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79화 (79/258)

< 79. 첼시의 8할 (2) >

미국은 모든 스포츠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다.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들이 따내는 메달 숫자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심지어 그 메달의 분포가 거의 모든 종목에 골고루 퍼져있다.

하지만 축구만큼은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강팀들이 있었으니까.

그건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아무리 축구가 인기가 없다고 한들, 월드컵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세계의 축제인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했던 18년 러시아 월드컵은 치욕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 시민들에게 '월드 클래스' 반열에 오른 자국 선수에 대한 열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어도, 분명히 존재했다.

"드디어 나타났어!"

"Lovely Goal! Lovely Play!"

정말 세계적인 선수나 보여 줄 법한 엄청난 활약.

멕시코전 3골 2어시스트.

코스타리카전 2골 1어시스트.

연이은 호성적에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온갖 월드 클래스 선수들을 떠올렸다.

"지금 제프 정도라면 어디까지 가능해?"

"펠레? 마라도나?"

"골 넣는 거 보니까 게르트 뮐러?"

"호나우두가 유명하지 않아?"

"호나우지뉴! 히바우두!"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정말 클래스 있는 선수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 기대감이 제퍼슨을 스타로 만들었다.

물론 여러 가지가 겹쳤다.

제퍼슨의 엄청난 활약의 상대가 얼마 전 골드컵에서 우승컵을 빼앗아 갔던 멕시코라는 점.

'위대한 아메리카'를 부르짖는 제퍼슨의 인터뷰.

미식축구 러닝백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

이미 유럽에서 인정받고 있는 최고의 공격수라는 사실.

더구나 건장한 체격을 넘어 단단하고 우람한 근육질의 체격은 미국인들이 딱 좋아할 외모였다.

특히 '미국의 엉덩이'라고 불리며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은, 비단 마초들뿐만 아니라, 갑자기 늘어나는 여성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이유였다.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제퍼슨은 미국의 스타를 넘어 히어로가 되었다.

"브라보!"

물밀듯이 쏟아지는 미국 기업들의 스폰서 문의에 제크 팀장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친 건 그런 이유였다.

"제크 팀장님. 이 SNS 보셨습니까?"

"무슨 SNS?"

"이거요."

제크 팀장은 액정의 사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SNS로 자주 의견을 나타내는 미국의 대통령이었으니까.

별일 아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SNS로 정치하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SNS를 자주 이용했으니까.

한데 내용은 쉬이 무시하고 넘길 게 아니었다.

@realDonaldTrump

-그에게 훈장을 주고 싶군.

#제퍼슨 리 #캡틴 #축구

-위대한 아메리카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에게 명예직으로 '대위' 계급을 주고 싶어.

-진짜 캡틴이지.

***

"Hey, Captain Bro."

"······."

"대통령이 직접 계급까지 준 캡틴이라니. 그런 건 본 적도 없어."

"왜 그래. 흔한 농담 가지고."

과장되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는 풀리시치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나에 대한 언급을 한 것도 신기한데.

저런 농담도 하다니.

뭐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회귀 전에 봤던 거 같은데······.

미국 영화 '어벤저스'에서 요원 한 명이 죽자, 대통령 명으로 그를 살려 내라고 SNS로 농담을 던진 적이 있지.

그런 걸 고려하면, 이번에 대통령이 나에게 '캡틴' 운운하면서 던진 농담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장난스러운 SNS 하나 때문에, 나는 이제 명실상부 공인된 '캡틴 아메리카'가 됐다는 것이지.

툭툭.

"출발하나 보다."

풀리시치가 기내 마이크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좌석에 몸을 뉘었다.

푹신하고도 넓은 퍼스트 클래스.

미 축구협회에서 마련해 준 자리다.

덕택에 아주 편하게 영국으로 돌아가겠군.

-Ladies and Gentlemen.

기내 방송이 시작됐고.

나는 피로가 쏟아져 한숨 잘 요량으로 안대를 썼다.

