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94화 (94/258)

< 94. 리그컵 트로피 (5) >

[이건 잔인한 짓입니다.]

중계에 다소 적합하지 않은 해설자의 발언.

하지만 캐스터는 만류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경기 내내 제퍼슨의 플레이에 찬사를 던졌던 해설진은, 오히려 제퍼슨의 골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다시 입을 연건, 제퍼슨의 세레모니가 끝나고 다시 경기가 재개되는 시점이었다.

[어, 이걸 어떻게 얘기를 해 드려야 할까요.]

[스포츠는 비디오 게임이 아닙니다. 분명 아닙니다. 분명 아닌데, 그러니까 이건 마치 비디오 게임 같군요.]

방송 담당자 역시 감명받은 듯 계속해서 제퍼슨의 골장면을 리플레이해서 내보냈다.

리플레이 장면을 보면서 중계진은 연신 감탄사만 터뜨렸다.

[제가 만일 스토크 선수였다면, 지금 당장 경기장에서 도망치고 싶을 것 같습니다.]

해설자의 말은 실제로 선수들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너무 잔인하고 굴욕적인 농락 플레이.

그 터프한 쇼크로스마저 자신이 당했단 사실에 정신을 반쯤 놨고, 골키퍼 잭 버틀랜드도 소리치며 수비진을 다그치지 못했다. 스스로 멘탈이 크게 꺾인 상황인지라 수비진을 신경쓸 여력이 없던 것이다.

반대로 첼시 선수들은 그저 웃었다.

"미친놈."

"미친 자식."

"저 자식을 데리고 오자고 감독이 졸랐다지?"

"우리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아스날로 갔다면."

"오, 세상에."

"저런 미친놈이 내 팀인 게 너무 고맙군."

제퍼슨과 한 팀이란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첼시의 수비진.

제퍼슨의 골에 엄청난 자극과 전율을 느끼는 공격진.

또한, 패스를 보내면 어떻게든 받아 내서 득점으로 연결하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는 미드필더진까지.

제퍼슨은 양 팀 선수들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줬다.

완전히 상반된 두 팀의 분위기는 필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뻐엉!

조르지뉴의 롱패스는 정신줄을 반쯤 놓고 있는 스토크 수비진 사이를 갈랐다.

[오도이! 조르지뉴의 롱패스를 받고 그대로 달립니다!]

분위기는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선수들도 분위기를 타면, 또는 분위기를 넘겨주면.

흐름은 확연하게 바뀐다.

단숨에 오른쪽 측면을 말 그대로 찢어버리며 내달린 오도이.

'제퍼슨!'

중앙으로 달려 들어가는 제퍼슨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찰나의 시간.

그는 타이밍을 포착했다.

제퍼슨에게 공을 전달해줄 시점을.

뻐엉!

골문 쪽을 향해 길게 감아 주는 크로스.

[오도이의 크로스! 제퍼슨! 달려가며 뛰어오릅니다! 아! 버틀랜드 골키퍼도 튀어나와 손을 뻗네요!]

골키퍼와 제퍼슨이 동시에 낙하하는 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순간.

타이밍이 잘못됐을까.

아니면 버틀랜드가 예상했던 걸까.

버틀랜드가 한발 앞서 뛰어올랐고,

공을 잡는 데 성공했다.

'막았다!'

그러나.

이미 뛰어오른 시점에서, 제퍼슨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버틀랜드는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는, 태양을 가려 버리는 거대한 그림자에 순간 부끄럽게도 겁을 집어먹었다.

퍽!

"억!"

그리고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오, 세상에! 제퍼슨이 골키퍼를 골대에 집어넣습니다!]

'······Fuck.'

버틀랜드가 잘 잡은 공이지만,

애석하게도 그 장면은 경기가 끝나고도 꽤 많이 되풀이됐다.

