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첼시의 8할 (4) >
[고오오오올-! 제퍼슨! 제퍼슨 리! 오도이의 환상적인 원터치 패스를 받아, 다시 한번 득점에 성공합니다!]
게임은 의외로 초반부터 쉽게 흘러갔다.
그건 첼시의 안티팬들.
한마디로 다른 런던팀의 팬들에겐 아쉬운 얘기였다.
일전에 리버풀을 격침한 것처럼, 아스톤 빌라가 다크호스의 모습을 보여 줄 거란 기대감과,
그리고 제퍼슨을 가장 잘 아는 감독이라고 언론에 소문난 것처럼 그를 어느 정도 봉쇄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존재했다.
막상 까 보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전반 초반부터 제퍼슨은 그간 무득점을 기록했던 본인의 경기력에 답답함을 해소하듯이 골폭격을 이어갔다.
[공에 대한 제퍼슨 리의 집착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빌라의 수비들이 유니폼을 잡아당기고, 부딪치고, 태클해도 절대 넘어지지 않고 끝끝내 슈팅까지 이어가 득점에 성공합니다!]
빌라 선수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이 묻어났고, 원정팬들은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노를 토했다.
"어제 여자 만나고 술이나 처먹었냐! 왜 이렇게 비실대?"
"빌어먹을!"
"왜 저 자식 하나를 못 막아?"
"아니. 잘 안다면서?"
그들의 야유는 그랜드 감독에게 쏟아졌다.
그랜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쟤를 어떻게 막으라고? 어? 쟬 막은 감독이 있기나 해?"
물론 제퍼슨을 아예 못 막는 건 아니다.
못 막는다면, 제퍼슨이 리그 매 라운드마다 골폭격을 했겠지.
제퍼슨이 득점하지 못한 경기를 보면 된다.
"먼저 그를 도와줄 조력자가 없거나 상태가 형편없어야 해. 그다음에 공격 따위는 포기하고 텐백만 하면 적어도 비길 가능성은 있지."
그런 식으로 하면 적어도 제퍼슨을 막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전 제퍼슨이 무득점한 경기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러면 승리는 물 건너가는 일이다.
물론 언제든 강등권에 처박힐 가능성이 있는 팀이, 원정에서 텐백으로 승점 1점을 얻어 내는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근데 그게 무슨 축구야?"
수비만 하는 게 무슨 축구란 말인가.
메이저리그의 벤치 클리어링을 좋아하고, 미식축구의 슈퍼볼 경기를 즐기는 그랜드 감독에게 있어선, 그건 스포츠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전진해! 라인 올려! 너희도 넣을 수 있다고!"
과격하게 소리치며 연신 선수들을 독려했다.
4경기 동안 11골을 터뜨린 선수들이다.
언제든 기회는 온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전하시네요'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제퍼슨을 노려봤다.
"끙. 그래도 이렇게 못 막을 줄은."
그렇다고 제퍼슨을 막는 걸 포기한 건 아니었다.
미드필더 셋은 삼각편대를 이뤄 사실상 제퍼슨을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거기에 중앙 수비수 두 명은 원톱, 제퍼슨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제퍼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전술을 결정하자, 코치진에서는 우려를 표했다.
"제퍼슨에게 집중되면 나머지 선수들이게 기회가 생겨요."
"차라리 그게 나아. 제퍼슨은 찬스가 생기면 넣어 버리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그래도 날릴 가능성이 있잖아? 제퍼슨에게 공간을 많이 줄 바엔, 차라리 그에게 가는 패스 자체를 줄이고 다른 선수에게 볼이 배급되는 것이 백번 나아."
완벽한 스코어러.
득점 찬스가 생기면, 그걸 웬만해서는 놓치는 일이 없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에 비교해 유효슈팅이 득점에 연결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차라리 그를 집중 견제해서, 나머지 선수들에게 공이 가게 만드는 것이 훨씬 나은 방안이었다.
나머지 선수도 위협적이지만, 제퍼슨이 기회를 맞이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런데 우습게 됐군."
그랜드 감독은 실소를 지었다.
기회가 생기지 않자, 스스로 몸으로 부딪쳐 기회를 만들더니.
단숨에 모든 집중 견제를 바보로 만들지 않았는가?
"제-프, 그래도 옛 인연이 있는데, 좀 봐줄 줄 알았더만."
그는 씁쓸하게 제퍼슨을 쳐다봤다.
프로 무대의 냉혹함이었다.
***
아스톤 빌라는 그래도 공격력만큼은 대단한 팀이었다.
대단한 스코어러나 킬러는 없지만, 공격을 전개하는 과정만큼은 일품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중원에 캉테가 없는 틈을 타.
잭 그릴리쉬가 아름다운 중거리 슛을 꽂아 넣는 데 성공했다.
2-1.
만회골인가.
전반 25분 만에 세 골이 터지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필드도 뜨거워지기 마련이고,
빌라는 거칠어졌다.
삐빅!
"우우우우!"
"빌어먹을 아메리칸 빌라 감독! 이게 너희들 풋볼인 줄 알아?"
"개자식! 내 똥이나 먹어라!"
