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05화 (105/258)

< 105. 키 플레이어 (4) >

사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감독들은 제각기 전술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특히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하는 감독들은 전술, 전략적 식견, 선수 관리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세상엔 수많은 명장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현시점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펩 과르디올라를 꼽는 이들이 많다.

물론 그에게도 비판이 향하긴 한다.

늘 완성된 스쿼드와 엄청난 뎁스, 화려한 선수진이 있는 팀을 이끌었으니까.

실제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까지.

그가 이끈 팀은 강팀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 있다고 한들, 그가 얻어 낸 성과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수많은 경기에서 많은 상황을 맞닥뜨렸고, 극복해 왔다.

그런 펩에게도, 지금의 상황은 마치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면서 정글을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장 간단한 것에 당했어."

제퍼슨의 스피드와 오프 더 볼 무브먼트는 아무리 강력한 수비진이라 하여도 찢어발기는 힘을 갖고 있다.

더구나 점유율을 끌어올리며 점점 전방으로 올라가는 맨시티의 후방은, 제퍼슨이란 무기가 찢어 날뛰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한쪽 원정석에서 지긋지긋한 응원가가 울려 퍼진다.

펩은 미간을 좁혔다.

과연 그가 이런 방식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겠는가.

아니다. 이미 대처를 했다.

스톤스는 비교적 후방에 머물렀고, 발 빠른 그의 속도는 충분히 커버를 하고도 남음이다.

물론 애당초 속도에서 제퍼슨을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톤스 정도의 클래스라면.

적어도 다른 수비가 복귀하는 시점까지 시간을 벌어 줄 줄 알았다.

한데, 이건 정말 말이 안 되지 않나.

"저 어마어마한 스피드. 옆에서 스톤스가 달리면서 방해하는 데도 무너지지 않는 밸런스. 정말 신이 축복한 신체야."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등골이 서늘하고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감정은 언제였던가.

'메시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봤을 때. 레반도브스키의 10분동안 몰아치는 5골을 봤을 때.'

펩은 그때의 감정이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두 선수는, 본인이 이끌던 소속팀의 선수가 아니었던가.

제퍼슨 리는 다름 아닌 상대편이다.

그런데도 펩은 분노보단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강렬한 소유욕도.

'레알과 바르셀로나, 그리고 PSG가 노린댔지? 절대로. 절대로 안 돼.'

펩은 한 가지 결심을 하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지.'

물론 한 명의 괴물이 경기를 찢어발기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건 상대팀과의 격차가 분명 존재했을 때나 가능하다.

맨시티가 첼시보다 퀄리티가 떨어지는 팀은 아니잖나.

'감독도 제법 변칙적이고 유능하지만, 제퍼슨 리에게 기대는 면모가 있어. 제퍼슨 리가 세 골을 넣어도, 우리 선수들이 합심해 네 골만 집어넣어도 이기는 게 팀 스포츠니까.'

펩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스산하게 빛났다.

***

캉테는 유럽 전체에서도 톱클래스다.

우리 팀이 올 시즌 모든 대회에서 이뤄 낸 좋은 성적은 캉테의 공이 크다. 물론 내가 넣은 골도 있지만, 중원을 잠식해 버리는 캉테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대인마크 능력, 패스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시야, 감각적인 수비 위치 선정, 영리한 태클까지.

거기에 볼을 지키고, 전진하는 드리블 능력까지 장착했다.

그런 캉테가 아무리 이를 악물고 뛰어다녀도.

맨시티의 중원은 아름다운 패스로 점유율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City! City!"

"박살 내 버리라고! 런던의 개자식들을!"

"저놈들을 찢어 버려!"

맨시티 팬들은 유난히 흥분했다.

그럴 수밖에. 이 경기에 리그 우승이 걸려 있으니까.

그렇다고 첼시 팬들이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수의 원정 팬들은 괴성을 내질러 댔다.

"빌어먹을 중동 오일 머니!"

"FFP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냐!"

"돈으로 축구를 사려는 너희 구단주에게 전해! 너희는 이번 시즌 무관으로 끝난다고!"

음.

돈으로 축구를 사려는 팀의 원조는 원래 첼시 아니었나.

뭐, 내로남불이 기본인 게 축구판이지.

하지만 우리 팀 팬들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맨시티의 화려한 패스 플레이 때문이었다.

툭, 툭!

