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83화 (83/258)

< 83. 첼시의 8할 (6) >

귀여운 아이들이 때론 영악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순진한 얼굴, 아무런 악의 없는 듯한 말.

그러나 듣는 사람은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순수악'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내가 브래던 씨의 손녀딸, 안나와 3분간 대화를 나누고 느낀 거다.

"오케이, 안나. 저어기 주장 완장 차고 있는 리버풀 선수 보이지?"

"네."

"저 친구랑 같이 손잡고 입장하는 게 어때?"

"저 아저씬 리버풀 선수잖아요?"

"그래. 나야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저 선수는 아니잖아? 가서 마음껏 떠들어 봐."

에스코트 키즈.

선수와 함께 경기장에 입장하는 어린이들이다.

안나는 브래던 씨의 손녀딸로, 상당히 귀여운 9살 여아였다.

하지만 잠깐 얘기해 보면 그 생각이 달라질걸. 브래던 씨가 왜 자기 손녀딸하고 대화하지 말랬는지 나도 이제야 이해됐으니까.

"안녕."

리버풀의 주장, 조던 헨더슨이 자신에게 달려와 옆자리를 차지하는 안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니?"

"안나예요. 이거 오래 걸려요?"

"······아니 곧 나갈 거야."

시작됐군.

저 순진한 눈망울에 대화의 맥을 끊어 버리는 화법.

헨더슨은 그래도 리버풀의 캡틴답게,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혹시 첼시 팬이니? 아니면 리버풀 팬?"

"아니요. 저 축구 싫어해요!"

"······."

"울 할아버지가 여기 대빵이거든요. 그래서 뽑혔어요."

"대빵? 혹시······ 로만 구단주?"

"아니요. 브래던이요."

"······그렇구나."

"TV에 나오고 싶기도 했어요. 혹시 알아요? 광고 모델로 스카우트 될지?"

"아······ 그래."

헨더슨은 슬슬 말리는 기분일 것이다.

나도 저 기분이었거든.

하지만 남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웃기긴 했다.

"이 경기 중요해요?"

"음, 중요하지."

"자신 있으세요?"

"······약간?"

"네."

"······왜 그런 표정이니?"

"그냥요."

"······."

"우리 할아버지가, 아저씨가 놓친 골은 돌아가신 할머니도 넣을 수 있다고 했어요."

"······모든 골을 다 넣을 수는 없는 법이야."

"골 넣는 거 쉽잖아요. 우리 팀 공격수는 매번 집어넣는데."

"내가 골을 놓쳐도 우리 팀은 경기에서 이겼거든?"

"그런다고 골 못 넣은 게 어디 덮어지겠어요? 그 넓은 골대에 조금만 정확히 집어넣으면 쉬운 걸."

"아니야."

"골은 아무나 넣을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래두."

"그게 얼마나 쉬운 건데."

"······."

헨더슨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입술 꾹.

순간 욱 치솟는 걸 참는 듯한 얼굴이다.

하기야, 9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화를 내겠어?

더구나 아무렇지 않게 순진한 눈망울과 웃는 낯의 안나에게 말이다.

경기 입장 전에 선수들이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건 중요한 일이다.

때문에 안나와의 대화는 미묘하게 헨더슨의 심리를 흔들어 놓고 있을 것이다.

이쯤 하면 헨더슨도 충분히 흔들렸을 거 같은데, 안나는 여전히 떠들었다.

"아저씨가 주장이에요?"

"그래, 내가 리버풀의 캡틴이지."

"그러면 중요한 사람이네요?"

"······응."

"골 못 넣으면 사람들이 다 아저씨만 욕하겠네요?"

"······."

"쉬운 기회를 놓치면 더 그러겠네요."

"후우."

"아저씨 골 못 넣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뭐라고 놀린 줄 아세요?"

"아니, 듣고 싶지 않아."

"네. 그게 좋겠네요. 말씀드리면 아저씨 충격받아서 우실지도 몰라요."

헨더슨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꾹 감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걸 보니.

흠.

볼 만하겠네.

최고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이스.'

그러자 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러냐는 듯.

음.

영악해.

회귀자는 아니겠지?

***

리버풀은 전반 시작하자마자 두 번 정도의 기회를 맞았다.

한 번은 제대로 된 타이밍에 패스만 있었다면 완벽한 득점 기회였고,

또 한 번은 헨더슨이 때린 중거리 슛이 공간이 완전히 열려 있었는데도 골대 옆을 스쳤다.

"헨더슨이 우릴 도와주는군."

필마르크 감독이 실소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 헨더슨은 오늘따라 영 시원찮은 플레이를 보여 줬다.

첼시에 있어서 행운이었다.

"하지만 역시 안 되는군."

