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Jeff's Day (2) >
그 장면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스탬포드 브리지가 큰 경기장은 아니지만, 골대 뒤 한 섹터가 전부 카드 섹션으로 제퍼슨의 미니어처 그림이 그려진 건,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놀라운 일이군요.]
[뭔가 잘못된 정보가 있던 것 같네요. 오늘은 팬즈데이라고 알려졌는데, 이거 제퍼슨의 날이 아닌가 싶은데요?]
[혹시 오늘 제퍼슨의 생일인가 싶습니다만, 아닙니다. 아마도 최근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와 링크가 뜨면서 팬들이 자발적으로 보여 준 모습 같네요.]
[신기한 일입니다. 제퍼슨이 첼시에 온 건 고작 4개월입니다. 입단 후 4개월이 지난 선수에게 이런 카드 섹션을 펼치는 모습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중계진은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첼시 팬들의 그런 퍼포먼스도 감탄스러웠지만,
진짜 감탄스러운 건 필드에서 벌어지는 제퍼슨의 퍼포먼스였다.
[제퍼슨은 늘 위협적입니다. 항상 골을 넣어 주고, 상대팀을 부숴 버리죠. 상대가 어떤 수비전술을 가지고 왔냐는 중요하지 않죠.]
[오늘도 제퍼슨이 왓포드의 강력한 수비 블록을 마구 헤집고 있습니다!]
왓포드는 첫 실점을 내주고도 그들의 축구를 버리지 않았다.
황급하게 라인을 올리고 득점을 위해 나아가지 않았다.
앞으로의 경기에 따라 유로파리그 진출권도 노려볼 만하기에,
왓포드 감독은 결코 경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지금부터 준비한 걸 버리고 공격적으로 나간다면, 오히려 팀이 무너질 수 있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자식 때문이야!"
감독의 눈에 제퍼슨이 담겼다.
리그에서 가장 위험한 공격수.
그를 막을 수 있는 팀이 없다.
막으려면 수비만 해야 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제퍼슨에 관한 얘기였다.
"그래서 수비만 하는데 왜?"
감독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 담겼다.
애석하게도,
제퍼슨의 컨디션이 최고인 걸 고려하지 못했다.
지금 감독은 무언가 방도를 찾기 어려웠다.
필드는 제퍼슨 하나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왓포드의 강력하고 끈끈한 수비진은 제퍼슨이란 괴물을 맞아 연신 넘어지기 일쑤였다.
"으억!"
센터백 크레이그 카스카트(Craig Cathcart)가 비명을 내지르며 넘어졌다.
넘어진 수준이 아니라 뒤로 두 바퀴를 구를 정도로 튕겨 나갔다.
"반칙! 레프리! 반칙이잖아? 어? 이게 럭비냐고!"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나 소리쳤지만, 심판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퍼슨은 늘 경합을 망설이지 않았다.
상대가 거칠면, 그 역시도 거칠게 대했다.
그런데도 제퍼슨의 파울 횟수는 리그 전체를 봐도 많은 편이 아니다.
교묘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반칙이 아닌지, 정확한 경계선을 알고 행하는 제퍼슨은 손을 적당히 쓰고, 또 손보다는 어깨와 몸으로 밀치는 플레이를 자주했다.
심판이 보기엔 반칙이라기 보단 정당한 몸싸움으로 비쳐졌다. 심지어 여기는 프리미어리그가 아닌가? 이 정도쯤이야 늘 있는 일이다.
다만 문제는 이 정도로는 휘슬을 불지 않으니, 제퍼슨이 더 미쳐 날뛴다는 것.
'이러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저 황소 같은 움직임. 탱크 같은 덩치와 무시무시한 힘에 왓포드 선수는 수수깡처럼 무너졌다.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유로파 진출권을 노리고 있는, 비교적 스쿼드가 얇은 왓포드에겐 치명적이다.
때문에 왓포드 감독이 전술변경을 고려할 무렵.
그 고민을 끝내 줄 플레이가 필드에서 벌어졌다.
"Oh, Shit!"
센터백 뤼디거가 길게 걷어 낸 공이 왼쪽 풀리시치에게 닿았고,
툭!
풀리시치는 오른쪽 아웃사이드로 공의 방향만 바꾸는 원터치 패스를 찔러줬다.
맹렬하게 달려 나간 바클리가 공을 잡은 뒤, 뒤꿈치로 뒤따라오는 풀리시치에게 다시 리턴패스.
단숨에 선수 세 명이 벗겨지고, 중앙에서 집중견제를 받는 제퍼슨에게 공이 도달했다.
"흥. 무의미한 패스지."
방금까지 가슴이 싸늘할 정도로 정교한 패스 플레이였지만, 마무리는 좋지 못했다.
이미 수비수 두 명에게 집중견제를 받는 제퍼슨이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저기서 공을 받아서 무얼 하겠는가.
수비 두 명을 등진 채 패스를 받은 제퍼슨.
거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뒤로 공을 내주고 다시 돌아 침투하는 플레이가 베스트.
