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빗장수비는 열쇠가 없답니까? (2) >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제퍼슨의 개인 트레이너인 율리아겐은 미간을 좁혔다.
테이블엔 각종 복잡한 수치들이 적힌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율리아겐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유연성, 근전도, 폐활량, 근밀도······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는군."
특히 주목할 건 근육이었다.
"속근과 지근, 모두 조화롭게 변해 가는군."
기본적으로 제퍼슨은 속근 중심으로 발달된 근육을 갖고 있었다.
폭발적인 힘, 수축에서 이완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근력.
엄청난 스프린터와 더불어 순간적으로 끌어올린 힘. 그와 부딪치는 선수들이 속속 넘어가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지금은 속근뿐만 아니라 지근도 상당히 조화롭게 성장했다.
제퍼슨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지구력과 체력에서 눈에 띄는 발전이 보이는 것이다.
"예상보다 더 빠른 성장 속도야. 근육이 붙는 건 순식간이고, 그 근육이 내는 힘은 다른 스포츠 선수하고도 비교가 되지 않아."
율리아겐은 혀를 내둘렀다.
원래 이 정도 몸을 만들려면 장기 플랜을 짜야 한다.
"3년을 생각했는데, 1년 만에 말이지."
정말 불가사의한 신체가 아닌가.
오랜만에 외출했음에도, 율리아겐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탐구욕을 자극하는 수치들이었으니.
"반갑습니다. 율리아겐 씨."
그때 테이블 반대편에 반듯한 차림새의 신사가 나직하지만,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런던에서 듣는 유창한 독일어.
"안녕하십니까. 바이에른 뮌헨의 일리아스라고 합니다."
일리아스.
바이에른 뮌헨의 전 수석 전력 분석관이자, 현 스카우트 총괄 책임자.
지금은 겨울 이적시장이 한창인 시기다.
스카우팅을 총괄하는 일리아스는 구단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일리아스가 런던까지 날아왔다. 바로 율리아겐을 만나기 위해서.
"정말 반갑습니다. 율리아겐씨를 흠모했던 사람으로서, 이리 만나니 반갑네요."
"하하, 그저 평범한 트레이너인데요."
"아닙니다. 율리아겐씨. 율리아겐씨야 말로 현재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스포츠 물리학자이자 트레이너 아닙니까? 사전에 통화로 말씀드렸던 조건, 만족하십니까?"
"글쎄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세계적인 팀에서 우리는 율리아겐 당신을 치프 피지컬 트레이너로 선임할 생각을 굳혔습니다. 현재 받고 있는 연봉에 최소 두 배부터, 각종 수당까지 지급될 예정입니다. 또한 체력 훈련 부분에서는 감독님보단 율리아겐씨의 의견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제안이다.
바이에른 뮌헨은 감독의 권한이 큰 편이다.
그건 훈련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비록 일부 체력 훈련이다. 그러나 그 부분의 권한을 넘기겠다는 건 정말 율리아겐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거였다.
"우리 바이에른 뮌헨은 당신을 원합니다. 제퍼슨 리의 영입보단, 오히려 당신의 영입이 더 큰 메리트가 있다고 느낍니다."
일리아스는 율리아겐이 학계에 내놓은 논문을 모조리 독파했다.
획기적인 내용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이걸 당장 스포츠팀에서 적용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었다. 참신한 만큼, 증명되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요즘 핫한 공격수, 제퍼슨 리의 개인 트레이너가 율리아겐이란 사실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일리아스는 머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전율을 느꼈다.
'이미 그의 트레이너 방식이 효과적이란 게 증명됐다. 제퍼슨의 피지컬이 그 답이 아니겠는가?'
제퍼슨의 미친 피지컬은 유럽 축구 구단들에게 정말 미스테리였다.
엄청난 근육과 힘, 스피드.
그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선수가 흔할 리가 있겠는가.
많은 구단이 주목한건 제퍼슨의 괴물같은 피지컬과, 그걸 유지하는 엄청난 회복력이다.
체력 소모가 빠르고 회복 속도가 느릴 게 자명할 터.
한데도 제퍼슨은 3-4일 꼴로 치르는 경기에 풀타임과 교체 출전을 반복했다. 오히려 체력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평과 다르게 제퍼슨은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근육에 쌓인 노폐물과 피로를 모조리 없애고 체력을 회복하는 게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해지려면 뭘 먹고, 뭘 어떻게 운동해야 하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쯤에 제퍼슨의 피지컬을 유지해주는 괴물 같은 트레이너들이 있단 소문이 퍼졌다.
특히 그 중, '율리아겐'이란 이름을 들은 일리아스는 저도 모르게 사무실에서 유레카를 외쳤다.
