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Welcome to the EPL (3) >
아스톤 빌라는 쉬이 라인을 올리지 못했다.
"뭣들 하는 거야! 뭐가 겁이 나서 엉덩이를 뒤로 빼? 엉?!"
그 막강한 리버풀과 맨시티를 만나도 굶주린 들개처럼 전진하고 물어뜯던 게 아스톤 빌라였다
그랜드 감독의 철학이 그런 축구를 만들었다.
하나,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뛰고 있던 아스톤 빌라 선수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도 물러서고 싶어서 뒷걸음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최전방 공격수마저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올 정도로.
첼시의 공격력은 매서웠다.
오랜만에 출전한 오도이와 페드로의 넘치는 의욕은 둘째고,
'푹 쉬다가 돌아온' 제퍼슨 리의 컨디션이 절정이란 점이, 아스톤 빌라가 감히 앞으로 나갈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빌라 팬들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움츠린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냈다.
"Wuuuuuuuuuu!"
[캉테가 드링크워터에게, 드링크워터, 단번에 머리 위로 넘기는 패스! 제퍼슨에게 이어집니다!]
툭!
트래핑은 축구의 기본이다.
가장 기초이면서도 중요한 기술이다. 그리고 누군가 제퍼슨의 트래핑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교과서다. 어린 선수는 저 트래핑을 교과서로 삼아야 해!"
그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볼 터치.
회전을 멈추고 원하는 위치에 정확히세우는 완전한 통제.
볼을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건, 원하는 플레이를 한다는 걸 뜻했다.
지금 이 필드는.
[제퍼슨 리! 필드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습니다!]
촘촘하고 빡빡한 수비
틈은 많지 않다. 하나, 제퍼슨은 조그만 틈을 억지로 벌릴 힘이 있다.
'후웁.'
숨을 들이키자 허벅지 근육이 일순 팽팽하게 부푼다.
탓!
꽉 막힌 견제.
패스를 할 줄 알았던 제퍼슨이 서서히 볼을 몰고 전진 드리블을 펼친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서서히 움직이던 그의 속도는, 눈앞에서 미드필더를 만나는 순간 단숨에 최고속도에 도달했다.
어깨로 상대 선수를 강하게 밀어내며.
상대 선수는 갑작스런 급발진에 이은 충격에 흔들렸고, 왼쪽으로 작은 틈이 생겼다.
"Wuaaaaaaaaaa!"
그리고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스피드.
급격한 가속에, 또 다시 가속, 그리고 다시 한번 가속!
터치라인 위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제퍼슨은 단숨에 풀백과 미드필더 두 명을 벗겨 내고, 페널티 박스 좌측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제프! 더는 안 돼!"
로드릭은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았다. 어쩌면 제퍼슨의 사소한 습관까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로드릭일지도 모른다.
1년 넘게 한집에서 살았으며, 같이 훈련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와 같이 수십, 수백 번 훈련했다. 많지 않지만 그를 막았을 때가 있었다. 그때의 기억과 감각을 떠올리며, 로드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좁은 공간, 빡빡한 수비. 박스에 바글거리는 수비 블록.
로드릭은 어깨를 넣으며 발을 뻗으려던 찰나.
팟!
"미친!"
급격한 정지.
세상의 모든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온 더 볼의 무브먼트.
급정지 이후, 발바닥으로 볼을 뒤로 빼내는 백스텝에 로드릭의 발이 허공을 가르고.
툭!
"아!"
로드릭은 중심을 잃은 채 쓰러지면 서 새삼 느꼈다.
'빌어먹을. 친구는 개뿔이.'
프로 무대는 냉혹한 거 아니겠는가.
하나, 박스 안은 촘촘했다. 급히 복귀한 미드필더 둘, 풀백, 센터백까지 네 명.
그리고 뒤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수비수까지.
페널티 박스에 사람이 꽉 차 있다.
누구나 그 앞에 선다면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 그만큼 비좁은 공간이었고, 빽빽했다. 한데도 제퍼슨은 전진했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싶은 플레이가 저절로 펼쳐지는 날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이라 여겼다. 빽빽하게 공간을 좁힌 수비들을 보라.
여기서 올바른 선택은 동료 선수들에게 패스로 공격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제퍼슨은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마치 환상처럼 마법이 펼쳐졌다.
발끝에 달려있는 듯한 정교한 볼 컨트롤.
[제퍼슨! 그대로, 그대로 파고듭니다!]