그러나 왓포드 수비가 바보도 아니고, 미리 위치를 선점하여 커버할 준비를 마친 상태.
물론 스포츠에선 일반 상식이 무너지는 건 왕왕 있는 일이다.
지금처럼.
"?"
순간 왓포드 감독은 자신의 두 눈을 믿지 못했다.
툭.
"······!"
뒤로 백패스가 아닌.
그대로 공 아래를 툭 찍어 등진 수비의 머리를 넘기는 패스.
제퍼슨이 움직임에 수비 두 명이 몰린 사이.
제퍼슨의 재치 있는 패스가 오른쪽에서 대각선으로 침투한 윌리안의 발끝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Nooooooo!"
전반전에 두 골을 내준다면,
왓포드가 여기서 첼시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왓포드에겐 애석한 일이다.
윌리안은 제퍼슨의 패스를 어시스트로 연결해 줄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
부드럽게 공을 한 번 잡아 세운 뒤 구석을 노리는 정확한 슈팅.
"Gooooooaaaal!"
왓포드 감독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Shit! Shit! Shit!"
왜 하필 자신의 상대팀에 상식을 넘어서는 선수가 있는지 한탄하면서.
***
하프타임 땐 유명 밴드가 와서 공연을 했고, 오늘 결장한 드링크워터와 크리스텐센이 추첨에 당첨된 관중들에게 피자 배달을 했다.
그 모습이 전광판에 나오면서 경기장은 왁자지껄 웃음이 가득했다.
"봤어? 완벽한 원더골?"
윌리안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음.
좋은 슈팅이었지만 원더골은 아니지.
"솔직히 그 정도는 우리 어머니도 넣을 수 있어, 윌리안."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우리 엄마 육상선수 출신이야. 운동신경이 어디 가진 않지."
"하하, 제프. 그냥 인정하라고. 내가 이렇게 골만 집중적으로 노리면 원더골을 심심할 때마다 넣을 수 있어."
"시즌 초를 생각하면 글쎄."
내 말에 윌리안은 다소 찔리는지 헛기침을 했다.
시즌 초 욕심만 내다가 온갖 욕을 먹었던 윌리안이었으니까.
뭐 어쨌든 오늘 같은 날엔 나는 조력자로서 더 잘 뛸 수 있다.
나에게 견제가 집중되다 보니, 다른 동료들에게 공간이 자주 생기는 편이다.
윌리안이 넣은 골도 그러했고.
수비적인 쓰리백의 왓포드.
두 명의 센터백과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
처음엔 두 명 정도가 날 막았지만,
내가 하도 위협적으로 들쑤시다 보니 지금 무려 네 명이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집중 견제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나에게 오는 패스를 완벽하게 받아 냈고.
망설임 없이 원터치로 왼쪽으로 크게 열어 줬다.
"풀리식! 받아!"
"Yeaaaaaaaa!"
네 명의 선수가 고작 한 명에게 몰렸다.
하면 다른 선수에겐 공간이 생기지 않겠는가.
풀리시치는 거침없이 빈공간을 질주한다.
뒤늦게 따라붙은 풀백의 태클을 피해 한 번 접은 뒤.
파포스트를 노리고 강하게 감아 차는 슈팅을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철-럭!
"풀리식-! 풀리식! 풀리식!"
"우우우우우우!"
첼시 홈팬들의 환호와 왓포드 원정팬의 야유가 동시에 울린다.
"제프, 미안. 어시스트는 아닐걸?"
"뭐, 괜찮아. 내가 도움왕까지 해 버리면 넌 상 받을 게 없으니까 말이지."
"허어!"
풀리시치의 드리블 터치가 길어서 아마 어시스트는 인정 안 될 거다.
상관없다.
스트라이커에게 어시스트가 많으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척도는 아니다.
중요한 건 골이니까.
오늘 컨디션도 최고고, 기분도 최고다.
카드 섹션 응원은 프로로 뛴 이래, 아니, 내가 축구를 시작한 후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하면, 한 골은 너무 아쉽지 않은가.
기회는 찾아왔다.
세 골이나 실점한 이상, 왓포드는 더 이상 현 전술을 유지하지 못했다.
점차 공격적으로 나오며 만회골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우리도 그에 빠르게 대응했다.
사이드를 넓게 벌리면서.
아스피가 길게 올려 찬 롱패스를.
중앙에서 캉테가 빠르게 움직여 받아낸 뒤에.
오른쪽의 윌리안에게 넓게 벌렸다.
"Yeaaaaaaaaaa!"
첼시팬들이 좋아하는 패스 플레이다.
짧은 패스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다이렉트 패스로 길게길게, 속 시원하게 넘겨버리는 플레이.
윌리안은 공을 잡고 다시 박스 안으로 툭툭 치고 들어오는 플레이를 보였다.
아, 저거 오늘 골 넣었다고 또 욕심 부리네.
라고 생각이 들 무렵.
문득 윌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뭐라 해야 할까.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쳐 타닷! 하고 스파크가 튄다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잘 통한다.
윌리안의 재능은, 가끔 나도 놀랄 정도로 날카롭고 센스 있었으니까.