실 떨어진 인형처럼 제퍼슨과 부딪쳐 골문 안으로 날아가는 버틀랜드의 몸은 퍽 유쾌한 장면이었으니까.

***

-그래서, 다음 여름에나 가려고.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할머니 잘 모시고."

겨울 이적시장.

산티아고는 꽤 핫한 공격수였다.

내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 준 활약 때문에 토론토 시절 뛰었던 친구들에 관한 관심도 증가했다.

당연히 산티아고도 여러 클럽의 러브콜을 받았다.

한데 산티아고의 선택은 미국에 남는 것이다.

-할머니가 좀 움직일 수 있으실 때까진 있어야지.

산티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가 몸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당장 유럽으로 오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 여름까지 충분히 고민해 보라고."

-아 맞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을 거야.

"응?"

-로드릭이 영국으로 가.

"뭐?"

-걔한테 좀 잘해 줘. 잔뜩 긴장한 얼굴로 비행기 타러 가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곧 뉴스 뜰걸?

산티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스톤 빌라의 그랜드 감독, 토론토의 제임스 로드릭(CB) 영입으로 수비 보강]

허,

참 세상 모르는 일이다.

***

사람들은 놀라곤 한다.

리그 26라운드까지 진행된 시점.

득점 랭킹의 1위가 30골이란 기록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기록을 세운 사람이 고작 19살의 공격수라는 점에 다시 한번 고개를 젓는다.

"솔직히 말해. 너 나이 속였지?"

가끔 풀리시치가 하는 농담은 반쯤 진심이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

[제퍼슨 리, 현 10대 최고 선수.]

[원더보이를 넘어 이미 완성된 선수, 음바페와의 비교는 오히려 제퍼슨 리에 대한 평가가 낮게 된 것.]

어쨌거나 모든 걸 결과로 보여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이를 속여서 뭐하겠어?"

"하긴, 그렇긴 하지. 그럼 이건 아니야? 지금 네 머릿속에 있는 게 제퍼슨이 아니라, 어디 유명한 레전드 선수인거?"

"······아니야."

순간 뜨끔했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전드 선수는 아니었으니까, 거짓말은 아닌 거지.

풀리시치 저 녀석은 코믹스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상상력도 대단한 편이다.

이거야 원.

저렇게 핵심을 찌를 줄이야.

어찌 됐든, 우리는 여전히 경기를 즐겼다.

스토크를 잡았고, FA컵 5라운드에서 QPR을 잡았다.

그리고 리그컵 결승전을 앞둔 상황에서, 유로파 32강 인터 밀란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결과는 아쉽게도 1대 2 패배였다.

내가 한 골을 넣긴 했지만, 우리 첼시 수비진을 여러 번 경험해 본 루카쿠의 첫 골과 후반 종료 직전 내준 페널티킥에 무너졌다.

"홈에서 2골을 내줬다라."

"이거 쉽지 않겠어."

"인터 밀란 수비진이 생각보다 좋던걸."

"콘테의 쓰리백은 무시할 수 없지."

콘테는 첼시에서 리그 우승을 들어올렸던 명장이다.

더구나 본인이 한때 치를 떨며 떠났던 첼시였다.

콘테는 첼시 선수 하나하나를 모두 분석해서 완벽한 전술을 만들어 왔다.

물론 나를 예상 못 해서 한 골을 내주긴 했지만, 콘테는 유연한 전술가답게 비교적 날 잘 막은 편이었다.

[인터 밀란 콘테 감독, "제퍼슨이 한 골만 넣었다는 건, 우리 수비진에게 찬사를 보내야 하는 일이다."]

실제로 콘테는 나에게 한 골만 먹힌 걸 아주 많이 다행이라고 여기는 얼굴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고 할까.

하여튼 일이 좀 어렵게 됐다.

수비력이 강한 이탈리아 팀이고, 첼시를 지휘했던 콘테가 만들어놓은 인터 밀란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실제로 필드골의 비율이 낮고 세트피스 골이 압도적으로 높다던가.

