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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78화 (78/258)

< 78. 첼시의 8할 (1) >

내가 미국 대표가 된 후, 느낀 건데,

이 나라 사람들······.

흔히 한국인들이 '주모'하면서 부르던 국뽕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나라였다.

사실 내 마지막 인터뷰는 가벼운 조크였다.

의외로 인종차별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게 스포츠다. 산티아고와 내가 투톱을 이룬다고 하자, 진짜 미국인은 없다면서 비아냥거리던 SNS 반응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인터뷰를 했던 것이다.

인종, 출신 상관없이 국가대표로 한팀에서 뛰면 원팀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러려고 사용했던 '위대한 아메리카'라는 단어가, 정말 뜻밖의 반응을 불러왔다.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 미국을 위해 뛰다.]

[위대한 아메리카를 되새기는 아시아계 축구 영웅.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나?]

[멕시코 6대 1 대파! 제퍼슨 리. 미국의 정신을 부르짖다!]

이런 장엄하고도 낯 뜨거운 기사부터.

"오 제-프!"

"제퍼슨! 넌 정말 멋진 놈이라고!"

"내 아들이 널 닮았으면 좋겠어."

"나중에 내 딸이 사윗감을 데리고 올 때 제프, 너 같은 친구라면 난 망설임 없이 허락할거야!"

두 번째 A매치를 치르기 위해 LA에 도착하자, 공항의 환영 인파가 저런 말들을 쏟아 냈다.

어딜 가나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다.

이런 상황에 에이전시 제크 팀장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주 좋았어요. 저희도 생각 못 한 완벽하고, 멋진 인터뷰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제프, 당신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으니까요.

"음. 이게 그 정도인가요?"

-성조기만 보고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고, '위대한 아메리카'라는 단어만 듣고도 가슴 뛰는 게 미국 시민들이죠.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그 수많은 인구 중에 절대다수가 그럴 겁니다.

"어우. 얼떨떨할 정도네요."

-이젠 익숙해져야 합니다. 미국엔 정말 많은 스포츠 영웅이 있지만, 그 중 아시아계 선수가 이렇게 주목받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제크 팀장의 말처럼 미국은 영웅들의 나라다.

범람하는 히어로 영화부터,

스포츠 영화에도 여지없이 영웅이 나타나 경기를 뒤집어엎곤 한다.

'히어로라······.'

참 재밌는 일 아닌가.

이러다가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하게 되면 내 전기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꿈도 아니겠어.

***

4대 스포츠가 아닌, 축구가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최근의 일이라면 골드컵 결승전에서 멕시코에게 패배했던 거나.

그 이전이라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는 것 정도.

하나같이 암울하기 짝이 없던 소식들이었다.

당시 월드컵 중계권을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사들였던 방송사들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심지어 26년 북중미 월드컵까지 역대 최고 중계권료, 11억 달러(1.1조원)를 지불했던 폭스 스포츠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야? 22년 카타르에 26년 북중미 월드컵 중계권을 그 비싼 가격에 사자고 했던 놈이?]

[Fuck! 존나게 좋은 선견지명이었어!]

순식간에 방송 관계자들의 반응이 뒤집어졌다.

이미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시청률을 가볍게 넘겼던 기록이 있다.

그리고 현재 멕시코를 유례없는 스코어로 이기면서, 모든 스포츠 언론에서 축구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심지어 '위대한 아메리카'란 인터뷰로 단숨에 전국구 스포츠 스타의 반열에 오른 선수가 등장했다.

미국인들은 '히어로'에 열광한다.

범람하는 수많은 히어로 영화와 코믹스.

혼자서 세상을 구해 내는 영웅의 이야기는 할리우드에서부터 스포츠, 그리고 일반 실생활에까지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 미국시민들에게,

멕시코를 홀로 무너뜨린 새로운 영웅의 등장의 여파는 대단했다.

[제퍼슨 리, 저 친구가 월드컵에 간다면?]

[무조건이야. 아무리 축구가 미국에서 인기가 없어도 월드컵은 아니지.]

[멋진 인터뷰였어. 단숨에 미국 시민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군.]