거의 쉬는 틈 없이 달려왔으니,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장시간 비행까지 하고, 고작 3일 후 리그 경기가 있는 걸 생각하면 휴식이 절실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 우리 비행기에 멕시코와 코스타리카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고 영국으로 되돌아가는 캡틴 아메리카 제퍼슨 리와 크리스티안 풀리시치가 타고 있습니다.

"어?"

"응?"

-그들의 앞길에 축복을 해 주시고, 우리가 그들의 헌신에 고마워한다는 걸 전해 주세요.

갑작스러운 방송 내용에 나와 풀리시치는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1층 일반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짝!

"휘이이이익!"

"제-퍼슨 리!"

2층으로 들려오는 박수갈채와 환호.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경기장에서 받는 환호야 익숙하지만, 기내에서 이런 박수갈채와 환호 소리라니.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승무원이 다가와 웃으면서,

"Thank you for your service."

라고 말할 때야.

그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해했다.

"허. 이거 그거 아니야?"

"군인들한테 보내 주는 찬사?"

"맞아. 저번에 봤어. 군인들이 비행기에 타면 이런 식으로 예우해 주더라고."

우린 군인도 아닌데.

아, 그러고 보니 비행기에 탑승할 때 기장과 악수를 했다.

기장이 엄청난 축구 팬이라고 하던가.

그래서 멕시코전 정말 잘 봤다고, 사진과 사인을 요청하길래 해 줬었는데······.

"다 네가 캡틴 아메리카라서 그러지."

풀리시치는 피식 웃었다.

"대통령에게 대위 계급도 받았겠다! 오케이, 캡틴. 다음 작전은 뭐죠?"

풀리시치의 실없는 농담에 난 그저 웃으며 눕듯이 좌석에 기댔다.

음.

제법 괜찮은 기분인데?

***

A매치가 끝나고 코밤 훈련장으로 복귀했다.

"제-프, 소식 들었어. 여기 시셀도가 울면서 오더라고."

오도이가 웃으며 반겨 주자, 멀리서 일찍 도착했던 시셀도가 날 노려봤다.

음.

사실 좀 심하게 했다.

6골이나 먹혔으니까.

시셀도는 단단히 삐져서 나하고 얘기도 하지 않는다.

뭐 어쩔 수 없지.

"애당초 전쟁이라고 한 건 너잖아, 시셀도."

"······."

자기가 한 말이 있어서 시셀도는 그저 울상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애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지금의 나보다야 나이가 많지만.

사실 훈련장의 분위기는 그렇게 좋진 않았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감독님은 잔뜩 미간을 좁혔다.

캉테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4주.

우리 수비의 핵 안토니오 뤼디거가 어깨 부상으로 약 3주.

윌리안이 뭘 잘못 먹었는지 식중독으로 최소 1주일 아웃.

지루는 훈련장에 도착해서 몸 풀다가 발목이 삐끗했단다.

"······."

살벌하군.

이거야 원 부상병동이잖아?

난 우리 팀의 스쿼드가 나름 두텁다고 생각했지만, 부상 쓰나미가 닥치자 그야말로 뼈만 남은 상황이었다.

다행은 박싱데이가 오기 전까지 대부분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소모될 현재 선수들의 체력.

그리고 이어지는 박싱데이를 생각하면 현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제-프. 난 너를 150분이나 뛰게 한 미국 감독의 멱살을 잡아서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어."

"하하. 그래도 두 번째 경기는 60분에 교체로 물러났어요."

"아니. 코스타리카는 솔직히 네가 없어도 되잖아? 산티아고 그 친구도 대단하더만!"

"아, 그러고 보니. 산티를 데리고 올 생각이세요?"

그러자 필마크르 감독은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널 보러 갔을 때 이미 찜해 놨다. 이번 겨울에 데리고 올 거야."

"흠. 힘내세요. 걔 아스톤 빌라도 생각하던데."

"아스톤 빌라? 그 강등권 팀을······. 아, 이번에 온 감독이 토론토 감독이었군."

필마르크는 한층 미간을 좁혔다.

어린 선수들은 의외로 자신을 이끌어 준 감독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산티아고도 지금 그 점 때문에 고민 중이었다.

그랜드 감독은 꽤나 유능한 감독이니까.

