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Jeff's Day (1) >
축구판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고 정확한 예측은 없다.
스포츠는 늘 기적이 뒤따르는 분야다. 단순한 숫자와 분석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즌 시작 전, 수많은 전문가가 리그 순위를 예상했다.
맨시티와 리버풀의 1위 다툼.
그 뒤를 토트넘이 추격하고, 어떻게든 성적을 내긴 내는 아스날과 맨유가 뒤쫓을 모양새.
오히려 에버튼, 울브스, 웨스트햄이 4~6위권을 형성하리란 예상도 있었다.
"첼시? 첼시는 잘해야 리그 7위권이죠."
"솔직히 말해 유로파 수성이 그들의 현실적인 목표지."
"필마르크 감독도 물론 좋은 감독이야. 코펜하겐을 이끌고 유로파 준우승을 차지한 건 놀라운 업적이니까."
"하지만 생각해 봐. 지금까지 첼시 감독 중에 어디 못난 감독이 있었나?"
"그나마 첼시가 성적을 냈던 건 아자르라는 슈퍼크랙이 있어서야. 작년을 봐. 아자르가 없는 첼시는 어땠지?"
첼시팬들에겐 가혹한 비판과 힐난이었다. 하지만 애써 분한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모두 팩트가 아닌가.
심지어 작년에 라이벌 아스날은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냈다. 그에 반해 첼시는 겨우 유로파 티켓을 따냈지 않았는가.
그래,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늘 무시했던 북런던의 토트넘에게 리그 2연패를 당하는 것도 감수할 만했다.
문제는 조롱과 비난이 도를 넘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난은 첼시팬들에게 있어서 정말 고역이었다.
'돈으로 우승컵을 사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던 첼시였기에, 첼시의 부진한 성적은 타팀팬들의 충분한 조롱감이었다.
그들은 모든 조롱을 감내했다.
그래도 이적시장에서 대어를 낚을 거라고.
한데 데리고 온 선수가 5천만 파운드의 미국 유망주였다.
이 부분에서 대부분 첼시팬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리그가 시작하기도 전에.
#필마르크 OUT
이런 해시태그가 SNS를 뒤덮었으니 오죽하랴.
때문에 축구가 예상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이유였다.
그들의 예상은 일부 맞았지만, 일부는 틀렸으니까.
리그가 전환점을 도는 19라운드 직전의 분위기는,
시즌 시작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빅6 상대 4승 1무 압도적 기록!]
[첼시, 챔피언스리그 진출 가시화.]
[제퍼슨 리, 막을 방법이 없다.]
"우리가 런던의 왕이다!"
"Pride of LONDON!"
맨시티와 리버풀이 없는 다른 리그라면 충분히 1위를 차지할 만한 성적.
그들이 환호를 내지르는 건 여러 이유가 있다.
프리미어리그뿐만 아니라 참여한 모든 대회에서 순항 중이니까.
가장 결정적인 건 바로 선수다.
제퍼슨 리.
[제퍼슨 리는 현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위험한 스트라이커.]
[챔피언스리그 진출팀들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릴 것이다. 첼시가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면, 제퍼슨은 유럽팀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현 유럽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
[음바페와 비견되는 미국의 원더보이]
"9번의 저주는 이제 완전히 깨졌어!"
"도대체 얼마만이야? 리그 20골을 넘은 선수가!"
세상에 완벽한 스트라이커는 별로 없다.
진짜 한 방을 가진 스트라이커를 소유한 팀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가장 많은 포지션 중 하나기도 하지만, 막상 대단하다고 여길 만한 스트라이커의 풀이 넓은 것도 아니다.
첼시는 그런 상황을 감안해도 스트라이커와 지독하게 연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리그 18라운드 24골을 터뜨린 제퍼슨 리는 대단하다 못해 '특별한' 존재였다.
"근데 큰일이군."
