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89화 (89/258)

< 89. 스승 제자 (2) >

12월에 접어들면 리그 일정은 정말 힘겨워진다.

더구나 매치업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20라운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스날, 리버풀, 레스터 3연전.

"그래도 아스날 따위한테는 질 수 없지!"

"죽여 버려! 런던의 제왕은 우리라고!"

리그컵의 여파가 끝나지 않아 피곤했지만, 다행히 그건 아스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팬들의 협박에 시달리면서 2대 1로 아주 힘겹게 이겼다.

내가 마지막에 페널티킥을 얻어 내지 못했다면, 비겼을 경기였다.

"나는 정말 첼시의 9번이 너무 싫다. 그가 빼앗아간 승점 6점은, 어쩌면 우리를 유로파로 처박아 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스날 에메리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좀 미안했다.

아스날은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2위로 진출했지만, 16강 상대로 바르셀로나를 만났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번 시즌 챔스 우승팀은 바르셀로나니까.

심지어 리그에서도 5위로 떨어져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자신하지 못하는 상황.

"빌어먹을 아메리칸!"

"저 자식을 죽여 버리고 싶어!"

아스날 팬들이 내 욕을 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라이벌 팀에게 욕먹는 건, 내가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증거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다음 리버풀전은 패배했다.

내가 한 골, 페드로가 한 골을 터뜨렸지만.

[위르겐 클롭 감독 "우리는 제퍼슨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런 노력조차 없었으면 한 골이 아니라, 해트트릭을 당했을 것이다."]

리버풀의 살라와 피르미누가 정말 미친 폼을 보여 주면서 3대 2로 패배했다. 우리 팀 퀴르 주마가 치명적인 실책을 범해서 초반부터 경기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제이미 바디의 2Shot 2Kill! 첼시 격침!]

그다음 레스터에게 역시 패배했다.

제이미 바디가 딱 두 번 슈팅을 때렸는데, 그 두 번이 다 골로 연결됐다.

"이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게 내가 하는 게임이었다면 키보드를 박살을 냈을 거야."

"레스터 스타일이 이런 거지."

굳이 변명하자면, 내가 리버풀전에서 저번처럼 또 인사이드 포워드로 출전했다는 점.

날개 포지션은 활동량이 많이 요구되다 보니, 레스터전에서 벤치로 시작했다.

그리고 레스터가 너무 빨리 골을 집어넣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지.

또 변명하자면, 저 3연전이 무려 1주일 동안 펼쳐진 경기라는 거다.

"잉글랜드 놈들은 미친놈들이야."

필마르크 감독님은 당장이라도 잉글랜드 축구협회를 찾아가 소리칠 것처럼 보였다.

그런다면 사실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

같은 심정이니까.

어? 이게 사람이 뛸 수 있는 일정이냐고.

일주일 동안 세 경기를 치르고 4일 후에 또 경기 치르고, 심지어 2일후에 치르는 건 이게 무슨!

우리 팀은 전체적으로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전 경기 출장한 아스피가 못 버티고 휴가를 요청한 모습이 현재 첼시의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전진했다.

23라운드에서 에버튼을, 24라운드에서 번리를 무너뜨렸다.

우리 팀은 3위를 공고히 했다. 토트넘이 위협적으로 추격했지만, 최근 맨유을 만나 무너지면서 주춤했다.

맨시티와 리버풀은 승점 1점 차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다.

가만 보면, 저 두 팀이 진짜 강하긴 하다.

우리도 어디 다른 리그가면 충분히 1위를 차지할 승점인데 말이야.

토트넘이 4위로 우릴 따라오고,

아스날이 5위, 에버튼과 레스터가 6위와 7위.

그리고 레스터와 승점 동률로 맨유가 8위다.

아스날 팬들은 그런 맨유를 보고 시도 때도 없이 조롱했지만,

글쎄.

아스날도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꿈꾸는 건 힘겨워 보인다. 토트넘이 만만치 않고, 에버튼과 레스터의 약진도 무섭고, 맨유도 부상자들이 복귀하면서 다시 기세를 올리고 있다.

아스날이 조금 무너지면, 맨유가 금세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제프, 이런 상황에서는 드리블 돌파가 나을까? 패스가 나을까?"

그리고 훈련장에서,

나에게 달라붙는 선수가 새로 생겼다.

바로 타미였다.

"음. 나라면 드리블로 뚫겠어. 그렇지만 넌 내가 아니잖아?"

"그렇지."

"나한테 패스해. 그러면 게임 끝이야."

"완벽한 방법이군. 고마워, 너의 조언은 언제나 효과적이야."

타미는 프로의식이 대단한 선수다. 경쟁자인 나에게 끊임없이 배움을 청했다. 내가 타미보다 3살 어린 걸 생각하면, 타미의 행동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이 사이좋아 보이는군."