투욱, 툭툭툭툭툭!
볼을 노리는 수비수들의 태클이 쏟아진다. 그러나 지독하다 싶은 정도로 짧은 볼 터치로 아슬아슬하게 모든 태클을 무위로 되돌린다.
"미친!"
"헉!"
"무슨······!"
더 놀라운 건, 가속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빽빽한 좁은 틈을, 조금의 속도도 줄이질 않고 파고든 것이다.
미세한 마이크로 컨트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짧디 짧은 볼 터치.
마치 발끝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상적인 무브먼트로 태클을 피한 제퍼슨에게 남은 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넓은 평야였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될 거 같은 날이.
그리고 그런 날이 찾아온 순간이라면.
모든 게 잘 되는 법이다.
뻐-엉!
[제퍼슨 리! 환상적인 드리블 이후 득점을 기록합니다!]
[마법사 같네요. 도대체 그 좁은 공간을 어떻게 뚫을 수가 있나요! 아스톤 빌라 팬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제퍼슨 리를 바라봅니다!]
***
[첼시, 아스톤 빌라를 4대 1로 꺾으며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에 한 발짝!]
[통제 불가 제퍼슨 리, 페널티 박스 환상적인 드리블로 1골 1어시스트!]
[대패 아스톤 빌라, 패배 속 얻은 유일한 위안은 신예 제임스 로드릭의 투지]
[제퍼슨 리 외에 모든 첼시 공격수를 단단히 틀어막았던 제임스 로드릭, 팀내 최다 평점]
[제퍼슨 리 14번째 MOM선정!]
[첼시 팬들, 리그 33호 골을 터뜨린 제퍼슨을 칭송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공격수!']
***
비교적 겨울 이적시장은 여름에 비해 조용한 편이다.
대체적으로 여름에 자금을 거의 다 쓴 구단이 많다. 또한 시즌 도중에 영입을 한다는 건, 정말 그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겨울에 이적은 여름처럼 활발하고, 충격적이지는 않다.
우리도 그랬다.
하나 이적시장 마지막 날. 결국 우리 팀에서도 이적생이 나왔다.
"굿바이, 주마!"
잦은 실수로 시셀도와 크리스텐센에 밀려 4순위 센터백이 된 주마가 에버튼으로의 이적을 확정지었다.
"보고 싶을 거야. 난 이 클럽을 사랑해. 하지만 나는 프로니까 어쩔 수가 없어."
우리 그 누구도 그의 결정을 비난하지 않았다.
주마는 필요할 때 충분한 수비를 보여 줬지만, 결정적인 건 얼마 전 벌어졌다.
몇 번의 실수가 계속되자 주마에게 인종 차별 발언이 경기장에서 쏟아진 것이다. 그것도 첼시 홈팬들이.
사실 어쩔 수 없다. 어느 클럽에서 소위 '강성 또라이'들이라 불리는 울트라스가 있었고, 그들 중에서도 일부가 주마에게 인종 차별 발언을 던진 것이지만.
어쨌든 클럽은 그 발언을 던진 관중의 경기장 출입을 영원토록 금하는 조치를 취하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조치는 빨랐지만, 주마는 결국 여기서 마음이 떠났다. 한때 임대 생활을 했던 에버튼으로 이적했다.
"내가 떠나는 데 가장 망설였던 이유가 뭔지 알아? 제프?"
음, 글쎄.
아무래도 클럽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정말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리그에서 이제 널 막아야 한다는 거야. 그 사실이 몸서리치도록 두려워!"
"걱정 마. 적어도 이번 시즌에 에버튼을 만날 일은 이제 없으니까."
"그래. 내년에 만나면, 올해 첼시에서 보여 준 내가 아닐 거야, 제프. 기대해."
주마는 그렇게 좋은 이별을 했다.
시셀도는 주마의 이적을 보면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주마의 이적으로 인해 이제 뤼디거의 파트너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으니까.
그래도 동료가 자리를 비운 그 허전함은 쉬이 떨쳐 내기 어려운 것이리라.
"시셀도, 주마가 떠나서 허전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너 어디로 이적할 생각 있어?"
"응? 아직은."
"결심 굳히면 나한테 바로 말해. 나도 따라갈 거니까."
"뭐?"
"너랑 상대팀으로 마주하는 건 첫사랑에게 이불에 오줌 싼 걸 들키는 것 보다 더 끔찍한 일일거야."
거참, 내가 무슨 귀신도 아니고 다들 왜 이러나.
