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첼시의 8할 (3) >
[캡틴 아메리카를 프로로 데뷔시킨 그랜드 감독. 그를 막을 비책, 갖고 있나?]
[누구보다 제퍼슨을 가장 잘 아는 감독. 제퍼슨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음. 제퍼슨이 최근 두 경기 무득점이었나?
-드디어 밑천 다 떨어진 거지.
-맙소사. 16경기에서 결장한 두 경기에, 지난 무득점 두 경기 제외하면 12경기에서 득점을 했지. 그것도 14경기 19골이야.
-이게 밑천이 떨어진 거라고?
-내버려 둬. 우리 캡틴-제프를 부러워해서 저러는 거니까.
-어쨌든 무득점이 이어지면 염려스럽긴 해. 어린 선수들은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잖아?
-더구나 상대가 그를 잘 아는 감독이라면 말이지.
-글쎄. 너희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감독이 제프를 잘 아는 만큼, 제프도 그 감독 스타일을 잘 알지 않을까?
-더구나 미친개처럼 공격만 하는 아스톤 빌라라고.
-리버풀 전에서 보여 준 수비 뒷공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
-오히려 제퍼슨이 다시 득점포를 가동하기 딱 좋은 경기야.
-Go! Jeff! 가서 죽여 버리라고!
***
옛 은사와의 만남은 뭔가 극적일거라고 생각했다.
당치도 않는 생각이었다.
마치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그랜드 감독은 온화한 얼굴로 필드에 나타났다.
"Hey, Captain."
"캡틴이라뇨."
"대통령한테 계급도 받았는데 뭐가 문제야. Cap."
"아이고야."
"캡틴. 오늘 몇 골이나 넣을 생각이야?"
"음.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 해트트릭만하죠. 최근 골 맛을 못 봐서 좀 간절하거든요."
최근 두 경기 무득점이었다.
출장하는 경기마다 득점을 기록했기 때문에, 두경기 연속 무득점은 언론에서 꽤 화제가 됐다.
누적된 피로에 완전히 내려앉아 육탄 방어만 하는 수비진.
거기에 골대를 맞추는 등, 운마저 따르지 않기도 해서 말이지.
다행히 오늘 컨디션이 좋다.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으며 뭘 해도 기분이 좋은 날.
오늘이 그런 날이다.
때문에 웃는 낯으로 다가온 그랜드 감독의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릴 자신이 생겼다.
"내가 널 프로 무대로 데뷔시켰는데, 너는 날 강등권으로 보내려고?"
"그게 프로의 냉혹함이죠."
"빌어먹을. 내가 사자를 길렀군."
"사자는 스스로 크는 법이죠."
그랜드 감독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경기장을 쭉 훑었다.
"네가 세 골을 넣으면, 우리 팀은 네골을 넣을 거야."
"그럼 전 다섯 골을 넣죠."
"흥! 그러면 우리 팀은 여섯 골을 넣겠지."
"그럼 전 7골이요."
"흥. 8대 7로 우리가 이기겠군."
"······"
이렇게 유치한 양반을,
누가 미국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
[첼시의 선발진입니다. 케파 골키퍼, 수비진에는 에메르송, 시셀도, 크리스텐센, 리스 제임스가 수비라인을 이룹니다. 중원은 코바치치, 메이슨 마운트, 다니엘 드링크워터가 자리 잡네요. 공격진에는 풀리시치, 허드슨 오도이, 제퍼슨 리가 뜁니다.]
[아스톤 빌라입니다. 골키퍼 톰 히턴, 그리고 왼쪽부터 닐 테일러, 타이론 밍스, 비에른 엥겔스, 프레데릭 길버트가 수비라인입니다. 중앙에는 더글라이즈 루이즈, 디오구 조타, 존 맥긴, 잭 그릴리쉬, 트레제게, 공격수에는 웨즐레이입니다. ]
[라인업만 보면 첼시가 승리할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첼시도 정상적인 라인업이 아닙니다. 수비에는 뤼디거, 중원에는 캉테가 부상으로 아직 복귀하지 못했죠.]
[공격수에는 윌리안이 경고 누적으로 결장입니다. 중원의 레지스타, 조르지뉴 역시 지난 경기에서 피로를 호소해 오늘은 벤치로 시작하네요.]
[캡틴 아스필리쿠에타도 없죠. 대신 유망주 리스 제임스가 얼마나 그의 역할을 대신해 주냐가 중요하겠습니다.]
[그에 반해 아스톤 빌라는 가동할 수 있는 최선의 라인업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라인업으로 바로 직전 경기, 리버풀의 무패를 깨뜨렸으니까요.]
첼시의 스타팅 라인업은 정상이 아니었다.
물론 이름값과 실력만 보면 아스톤 빌라의 선발진과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하나, 공은 둥글고 축구 경기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컨디션, 전술 전략, 선수들의 정신력, 동기부여.
수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합쳐져 결과가 나온다.