"왜? 우리 제프가 잘해 주고 있는데. 이 기세라면 리그 40골도 가능하지 않겠어?"
"아니, 이 기사를 봐."
[레알 마드리드, 제퍼슨 리를 향한 욕망을 드러내다. 1억 파운드를 쏟아부을 생각.]
[바르셀로나, 부상당한 수아레스의 대체자로 겨울 제퍼슨 리의 영입 노려.]
[장외 엘클라시코 발발? 제퍼슨 리의 현재 몸값 1억 파운드(1472억 원)!]
"미친!"
"이거 진짜야?"
"장난 아닌데. 여기 스카우터 사진도 찍혔어. 여기 W석 쪽이잖아?"
"Shit!"
"그래도 이번 겨울에 데리고 가려면 돈 엄청 들 거 아냐?"
"맞아."
"지금 제퍼슨이 고작 1억 파운드면 저 두 팀은 충분히 노릴 만하지 않아?"
그 말에 팬들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는 수아레스의 부상, 레알 마드리드는 벤제마의 기량 저하로 공격진에 문제점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
이적 자금이 충분한, 세계에서 가장 큰 두 클럽이 제퍼슨을 노린다는 건,
단순한 루머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음. 뭔가 방도가 필요해."
"방도?"
"그래. 이대로면 겨울에는 아니더라도, 내년 여름에 떠날 지도 몰라."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설마."
"돈? 막말로 돈이 문제야? 솔직히 말해서 우리 첼시가 저 두 클럽보다 나은 메리트는 없어."
"제기랄. 뭔가 방법이 필요해!"
"잠깐. 서포터즈 그룹끼리 뭐 하나 해 보자."
"뭘?"
"다음 경기 왓포드전까지 4일 남았지? 오케이. 서포터즈 그룹 리더들 다 불러 모아!"
팬들이 무언가를 작당하기 시작할 무렵.
제퍼슨은 19라운드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다음 경기는 리그 9위 왓포드전이다.
이 팀도 도깨비 성향이 짙은 팀이다.
강팀 상대로 곧잘 승리를 거두거나 무승부를 기록하지만,
약팀 상대로는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무너질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리그 9위라고 얕볼 상대는 아니다.
"아니야, 제프. 프리미어리그에선 얕볼 팀은 없어."
아스필리쿠에타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잔뼈가 굵다.
12년부터 첼시에서 뛰었으니.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런던의 모든 레스토랑은 다 꿰고 있어서, 오늘 그가 아주 좋은 맛집을 소개해 준다고 자리를 마련했다.
"얕볼 수 있는 팀이라.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리그 꼴찌라고 얕보다가 톡톡히 당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지. 당장 리그 1위인 맨시티가 번리에게 당할 줄은 누가 알았고, 리버풀이 아스톤 빌라한테 당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하지만 우리가 내일모레 왓포드에게 당할 일은 없을 거예요."
내 말에 아스피가 크게 웃엇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우리에겐 가장 위험한 공격수가 있으니까. 안 그래? 제프?"
"물론이죠, 캡틴. 완벽한 크로스만 올려 준다면야."
"오, 제프. 난 네가 참 좋아."
"제가 아무리 미국인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요, 캡틴. 고백은 거절할게요."
"하하하!"
아스피는 별것도 아닌 농담에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좋은가 보네.
그러고 보니 아스피는 벌써 첼시에서만 10년 가까이 뛰고 있다.
세계적인 풀백 중 하나인 그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클럽에서도 뛸 수 있을 텐데.
첼시팬들에겐 있어서 거의 원클럽맨처럼 받아들여질 정도로, 아스피의 헌신은 유명하다.
솔직히 궁금했다.
나야 피지컬이 부족해서 여기저기서 방출당해 떠돌았지만.
아스피는 실력 때문이라도, 특히 스페인 국적이라서 스페인의 두 빅클럽이 충분히 노릴 만한 자원 아닌가.
그래서 분위기도 좋아 은근슬쩍 물어봤다.