주마가 떠나고, 그 빈자리는 2군을 전전했던 첼시 유스 출신 파키요 토모리가 들어왔다.
작년에 뤼디거의 부상으로 몇 번 선발 기회를 얻었던 친구다.
"제프, 잘 부탁해."
"안녕, 토모리."
"토론토 시절 경기 잘 봤어. 나도 캐나다 출신이거든."
토모리는 붙임성이 좋았다.
다만 아직 자신의 실력에 대해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듯했다.
과연 자신이 리그에서 주마의 빈자리를 잘 커버할 수 있을까 하는.
그래도 아직은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시셀도가 2옵션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크리스텐센도 기본기에선 결코 뒤지는 선수가 아니니까.
토모리가 선발로 뛰는 건 아마도, 올 시즌 남은 시간 동안 없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딱 하루 뒤인 다음날.
그런 내 예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시셀도가 다리 부상을 입었다. 크리스텐센은 저번 경기 카드를 받은 걸로 경고누적이니 출전 불가다. 토모리, 다음 경기 선발이니까, 준비해라."
"네? 넵!"
잔뜩 굳은 얼굴의 토모리.
허.
올해 첫 1군 선발이 유로파 16강 1차전이라니.
얼어붙은 토모리의 모습을 보니, 뭔가 불안하다.
***
32강 인테르에 비하면 스타드 렌은 확실히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팀이다.
한때 우스만 뎀벨레가 뛰었지만 그거야 과거의 일 아닌가.
때문에 내가 벤치에서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렌은 발 빠른 7번, 브라질의 테크니션인 하핀하를 중심으로 엄청난 역습을 보여 줬고.
올 시즌 처음 1군 경기 선발로 나온 토모리를 농락하는 드리블로 득점을 성공했다.
이게 원정경기라서 다행이지
홈 이었으면 토모리는 온갖 욕을 다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토모리는 후반전에서도 하핀하를 상대로 계속 애를 먹었다. 브라질리언 특의 테크닉에 번번이 헛태클로 무너질 따름이었고.
하핀하는 어린 선수의 멘탈을 흔들 입담도 갖고 있었다.
"가서 어머니 모유라도 더 먹고 오지 그래? 첼시 유스 중에 최고였다면서? 그냥 유스나 계속하라고!"
"EPL도 별거 아니네! 네 녀석 수준을 보니까 말이야!"
내가 들은 건 그 정도였다.
터치라인 근처 가까이 왔을 때.
토모리는 붉어진 얼굴로 점점 몸이 굳어졌고, 딱히 교체할 센터백 자원이 없던 우리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원정 득점을 위해 내가 투입됐다.
물론 유로파에선 지루가 유로파의 사나이라고 불릴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인다.
그런데.
스타드 렌이란 팀은.
솔직히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온 팀에 비하면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가.
제 아무리 5백을 들고 왔다고 한들.
선수가 박스에 바글거린다고 한들.
그 다섯 명이 모두 어디 라모스나 반 다이크 같은 선수들이 아닌 이상.
골이 안 들어갈 리가 없지.
뻐어엉!
"Yeaaaaaaaaaaaaaa!"
수비수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강력한 중거리 골을 터뜨려 동점을 만들고.
계속 토모리에게 이죽이던 하핀하의 드리블을 강력한 숄더차징으로 멀리 날려 버리면서.
"으어억!"
기죽었던 토모리에게 미소를 지어 줬다.
"어때? 쟤도 별거 아니지? 깝죽대면 그냥 박아 버려."
"그러다 카드 받으면?"
"옐로카드까진 괜찮잖아?"
헛웃음을 지으며 밝아지는 표정의 토모리를 뒤로 한 채.
후반 39분.
무리한 드리블 돌파를 하던 하핀하를 몸싸움으로 가볍게 이긴 뒤(-저 멀리 날려 보낸 뒤) 25m 정도 드리블해서 인프론트 슈팅으로 골을 집어넣어 스타드 렌의 유로파를 향한 달콤한 꿈을 그대로 무너뜨렸다.
"하핀하! 이 개자식아!"
"그딴 드리블 좀 그만 치라고!"
"네가 메시나 펠레인 줄 알아?"
홈팬들에게 야유를 받는 넋 나간 하핀하를 보며 웃어줬다.
"Welcome to the EPL! 이게 바로 EPL이라고. 프랑스 리그하고 차원이 다르지?"
< 100. Welcome to the EPL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