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키 플레이어 (3) >
클럽 감독과 국가대표 감독간의 사이는 좋지 않을 때가 많다.
선수의 출전과 휴식을 두고 여러모로 의견 갈등이 상당하니까.
"캐나다 전에서도 널 선발로 출전시키면, 너희 감독이 당장 미국으로 날아올 것 같더군."
버홀터 감독은 쓰게 웃었다.
이미 A매치 엔트리에 등록된 이상 선수 선발 권한은 그의 것이나, 클럽 감독과 마찰이 심해지면 좋을 건 없다. 훗날 친선 경기에 차출을 아예 막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 경기는 벤치에서 시작할 거다. 혹시 괜찮나?"
그리고 나는 외부에서 건방지다는 생각과 다르게 감독의 말에 순응하는 편이다.
"물론이죠. 그게 감독님의 선택이라면."
"캐나다는 어려운 팀이 아니니까. 사실 산티아고의 원톱도 실험해 보고 싶었거든."
"흠. 잘될 겁니다. 아시잖아요? 토론토에서 원톱으로 29골을 뽑아낸 거."
"너는 지금 첼시에서 한 시즌 50골을 몰아 넣고 있지."
"음."
***
캐나다 전이 펼쳐지는 BMO 필드는 정말 많은 관중들이 들어찼다.
젊은 피가 많이 수혈된 미국은 초반부터 역동적이었다.
새로운 미국을 보여 주는 것처럼, 빠르고 역동적인 플레이.
그 최전방에는 산티아고가 있었고, 산티아고는 특유의 폭발력 있는 움직임으로 캐나다의 수비진을 휘저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득점을 만들어 내진 못했다.
[캐나다의 노장 조슈아가, 같은 팀의 산티아고를 결정적인 순간에 막아 내는 군요.]
[터프한 수비가 장점인 선수로, 국가대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지만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토론토의 전관왕에는 그의 공이 크죠! 토론토가 LA 갤럭시를 꺾고 우승할 때, 그가 즐라탄을 다리가 부러지면서까지 막은 전적이 있죠! 그만큼 투혼이 대단한 선숩니다!]
"아, 조슈아. 이럴 거예요?"
"요즘 회춘하는 기분이라서."
산티아고의 작은 불만에 조슈아가 씩 웃었다.
조슈아는 그렇게 산티아고의 투정을 귀엽다는 듯이 보더니, 저 멀리 로드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흠칫.
로드릭이 조슈아를 보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로드릭은 여전히 날 무서워하네."
"토론토에서 로드릭을 쥐 잡듯이 많이 혼냈잖아요."
"하하! 그랬긴 했지. 여기서 다 같이 뛰던 게 엊그제 같군. 너와 로드릭, 그리고 저기 벤치의 제프까지 말이야."
"흠. 제프가 안나와서 아쉽죠? 상대편으로 뛰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 그건 절대 사절이야."
조슈아가 정색했다.
***
산티아고는 조슈아의 수비를 뚫고 어떻게든 한 골을 넣었다.
하나, 역습 상황에서 캐나다의 공격이 성공하면서 스코어는 1대 1 동점.
워낙 뉴페이스가 많고 20대 초반으로 이뤄진 라인업이라, 손발이 잘 맞지 않은 것도 있다.
내가 후반 28분에 투입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한 골을 집어넣었다.
"Goooooooooaaaaaaaaallll!"
풀리시치와 웨스턴 맥케니의 호흡으로 이어진 스루패스를 놓치지 않고,
상대 선수를 말 그대로 꾸깃꾸깃 접어 버리면서 골문 안으로 억지로 때려 넣었다.
그리고 꾸깃꾸깃 접힌 선수는.
"끄응! 제프, 오랜만에 만난 인사치고는 너무 화끈한데?"
"이게 미국식 인사 방법이죠."
BMO 필드의 관중들은 토론토 팬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내가 집어넣은 골에 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 같이 손뼉을 쳤다.
상대팀의 관중에게 받는 존중은, 때로는 가슴이 묵직해질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끝나기 전에 딱 한 골만 더 넣었다.
"Oh Shit! 토론토의 왕이었던 남자가 고향을 짓밟는구나!"
맥케니의 스루패스를 재빠르게 끊어 가는 움직임으로 조슈아를 스피드로 떨쳐 내고, 강력한 인스텝 슈팅으로 골문을 활짝 열었다.
"빌어먹을. 온몸이 다 쑤시는군. 그 엿 같은 미국식 인사를 한 번 더 받으면 죽을지도 모르겠어."
한때 같이 뛰었던 동료가 울분을 터뜨리는 것도,
묘하게 기분 좋은 일이다.