"율리아겐! 이 사람이다! 그 수많은 논문을 내놓은 획기적인 교수!"
일리아스가 개인 트레이너 율리아겐이란 이름을 보고, 그가 학계에 내놓은 수많은 논문의 저자를 연이어 머릿속에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율리아겐. 저희 바이에른 뮌헨의 한 축이 되어 주시죠."
원래 역사대로라면, 일리아스의 스카우트에 율리아겐은 강등된 팀을 떠나 뮌헨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뮌헨의 역사에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제퍼슨이 비틀어 버린 역사의 곡점에서는.
"죄송합니다."
단호한 목소리는 거절을 뜻했다.
"······."
설마 이렇게 간단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터.
일리아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퍼슨 리가 절 해고하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제 자의로 그를 떠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제퍼슨 리는 훌륭한 선수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연구하고 싶은 신체를 지녔죠. 이건 제 개인적인 탐구욕입니다. 만일 저를 원하신다면, 뮌헨에서 제퍼슨 리를 영입하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일 것입니다."
"······진심이시군요."
율리아겐은 진심으로 제퍼슨에게 탄복하고 있었다. 그의 괴물 같은 신체는 둘째 치고, 그의 태도를 더 감명 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트레이닝에 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어.'
그리고 그런 선수를 도와줄 수 있는 조력자의 역할이란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일리아스는 율리아겐의 목소리와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유가 안될 거란 걸 짐작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율리아겐.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뮌헨은 훌륭한 팀입니다. 저 말고 더 훌륭한 트레이너들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
"어떻게, 이직은 결정하셨습니까? 뮌헨 관계자하고 커피만 마셨을 리가. 아니 맥주라도 한잔하고 오셨나?"
"아니요. 여기가 제 직장이죠. 그쪽은? 토리노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던데."
"나도 뭐, 커피 한잔만 마시고 왔지요."
디 파코가 능글스럽게 웃었다.
늘 과장한 듯한 태도.
율리아겐도 처음엔 그런 모습이 탐탁지 않았지만, 같이 일하다 보니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란걸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서로 농담을 던질 정도로 친해졌다.
"한 세 배의 연봉이면 모를까, 고작 두 배 불러놓고 생색을 내지 않습니까. 그럴 바엔 여기가 낫죠."
"그래도 유벤투스면 좋은 팀일 텐데."
"뭐, 바이에른 뮌헨을 거절하신 양반도 계신데요. 유벤투스에선 호날두를 얘기하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를 트레이닝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연신 얘기했습니다만, 난 이렇게 받아쳤죠."
"······?"
"이미 세계 최고 선수를 트레이닝 중인데 무슨 소리냐고 말이죠."
율리아겐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가 뮌헨의 제안을 받은 것처럼, 디 파코는 유벤투스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둘 다 거절했다.
더 많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 트레이닝 하는 선수가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지금 제퍼슨은 뭘 하고 있죠?"
"온종일 인터 밀란의 이번 시즌 전 경기를 비디오로 돌려 보고 있어요."
"허 참."
축구에 대한 제퍼슨의 열정은 정말 독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다음 경기 인터밀란전.
그는 구단에서 내놓은 분석자료 외에도 휴식시간까지 짬을 내어 직접 비디오를 보며 분석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매일 같이.
디 파코가 지독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제 조카가 18살인데, 그 녀석은 허구한 날 클럽만 가거든요. 저번엔 대마하다가 걸리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퍼슨은 고작 한 살 차이인데, 믿기지가 않네요."
"이젠 좀 쉬어야 할텐데. 가서 말해보죠."
늦은 저녁이다.
머리를 쓰는 것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체력 소모가 크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인터 밀란의 경기를 보고 있는 제퍼슨의 얼굴을 보니, 쉬이 입을 열기 쉽지가 않았다.
제퍼슨은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인사했다.
"저 쓰리백 말이죠. 정말 뚫기 어려워 보여요."
제퍼슨은 순수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인터 밀란의 쓰리백.
1차전에서 쓰리백 핵심인 디에고 고딘이 없었음에도, 제퍼슨은 겨우 한 골을 넣었다.
2차전은 고딘이 복귀한다. 고딘이 축이 되는 쓰리백은 콘테의 무기이자 방패였다. 그걸 뚫기가 영 쉽지 않아 보였다. 제퍼슨이 쉼 없이 비디오를 분석해 봐도, 답이 쉬이 보이지 않았다.
"열쇠가 없는 빗장 수비랬나. 저걸 어떻게 뚫어야 할까요?"
