들지는 않았다.
"빨리 저 시끄러운 입들을 닫아 주게 할 생각이야."
둥글게 모인 선수들이 의지를 다지는 가운데, 제퍼슨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아스필리쿠에타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어떻게긴요. 골을 넣어서 다 벙어리로 만들어야죠!"
"좋아. 아주 좋은 마인드야. 자! 보자고, 우리는 맡은 역할만 확실히 수행하자고! 저놈들은 유로파에선 메시나 다름없는 지루하고, 우리 제퍼슨 리를 상대해야하는데. 우리 수비는 편한 거잖아?"
아스피의 농담에 선수들은 웃음을 흘리며 긴장을 풀었다.
유로파리그 결승전.
챔피언스리그보다 분명 격이 떨어지지지만, 역사와 명성이 존재하는 유럽대항전이다.
하나, 그들은 적어도 이 경기가 FA컵 결승전만큼 치열할 거라고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늘, 왠지 그랬다.
"좀 편하게 가 보자!"
"Go! Blues!"
***
경기 시작 5분.
경기장은 시끄러웠다.
아마 데시벨 측정을 한다면, 역대 최고치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만큼 관중들은 열렬하게 세비야를 응원했고, 또 첼시를 야유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첼시 선수가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가 쏟아졌다.
"엿이나 처먹어!"
펜스 근처에 오면, 그쪽에 있던 관중이 모두 일어나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이것이 홈에서만큼은 '극강'을 자랑하는 세비야다.
리그에서도 홈에서는 단 세 번의 패배밖에 없는, 그야말로 홈 극강의 팀.
아무리 베테랑이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야유와 조롱, 그리고 욕설은 버티기 어렵다.
하나, 그런 상식을 벗어나는 선수가 꼭 있었다.
19살의 나이.
멘탈이 성숙하지 못하고, 외부의 공격에 흔들릴 수 있는 시기.
제퍼슨이 필드에서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올렸다.
"Wuuuuuuaaaaaaaaaaa!"
그 순간, 잠자코만 있던 첼시 팬들이 일제히 기립하며 환호를 보냈다.
"뭐지?"
세비야의 홈팬은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필드의 분위기가, 경기장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는.
"Wuuuuu!"
4만 5천 명 관중의 시선이 일제히 제퍼슨에게 쏠렸다.
"압박해!"
로페테기가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서늘했다.
그러니까 그런 적 있지 않나.
단지 공을 향해 뛰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을 선사해주는 선수가.
기대감을 심어주는 선수가 말이다.
"Wuuuuuuuuu-!"
공중에서 제퍼슨에게 뚝 떨어지는 공.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달려드는 세비야의 수비수, 디에고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빠르게 뒤에서부터 압박해 들어가고.
홀딩 미드필더 페르난두 헤제스가 앞에서 압박했다.
앞과 뒤.
터치라인 근처에 있는 제퍼슨이 빠져나갈 방법은 중앙으로 치고나가는 것뿐.
사실 그것도 쉽지 않다.
'공중볼이니까.'
공중에서 떨어지는 볼을 완벽한 터치로 받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두 명의 선수가 앞뒤에서 강력한 압박을 가해 온다.
여기서 흔들림 없는 플레이?
'가능할리가!'
페르난두가 씩 웃었다.
'리오넬 메시의 뒤를 이어 세계를 제패할 선수라고?'
언론들은 때론 호들갑을 심하게 떤다.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나, 이내 그의 눈동자는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툭.
공중에서 떨어지는 볼 끝으로 다시 한번 리프팅하듯이 띄우고,
달려드는 페르난두의 몸을 밀쳐 내며,
툭!
또 떨어지는 볼을 띄워서 카를로스를 등지고.
"······!"
급히 몸을 꺾는 페르난두를 쳐다보며,
여유롭게 다시 한번 공을 툭!
"Wuuuuuuuuuuuuaaaaaa!"
첼시 팬들의 환호와.
5분 동안 시끄럽기 짝이 없던 세비야 홈팬들의 침묵.
그리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제퍼슨의 뒤를 바라보며 페르난두가 느끼는 순간적인 절망감.
'트리플 솜브레로(Trip Somebrero)?'
네이마르가 자주 사용하는 개인기.
공을 허공에 띄워 선수들을 농락하는 플레이.
축구공을 저글링하듯이 다루는 스킬.
세 번의 터치로 두 명의 압박을 공중볼로 벗겨 내는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플레이에 페르난두가 느낀 감정은 딱 세 가지였다.
경악, 두려움, 그리고 경외.
브라질 태생으로서 삼바 축구가 가슴에 새겨진 그에게, 방금 전 제퍼슨이 보여 준 모습은 소름이 돋았으니까.
'곧 세계를 제패할 선수라고?'
언론은 그렇게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진짜였군.'
***
세 번의 볼 띄우기로 압박을 피해 내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세비야 관중의 침묵과 첼시 원정팬의 환호.
"The blues!"
"Goooooooo!"
그 이후 이어지는 장면은, 더 끔찍했다.
트리플 솜브레로라는 기술로 압박을 벗겨 낸 제퍼슨은 달려드는 수비를 상체 페인트로 가볍게 속여 넘겼다.
그리고 중앙에서 성큼성큼 전진하는 메이슨 마운트에게 패스.
마운트는 선수 하나를 돌파한 뒤.
제퍼슨에게 곧바로 패스를 찔러줬다.
[제퍼슨 리! 공을 가볍게 터치하고, 달려드는 수비를 피해 볼을 발바닥으로 긁어 냅니다!]
[아! 공간이 열렸어요! 제퍼슨! 그대로 슈팅! 고오오오오오올! 제퍼슨이, 전반 6분 선제골을 만들어 냅니다!]
"Yeaaaaaaaaaaaaaaa!"
"제-퍼슨! 제-프!"
로페테기는 침묵했다.
세비야 관중들처럼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당했다.
공을 저글링하듯이 다루는 기술은 둘째 치더라도, 순식간에 수비를 벗겨 내고 때리는 슈팅은 너무나 매서웠다.
골키퍼 토마스 바츨리크가 공을 쳐다보기만 했음에도, 그는 그를 차마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미쳤군."
화려한 개인기부터.
"슈팅이 너무 완벽하군."
깔끔하면서 강력한 슈팅.
그가 본 슈팅 중에 아름답기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한 방에, 분위기가 단번에 역전됐으니까 더 뭐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 감독으로서 여기서 무너져선 안 된다.
"고작 한 골이니까."
한 골 차이는 언제든 역전이 가능하지 않나.
하지만 생각해야 한다.
전반 6분,
제퍼슨은 아직 '고작' 한 골밖에 안 넣었을 뿐이라고.
< 111. 우승 청부사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