감독님이 흐뭇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기야, 팀 내 불화와 갈등이 적다는 건 감독으로서는 만족스럽겠지.

"그래서 다음 경기는 둘이 같이 뛰어보는 게 어때?"

"투톱이요?"

"좋습니다! 감독님! 꼭 그러고 싶어요!"

다소 얼떨떨한 내 반응과는 달리 타미는 열렬하게 환영했다.

저번 리그컵에서 투톱으로 뛰긴 했지만, 교체 투입으로 20분 정도이니 제대로 뛴 건 아니다.

"좋아, 타미. 오늘부터 제프하고 발 한번 맞춰 보라고!"

"알겠습니다! 최고의 팀워크를 보여 드리죠!"

아니, 왜 이렇게 열정적인데.

***

리그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버거워지는 게 있다.

상대팀의 준비가 더 철저하다는 게 피부로 체감이 된다.

상대팀들이 첼시전을 준비할 때,

그들은 나에 대해 분석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분석은 거의 분해 수준에 이르렀고, 그러다 보니 나조차 파악 못 한 습관 같은 걸 공략하는 수비 방식도 나타났다.

25라운드 상대인 크리스탈 팰리스도 그러했다.

"압박해!"

"우리는 저 9번을 죽일거다!"

"팰리스! 팰리스! 팰리스! 첼시를 죽여버려!"

중앙에서 공을 잡고 전진하면, 수비 두 명과 홀딩 미드필더 한 명.

측면으로 빠지면 미드필더와 윙어, 그리고 풀백까지.

어디를 가나 최소 세 명이 날 압박했다.

뭐, 3명 정도가 날 막는 건 익숙하다.

그리고 그걸 뚫어내는 것도.

툭.

"헙!"

이런 식으로 말이지.

달려오는 수비수 앞에서 팬텀드리블을 써서 무너뜨리고, 틈으로 공을 툭 차고 빠져나가려는 찰나.

멀리 있던 수비수가 뛰어와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걷어 냈다.

"부라보!"

"그래! 저 자식 다리를 부러뜨려버려!"

"가장 위험한 공격수? 별거 아니고만!"

어우.

역시 원정경기의 야유는 귀가 따갑다.

'다리가 무거워.'

원래라면, 공을 빼낸 후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터뜨려서 치고 나갈 생각이다.

그게 내 플레이 방식이다.

한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평소보다 몸이 둔하게 느껴졌고, 두 다리의 속도도 쉬이 올라오지 않았다.

박싱데이, 박싱데이,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이야.

내 트레이닝 팀이 큰 노력을 기울였어도, 내 컨디션을 100% 유지하는 건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밑으로 빠질게. 타미, 좀 더 많이 움직여 줘."

타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유를 물어보거나, 고개를 갸웃거릴 법도 하건만.

타미는 마치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이해 못 한 거 같은데······. 그냥 내 말이면 무조건 의심도 안하고 따르는 타미였다.

"윌리안! 내려와서 패스 주고받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앞으로 가 줘."

필드에서 감독의 지시 없이 선수 마음대로 하는 건 월권행위에 가깝다.

하나 애당초 나는 거의 프리롤에 가까운 자유를 부여받았다. 또 경기에 임하기 전, 훈련에서 늘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는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 플레이하겠다고.

슬쩍 벤치를 돌아보니, 때마침 감독님도 포메이션 변경을 지시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 게, 마침 내가 하려던 플레이를 주문하는군.

좋아.

내가 뒤로 좀 빠지고.

최전방에 타미가 서면서.

4-4-1-1. 또는 4-2-3-1에 가까운 포메이션.

"자리 지켜! 속지 마!"

"저 자식에게 시선 뺏기지 마!"

오, 안 쫓아와?

내가 깊게 뒤로 빠지면, 날 마킹하던 선수들이 자연히 본래 자리를 이탈하면서 쫓아오기 마련.

한데도 팰리스 선수들은 수비라인을 굳건히 지켰다.

본래 예상은 내가 뒤로 빠지면서, 순간적으로 쫓아오는 수비 뒷공간을 윌리안과 페드로, 타미가 박살 내는 것이 바로 플랜B였다.

내가 미끼가 되는 거지.

한데 팰리스도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한 움직임이다. 팰리스의 감독, 로이 호지슨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양반은 아니니까.

그럼, 플랜C로 간다.

아, 물론 플랜C는 지금 내가 급조한 거다.

깊게 내려앉은 수비라인. 웅크린 채 튀어나올 구석만 노리는 팰리스.

이런 수비를 상대하는 방식은 가장 간단하다.

중거리 슈팅.

그래, 스트라이커는 슈팅을 때려야지.

툭, 툭!

공을 툭 차고 전진드리블을 펼칠 것처럼 한두 번 치고 들어가다가.

기습적으로 공을 앞으로 살짝 굴러 놓고,

왼발을 땅에 박아 버리듯이 디딘 채, 그대로 오른발 발등으로 공을 때렸다.