아무리 내 활약이 있었다고 해도, 토론토가 전관왕을 차지한 건 그랜드 감독의 영향이 분명 컸다.

그리고 선수들에게도 살갑게 대해 주는 감독이라, 산티아고는 반쯤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었다.

그때 필마르크 감독님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제-프."

"네?"

"산티아고와 친하지?"

"······저보고 데리고 오라고요?"

"우리 블루스를 위한 일이야. 그냥 몇 번만 좋은 말 해 주면······."

"네. 말 한번 하는 거야 뭐, 어렵지 않죠."

올지는 모르겠다만.

같이 뛰면 나도 좋을 거 같다.

***

A매치 직후 펼쳐지는 일정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한 달 동안 무려 7경기가 있었다.

거의 4일에 한 번꼴로 경기를 치르는 격한 일정.

여기서 상위권 팀 대부분이 무너졌다.

아스날은 리그 4경기에서 1승 2무 1패.

맨유는 2승 2패.

토트넘은 1승 3무.

에버튼은 3승 1패.

오히려 중위권, 하위권 팀의 상승세가 돋보였다.

비교적 A매치 차출 선수가 적은 팀들은 휴식기동안 체력을 회복하고 전술을 가다듬었다.

그 덕택에 상위권 팀이 하위권 팀에게 잡히는 이변이 여러 번 발생했다.

[제-퍼슨 리! 결승골을 터뜨리며 노리치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첫 경기 노리치전을 1대 0으로 간신히 이겼다.

정말 답답한 흐름이었다. 중원에 캉테가 없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경기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꾸역꾸역 승리를 거뒀다.

리그 4경기에서 2승 1무 1패.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왜냐하면, 이 사이에 유로파리그 두 경기. 리그컵 16강이 있었거든.

7경기 성적 총합 4승 2무 1패였다.

부상자가 많은 상황에서 팬들도 손뼉을 칠, 아주 대단한 성적이었다.

리그컵 16강은 오히려 포기한 경기였지만, 출전한 로테이션 멤버들이 가볍게 8강으로 진출시켰다.

덕택에 경기를 포기하고 일정을 조율하려던 필마르크 감독님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어쨌거나 나름 선방한 성적.

그러나 우리 위에 팀, 맨시티는 챔피언스리그 조별경기 포함,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둬 리버풀을 승점 2점 차로 바짝 쫓았다.

"이게 스쿼드의 저력인가."

"부상자가 하나도 없잖아?"

리버풀도 분명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무패가 리그 15라운드에서 깨졌다.

[리버풀! 안필드에서 아스톤 빌라에게 4:3 혈투 끝에 패배!]

토론토를 전관왕으로 이끌었던, 그랜드 감독이 리버풀을 잡아 버린 것이다.

덕택에 맨시티에게 추격의 여지를 남겨 뒀고.

[아스톤 빌라, 감독 교체 효과? 리그 2승 2무! 상승세!]

[아스톤 빌라의 화력에 불을 당긴 그랜드 감독. 4경기 11골 폭발!]

[강등권 탈출, 아스톤 빌라. 리그 중위권까지 노리나?]

그랜드 감독님은 본인 특유의 공격축구, 마초축구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화끈한 경기력은 곧바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버풀을 잡고, 토트넘과 비기고, 리그 중위권 두 팀에게 승리와 무승부를 거뒀다.

물론 아스톤 빌라는 일정이 넉넉했다.

리그컵은 진작 떨어졌었고, 대륙간 컵대회는 없었으니까.

넉넉한 일정, 부상자 없는 스쿼드.

뭐 그런 걸 고려해도 대단한 성적이다.

나도 내 옛 은사의 성적에 순수하게 기뻤다.

물론, 기쁜 것하고 승부욕은 다르다.

[상승세 아스톤 빌라, '만성피로' 첼시 잡고 날아오를까?]

[토론토 스승과 제자의 대결. 제퍼슨 리를 데뷔시킨 그랜드 감독의 '한 수'는?]

애석하게도,

내가 스승님의 상승세를 꺾어야 할 것 같았다.

< 79. 첼시의 8할 (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