벌써 두 번의 찬스를 내준 건, 시작부터 끌려간다는 의미다.

실제로 리버풀은 두 번 기회를 놓쳤지만, 여전히 공격을 퍼부었다.

[조르지뉴가 피르미누를 놓칩니다! 피르미누! 단숨에 공간을 가로지르며 선수들의 시선을 끄는 사이, 모하메드 살라가 침투합니다!]

[살라에게 이어지는 패스! 살라- 살라-! 살라 고오오오오올!]

[리버풀이 런던 원정에서 선취득점을 얻어 냅니다!]

"공격력 한번 살 떨리는군."

필마르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리버풀의 공격전개.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헨더슨의 어설픈 공격이 아니었다면 벌써 스코어는 3대 0으로 벌어졌을 터.

이대로 경기가 흘러가면 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때문에 필마르크 감독은 경기 전에 준비했던 플랜 B 전술을 꺼내 들었다.

서로 약속했던 신호가 벤치에서 필드로 전해지고.

4-4-2의 포메이션에 변화가 나타났다.

"음?"

그리고 그 변화의 흐름을 캐치한 건 클롭 감독이었다.

선수들의 포지션이 바뀌는 걸 본 클롭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4-2-3-1?"

4-4-2의 투톱이 4-2-3-1로 바뀌는 건 흔한 일이다. 투톱 중 하나가 밑으로 처져서 하는 플레이는 정석적인 것이다.

그런데.

"제퍼슨을 오른쪽으로 보낸다고?"

순간 머리에서 비상등이 울렸다.

그간 파악한 제퍼슨의 플레이 스타일.

제퍼슨의 엄청난 장점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친다.

"무지막지한 스피드, 말도 안 되는 방향 전환, 달려드는 수비수를 이겨 내는 피지컬······"

클롭은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 감독이 제퍼슨을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인지.

그건 곧 현재의 흐름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음이니, 그가 황급하게 소리치며 선수들에게 경고하려던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피르미누가 중앙까지 내려와 공을 주고받습니다!]

리버풀의 공격수 피르미누는 엄청난 활동량으로 필드를 누빈다.

모하메드 살라와 마네처럼 날카로운 득점을 보여 주진 않지만,

클롭 체제의 키 플레이어는 바로 피르미누였다.

'좋아!'

피르미누는 높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중앙까지 내려가 공을 잡았다.

공이 연결되자마자,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템포를 높이기 위해 속도를 터뜨리는 순간.

"읍!"

[캉테가 피르미누의 볼을 뺏습니다!]

[캉테가 돌아왔네요. 캉테가 있는 첼시의 중원은 막강하기 짝이 없습니다!]

활동량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캉테가 귀신처럼 나타나 피르미누를 밀쳐 내며 공을 따냈다.

'피르미누는 중앙까지 깊숙이 내려오니, 잘 막으라고 했지?'

며칠 전 있었던 새로운 전술 훈련.

캉테는 감독과 제퍼슨이 상의하며, 자신에게 말해 줬던 걸 똑바로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중앙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다가 피르미누가 내려오자마자 공을 빼앗았다.

차단에 성공한 캉테는 약속했던 것처럼 거침없이 순식간에 오른쪽 대각선으로 길게 패스를 뿌렸다.

"······!"

캉테를 떠올리면 흔히 태클과 차단에만 능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캉테는 패스에도 일가견이 있는 선수다.

그의 대각선 패스는 교묘했다.

수비와 미드필더의 지역 방어 경계선.

그 경계선을 완벽하게 갈라버리는 대각선 패스.

센터백 조엘 마티프와 레프트 백 앤드류 로버트슨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애매한 거리.

서로 맡은 지역방어의 경계선을 갈라 버리는 패스에,

누가 달려들어 커버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허둥지둥하는 찰나.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시야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담겼다.

"헉!"

별안간 나타난 인영이 단숨에 공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중앙에 있던 스트라이커가 우측 터치라인에서 나타났다.

파앗!

"미친!"

"Shit!"

"쟤가 왜 저기서 나와?"

누군가의 경악스러운 외침과 거의 동시에 첼시 홈팬들의 격한 환호성이 터졌다.

"Yeeeeeeaaaaaa!"

"제-----프!"

"Run! Run and Kill!"

터치라인을 타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질주하는 제퍼슨 리.

[제퍼슨 리가 달립니다!]

[엄청난 속도입니다! 슈퍼카가 아우토반을 달리는 것 같네요! 터치라인을 타고 질주하면서 단숨에 리버풀의 뒷공간을 공략합니다!]

"대체 무슨!"

필드 안에서는 변화를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다.

순식간에 바뀐 첼시의 포메이션.