데브라이너와 다비드 실바, 로드리의 패스가 짧고, 때로는 길게 전후좌우로 흔들림 없이 이어지며 우리의 공간을 점점 일그러뜨렸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중원, 조르지뉴, 캉테, 메이슨 마운트가 나쁜 건 아니지만.

맨시티가 힘과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모양새였다.

어쨌거나 볼을 많이 소유한다는 건, 결국 기회를 얻어 간다는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의 수비도 물이 올랐다는 거다.

뤼디거의 안정된 수비, 시셀도 특유의 걸레 수비까지.

거기에 골키퍼 케파가 두 번의 슈퍼 세이브를 선보이면서 맨시티 선수들의 얼굴을 잔뜩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Go! Blues!"

축구엔 흐름이 있다.

아무리 강팀이고, 상대가 약팀이어도.

전력 차가 명백해도.

한 팀이 90분 내내 주도권을 쥐지는 못한다.

흐름은 분명하게 한 번은 넘어간다.

캉테와 다비드 실바의 대결.

우아한 몸놀림으로 빠져나가던 실바가 일순 캉테의 영리한 태클에 볼을 빼앗겼다.

"막아! 제발!"

그리고 팬들은 때때로 강렬한 위기감을 느낀다.

왜냐면 필드가 한 눈에 다 보이니까.

그들의 눈에는 캉테가 볼을 차단하자마자, 달려 나가는 내 모습이 똑똑히 담겼을 것이다.

캉테는 작은 몸으로도 요리조리, 중원을 휘저으며 전진 드리블을 펼쳤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윌리안에게 패스.

윌리안은 측면으로 빠지려다, 중앙으로 툭툭 치고 들어왔다.

윌리안은 비교적 압박에서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나에게 홀딩 미드필더 로드리와, 존 스톤스가 달라붙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윌리안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게. 위협적으로, 맹렬하게, 스피디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며 달려 나갔다.

"놓치지 마!"

아이러니하게도.

공은 윌리안이 소유했지만, 맨시티 선수들의 시선은 나에게 향해 있었다.

수비진 틈새로 파고들자.

어중간한 위치에서 커버를 하고 있던 라포르테의 시선이 일순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윌리안은, 그 작은 틈을 노려 기습적인 타이밍에 슈팅을 때릴 능력이 충분히 있는 선수다.

뻐어엉!

"······!"

"Oh, Shit!"

날카롭고 위력적인 강슛.

빠악!

하나 몸을 날린 에데르송 골키퍼의 선방이 나오면서 관중석에서 일제히 환호가 울린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환호가 멎어든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최고속도로 맹렬하게 달려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도가 100이라면, 난 70으로 달리고 있었을 뿐.

거기서 한 번 더 가속력을 터뜨릴 힘이 남아 있었다.

존 스톤스가 위압적인 표정으로 앞에서 어깨를 들이밀고.

왼쪽에서 로드리가 순간적으로 발을 쭉 뻗어 공을 건드려는 찰나.

"으읍!"

"Fuck!"

순전히 힘으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오로지 힘으로. 화려한 기술 따위는 필요 없는, 순전한 어깨 힘으로 두 선수를 밀어내고.

에데르송 키퍼의 손에 맞고 튕겨 나오는 볼을 향해.

다이빙하듯 몸을 던진다.

그리고 이마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다이빙 헤더.

"제-----프!"

역동작에 걸려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에데르송은 그대로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나에게 어깨 싸움에 밀린 스톤스는 잔디를 스터드로 찍었으며.

로드리는 잔뜩 성난 얼굴로 수비들을 향해 성을 냈다.

그리고 나야 뭐.

맨시티 팬들 앞에서 왼손 손가락 세 개와 오른손 손가락 한 개를 들어 올렸다.

"한 골 더 기다리라고! 시티즌!"

리그 최종전.

해트트릭 정도는 나와야 화려하지 않겠나.

***

전반전의 2 대 0이란 숫자는 어쩌면 일찌감치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하게 만들 스코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드레싱 룸에 들어오는 맨시티 선수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제퍼슨 리. 무서운 선수지. 솔직히 인정하자고. 그 자식은 미친놈이야."

펩은 순순히 인정했다.

여기서 제퍼슨 리를 깎아내려다 봤자 얻을 건 없다. 차라리 선수들의 부담감을 내려 줘야 했다.

"하지만 지금 경기 내용을 보자고. 제퍼슨의 퍼포먼스로 첼시가 앞서 가지만, 모든 기록에서 우리가 우위다. 축구는 팀 스포츠고, 어느 선수 한 명이 엄청난 활약을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같은 팀 상대로 그럴 선수는 없다. 안 그런가? 제군들!"

