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우승 청부사 (1) >
현 시대 최고의 선수라고 한들, 후세에 가면 저평가가 될 수도 있다.
우승 커리어가 없거나, 또는 개인 수상이 부족하거나.
경기에서 보여 준 임팩트가 좋아도 남는 건 기록과 커리어다.
[20-21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 순위]
1. 제퍼슨 리(첼시) 43골
2. 해리 케인(토트넘) 33골
3. 모하메드 살라(리버풀)24골
4. 세르히오 아구에로(맨시티) 22골
5. 티무 푸키(노리치) 19골
"케인이 널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돼."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이후, 역대 리그 최다 득점 기록은 모하메드 살라의 32골이었다.
그리고 케인은 이번 시즌 엄청난 폼을 보여 주며, 33골을 기록했다.
이전 기록을 깼다.
한데 그 기록을 다시 한번 내가 깨 버렸다.
"아마 이 기록을 깰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일 거야."
"하나는 짐작되는데."
캉테가 실눈을 뜨며 날 흘겨본다.
요즘 따라 캉테 성격이 묘하게 바뀌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짐작되는 게 그거야? 네가 깰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캉테는 헛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야. 43골을 누가 깨? 지금 공격수 중에 가능한 선수가 누가 있겠어. 케인이나 그나마 노려볼 만한데, 사실 모르는 일이고."
"그러면 다른 방법은 뭐야?"
"응?"
"기록을 깰 수 있는 게 두 개라면서?"
"아. 하나는 당연히 리오넬 메시가 맨시티로 이적하는 거?"
캉테의 농담은 정말 농담이었다.
그만큼 내가 세운 기록을 깰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강조하는 말이다.
"앙큼한 녀석."
"응?"
캉테가 순진한 눈을 끔뻑거렸다.
녀석.
대놓고 내 칭찬을 하려니 쑥스러우니까, 저런 식으로 날 치켜세워주곤 한다. 고마운 친구다.
음.
리오넬 메시가 맨시티로 이적한다면?
생각해 보니 그거 무서운데.
저번에 상대한 맨시티의 데 브라이너. 그 친구의 패스는 진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마 이학현일 때 봤다면, 우상으로 삼고 배우고 싶어 했던 플레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패스에 메시가 장착된다면?
'음. 우리 팀에도 그런 패서가 있으면 좋겠는데.'
조르지뉴가 레지스타 역할을 맡고 있지만, 솔직히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맨시티로 이적할 건 아니다.
첼시로 그만한 선수가 올지도 모른다.
[첼시 로만 구단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해 거액의 이적료 배팅!]
[돈뭉치를 푸는 첼시. 제2의 '제퍼슨 리' 영입 노리나?]
[대대적인 투자 선언! 첼시,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두 개 다 목표!]
[첼시, 제퍼슨 리와 주급 20만 파운드(3억) 재계약 준비 중]
이번 시즌 성적에 고무받은 로만 구단주가 호언장담했다.
다음 시즌 확실한 투자와 보강을 해주겠다고.
하나, 그 사실이 꼭 모든 선수에게 달갑게 여겨지는 건 아니다.
투욱! 뻐엉!
훈련장 한쪽에서 연신 공을 차고 있는 드링크워터.
그는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5경기 연속 결장이다.
옆에선 로스 바클리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두 명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팀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두 명이니까.
다음 시즌 새로운 선수가 이식된다면, 가장 먼저 나갈 확률이 높은 친구들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저 두 명과 친분이 생겼지만, 프로 무대는 때론 치가 떨리도록 냉정하고 잔혹하니까.
"제프! 크로스 연습 좀 할 건데, 도와줄래?"
그에 반해 다음 시즌도 자신의 자리가 확실한 선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나나, 여기 풀리시치다.
풀리시치는 이번 시즌 19개의 어시스트로 도움왕을 차지했다. 그 대단한 패서인 데 브라이너를 이겼다.
"물론."
"다 네 덕택이야. 내가 제대로 올리지 못한 크로스에도 여지없이 골을 넣어주니까!"
도움왕은 풀리시치가 차지했지만, 더 주목받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였다.
[크리스티안 풀리시치, '어시스트 1위에 제퍼슨 리를 향한 찬사를 보내다']
그가 순전히 자신의 기록은 내가 만들어 줬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으니까.
한데 이게 그럴듯했다.
패스 성공률과 빅 찬스 성공 횟수에선 데 브라이너가 거의 풀리시치의 두 배에 가깝게 앞선다.
그런데도 풀리시치가 도움왕이 됐다는 건,(-19개로 같다. 풀리시치 경기 출장이 적어 도움왕이 되었다) 순전히 내가 올린 득점 기록 때문이다.