제퍼슨은 혼자 고민하다 막히면, 이렇게 트레이닝 팀에게 의견을 물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율리아겐과 디 파코가 무언가 대답해 주긴 어려운 질문.
율리아겐이 멋쩍게 웃으며 휴식을 권하려던 찰나.
"제프! 미국인은 문을 열쇠로 열지 않는다!"
풋볼 출신의 트레이너인 아놀드가 별안간 들어오며 소리쳤다.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큰 목소리에 율리아겐이 흠칫 몸을 떨며 의문을 품었다.
'뭔 소리야? 문은 열쇠로 열어야지?'
슬쩍 보니,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디 파코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그리고 제퍼슨 리는.
"아! 그렇죠!"
감탄을 터뜨렸다.
디 파코도 살짝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유일한 유럽인인 율리아겐은 소외감을 느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아놀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라고! 멀쩡한 문에 머신건을 갈겨서 열거나, 어깨로 밀어서 여는 게 바로 미국인이지! 열쇠? 그딴 게 뭐가 필요해? 몸으로 문을 부숴 버리면 되지!"
"그렇죠!"
"제프! 이번엔 나만 믿어! 특훈이다! 유로파 끝나고 다음 리그 경기는 한 경기쯤 빠지고 쉬어! 모든 문을 부숴 버리는 만능열쇠를 만들어 주겠다!"
"좋습니다! 아놀드!"
호탕하게 웃는 아놀드와 거기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제퍼슨.
'다들 미친건가?'
율리아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문을 부숴 버리는 게 왜 만능 열쇠인거야?'
***
인테르에서 구축한 콘테의 쓰리백은 꽤 무서운 전술이었다.
콘테 1년차에는 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지만, 2년차에 접어든 지금은 말 그대로 '지옥의 쓰리백', '빗장 수비'라는 별명을 불릴 정도로 질식 수비에 능했다.
다만 수비에 힘쓰다 보니 공격력이 빈약한 터.
그 때문에 세리에 최소 실점 1위였지만, 득점은 15위를 차지할 정도로 공격과 수비의 격차가 큰 팀이다.
때문에, 인터 밀란이 유로파 32강 1차전 첼시 원정에서 두 골을 넣은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홈에서 최소 실점을 보여 주는 인테르였기에, 현재 스코어를 지키기 수월하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32강 2차전은 꽤 많은 관심을 받는 경기였다.
첼시를 떠난 콘테의 인테르.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영입 경쟁을 펼친다는 소문이 파다한 제퍼슨 리의 첼시.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공격력의 첼시.
세리에A 최강의 방패를 구축한 인테르.
유로파 대회 중엔 가장 관심이 많이 쏠리는 경기였다.
"만일 우리 인테르가 패배한다면, 그 가정은 딱 하나일 겁니다. 제퍼슨 리를 효과적으로 컨트롤 하지 못해서였겠죠. 제퍼슨 리는 그만큼 위협적이고, 우리의 수비를 부술 힘을 갖춘 선수입니다."
콘테의 인터뷰와 맞물려 경기의 가장 큰 화제는 제퍼슨이 되었다.
그리고 제퍼슨 리가 믹스트 존에 도착한 순간.
기자들은 플래시를 터뜨릴 생각도 못 하고 입을 쩍 벌렸다.
'무슨 몸이.'
'제퍼슨이 저렇게 거구였었나?'
'아닌데.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크게 느껴지지?'
'분위기 때문인가?'
믹스트 존에 등장한 제퍼슨에게 심상찮은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그것은 흡사 위압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기자들은 곧바로 질문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제퍼슨을 쳐다봤다. 몸이 커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제퍼슨의 팔과 종아리 근육이 유난히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질문 없나요?"
"아아! 잠시만요. 음, 음, 16강에 진출하려면 최소한 두 골을 넣어 승리해야만 합니다. 1대 0으로 이겨도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떨어지는데요, 제퍼슨 리 선수께선 홈 인테르, 그리고 콘테의 쓰리백, 빗장 수비를 열어젖힐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네?"
예상외의 답변에 기자들이 멈칫했다.
제퍼슨이 가진 본래의 인터뷰 스킬이라면.
'자동문이죠.' '버튼 눌러서 열리는 문 아니겠어요?' 같은 인터뷰를 기대했건만.
저 맥 빠지는 대답은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제퍼슨의 대답에 기자들은 역시 제퍼슨이라며 감탄을 터뜨렸다.
"문은 부수고 들어가야 제맛이죠. 굳이 쪼잔하게 열쇠로 빗장을 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부숴서 골문으로 들어가죠."
< 97. 빗장수비는 열쇠가 없답니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