맨시티 선수들은 결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퍼슨 리는 월드 클래스야. 인정해! 하지만 보라고. 너희 역시 모두 월드 클래스다. 저 팀엔 캉테와 제퍼슨. 딱 두 명만 그 정도 수준이지만. 우린 11명이 세계 최고다. 혼자서 경기를 지배한다고? 우리는 그런 실력을 가진 열한 명이 시너지를 낼 수 있어! 가자! 가서 우승컵을 쟁취해 와라!"

"Go! City!"

맨시티 선수들은 베테랑들이다.

프로 의식뿐 아니라 모두 유럽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빛나는 재능을 가진 자들이다.

"제퍼슨? 잘하는 녀석 맞아.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골만 넣으면 문제없어. 걔가 두 골을 넣든, 세 골을 넣든. 우리가 네 골을 넣자고."

아구에로가 마레즈와 스털링과 얘기를 나누고.

로드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수비진과 얘기를 나눴다.

"그 자식 세리머니 봤지? 난 절대 용납 못해! 내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그 자식이 페널티 박스로 넘어가는 걸 막을 거야."

존 스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 녀석이 어마어마한 놈이란 걸 알겠어. 그래. 이제 더럽게 해서라도 잡을 거야. 어차피 45분. 옐로카드 한 장 정돈 받지!"

선수들은 각자 의욕을 다지고.

터널 밖으로 나갔다.

"City! Oh my City!"

승리를 간절히 바라는 홈 팬들의 응원 소리와 함께.

시셀도의 걸레 같은 수비와.

뤼디거의 묵직한 수비. 그리고 철벽과도 같던 케파마저 무너지는 추격골이 터져 나왔다.

[아구에로! 공을 잡고 밑으로 내려옵니다! 오, 엄청난 백 힐 패스! 왼쪽으로 스털링이 달려 들어갑니다!]

[스털링! 스털링! 엄청난 스피드와 화려한 드리블입니다! 철벽과도 같던 아스필리쿠에타가 발이 꼬여 넘어지고, 오, 그대로 슈웃! 엄청난 골입니다!]

[원더풀 골입니다. 아름다운 궤적으로 꺾여 들어가네요! 세상에! 케파 골키퍼도 허망한 표정입니다!]

[맨시티의 홈 팬들! 추격골에 환호하면서 감정을 마구 터뜨립니다! 스털링, 세리머니를 하지도 않고 공을 잡고 하프 라인으로 달려가네요!]

시작 5분과 끝나기 전 5분을 조심하라.

축구계의 격언이다.

맨시티는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1분 만에 추격골을 터뜨리며, 다시 움츠렸던 머리를 들어 올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시즌 내내 리그 최강으로 불렸던 기세가 다시 살아났다.

"리버풀이 지금 한 골을 넣어서 1 대 0으로 앞서 가는 중입니다."

"그럼 우린 두 골이 필요하겠네요."

코치진의 의견에 펩은 담담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적어도 네 골이 필요해."

"네?"

"제퍼슨은 끝나기 20초 전에도 득점을 터뜨릴 수 있는 선수지.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이 필요하다."

펩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무거웠다.

코치진은 흠칫 떨었다.

철혈과도 같던 그들의 보스가 이토록 한 선수를 경계하고 진지하게 대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저번에 메시를 상대할 때나 저런 얼굴이었지.'

이미 오랫동안 세계 축구계에 군림해 온 신계의 축구선수.

그와의 비교가 과연 가당키나 할까.

그러나 코치진은, 필드에서 맨시티의 수비진을 종이 인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제퍼슨을 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난 내 선수들을 믿는다. 제퍼슨 리는 분명 월드 클래스야. 저게 월드 클래스가 아니면 억울한 일이지. 그렇지만 우리 팀 11명 모두 월드 클래스다. 절대로 선수 하나에 휘둘리지 않아. 이건 팀 스포츠니까."

그때였다.

열정적으로 응원을 펼치던 맨시티 팬들이 일순 히스테리에 걸린 사람처럼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제퍼슨 리.

펩은 생각했다.

어쩌면 11명으로 이뤄진 월드 클래스를 단신으로 부수는 그 위의 클래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경기를 결정짓는 '키 플레이어'를.

뒤늦게, 말이다.

< 105. 키 플레이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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