"음. 조심해. 우리 제프도 그 미국인이라고."
"아니지. 제프는 블루스야."
"······."
어쩌면 그랜드 감독님은 EPL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른다.
거칠기 짝이 없는 미국 마초 스포츠 문화를 사랑하는 그에게, EPL은 최고의 무대가 아닐까?
빌라 선수들은 카드를 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좀 웃긴 일이긴 하다.
"으아아!"
퍽!
나보다 쪼끄만 애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에게 달려드는 모습이란 참.
내가 공을 잡으면, 빌라 미드필더들은 거침없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매번 나가떨어지는 건 본인임을 알면서도.
"잡아!"
"몸이 부서지더라도 덤벼!"
하지만 이게 은근히 골치 아팠다.
나에게 밀려 넘어지면서도, 은근슬쩍 옷깃을 잡아끌고 중심을 무너뜨리려고 애쓴다.
야유가 쏟아지고, 관대한 성향의 심판도 점점 휘슬을 부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난 샐쭉한 눈길로 빌라 측 벤치를 바라봤다.
가까운 거리.
"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옛 제자한테 부상을 입히려고 하시나."
"그럴 리가. 이게 축구 아니겠어? 캡틴."
"허어."
"난 말이야. 메이저리그를 좋아해. 여차하면 벤치클리어링해서 다 때려 버릴 수 있잖아? 아이스하키는 어떻고? 아예 주먹질하는 포지션이 있단 말이야. 그에 반해 축구는 너무 시시해. 적어도 이렇게 거칠어야 스포츠 아니겠어?"
그렇긴 하지.
음······ 맞는 얘기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죠?"
"헤이 캡틴, 너무 아파하지 마. 이래야 스포츠지."
"미국식 스포츠라. 그거 알아요?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인 미식축구 선수 출신 인거?"
"······!"
"지금부터 감독님 선수들 다 죽었어요."
"······제프? 우리······ 말로 할까?"
버스 떠났습니다. 감독님.
***
[잭 그릴리쉬! 공을 잡고 전개합니다!]
잭 그릴리쉬가 중원에서 공을 잡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치고 들어갔다.
캉테가 없는 중원은 빈약했다.
그가 중앙에서 공을 소유한 채, 선수들의 압박을 벗어날 때.
라인을 파고드는 공격수, 웨슬리 모라에스를 보고 패스를 찔러주려는 순간.
퍼억!
"악!"
멀리서 달려오던 제퍼슨이 숄더 차징으로 그릴리쉬를 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삐비비빅!
휘슬이 울리고 빌라 측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미쳤어? 반칙이라고!"
"고의였어!"
"전혀. 공 뺏으려다 그런 건데?"
"이 개자식이!"
"아니, 저렇게 허무하게 날아갈 줄은 몰랐지."
수많은 선수가 둘러싸였지만, 제퍼슨은 오히려 능청스럽게 웃으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흠칫한 건 달려들던 빌라 선수들이었다.
"참새처럼 쫑알대지 말고, 어디 한번 해볼 생각이야?"
전혀 기죽지 않은 제퍼슨.
사실 제퍼슨, 그러니까 이학현으로 뛸 때, 필드에서 배짱 하나만큼은 두둑한 선수였다.
자주 부상을 당하니 그런 약점을 노려 거칠게 부딪쳐 오는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겁먹어서는 안됐다.
다칠까 염려해 몸을 사리면, 더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오니까.
그래서 배짱만큼은 두둑하게 길렀다. 본인보다 크고, 과격하고, 거친 파이터형 선수들과 맹렬하게 부딪쳐 본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이런 기 싸움에서 밀린 적이 없었다. 부족한 피지컬일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그만둬! 다들 레드카드 받기 싫으면!"
심판이 와서 만류하자 상황은 어찌어찌 정리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퍼슨은 멈추지 않았다.
[오도이에게 거칠게 태클을 시도하던 닐 테일러! 공을 차단하고 바로 전진합니다! 아아! 제퍼슨이 달려와 그대로 공을 빼앗아 버리네요!]
뻑!
"으읍!"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제퍼슨은 그 격언 그대로 움직였다.
동료 선수들에게 거친 반칙을 하면, 제퍼슨은 여지없이 달려가 똑같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거친 숄더 차징.
슬라이딩 태클, 그리고 심판의 눈을 피해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차거나.
삐빅!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저랑 몸싸움하면 다 그냥 나가떨어지는데, 그렇다고 수비를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음!"
제퍼슨은 심판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정중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심판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관대한 성향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전까지 빌라 선수들에게 반칙에 시달렸던 첼시 선수였기에,
어느 정도 보상 판정이 가해진 것도 있었다.
그렇게 제퍼슨이 전후좌우 돌아다니며 빌라 선수들을 거칠게 대하자,
"으아악!"
"······?"
제퍼슨이 들소처럼 전진해 오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면서 뒤로 피하는 게 아닌가.
툭.
제퍼슨은 자기 혼자 화들짝 놀라 공을 놓치고 주춤 물러서는 빌라 선수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곤, 그대로 주인 잃은 공을 차고 달렸다.