특히 이번 경기에서 다시 패배한다면 강등권으로 추락할 수 있는 아스톤 빌라였기에,
그들의 각오는 남달랐다.
"물론 너희에게 원하는 건 승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랜드 감독은 라커룸에서 이상한 말을 던졌다.
"내가 원하는 건 골이야. 승리나 패배는 상관없어."
승리보단 골을 원하는 감독.
선수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의외로 세심하며 전술적으로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선수들은 이미 경험했다.
최근 4경기 동안 아스톤 빌라는 거짓말처럼 무패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내 제자 놈 하고 얘기했지. 너희도 잘 알 거야, 제퍼슨 리."
"우리 수비진에게 그 괴물을 막으라고 하는 건 솔직히 말해 무리잖아?"
"그런데 그 자식이 아까 필드에서 이런 말을 했어. 자기가 일곱 골을 넣을 거라고."
"······!"
"우리 수비가 아무리 약해도 말이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우린 8골을 넣을 거라고."
그 말에 공격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랜드 감독은 쭉 선수들을 둘러보고 소리쳤다.
"수비는 세 골로만 막아! 그러면 공격진에서 다섯 골 정도로 끝낼 테니까. 명심해! 너희는 리버풀의 무패를 깨뜨린 최고의 팀이다! 가서 짓밟아 버려!"
"The Villans!"
***
"LEE will, LEE will Kill you!"
그랜드 감독은 경기장을 울리는 응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섭군, 무서워."
선수 개인의 응원가가 만들어지는 건 특별한 경우다.
선수에 관한 스토리가 있거나,
아니면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았다거나.
아마 제퍼슨은 후자이리라.
"쟤가 농담하면 무섭단 말이야."
제퍼슨이 7골을 넣겠다고 했을 때,
그것이 농담인 줄 알고 있는데도, 문뜩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아는 제퍼슨의 폭발적인 득점력이라면, 그 7골이 단순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뭐, 그래도 할 만하군."
첼시의 라인업은 정상적이지 않다.
충분히 공략할 틈이 있다.
중원 싸움에서 쉬이 밀리지도 않을 것이고, 결정적인 찬스에서 수비에 막히는 일도 적을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기세를 탄 선수들.
아스톤 빌라 선수들은 리버풀을 무너뜨리고 제대로 동기부여가 됐다.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이런 상황에서 골만 터진다면야, 첼시를 무너뜨리는 것도 비단 농담만은 아니리라.
"제-퍼슨!"
그 순간, 그랜드 감독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경기가 흘러갔다.
"으음!"
더글라이스 루이스.
아스톤 빌라의 홀딩형 미드필더로, 패스를 차단하는 수비 위치 능력, 발밑이 다소 부족하지만 일대일 마크와 태클 실력이 뛰어난 선수다.
이렇게 보면 대단한 선수처럼 보이지만, 그렇다면 빅클럽에서 뛰고 있을 것이다.
그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홀딩형 미드필더치곤 지극히 평범한 피지컬을 지녔다는 점이다.
루이스가 제퍼슨을 막으려고 달려들자.
"억!"
단발마의 비명과 트럭에 부딪힌 사슴처럼 날아가는 루이스.
거침없이 뛰어가는 제퍼슨의 뒷모습에 그랜드 감독은 뭔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막아!"
그렇게 외치곤 생각했다.
'보통 내 상대팀이 이렇게 외치곤 했던 거 같은데.'
눈에 익은 모습이다.
토론토 시절, 상대팀 감독이 지금처럼 황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장면이 마치 데자뷔처럼 스쳐간다.
'그 다음엔 어떻더라?'
그리곤 아마, 상대팀 감독은 머리를 부여잡고 물통을 걷어찼겠지.
제퍼슨이 여지없이 골을 넣었으니까.
지금 그랜드 감독은 그때 상대팀 감독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불길함이 치밀었다.
세 명의 미드필더가 제퍼슨에게 강력한 압박을 시도했다.
173cm의 존 맥긴(John McGinn)이나, 175cm의 잭 그릴리쉬(Jack Grealish)는 제퍼슨을 막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체격이었다.
물론 피지컬이 나쁘다고 수비를 못 하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캉테가 있지 않은가.
"어억!"
그러나 상대가 잘못됐다.
"우우우우우!"
"멍청한 놈들! 너희들이 어떻게 우리 킹 제프를 막아?"
"약골 자식들!"
"이유식이나 더 처먹고 오지 그래!"
제퍼슨의 피지컬은 리그 탑급 수비수도 혀를 내두르다 못해 욕을 내뱉는 수준이다.
왜소한 체격의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산이었던 셈이다.
단숨에 미드필더 셋을 허물어뜨린 제퍼슨은 수비라인을 향해 말 그대로 돌진했다.
"어어?!"
정면에서 제퍼슨을 마주한 비에른 엥길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공중볼 능력과 수비능력을 지녔고, 프랑스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수비수지만.
반응속도와 발이 느리다는 치명적 약점이 존재.