왜 계속 첼시에서 뛰냐고.
"간단하지. 난 이 팀이 좋아. 첫 시즌에는 영 좋지 못했지. 두 번째 시즌 초반까지도 지독하게 욕먹었어."
"그래요?"
"지금이야 내 자리가 확실하지만, 그땐 이바노비치와 애슐리 콜이 있었거든. 그들을 밀어내기엔 부족했고, 또 내가 주전으로 뛰면 늘 실수를 했거든. 당장 여기서 꺼지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
"으음."
"그런데······ 언제였더라. 그래. 여기 이 식당이었지."
"여기요?"
"훈련이 끝나고 에이전트에게 다른 팀을 알아봐 달라 얘기하려고 여기서 만나자고 했어. 그런데 첼시 유니폼을 입은 꼬맹이가 나에게 다가와 말하더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스피는 언뜻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니 즐거운 듯했다.
"난 아저씨가 좋다고. 물론 그때 내가 스무 살이긴 했지만. 어쨌든. 꼬맹이가 여기서 꼭 리그 우승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이걸 줬지."
아스피는 주섬주섬 지갑에서 무언가 꺼냈다.
꽃 모양으로 작게 접힌 종이였다.
"행운의 부적이라면서,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난 우습게도 그 꼬맹이 앞에서 엉엉 울었지."
"음. 그건 좀 그러네요."
"그땐 힘들었으니까. 거짓말처럼, 이걸 지닌 순간부터 경기가 잘 풀렸어. 팬들도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고."
"그거 효과 좋네요."
"하하, 그치? 어쨌든 리그 우승을 했고, 그다음엔 꼬맹이가 찾아와서 빅이어를 들고 와 달라더군. 그러다보니, 바르셀로나에서 날 불러도 난 여기 남게 됐어."
"그 정도로 효과가 좋은 부적이면, 빅이어는 들고 와야 값어치를 하겠네요."
"맞아, 맞아.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어쩌면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일지도 몰라."
갑자기 아스피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날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일순 진지하다 못해 뜨겁게 타올랐다.
"우리의 약점은 늘 공격력이었지. 그리고 지금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공격수가 있고."
"챔피언스리그는 저도 경험이 없어요."
"프리미어리그는 경험이 있어서 지금 다 부수고 있나?"
음.
그렇긴 하지.
아스피는 진지한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다음까지 같이 가자고. 제프. 빅이어를 향해서."
"음. 혹시 이적 루머 때문에 그래요?"
"들켰군. 기사 봤어. 레알 마드리드하고 바르셀로나에서 노린다면서?"
"그렇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기사에 나온 것처럼 뭔가 급하게 흘러가는 모양새는 아니다.
그들의 스카우터가 날 관찰한 건 확실하지만, 지금 뜬 기사들은 내 에이전시가 이적시장을 앞두고 터뜨린 것들이라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없기에 난 웃었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젊은 남자가 별안간 소리쳤다.
"제퍼슨 리! 여길 떠나지 말아 주세요!"
식당은 풀럼에 위치해 있어, 첼시 팬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가 식사 중이었기에, 보고도 일부러 다가오지 않았지만 내 이적 루머가 대화로 나오자 참지 못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제프, 우린 당신을 사랑해요."
"음, 고마워요."
"내가 로만하고 잘 아는데, 가서 담판을 짓고 오지. 당신한테 주급으로 15만 파운드 이상을 주라고 말이지!"
어떤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허풍을 떨었고,
"제프! 우리 팀에서 영원히 뛰어 주세요!"
어떤 어린아이는 나에게 사인을 받아가면서 제발 첼시에 남아 달라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아.
아스피가 왜 쉽게 팀을 떠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런 팬들이 붙잡는데,
어찌 쉬이 떠나겠나.
"자. 어때. 적어도 빅이어는 여기서 들고 가야, 저 어린애가 널 원망하지 않겠지?"