수비적으로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팀이고, 공격력은 오로지 세트피스 한 방으로 이루어진 팀.

2차 원정이 조금 어렵게 된 거다.

"그래도 자신 있지?"

"일단 트로피부터 따고 생각하자고."

당장 다음 경기가 중요하다.

리그컵 결승전.

내가 영국에 온 이후로 처음 맞닥뜨리는 결승전이니, 각오가 남다르다.

더구나 하필 상대가 런던 라이벌 아스날이 아니던가.

"한때 아스날에서 뛰었지."

웸블리로 향하는 버스 안.

지루의 얼굴에 아련한 기색이 떠오른다.

음.

솔직히 말해 지루는 정말 잘 생겼다.

그래서 그런가.

저런 표정도 어울린다.

한데, 조금 느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루는 아스날에서 오래 뛰었다.

그리고 라이벌팀인 첼시로 이적했다.

은근히 흔한 일이다. 지금 단장인 체흐도 아스날에 갔었고, 첼시에 애정을 보였던 다비드 루이스도 지금 아스날에서 뛰고 있다.

"거기서의 플레이는 나쁘지 않았지. 원더골도 자주 넣었고, FA컵도 들었으니까."

지루는 아스날에서 그 유명한 스콜피온 슛으로 푸스카스상을 받았다.

쏠쏠한 득점도 자주 올려줬고, 특유의 장점인 연계 플레이로 아스날 패스 플레이의 정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아스날의 지루는 런던팀 상대로는 무서운 공격수였지."

"맞아. 그들에겐 아스날의 지루는 재앙이었어."

옛날을 떠올린 아스필리쿠에타가 중얼거렸다.

12-13에서 13-14시즌.

지루는 14골을 모두 런던팀 상대로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정말 그들에게 강했던 면모.

당시 지루를 상대했던 아스필리쿠에타는 지루의 전성기 시절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런던 밖으로 나가면 무득점이었지."

"어이. 완전 무득점은 아니었다고."

"어쨌든 말이야."

"아스날을 상대하는데 해 줄 수 있는 조언 있어요?"

내 물음에 지루는 잠깐 생각했다.

"롭 홀딩, 그 녀석도 수비력 좋지. 유망주였었는데, 어느 순간 성장해서 대단하기도 했고. 소크라티스도 거칠기로 유명하지만 괜찮은 친구야."

"흠. 그래요?"

"그런데 뭐, 오늘부로 그 친구들이 불쌍하군. 널 상대해야 하니."

지루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앞에 앉았던 우리 수비수, 뤼디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저 자식을 상대하는 건 수비 입장에선 재앙이지."

"제프, 내 옛 친구들이지만 박살 내 버리라고. 내가 아스날을 떠날 때 울지도 않던 놈들인데, 이번엔 우는 꼴을 보고 싶어."

"음. 떠날 때 울지도 않았던 거 보면, 지루도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나 보네요."

"허!"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푸는 사이.

우리 버스는 웸블리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

90,000명을 수용하는 엄청난 규모.

결승전답게, 전석 매진이라고 들었다.

하필 두 팀 모두 런던을 연고로 하는 팀이니까 말이지.

실제로 버스가 지나가는 와중에 본 도로에는 파란색 유니폼과 빨간 유니폼이 가득하였다.

"런던의 모든 시민이 쏟아져 나온 것만 같은 인파군."

"저 인파 속에서 이겨야 하는 거란 말이지."

베테랑 선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인파.

결승전이란 중압감, 수많은 관중의 압박감과 열기.

그 속에서 승리를 위해 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압박은 몸의 템포를 흔들고, 긴장감은 실수를 유발하며, 뜨거운 함성은 때때로 집중력을 흔드니까.

아, 물론 모든 선수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지루. 아스날 수비수들이 우는 꼴을 보고 싶다고 했죠?"

"응? 뭐, 그냥 농담이긴 한데."