***
미국은 확실히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었다.
수많은 노장들이 물러나고, 20대 초중반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유럽에서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다름 아닌 10대 선수인 제퍼슨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퍼슨과 산티아고, 그리고 로드릭까지.
세 명의 10대 국가대표를 만들어 낸 고등학교의 축구 코치가 주목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한 건 없다. 그저 그 아이들이 뛰고 싶었던 경기장을 청소한 것 밖에는."
한때 은사였던 축구부의 '불독' 코치님이 빨개진 얼굴로 하는 인터뷰를 보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한번 찾아가 봐야 하는데."
"그러게. 미네소타에 갈 일이 별로 없네."
"이번 시즌 끝나면 같이 찾아가자, 로드릭."
"좋아."
A매치 소집이 끝나고 로드릭과 산티아고와 헤어졌다. 처음으로 A매치에서 발을 맞춰 본 신성들과도 간단히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지고, 풀리시치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어때? 어디 다친 데 없지? 오, 제발. 허벅지가 땡긴다거나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어깨가 아프다거나. 그런 말을 하지 말아 줘."
필마르크 감독은 노심초사하면서 우릴 반겼다.
풀리시치는 어깨를 으쓱였고, 나 역시.
"FA컵 왓포드전에 출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음 경기에 대한 선발 의지로 대답을 대신했다.
***
A매치 기간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격한 일정에 빠져들었다.
리그 경기는 35라운드까지 빠르게 진행됐고, 유로파리그 8강도 중간에 치뤘다.
유로파리그 8강에선 비야레알을 만났다.
노란 잠수함이란 별명으로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팀 중 하나였지만.
유로파의 사나이 지루가 해결했다.
1차전 원정에서 3대 0으로 편안한 승리를 얻었다.
"내가, 이 지루가 해치웠으니 안심하라고!"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한 지루는 프랑스 국가대표에서 0슈팅이란 굴욕을 유로파의 사나이란 명성으로 다시 덮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 줬다.
덕택에 나는 푹 쉬었다.
[제퍼슨 리, FA컵 4강 출전 준비 완료!]
[왓포드에게 떨어진 특명, 제퍼슨을 통제하라!]
[필마르크 감독, '제퍼슨을 통제하겠다고? 살면서 그런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계획을 처음 듣는다.']
[왓포드 감독, '우리는 제퍼슨을 막을 비책을 준비했다.']
[제퍼슨 리, '저런 말 하고 이기는 사람 못 봤다.']
가끔 기자들은 정말 창의성 넘치는 존재들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했던 말은, '어떤 비책을 갖고 오든 이겨 내겠다'였는데, 저런 식으로 변질될 줄이야.
덕택에 벤치에서 콧김을 뿜어내며 날 노려보는 왓포드 감독의 표정이 살벌하다.
그러나 나도 입만 터는 놈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다.
왓포드가 준비했단 비책은 제법 성가신 것 일수도 있다.
발 빠르고 활동량 넘치는 세 명의 미드필더와 또 발 빠른 수비수까지.
애당초 몸싸움에서 이기기 쉽지 않으니 빠르게, 많이, 그리고 태클을 잘 해내려는 속셈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빠르다고 한들, 그들 중에서 빠른 것이고.
'속도'에서만큼은 과거의 카카나 가레스 베일의 전성기도 부럽지 않은 나였다.
툭!
"헙!"
가랑이 사이로 툭 차고, 어깨로 강하게 밀치며 성큼성큼 내딛는다.
압둘라에 두쿠예가 넘어지면서 내 옷깃을 잡으려고 했지만. 문제 없다. 이미 그가 손을 뻗을 수 있는 지점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으니까.
툭, 툭툭툭!
고스트 스텝은 볼을 발끝에 다는 아주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래야 속도가 줄지 않는다.
그 말은 언제든 정교한 컨트롤이 가능해야한다는 것이었고, 지독히도 짧은 볼터치는 수비로 빽빽한 밀집수비 안에서도 속도를 죽이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아무리 많은 수비라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걸.
내가 도저히 감당 못할 스트라이커란 걸.
저들에게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다.
날 막을 비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위하는 건 하나다.
압도적인 플레이.
"우왁!"
페널티 박스.
수비로 빽빽한 좁은 공간. 다른 이였다면 당황해서 볼을 돌리거나, 다른 방식을 찾겠지만.
내 눈에는 공이 오가야 하는 길과 드리블을 쳐야 하는 길이 보인다.
마치 마법처럼,
툭, 툭툭!
박스 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고스트 스텝.
