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키 플레이어 (2) >
"제퍼슨! 사랑해요!"
"제퍼슨! 제퍼슨!"
공항의 환영 인파가 낯설지는 않다.
유로파 원정 이후 런던으로 돌아올 때 마중 나온 첼시팬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런던이 아닌 워싱턴에서의 환영 인파는 조금 낯설었다.
저 열렬한 사랑 고백은 듣기엔 달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걸쭉한 목소리는 조금 소름 돋는다.
아니,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 큰 터프가이들이 사랑한다고 외치는데.
"제프, 난 눈에도 안 보이나 봐. 다 너만 외치고 있어."
"이젠 인정해. 너 인기 없어."
"......."
풀리시치는 풀이 죽은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음. 만일 내가 없었다면 원 역사에서 미국 축구팬들의 모든 인기와 기대를 받았던 선수였을 텐데.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 것 같기도.
"풀리식!"
그때, 굵고 걸걸한 목소리가 아닌 가늘고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풀리시치가 잔뜩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치어리더 복장으로 맞춰 입어온 일단의 소녀팬들이었다.
덥수룩한 수염 아저씨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띈다.
"치어리더 복장인데?"
"하하하하! 봤어? 제프? 넌 터프가이라서 마초들한테 인기 많지만, 요즘 여자애들은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풀리시치는 언제 풀 죽었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자! 팬 서비스 정돈 해 주고 가자고. 캠프 소집시간까지 여유가 좀 있잖아?"
새끼.
그냥 가려고 했으면서.
뭐, 나도 동감이다. 여기까지 나와서 환영해 주는 팬들에게 전부 고마움은 표현하지 못해도, 되도록 많이 악수하고 사인하고 사진 찍어 줘야지.
야. 근데, 임마.
넌 왜 치어리더들한테만 가냐.
풀리식과 내가 다가오자, 치어리더 복장으로 공항에 환영 나온 여성팬들은 하이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날 보면서 말이다.
"제-퍼슨! 제퍼슨! 사랑해요!"
"여기! 사진 한번 같이 찍어 주세요!"
그리고 풀리시치를 외쳤던 건, 치어리더 중 딱 한 명뿐이었고.
의기양양했던 풀리식은 다시 나라라도 잃은 것 마냥 암울해졌다.
"자. 팬서비스 하자고, 풀리식. 시간도 많잖아?"
"······나도 근육 좀 키울까?"
***
3월 A매치 소집은 2022년 월드컵 북중미 카리브 지역 최종예선 3, 4차전 때문이다.
우리는 저번에 멕시코와 코스타리카를 완파하며 조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아직 경기가 많이 남았으니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때문에 버홀터 감독님은 여전히 진지했다.
물론 어느 정도 얼굴에 여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멕시코를 이미 꺾은 이상, 나머지 팀은 그렇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까.
3차전은 온두라스, 4차전은 캐나다였다.
"홈에서 열리는 경기인 만큼, 압도적 승리를 원한다. 온두라스는 약체로 평가되니, 우리는 홈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줘야 해! 승리는 당연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리고 경기장을 찾은 미합중국의 시민들이 원하는 건 완벽한 승리다!"
우리는 이번에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대부분 감독님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다만 이번에 첫 소집된 로드릭만이 다소 어두운 얼굴이다.
"긴장했어?"
"헤이, 로드릭. 별거 없어! 우리가 토론토 시절에 상대한 멕시코 클럽 애들보다 약체들이라고!"
그러고 보니 하이스쿨에서부터 같이 뛰었던 3인방이 다 모였다.
로드릭, 산티아고 그리고 나.
첫 A매치 데뷔전인 로드릭이 긴장하는 것과 달리 산티아고는 여유로웠다.
"나랑 제프가 딱 세 골씩 넣어서 6골만 넣을 테니까. 설령 실점 몇 개 해도 상관없지. 긴장 풀어."
"······걱정 마. 무실점으로 만들 거니까."
역시, 이 녀석 승부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로드릭의 장점이 바로 저거다.
진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승부욕이 강하다. 그것이 원래 역사에서 무명으로, 그저 고등학교 축구부로 끝날 뻔했던 그의 인생이 미국 국가대표까지 이끈 것일지도 모른다.
"자, 가자. 밖에 팬들이 많아. 공항에서 만난 치어리더들도 있더라고."
"그건 또 언제 봤대."
"그중 소피아란 얘, 정말 이쁘더라."
"이름까지 알아냈어?"
"응. 네가 사인해 줬잖아. 소피아라고."