[스타성뿐이야? 경기력은 어떻고. 3골 2어시스트야. 정말 문자 그대로 멕시코놈들을 박살을 내 버렸다고.]

[복덩이가 나타났어.]

[확실해. 제퍼슨이 월드컵으로 미국을 이끈다면, 그로 인해 얻을 광고 수익은······ 상상만 해도 떨리는군!]

단순한 스타 만들기 마케팅이 아니었다.

멕시코란 퀄리티 높은 팀을 단순한 스코어로 박살낸 것도 아니고, 6대 1. 그것도 멕시코시티 원정에서 해트트릭에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것이니까.

모두가 지켜봤다.

그 콧대 높았던 멕시코 축구팬들의어깨가 축 늘어지는 장면을.

중계화면에 잡힌 멕시코 꼬마팬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

필드에 주저앉아 멘탈이 탈탈 털려 버린 멕시코 선수들의 생생한 표정까지.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경기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왓 더 퍽!]

[우리 미국에 '펠레'나 '마라도나'가 나타난 것 같군.]

최종예선 두 번째 경기, 코스타리카 전이 그 어떤 스포츠 경기보다 주목받게 되었다.

***

코스타리카는 북중미 축구의 강호 중 하나다.

멕시코, 미국, 코스타리카.

북중미의 전통적인 강호.

그러나 솔직히 말해 멕시코가 이들 중에서 가장 세계적인 팀이고, 미국이 다소 떨어지는 팀이다.

코스타리카는 세 나라 중 최하에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국가대표 경기는 만만하게 볼 수가 없다.

미국은 저 코스타리카에게 패배해 201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었으니까.

LA에서 열리는 경기인 만큼, 매진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이다. 4대 스포츠를 제치고 모든 스포츠 언론에서 축구 얘기를 가장 상단에 올리는 상황이. 그 뉴스의 중심에 대부분 내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자주 왔다.

내가 있던 축구부나, 원래 제퍼슨이 뛰었던 미식축구팀에서 말이다.

-너의 사인을 원해.

-헤이, 친구. 내 여동생이 네 사인을 받아 오지 않으면 당장 집을 나가겠다는데. 도와줄 수 있겠어?

-아니면 사진이라도.

-제발.

음.

영국에 가기 전에, 미네소타에 들러 아버지를 뵙고 갈 생각이니까.

가서 사인이라도 몇 장 해 줘야겠군.

"USA! USA! USA!"

축구는 팬들이 경기장에서 마음껏 'USA'를 부르짖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제경기였다.

터널로 나가기 전부터 뜨거운 응원 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헤이 캡, 오늘 잘 부탁해."

"최연소 캡틴 아닌가?"

"우리 미국도 이제 세대교체가 되는군."

캡틴 브래들리가 멕시코전에서 미세한 근육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이번 경기를 결장하게 됐다.

자연히 주장 완장은 내가 차게 됐다.

19살짜리 주장이라.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 올랐던 아약스의 데 리흐트도 19살 때 주장을 달고 챔피언스리그를 뛰었으니까.

다만 나는 '국가대표전'이란 게 좀 다르긴 하지만.

아마 미국 최연소 주장일 거다.

"그래서 부담스러워?"

"전혀."

내 능청스런 미소에 산티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내가 해트트릭 할 거야. 데뷔전 두 골을 넣었는데, 내 얘긴 거의 없어!"

"그러게, 해트트릭을 했어야지."

"이번엔 할 거라고."

"음. 좋아. 도와줄게."

"진짜로?"

"너 하는 거 보고."

"······."

산티와 실없이 농담을 나누는 도중.

문득 오른쪽 손을 살짝 쥐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여덟 살쯤 됐을까.

경기장에 같이 입장할 꼬마가 큰 눈을 데구루루 구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슬쩍 나랑 눈을 마주치며 웃어 주자, 아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뭐라 중얼거렸다.

"······캡틴."

"응? 뭐라고?"

"캡틴······ 저도 불러보고 싶었어요."

"좋은데. 이름이 뭐니?"

"샘 조에요."

"오. 한국계구나."