나를 따라 수비들이 대거 달려든다. 크레이그 도슨, 카셀레, 카푸에, 훌레바스까지.
그들이 지키고 있던 수비 범위가 일시에 무너진다. 서로 커버하는 위치가 뒤죽박죽 섞이고, 꼬였다. 수비의 호흡은 더 복잡해지고 혼잡해졌다.
마치 겁에 질린 양떼처럼.
그들 사이를 마구 휘저으며, 난도질하자.
"Yeaaaaaaaaaaaaaaaaa!"
나의 플레이에 열광하는 홈팬들의 열기가 쏟아지고.
번번이 허공을 가르는 수비들의 태클을 모두 갈라 버린 이상.
남은 건 골문이었다.
뻐엉!
간결하고, 강력하게.
키퍼가 막을 엄두도 못내는, 힘껏 때려 버린 강슛.
어쩌면 골네트가 찢어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력한 슈팅이 꽂혔다.
"제-퍼-슨!"
"Oh, 제프! 제프! 제프!"
"Wuuuuuuuuuaaaaaaaaaa!"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보일 거다.
박스 안에 가득한 밀집수비를 지독히도 짧은 볼터치와 말도 안 되는 드리블로 모두 찢어 버렸으니. 관중들이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소리치는 이유로 충분했다.
***
[첼시, 왓포드 FC를 1대 0으로 꺾고 FA컵 결승 진출!]
[제퍼슨 리, 30m 드리블 골! 두 번째 푸스카스상 후보!]
[첼시 팬들, '제퍼슨의 골이 모두 푸스카스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1위도 제퍼슨! 2위도 제퍼슨! 3위도 제퍼슨! 상 이름을 제퍼슨 상으로 바꾸는 게 어떤가?']
[왓포드 수비수 크레이그 도슨, 제퍼슨의 속도를 따라가다 햄스트링 부상 아웃!]
[필마르크 감독, '제퍼스 리를 통제하겠다고? 그의 부모님을 모셔 오는 방법밖엔 없다.']
[왓포드 감독, '한 골만 내줬다. 우리는 제퍼슨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다.']
***
FA컵은 결승전은 리그 일정이 끝나고 치른다.
우리로서는 한숨 돌린 결과였고, 다른 4강전을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올라오면 좋겠어?"
캉테가 물음에 생각했다.
리버풀과 맨시티.
둘 다 강한 팀이고, 맨시티는 저번 만남에서 겨우 간신히 동점을 만들었다.
리버풀은 1승 1패고.
두 팀 다 쉽지 않지만.
"맨시티가 좋겠어."
"왜? 난 맨시티가 더 까다로운데."
"과르디올라 감독은 아무리 대승을 거둬도, 선수에게 다가가서 오늘 못했던 걸 지적할 정도로 심하다 싶은 모습이 있을 정도거든."
"그게 왜?"
"그렇게 축구에 열정적인 감독을 무너뜨리면 기분이 더 좋을 거 같아서."
"······."
뭐냐.
캉테 너마저, 왜 풀리시치가 '새디스트인가'하고 중얼거리면서 짓던 눈빛하고 똑같냐.
[리버풀! 반다이크의 결승 헤더골로 팀을 웸블리로 이끕니다!]
[리버풀이 맨체스터 시티를 2대 1로 꺾고 FA컵 결승에 진출합니다!]
[리버풀과 첼시! FA컵 트로피를 두고 경쟁하겠네요!]
"어떡하냐. 리버풀이 올라왔네."
그러게.
뭐 상관없다.
어차피 두 팀 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팀이라서 또이또이고.
맨시티야.
"리그 최종전이 맨시티잖아?"
잠깐만 보자.
리버풀과 맨시티가 승점 1점차이로, 서로 치고 박는 가운데.
맨시티 승점 91점
리버풀 승점 90점
공교롭게도 두 팀 다 연승 행진 중이다.
그리고 최종전에서 운명의 팀을 만난다.
리버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최종전.
그리고 우리는 맨시티와 최종전을 치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정 아닌가.
"만일, 우리가 최종전에서 맨시티를 잡으면, 리버풀이 역전 우승하겠지?"
"리버풀이 맨유를 이겨야하긴 하지만, 최근 폼을 보면 리버풀이 이길 확률이 높겠지"
"그러면 과르디올라의 표정이 어떨까?"
"······."
"생각만 해도 짜릿하군."
"너 혹시 펩에게 안 좋은 기억 있어?"
"아니, 그런 거 전혀 없는데?"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린 거 같은데.
'미국 놈 인성'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저 순하디 순한 캉테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있겠나.
< 103. 키 플레이어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