"왜 내가 기억 못하는 걸, 풀리식 네가······."
"흠흠."
풀리시치는 애써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식.
요즘 나 따라서 축구만 한다고 연애를 못해서 그렇군.
***
[경기장은 축제 분위기입니다! 곳곳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캡틴 아메리카 입간판이 눈에 띄네요!]
미국에서 스포츠는 축제와 같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 건, 초반부터 시작되는 제퍼슨의 환상적인 드리블 때문이다.
[제퍼슨 리! 지금 말씀드리는 순간 왼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공을 붙잡습니다!]
측면으로 빠지고, 풀리시치가 가운데로 스위칭하며.
서로를 오가는 원터치 패스는 단숨에 온두라스의 수비를 허문다.
[풀리시치와 원투 패스! 첼시의 환상적인 호흡이 여기서도 나옵니다! 공을 받고 단숨에 측면을 허물어뜨리고, 페널티 박스로! 아아! 왼쪽으로 접고! 슈팅! 다시 접고! 온두라스 수비진이 허둥지둥 댑니다! 슈팅! 다시 접습니다! 다 접어 버리는군요! 박스에 수비수들이 모두 쓰러져 있습니다! 제퍼슨! 골! 골입니다! 수비수 5명을 농락해 버리면서 접어 버리고, 그대로 골문에 아름다운 슈팅을 넣어 버리네요!]
[제퍼슨 리! A매치 5경기 연속 득점입니다! 대단합니다! 엄청납니다! A매치 5경기 11골 째입니다!]
[미국의 전설을 써 내려가는 환상적인 선수네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 탈락의 슬픔을, 이제 제퍼슨이 치유해 줍니다! 그의 환상적인 선제골로, 1대 0으로 앞서갑니다!]
***
온두라스는 북중미 TOP4에 속하지만 솔직히 북중미 지역에서나 강자였다.
월드컵 본선만 나가면 처참하게 탈탈 털리니까.
그만큼 세계의 벽과 북중미의 차이는 컸다.
그리고 런던에서, 유럽 축구 중심에서 활약한 내게 온두라스는 정말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뭐가 이렇게 쉽게 뚫려?"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거 상대팀을 너무 얕보는 발언 아니야?"
"아니, 그렇기 한데. 페이크에 다 속아 넘어가잖아."
"네 슈팅 페이크가 치명적이란 사실을 알고 있길 바랄게."
흠. 그럴지도.
하긴. 이 페이크에 인테르의 수비진도 여러 번 속아 넘어가지 않았나. 온두라스의 수비진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좋아, 결심했어."
"뭘?"
"A매치 최다 골을 경신하겠어."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만."
선수가 기록 경신에 욕심을 내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미국 A매치 최다 골이 몇 골이더라.
뭐, 그런 건 넣다 보면 알겠지.
"Yeaaaaaaaaa-!"
그때, 후방에서 볼을 돌리던 온두라스의 공격을 끊어 낸 로드릭에게 환호가 쏟아진다.
처음엔 얼어붙은 모습을 몇 번 보여 주더니, 이내 제 페이스를 찾아서 특유의 커팅 능력과 후방 빌드업 능력을 보여 준다.
이렇게.
툭!
후방에서 길게 한 방에 떨어지는 롱패스는 아슬아슬하게 내 발끝에 걸리고.
조금 강도가 세고 빨랐지만,
발바닥에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착하고 달라붙는다.
달려드는 두 명의 이름 모를 미드필더의 압박을, 단 세 번의 볼 터치로 가랑이 사이로 공을 빼내자.
"USA! USA! USA!"
성조기를 마구 휘날리며 USA를 외치는 국뽕러들의 환호가 쏟아진다.
와. 첼시팬들보다 환호가 더 크다. 이게 국가대표란 말이지.
나에게 쏟아지는 6만 쌍의 눈동자와, 필드 위의 시선과 감정.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아마 내가 한국에서 이학현으로 뛸 때, 도저히 손을 뻗어도 닿지 않던 월드 클래스를 상대할 때의 그런 감정이 아닐까.
문득 센치해진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로 상대해 주겠다고.
그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존중의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저들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달려드는 수비수를 굳이 제치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대표에서 나만 돋보여서는 조금 미안하다. 특히 풀리시치의 우울한 표정을 떠올리면.
그래서 왼쪽으로 달려가는 풀리시치에게 곧바로 공을 내줬다.
풀리시치도 나에게 묻혀서 그렇지, 유럽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윙어다.