"오늘 경기 녹화본으로 소장하실 준비 하세요. 제대로 보여 드리죠."

수비수들 울리는 건, 내 전문이니까 말이야.

***

결승전은 트로피를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그건 선수들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를 심어 준다.

특히 부상선수가 많은 아스날에겐, 이번 시즌 트로피를 얻을 수 있다면 지금 리그컵이 기회다.

그래서 단단히 준비했다.

수없이 전술 훈련을 했고, 선수들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메리 감독은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최고의 피지컬 트레이너들을 모아 선수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다행히도 부상이었던 라카제트와 마테오 귀엥두지가 복귀에 성공했다.

아스날 입장에선 퍽 만족스러운 상황.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그런 아스날 팬들의 든든한 마음은 여지없이 깨져 나갔다.

"제발, 제발 저 자식 다리 좀 부러뜨려봐!"

벤치에서 시작한 지루는 어쩌면 익숙한 아스날 팬들의 목소리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

지루가 말했던 거칠고 터프하기 짝이 없는 수비수, 소크라티스는 제퍼슨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제퍼슨의 과격하고 화려한 무브먼트를 끊어내기 위해 거칠게 다가가면, 제퍼슨은 그보다 몇 배 더 거칠게 반응했다.

소크라티스는 그 모습에 헛숨을 들이켜며 뒤로 빠졌다.

마치 겁에 질려 엉덩이를 빼는 모습.

"저 녀석은 어릴 때 뭘 먹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그 최고 수비수들도 상대하기 힘든 저 어마어마한 피지컬은, 수비 입장에서 정말로 곤욕스러운 것이다.

소크라티스가 제퍼슨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자, 파트너 롭 홀딩이 제법 영리한 수비를 시도한다.

자리를 선점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재빠르게 동료와 압박을 유지.

"그렇지! 홀딩! 나이스!"

아스날 섹터에서 순간 함성이 울린다.

무지막지하게 돌파하던 제퍼슨이 멈칫하고는, 왼쪽으로 공을 뺀 것이다.

마치 홀딩이 제퍼슨을 저지한 듯한 모습.

그러나 지루는 제퍼슨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분명 봤다.

그리고 이어질 결과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쯧. 어떤 식으로 넣어서 울리려고."

저 미소.

즐겁기 짝이 없다는 듯한 얼굴.

첼시 선수진 내에 돌고 있는 새디스트란 별명을 떠올린 지루는,

이어지는 풀리시치의 높은 크로스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코너라인 쪽에서 페널티 박스 구석으로 향하는 궤적.

홀딩이 그걸 보고 먼저 달려가지만.

"······!"

순간 벼락같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홀딩을 앞을 가로막는 선수.

"헉!"

공이 낙하하는 순간,

제퍼슨은 애매하게 날아오는 크로스를 발등으로 툭 공중에 띄우더니.

그대로 등진 수비를 밀어내며 몸을 돌려 터닝슛을 때렸다.

"Wuuuuuuuuuuu!"

"Yeaaaaaaaaaaa! 제퍼스으은!"

아스날 팬의 야유와 첼시팬들의 환호가 동시에 쏟아진다.

그 뜻은.

"제퍼슨 골!"

제퍼슨이 선제골을 넣었다는 의미였다.

"허."

지루는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수비수를 등진 채, 침착하게 공을 위로 띄워 놓고, 그 뜬 볼이 다시 낙하하는 지점과 타이밍을 완전히 맞춰 터닝슛으로 때려 버리는 절묘한 동작.

아크로바틱한 골.

역동적인 원더 골.

지루는 주저앉아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롭 홀딩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자식. 저 녀석 골 넣어서 세레모니할 생각보단, 수비수들이 절망하는 표정을 보려고 골 넣는 게 분명해."

이제는 어느덧 제퍼슨의 성향을 알아가는 동료들이었다.

< 94. 리그컵 트로피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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