가령 내가 뒤로 살짝 빠지는 사이.
절묘한 크로스를 올려 주는 것도.
"우아아아아아아!"
"제----퍼슨!"
머리 살짝 위로 감겨서 들어오는 크로스.
헤딩으로?
무리다. 거리가 있다. 헤더 슛은 불가능.
"막아!"
"압박해! 먼저 걷어내!"
수비의 악다구니와 홈팬들의 기대어린 시선이 동시에 느껴진다.
가끔 이 육체가 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유연성, 힘, 폭발력, 스피드, 탄력.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태권도 금메달리스트인 아버지에게 발차기 훈련을 받은 영향이 있었을까.
다소 불가능하고 어려운, 위험한 킥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서.
바이시클 킥을 작렬한 건, 이 육체와 내 센스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뻐-엉!
골키퍼는 그저 넋 놓고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슈팅을 볼 수밖에.
"Yeaaaaaaaaaa!"
"제—프! 제—프! 제—프!"
"Waaaaaaaaaaaaaaaa-!"
바이시클킥으로 골을 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동료들이 달려와 그대로 엎어지니까.
빌어먹을 햄버거.
난 저기 뒤에서부터 쿵쿵 거리며 뛰어오는 거구를 보고 애원했다.
"아, 뤼디거는 제발······!"
무겁다고.
"헤이, 제프. 내 완벽한 어시스트 어땠어?"
"끔찍했어, 윌리안."
"뭐?"
"너무 끔찍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원더골을 넣어 버렸군. 이런 게 원더골이지."
***
우리는 이후 한 골을 내줬지만, 한골을 또 더 넣었다.
이번엔 침투한 바클리가 잘 주워 먹는 골로.
5대 1로 난적 왓포드를 제쳤다.
이로써 리그 절반이 끝났다.
그리고 득점 랭킹에서도 해리케인의 17골 기록을, 무려 9골 차이로 따돌리는 기염을 토했다.
"넌 내가 본 스트라이커 중 가장 완벽한 스트라이커야."
감독님은 본래 칭찬에 인색한 분은 아니다. 한데 요즘 칭찬이 너무 많아졌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지.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옛날에 호나우두나 히바우두, 게르트 뮐러 같은 공격수를 지휘했던 감독의 기분이 이런 거겠지?"
"음. 감독님."
"응?"
"적어도 다른 구단으로 갈 생각은 아직은 없습니다."
"아? 하, 하하! 티났나?"
"좀 많이요."
감독님은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레알이나 바르셀로나에 갈까 노심초사한 거겠지.
물론 그렇다고 그저 여기서 안심만 시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선 확실한 건 없잖아요?"
"음!"
나도 사실 이적할 생각은 없다.
아스피가 말한 빅이어를 같이 들자는 목표도 마음에 들고.
나와 첼시의 계약은 3년.
그러면 적어도 내년까지 뛰어야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에이전시가 계획 중인 재계약건을 그저 흘려보낼 생각은 없다.
재계약은 무리더라도, 지금 에이전시는 내 몸값을 계속 올려 주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내년, 그리고 내후년이라면 1400억이 아니라 1800억,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
지금 당장도 음바페하고 비교되는 중인데.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밀당이다.
나야 성실하게 내 플레이를 보여 주면 되지만.
이런 밀당도 필요하지 않겠나.
[첼시의 로만 구단주, 제퍼슨 리와 주급 15만 파운드의 재계약 추진.]
이런 식으로.
뭐, 지금 당장 재계약하면 돈은 더 받지만, 계약기간이 길어지니까 그것도 살짝 부담스럽긴 하다.
-이대로라면 주급은 계속 올라갈 겁니다. 성급하게 하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아요. 적어도 시즌이 끝나면, 15만 파운드가 아니라 25만 파운드는 줘야 합당한 주급이니까요.
"알겠어요.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이적기사 팡팡 터뜨려서 우리 감독님 노심초사하게 하지는 말아 주시고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몇몇 스폰서 계약이 끝나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은 메일로 보내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에이전시와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히 나누고 TV를 켰다.
유로파리그 32강 추첨이 있는 날.
우리 구단의 체흐 단장이 앉아 있는 모습이 비치고.
사회자가 꺼낸 공에서 작은 종이가 펼쳐진다.
[세 번째 32강 매치업입니다. 첼시 FC와 인터 밀란이군요.]
음.
뭐야.
이거 유로파리그 맞아?
좀 아쉬운 매치업이다.
32강에는 변방리그의 팀들도 많았으니까.
인터 밀란이 조별리그에서 2위로 올라올 줄은 몰랐고, 하필 우리가 만날 줄 몰랐지.
"괜찮아, 제프. 유로파리그에선 나만큼 대단한 공격수는 없다고."
자타공인 유로파의 사나이 지루의 말씀이었다.
"메시도 못해 본 유로파 득점왕이 바로 나라고!"
어.
그거야 메시가 유로파를 안 뛰어서 그렇지, 이 양반아.
< 87. Jeff's Day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