제퍼슨은 그 점을 경기 전에 분석자료를 보고 알고 있었고, 상대할 방법까지 준비해 왔다.
"The Blues!"
순간적인 방향 전환.
최대속도로 달리다가 마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왼쪽으로 휙 틀어지자, 엥겔스는 감히 그 속도에 반응할 수 없었다.
"으억!"
순간적으로 수비 집중력을 잃어버린 타이론 밍스를 현란한 스텝오버로 속이고.
"뭐야?"
필드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 못 한 골키퍼 톰 히턴이 얼빠진 소리를 낼 때.
뻐-엉!
골문 오른쪽 위를 노리는 강력한 슈팅이 꽂혔다.
"Yeaaaaaaaaaaaa-!"
"제-프!"
"Lee will Kill you!"
"머지사이드의 그 허접한 팀 하나 잡았다고 기세등등했지? 이게 바로 세계 최고 공격수의 슈팅이다!"
그랜드 감독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프로 무대로 데뷔시켰던 제자의 엄청난 활약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 활약의 대상이 자신이라면 조금은 다른 이야기였다.
"뭐, 한 골이야."
이른 시간 실점이지만 그랜드 감독은 개의치 않았다.
"쟤를 상대로 어떻게 무실점을 해?"
***
우리 팀의 공격 전개는 캉테로부터 시작된다.
캉테의 존재감은 중원을 장악한다.
그는 직접 볼을 끊어 내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전진 드리블을 펼치며 선수 두세 명을 벗겨 낸다.
훌륭하다 못해 세계적인 미드필더 자원이다.
때문에 캉테가 없으면 공격 전개가 원활하지 못했다.
내가 저번 두 경기에서 무득점을 한 건, 중원에서부터 볼 배급 자체가 너무나 적었다는 점과 상대 수비진이 내려앉다 못해 텐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스톤 빌라는 지금 시점에서 골치 아픈 상대긴 했다. 소위 말하는 '강등권 버프'와 '감독 교체' 효과가 동시에 도핑된 케이스거든.
부상자가 많고 아직 캉테가 없는 우리로선 부담스러운 상대.
하지만.
"이래서 감독님이 좋다니까?"
토론토 시절 특유의 공격 축구, 아니 마초 축구.
나를 상대로 수비 라인을 올리는 팀은 정말 오랜만이다.
맨유가 대놓고 쓰리백 수비를 하면서, 다른 팀들도 날 상대할 때 거리낌 없이 라인을 내렸다.
EPL급 수비수들이 대놓고 수비만 한다면, 뚫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라인을 올리는 팀을 상대한다면야.
"오도이!"
툭!
나는 우측 오도이에게 횡패스를 주고 곧바로 박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윌리안 대신 최근 몇 경기를 선발로 나오는 오도이.
서로의 호흡이 점차 잘 맞아떨어진다고 느끼는 만큼.
그는 내가 순식간에 수비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걸 확인했을 것이다.
"잡아! 몸이라도 던져!"
수비 일부가 오도이에게 붙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 라인을 빠르게 정비한다.
오도이의 선택은 두 가지다.
스스로 태클을 피해 돌파하거나, 그도 아니면 나에게 다시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찔러주는 것.
"엇!"
그런데 오도이는 전혀 예상외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내가 보낸 횡패스를 망설임 없이 박스 안쪽 공간으로 원터치 패스.
그것도 내 상체 중심이 쏠려 있는 방향으로.
애매한 공간.
수비수가 달려들어 걷어 내기에도, 그렇다고 골키퍼가 나와 잡기에도.
그사이 나는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터뜨렸다.
"왁!"
"큽!"
오도이의 원터치 패스와 순간적인 속도로 파고드는 내 무브먼트.
라인을 올렸다가 급하게 복귀하는 아스톤 빌라의 수비진은 균열이 심했고, 나는 그 균열을 틈타 옷깃을 잡아끄는 수비를 떨쳐 낼 수 있었다.
그 순간 반박자 늦게 뛰쳐나온 골키퍼가 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하다.
이대로 달려들면 골키퍼와 충돌은 기정사실.
물론 여기서 내가 골키퍼한테 걸려 넘어지면 PK를 받을 수도 있긴 한데······.
아니다.
애매한 판정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툭!
"······!"
발끝을 먼저 뻗어 공의 밑을 때려 그대로 띄워 슬라이딩하는 키퍼를 넘기고,
"헉!"
나 역시 휙 점프해 키퍼를 뛰어넘었다.
음.
오늘따라 몸이 가볍긴 해.
골키퍼를 공을 띄워 피한 후의 내 동작은 뻔했다.
빈 골문을 앞두고 무슨 생각이 필요하랴!
철럭-!
"Gooooooooal!"
"제----프!"
2-0.
두 번째 골이다.
자.
두 경기 동안 무득점 했으니,
지금 한 골 더 넣어서 해트트릭하면,
경기당 한 골은 되는 거지?
< 80. 첼시의 8할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