어설픈 패스마저 득점으로 연결했으니까.
데 브라이너가 나한테 맨시티로 오면 50득점으로 만들어 주겠단 게 순전히 농담으로 여길 만한 게 아니었다.
뭐, 하여튼.
풀리시치는 자신의 기록을 더 세우기 위해선 나와의 호흡이 필수라는 걸 잘 안다.
때문에 우리는 훈련에서 여러 의견을 교환했다.
크로스, 스루패스, 원투패스 등등.
"아, 근데 그 인터뷰 봤어?"
"무슨 인터뷰?"
"반 다이크가 했던 인터뷰 있잖아. 못 봤어?"
훈련 중이라 휴대폰을 보는 건 금지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풀리시치가 반 다이크를 흉내라도 내는 듯이 어깨를 펴고 목소리를 변조시켰다.
"리버풀에겐 최고의 결승전, 첼시에겐 최악의 결승전이 될 것. 제퍼슨 리의 몇 없는 무득점 경기가 바로 FA컵 결승이 될 것이다."
오호.
그렇게 말했다 이거지.
저 말의 의도는 명백했다.
"네가 자신을 뚫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지."
"음. 하긴. 워낙 대단한 선수라."
리그에서 리버풀을 두 번 만났다.
1승 1패의 성적이다.
첫 경기는 내가 인사이드 포워드로 출전해서 반 다이크와 직접 부딪치는 건 몇 번 없었다. 일명 '지루 시프트' 때문이었지.
그 이후 두 번째 리그전에서는 한 30분 동안 맞상대했다.
그리고 반 다이크가 근육 부상으로 교체됐다.
뭐, 30분 동안의 성적을 말하라면.
'거의 막히긴 했지.'
솔직히 말해 현 리그에서 최고의 센터백이 아닐까 싶다.
아니, 유럽 전체를 통틀어 봐서도, 감히 세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그때 30분은 내 패배였다.
물론 30분 동안 다섯 번의 슈팅을 성공시켰지만,
그것들 모두 정확도가 떨어졌다. 반 다이크는 영리하게 슈팅을 내주되, 내가 원하는 임팩트를 주지 못하게 방해하는 데 중점을 뒀으니까.
"그래서 아마도 이번에 지루 시프트가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또 통하려나."
"감독님도 고민 중이신가 봐. 봐봐. 우리 팀전술 훈련이 계속 바뀌잖아."
풀리시치의 말대로였다.
보통 전술 하나를 정해 놓고, 그걸 중심으로 훈련을 하는데.
이번에는 여러 포메이션과 전술 시험이 이어지고 있었다.
음.
뭐 선수인 내가 감독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위치는 아니다만.
FA컵 결승전이라는 압박감이 아무래도 리그컵과는 달리 감독님을 짓누르는 듯했다.
그러면, 적어도 선수로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지 않겠나.
"나, 잠깐 감독님 좀 보고 올게."
***
필마르크는 오히려 맨시티가 리버풀보다 상대하기 편했다.
"상성같이 말이지."
리버풀과 맨시티는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 스페인처럼, 점점 양강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강팀이었다.
다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맨시티는 오히려 상대하기 쉬웠다. 유난히 맨시티 수비진은 제퍼슨을 막는 데 애를 먹었고, 조르지뉴의 다이렉트한 패스나 풀리시치의 크로스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보였다.
물론 무너지더라도, 금세 엄청난 공격력으로 득점을 올리긴 하지만.
차라리 맨시티를 상대하는 건 의외로 부담감이 없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아니다.
"선수진의 퀄리티? 맨시티가 높으면 높았지, 리버풀이 맨시티보다 더 압도적이라고 볼 수는 없어."
한데도 왜 리버풀이 어렵게 느껴질까.
"반 다이크. 이 녀석 때문이지."
필마르크 감독은 전체적인 전술보단, 스트라이커를 이용한 개인 전술에 능했다.
사실 제퍼슨이 아무리 대단한 축구 센스를 지녔다고 해도, 회귀 전, 2선 미드필더에서만 뛰던 선수가 스트라이커로서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보여 주는 데에는 필마르크의 영향도 컸다.
그는 훈련장에서 늘 제퍼슨과 얘기했다. 플레이에 대해 의논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스트라이커 그 자체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필마르크는 스트라이커를 중심으로 두고, 전술을 풀어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스트라이커가 상대 수비를 부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맨시티는 그것이 됐다.
라포르테, 존 스톤스.
충분히 제퍼슨이 공략했다.
한데 반 다이크는.
"쉽지 않은 상대죠. 반 다이크는."