리버풀 선수들이 제퍼슨의 위치가 오른쪽 날개로 바뀌었음을 자각하지 못한 순간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 누구도 제퍼슨을 생각지도 못했고, 마킹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런 방해가 없다.

그러면 뭐겠는가?

[제-퍼슨의 질주! 아무도 없습니다! 단숨에 중앙에서부터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치고 들어갑니다!]

"제기랄!"

골키퍼 알리송은 많은 생각 끝에 판단을 내렸다.

'늦었다!'

선수들이 복귀해 수비하는 건 늦었다.

뒷공간을 찢어버리는 저 스피드를 보라.

단거리 메달리스트처럼, 모든 선수를 떨쳐 내고 질주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야생마 그 자체였다.

'내가 막아야 해!'

알리송은 박스 대각으로 치고 들어오는 제퍼슨을 향해 각도를 좁히며 뛰쳐나갔다.

그러나.

뻐-엉!

"······!"

알리송이 첫 번째로 느낀 건 바람이었고,

두 번째는 머리칼을 스치는 공의 흐름이었으며,

세 번째는 골네트를 철렁이는 싸늘한 소리였다.

철-럭!

단숨에 오른쪽 수비를 찢어 버리고, 페널티 박스 대각에서 때린 강력한 파포스트를 노린 아웃프런트 슈팅.

알리송이 차마 손도 뻗지 못하는 궤적과 스피드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Yeaaaaaaaaaaaa-!"

"Gooooaaaaalll!"

골키퍼와 수비수.

리버풀의 벤치까지.

모두가 얼어붙어 버린 순간이었다.

[마치 인간 총알과도 같았습니다! 제퍼슨 리라는 탄환이 리버풀의 심장을 꿰뚫어 버립니다! 제-퍼슨 리! 동점골을 만들어 냅니다!]

***

내가 저번에 말했던가.

필마르크 감독은 미래에 스트라이커를 가장 완벽하게 활용할 줄 아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고.

그는 포지션 파괴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다.

가령 내가 우측 윙어.

정확히는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는 것도 이미 계획된 내용이었다.

"맙소사. 어마어마한 스피드였어!"

"단숨에 수비진을 찢어 버렸군!"

"이거 윌리안도 긴장해야 하겠는걸? 제프가 오른쪽에서도 뛸 수 있으면 말이야!"

뭐, 내가 오른쪽에서 뛰는 건 자주 있지는 않을 거다.

사실 리버풀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술이거든.

날개에서 뛰면 체력이 빠르게 소모될 수밖에 없다.

위아래로 미친 듯이 오가야 하며, 스프린터 횟수도 스트라이커 포지션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매 라운드마다 이 위치에는 설 수 없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변칙적인 위치라면.

상대에게 크게 한 방을 날릴 수 있게 된다.

"장난쳐? 로버트슨!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왜 공을 미뤄? 바로 처리해야지? 위치가 애매하다고 동료한테 볼 처리를 미루다니! 마티프! 네가 지금 그러고도 프로야!?"

"정신 차려! 이 자식들아!"

엄청난 거구의 클롭 감독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당장이라도 필드로 뛰쳐나올 기세였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거겠지.

어쨌건 흐름은 역전됐다.

"클롭이 가장 잘 쓰던 전술을 그대로 따라 쓸 줄이야."

새삼 필마르크 감독의 배짱도 두둑하다.

라인을 전체적으로 올려서 상대 진영에서 볼을 뺏고, 곧바로 득점까지 이어지는 역습 형태.

비교적 클롭 감독이 즐겨쓰는 공격 형태와 매우 유사한 전술이었다.

"이 전술의 핵심은 제프, 바로 너다. 네가 시작이고 끝이고 핵심이야. 이번 전술의 80%는 너에게 달렸다."

첼시의 8할.

결국엔 내 발끝에서 끝나는 전술이었기에, 감독님은 내 역할의 비중이 80%라고 말할 정도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공간을 파고들어라! 캉테와 조르지류를 믿어!"

이 전술에선 모든 선수가 나의 조력자의 역할에만 그쳤다.

캉테가 공을 스틸하거나, 조르지뉴가 전방에 있는 공간으로 볼을 찔러 줄 때.

나머지 공격진.

풀리시치와 오도이, 지루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비진을 속이는 페이크를 펼친다.

그러면 나에게서 시선이 분산되는 사이, 스피드를 살려서 공간을 꿰뚫는다.

바로 지금처럼.

"Run!"

"죽여버려!"

"Yeaaaaaaaaa!"

뜨겁게 달아오르는 스탬포드 브리지의 응원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양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그 고양감은, 내 허벅지를 타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리버풀을 죽여 버리라고! 제-프!"

조금 과격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 줘야겠지?

< 83. 첼시의 8할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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