뻐-엉!

발등에 정확히 맞는 임팩트.

묵직한 느낌과 함께 인스텝 슈팅이 마치 대포알처럼 수비벽을 가르고 골문으로 쏘아졌다.

"Oh, Fuck!"

수비진에 시야가 가려져서일까.

뒤늦게 반응한 골키퍼는 황급히 손을 뻗어, 공을 살짝 건들지만.

이미 힘과 회전을 제대로 먹은 슈팅은 툭 친다고 경로가 바뀔 종류는 아니었다.

철-럭!

"Goooooaaaaaal!"

"제-퍼슨 리!"

답답한 양상을 뻥 뚫어 버리는 중거리 골.

이게 플랜C다, 이 팰리스놈들아!

***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야!"

팰리스의 로이 호지슨 감독은 제퍼슨의 득점이 터져 나오는 순간 물통을 발로 차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어? 아니 중거리 슛도 저렇게 때려 버리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감독의 말에 곁에 있던 수석코치도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정말 잘 막았다.

지친 제퍼슨은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 줬지만 팰리스의 끈질긴 수비를 쉬이 떨쳐 내지 못했다.

문제는 저 발목 힘이다.

스피드와 지구력은 피로 누적으로 저하될 수 있다지만,

저 어마어마한 발목 힘은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지쳤다고 한들, 그 묵직한 힘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른 선수는 대포를 쏘는 거 같다면, 제퍼슨은 미사일을 날리는 것 같았다.

손끝이 스친 골키퍼가 손아귀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슈팅에 실린 엄청난 힘 때문이다.

"저 친구를 막을 비책을 가지고 온다면, 그 사람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줘야겠군"

분노는 시간이 흐르며 체념이 되고 이내 수긍과 인정이 된다.

호지슨은 제퍼슨이란 괴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 축구 참 x같군."

그런 거다.

원래 스포츠는 이겨야 재밌는 법이고, 진다면 짜증만 날 뿐이다.

***

0대 0이란 균형의 추가 무너지자,

팰리스의 수비진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하지만 웅크린 채 역습 한 방을 노리는 플레이는 여전했다.

그리고 그런 팰리스의 수비를 공략하는 제퍼슨의 공격도 변함이 없었다.

"개자식!"

제임스 매카시가 붉어진 얼굴로 제퍼슨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제퍼슨은 그를 말 그대로 농락했다.

팬텀드리블로 한 번 무너뜨렸고,

상체 페인트 후에 슈팅 페인트로 속였으며,

제퍼슨 턴이라는 괴상한 터닝 동작에 밀려 바닥에 서너 바퀴 굴렀다.

그는 베테랑이고 필드에서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어린 공격수의 농락에 멘탈을 유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툭!

[아! 제퍼슨! 다시 한번 슈팅 페이크 후 접습니다! 매카시,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따라잡습니다!]

"흥! 어딜!"

이번에는 속지 않는다.

매카시는 이를 악물고 집중력을 최고조로 발휘했다.

기습 같은 중거리 슛 이후에, 제퍼슨은 그런 수비들의 마음을 이용했다.

슛을 때리려는 척 페이크를 주면서 수비진을 마구 뒤흔들었다.

[제퍼슨! 제임스 매카시의 끈질긴 수비에 막힙니다! 어? 먼 거리에서 슈팅을 시도하나요?]

제퍼슨은 그런 매카시를 끌고 가면서, 다시 한번 발을 뒤로 빼며 킥 모션을 취했다.

매카시는 황급하게 태클을 시도하려 몸을 날리지 않았다.

골문까지의 거리는 무려 34m.

여기서 중거리를 때릴 일은 없고, 다시 한번 접을 게 분명하다. 때문에 어디든 수비할 수 있는 위치에서 기다렸다.

뻐-엉!

"뭐?"

그러나 제퍼슨은 그런 매카시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사람처럼.

놀랍게도 그 거리에서 강력한 중거리 슛을 시도했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위력적인 슈팅.

그러나 거리가 멀었던 탓에, 골키퍼가 대응할 수 있었다.

빠악!

[아! 비센타 콰이타의 선방! 중거리 슛을 펀칭해 냅니다!]

간신히 슛을 펀칭해 내는 그 순간.

[타미 아브라함! 타미 아브라함이 갑자기 나타나 튕겨 나온 공에 머리를 갖다 댑니다! 골! 골입니다!]

수비진 사이에서 귀신처럼 움직이던 타미 아브라함이 별안간 튀어나와 흘러나온 공을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무려 4개월만의 리그 복귀 골.

그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타미 아브라함은 제퍼슨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거야. 이런 플레이를 하라는 거였구나!'

최근 일주일.

제퍼슨과 함께한 훈련에서, 제퍼슨이 말해 준 조언이 실제 필드에서 이뤄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 89. 스승 제자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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