"······."
그런 모습을 보고 그랜드 감독은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아메리칸 자식."
물론 본인도 아메리칸이었지만.
***
아스톤 빌라는 급격하게 동력을 잃었다.
맹렬한 투쟁심, 저돌적인 플레이, 거친 반칙으로 첼시 선수들을 제압했지만,
내가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자, 방금 전처럼 저돌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다.
'그래도 공격은 포기 안 할 걸?'
그랜드 감독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공격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빌라가 한 골차로 지고 있지 않은가?
참 애매한 스코어다.
한 골만 더 넣으면 동점을 바라볼 수 있으니.
"제-프! 이젠 안 내려와도 돼! 가서 부숴 버려!"
경기는 후반전으로 치닫고,
내가 여기저기 거칠게 보복하고 다니느라 소진될 체력을 걱정한 감독님의 주문.
그리고 교체 투입된 페드로가 적극적으로 선수들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나에게 집중된 견제가 약해졌다.
덕분에 난 좀 더 편안한 기분으로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었다.
"페-드로! 뛰어!"
왼쪽의 지친 풀리시치보단, 오른쪽의 쌩쌩한 페드로를 보며 소리쳤다.
페드로가 활발하고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우측 수비라인을 흔들면서 파고들자,
균열이 발생했다. 그에게 잠시 어그로가 끌린 사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공을 잡고 툭툭 치며 전진했다.
미드필더 루이스가 잔걸음으로 뒷걸음쳤다.
아무래도 달려들다가 나에게 걷어차이거나 밀려 넘어질 걸 무서워하는 눈치.
좋아.
이게 거친 플레이의 장점이겠지.
상대 선수를 말 그대로 '쫄게' 만드는 것 말이야.
덕택에 거리가 생겼다.
공간이 있으면, 왠지 치고 나가고 싶단 말이야.
툭!
넓은 좌측 공간을 향해 공을 툭 차며, 순간적으로 가속도를 터뜨리고.
"달려들어!"
수비수 한 명이 급하게 달라붙지만,
휙!
오른쪽으로 방향전환해서 태클을 피하자.
보였다.
어정쩡한 위치에서 머뭇거리는 수비수 하나와,
튀어나올지, 자리를 지킬지 고민하고 있는 골키퍼가.
그리고 그 사이로 공이 빨려 들어갈 만한 궤적이.
마치 새하얀 선이 쭉 이어져 있다고 해야 할까.
궤적 그대로 때리면 들어간다는 100%의 확신이 생기자,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오른발을 내딛어 축으로 삼고,
뒤에 빠져있던 왼발이 그대로 공에 임팩트되는 순간이.
파 포스트를 보고 때리는 아웃 프론트 슈팅.
골키퍼가 황급하게 손을 뻗지만,
글쎄.
내가 본 궤적은 이게 아니었단 말이지.
여기서,
휙!
"······!"
아주 조금의 회전력.
내가 원하는 임팩트가 실리는 순간, 살짝 스핀을 먹인 슈팅.
골키퍼가 향하던 방향으로 향하던 공이 마지막에 급격하게 방향을 틀며 역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UFO처럼.
철럭!
골키퍼는 역동작에 걸려 공을 쳐 내지도 못했고,
골네트가 흔들렸다.
3-1.
해트트릭.
이 정도면, 저번 두 번의 무득점 경기를 충분히 만회한 거겠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낀 채 달렸다.
"뭐야? 왜 안 와?"
늘 그렇듯이 달리면서 세레모니를 하는데,
동료들이 따라오질 않는다.
뭐야. 골 취소라도 됐나?
이상해서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내 동료들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빌라 선수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리고 관중들은 쩍 벌린 입을 손으로 막고 있었다.
깊은 적막.
정적.
그리고 한순간,
마치 댐이 무너지듯 우르르 폭발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제---프!"
"빌어먹을 정도로 완벽한 골이었어!"
"Lovely Finish! Lovely Goal!"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환호.
마치 경기장이 울리는 듯한 느낌은, 단순 느낌이 아니었다.
진짜로 울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저지른 게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해트트릭이야 놀라운 거지만,
마지막 UFO처럼 빨려 들어가는 골은.
"빌어먹을! 제프!"
"올해 푸스카스 상은 네가 가져가라고!"
"올해의 골이야!"
"미친 골이라고!"
뒤늦게 달려온 동료들이 내 몸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쳤다.
음.
푸스카스 상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 걸?
***
-이전 감독을 만나 완벽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해트트릭 소감은 어떤가?
"좋은 감독님이다. 아스톤 빌라 정도의 팀이라면, 다섯 골을 넣을 수 있었는데, 그랜드 감독이 팀을 잘 만들었다. 세 골만 허용한 아스톤 빌라의 수비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 UFO골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피니쉬였다. 노리고 찬 것인가? 아니면 행운의 골인가?
"나에게 행운이란, 첼시에 와서 좋은 감독님과 뛰어난 동료들, 그리고 환상적인 팬을 얻게 됐다는 것에만 있다. 나의 피니쉬는, 노력의 산물이다."
< 81. 첼시의 8할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