평소 그 답지 않은 폭발적이고 화려한 드리블로 온두라스의 왼쪽 수비를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나 역시 패스를 내줌과 동시에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가속, 가속, 또 가속!
"막아! 막으라고!"
"몸을 던져!"
하도 스페인어로 떠드는 말이 다 비슷해서 그런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해 줄 말은 산티아고에게 배웠다.
"Ruidoso(시끄러워)!"
그래도 수비들은 여전히 떠들어 대며 들이 댄다. 그때에 풀리시치가 내가 좋아하는 궤적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약간 감겨 들어오는 크로스.
수비 세 명이 앞, 왼쪽, 오른쪽에서 강하게 밀쳐 오지만.
"너희들 밥은 먹었냐? 왜 이렇게 약해!"
유럽의 떡대들을 상대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가냘픈 몸짓이었고,
풀리시치의 크로스는 내 이마에 정확히 떨어졌다.
뻥!
"Wuuuuaaaaaaaaaaaaaa!"
깔끔한 골과 귀청 떨어질 거 같은 환호성.
좌절하는 수비수와 무너지는 골키퍼의 얼굴을 보는 건, 환호성보다 더 즐거운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의 미사일이다! 이 자식들아!"
"21세기 캡틴은 주먹이 아니라 폭탄을 들고 싸운다고!"
"살고 싶으면 닉 퓨리에게 전화해서 빌어! 이 자식들아!"
"제-퍼슨! 제-퍼슨!"
***
[제퍼슨 리, 북중미-카리브지역 월드컵 최종예선 2골 폭발! 미국, 온두라스 5대 0으로 완파!]
[온두라스 감독, '클래스가 다른 선수다. 그는 끔찍하고, 위협적이며, 치명적이다. 우리 선수들이 그의 플레이에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기를 바란다.']
[온두라스 주장 메퀴로, 'LEE와 유니폼을 교환하려고 왜 뛰어갔냐고? 그야 내 딸이 그 녀석의 열렬한 팬이니까.']
[제퍼슨 리를 응원하는 관중석의 깜짝 치어리딩!]
[미국 그렉 버홀터 감독, 제퍼슨의 플레이에 대한 소감을 묻자, '아마 미국 올타임 넘버원이 될 것.' 호언장담!]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는 캐나다와 무승부! 토론토 BMO 필드, 그들의 영웅을 맞이할 준비 완료!]
***
"인생을 산다면 제프처럼 살고 싶다."
"왜 또 이상한 넋두리야."
"관중석에서 했던 치어리딩 플래시몹 봤어?"
아. 그거.
온두라스 전에서 카메라에 잡힌 깜짝 쇼였다.
어느 한 학교의 치어리딩 팀이 관중석에서 플래시몹 형식으로 퍼포먼스를 한 것이 꽤 화제가 됐다. 정식 중계로 북미 전역에 뻗어 나갔고, 유튜브에서도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물론 신기한 일이지만.
그 치어리더들이 내 이름이 새겨진 플랜카드를 들었다는 게 더 화제가 된 모양이다.
"넌 마초들한테만 인기 많은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엉덩이를 까 볼까?"
"아서라. 퇴장당한다."
캡틴 아메리카의 엉덩이.gif
라고 올라오는 짤방은 솔직히 보기 민망하다. 뭐, 그 사진을 보고 엄마한테도 한소리 들었다.
'너한테 접근하는 글래머의 금발 여자들은 일단 경계부터 하려무나!'
음.
어머니가 금발에 붉은 눈동자입니다만.
아버지가 옆에서 헛기침을 하면서 애써 웃음을 감췄지만.
어쨌거나 A매치 5경기 12득점이란 기록은 역대급 페이스긴 했다.
더구나 내 나이를 감안하면, 아무래도 대표로 뛸 시간은 많다. A매치 최다 골 기록 경신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미국의 레전드 랜던 도노반이 157경기 57골로 통산 최다 득점이다.
이 정도야 뭐.
흠흠.
내가 풀리식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버스 뒤편을 슬쩍 보니 로드릭과 산티아고는 서로 말없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이 많이 친한데, 싸우기라도 했나.
"아니. 우리가 갈 곳이 BMO 필드잖아."
BMO 필드.
토론토 FC의 홈구장.
나와 로드릭, 그리고 지금 산티아고가 뛰고 있는 구장.
흠.
이거 좀 감회가 새롭군.
고향에 돌아온 탕자 같으려나.
아니면,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 나쁜놈의 귀환일까.
< 102. 키 플레이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