"제프?"
"감독님. 혹시 반 다이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저번처럼 지루 시프트를 고민 중이신가요?"
필마르크는 뜨끔했다.
그게 제법 효과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클롭 감독이죠. 그 방식이 또 통할 것 같지는 않아요."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민이다. 리버풀의 수비진은 단단하거든. 거기에 골키퍼 알리송의 선방률은 현재 리그 1위니까."
"뭐, 리그 우승팀이니 어쩔 수 없죠. 또 결승전인 만큼, 저들도 최선을 다할 거니까요."
제퍼슨은 거기까지 말하고 필마르크를 똑바로 바라봤다.
"감독님. 절 믿으신다면,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죠."
"기본?"
"결국엔 스트라이커가 수비를 이기고 골을 넣는다. 이게 축구의 기본이죠. 반 다이크하고 정면으로 붙겠습니다. 윙어나 2선의 프리롤이 아닌, 원톱에 절 세워주세요."
필마르크는 제퍼슨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는다고 느꼈다.
'이 녀석······.'
제퍼슨은 필드에서 비쳐지는 당당하고 거만하고, 건방진 모습에 비교해 무척이나 순종적인 편이다.
자신의 지시에 철저하게 따르는 편이었고, 설령 의견이 맞지 않으면 최대한 얘기를 나누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편이다.
그런 그가 이토록 강렬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이번에는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랐다.
제퍼슨의 입가에 새하얀 웃음이 걸렸다.
"아무런 변칙전술도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제가, 보여 드릴게요. 힘대 힘, 공격 대 수비. 누가 더 날카로운지. 아무리 단단한 강철방패가 뚫리지 않는지."
"제프······."
필마르크는 결국 결심했다.
그의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변칙전술.
지루 시프트, 타미의 미드필더 활용, 제퍼슨의 윙어나 플레이메이커 활용 등등.
그 모든 변칙을 다 지워 버렸다.
"원톱에 제퍼슨 리, 너다."
원톱, 제퍼슨 리.
그것이 곧 전술이었다.
***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첼시와 리버풀의 FA컵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그야말로 빅매치입니다. 리그컵 우승과 유로파 결승, FA컵 결승까지 오른 첼시는 3관왕을 노리고 있습니다.]
[리버풀 역시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이은 FA컵 우승까지, 더블을 노리고 있죠.]
[이 경기! 엄청납니다! 관중의 열기와 선수들의 의욕이 벌써부터 뜨겁게 느껴지네요!]
[이번 경기의 핵심은 단언해드릴 수 있습니다. 리그 43골이란 역대기록을 세운 제퍼슨 리가, FA컵 결승전에서 득점을 터뜨릴 수가 있는가!]
[거기에 리버풀의 반 다이크가, 제퍼슨의 득점을 저지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죠.]
[만일 제퍼슨이 오늘 두 골을 넣는다면, FA컵 득점왕까지도 확정입니다!]
FA컵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대회다.
아마추어 축구팀부터, 프리미어리그까지.
모든 축구인이 치르는 축구 축제다.
괜히 사람들이 트레블을 얘기할 때, 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통틀어 얘기하는 게 아니다.
리버풀은 프리미어리그와 FA컵이라는 더블을 목표로.
첼시는 리그컵, FA컵, 유로파리그 세 개의 대회 우승이라는 목표를 둔 만큼, 두 팀의 대결은 치열한 격전을 예고했다.
[첼시의 라인업입니다. 케파가 골키퍼 장갑을 낍니다. 수비 왼쪽부터 에메르송, 안토니오 뤼디거, 시셀도, 아스필리쿠에타. 중원에는 은골로 캉테와 조르지뉴, 그리고 풀리시치와 허드슨 오도이가 다소 내려앉습니다. 4-4-1-1의 포메이션이네요. 쳐진 위치에 타미 아브라함이, 원톱에는 제퍼슨 리입니다!]
4-4-1-1의 포메이션.
비교적 수비적인 전술이다.
그러나 중계진은 이 전술이 절대 수비적이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원톱에는 제퍼슨 리이니까요.]
[사실 첼시는 수비적인 전술이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퍼슨 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수비적입니까?]
[저는 말이죠. 9명이 모두 수비하고, 제퍼슨이 맨 앞에 있어도, 결국엔 첼시가 득점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하하! 그 정도인가요?]
[다름 아닌 제퍼슨 리이니까요!]
중계진들의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경기 휘슬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잦아들었다.
모든 선수가 필드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전광판의 시간이 19:00가 되는 순간.
삐이이익!
[경기 시작됩니다!]
< 108. 우승 청부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