"하하하, 아스피. 이거 노리고 준비한 거 아니죠?"
아스피는 능청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
"보여 줘! 오늘은 팬들의 날인 거 알지?"
왓포드전은 팬즈데이라고 해서, 구단에서 지정한 팬들의 날이다.
경기장 티켓은 무료로 풀렸고, 각종 행사가 하프타임과 경기 전부터 잡혀 있었다.
오늘 결장하는 선수들은 사인회를 열었고, 하프타임 땐 관중들에게 피자 배달을 한다.
그만큼 중요한 경기다.
팬들에게 축제 같은 날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를 거둬야 한다.
"Gooooo-! Blues!"
오늘 분위기는 환상적이다.
이전에는 승리 못하면 다 죽여 버리겠단 같은 특유의 훌리건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가족들과 함께 온 팬들이 많아서 그런지 정말 축제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우리는 시작부터 승리를 위해 공세를 펼쳤다.
왓포드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선수비 후역습의 전술이었다.
깊게 내려앉아 한 방을 노리는 모양새.
두 줄로 이뤄진 수비 블록은 강력했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하나, 세상에 완벽한 방패는 없다.
나는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기 위해 연신 움직였다.
"제------프!"
오늘따라 내 이름을 외치는 환호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캉테가 중간에서 볼을 잡고 전진 드리블을 펼쳤다.
역시, 대단하다.
저 작은 움직임으로 선수들 사이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다.
그리고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풀리시치에게 패스했고, 풀리시치는 2선의 로스 바클리와 2대 1패스를 주고받으며 수비 블록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빠르게 오가는 짧은 패스는 수비를 흔들었다.
아주 조그마한 공간.
나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클리!"
정말 찰나라고 부를 시간.
내가 균열이 발생한 수비진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내 어깨가 수비의 어깨선을 스치는 그 아슬아슬한 찰나에.
바클리의 패스가 수비들의 다리 사이로 빠졌고,
"막아아!"
단숨에 나는 모든 수비진을 따돌린 채,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며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맞이했다.
튀어나오는 골키퍼.
자. 어디를 노릴까.
왼쪽? 오른쪽?
아니다.
오늘은 축제이지 않은가?
팬들이 좋아할만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툭!
조금은 거리가 있지만, 골키퍼가 튀어나오는 순간.
난 그대로 공을 머리 위로 넘기는 슈팅을 시도했다.
골키퍼가 황급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을 위로 뻗지만,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제대로 들어간 칩슛은 골로 연결됐다.
"제퍼스으으으으은!"
"제프! 제프! 제프!"
"Yeaaaaaaaaa!"
내가 터뜨린 골에 관중들이 미친듯이 환호하면 온몸에 고양감이 타오른다.
이래서 축구가 즐겁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에서 내가 스트라이커를 선택한 이유였다.
그때였다.
미친 듯이 뛰어오르던 팬들이, 그러니까 골대 뒤에 있던 섹터의 팬들이 갑자기 주섬주섬 바닥에서 무언가 들어올렸다.
정사각형 모양의 그림판.
파랗게, 하얗게 이것저것 섞인 그것들은.
"오, 세상에."
"맙소사."
"제프? 저게 뭐야?"
세레모니를 위해 달려오던 동료들도 눈을 크게 뜨고 그걸 지켜봤다.
카드 섹션.
섹터의 전부가 첼시 유니폼을 입은 나의 미니어처 캐릭터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손끝, 발끝을 타고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와.
솔직히 소름이 끼쳤다.
아스피가 다가와 어깨동무하며 소리쳤다.
팬들의 환호가 워낙 컸기에,
귓가에 대고 소리쳐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하하하! 제프. 내가 이 팀의 팬들에게 인정받기까지 2년이 걸렸는데, 넌 고작 4개월 만에 팬들의 마음을 다 빼앗아 버렸군!"
< 86. Jeff's Day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