"네! 울 아빠가 캡틴은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했어요."

"응?"

"스포츠 영웅은 많지만, 아시아계가 영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심지어 아시아계 선수가 '캡틴 아메리카'라고 불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했어요!"

꼬마, 샘 조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나였다.

하긴. 수많은 스포츠 영화를 봐도 아시아계 선수가 주인공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난하고 인생 역전을 이루는 대단한 재능의 선수들은 보통 흑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히스패닉이었지.

잠깐,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그런 와중에 내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미국의 상징 같은 별명으로 불린다는 건 확실히 주목할 만한 점이긴 했다.

꼬마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만하군.

"그래서 저도 캡틴 같은 스포츠 선수가 될래요!"

"그래? 너도 축구 좋아하니?"

"어, 음. 어떤 스포츠 할지는 아직 못 정했어요."

그 귀여운 모습에 난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샘. 오늘 경기를 잘 봐. 축구만큼 재미있는 스포츠가 없다는 걸 보여 줄게."

내가 회귀 전에도 축구하고.

지금도 축구하는 이유가 별 게 아니다.

이 축구란 스포츠가,

정말 재미있거든.

***

[미국 관중들이 모두 제퍼슨의 이름을 연호하네요.]

[하하하. 저기 캡틴 아메리카 입간판을 보세요. 멋지네요.]

[오늘은 정말 '캡틴 아메리카'입니다. 저 어린 선수가 새로운 미국 국가대표팀의 핵심이군요.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장을 활발하게 누빕니다.]

[벌써 동료 산티아고의 득점을 도와주는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이타적인 플레이에도 능합니다.]

제퍼슨을 막는 코스타리카 수비진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게 EPL 클래스인가."

"막을 방법이 없어."

코스타리카는 수비진을 깊게 내렸다. 원정에서 승점 1점만을 차지하겠단 속셈이었다.

그러나 모든 수비를 이겨 내며 긴 롱패스를 떨어뜨려 주고,

산티아고가 그걸 밀어 넣으면서,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코스타리카의 의중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반칙이라도 써."

"태클했다간 오히려 내 발목이 꺾일 것 같은데."

"쟤 무슨 몸이 바위 같아. 아무것도 안 통해."

코스타리카 수비진은 평소보다 강한 태클, 거친 플레이 등을 벌였지만.

제퍼슨은 그 모든 걸 뚫어내고 끝끝내 슈팅을 성공시켰다.

그나마 몸을 던지는 방해가 아니었으면, 이미 득점은 수도 없이 기록했을 터.

"또 온다!"

다소 처진 산티아고와 스위칭 하면서 제퍼슨이 내려가 공을 받은 상황.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산티아고가 전진하면서 제퍼슨이 뒤에서 받쳐주는 모양새.

"막아! 차단해!"

저 투톱 모두가 박스에 달려들면 막기 힘들다.

때문에 차라리 중간에서 제퍼슨을 차단하는 게 낫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제-퍼슨!"

"제-프! 제-프! 제-프!"

제퍼슨은 센터서클 바로 위.

40m 거리에서부터 전진 드리블을 시도했다.

그 순간 이미 높았던 함성이 더 크게 쏟아졌다.

달려드는 미드필더 한 명을 순간적인 스피드로 한 번 무너뜨리고,

"맙소사!"

왼쪽에서 라인을 올리던 미드필더가 황급히 달려들지만, 이미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제퍼슨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가 단숨에 필드를 가로질렀다.

"달라붙어! 압박하라고!"

다른 수비형 미드필더가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끌지만,

거친 터닝 동작, 소위 '제퍼슨 턴'으로 가볍게 떨쳐 내자.

경기장의 분위기가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우와아아아아아-!"

"제-프!"

[제-퍼슨 리! 미친 스피드입니다!]

[혼자서 스케이팅을 타는 것 같군요! 무지막지한 스프린터로 중앙에서부터 가로지르는 제퍼슨 리입니다! 마치 총알처럼 파고드네요!]

[코스타리카 수비수가 달려들어 바지를 잡아끄네요. 반칙이죠!]

[어? 제퍼슨! 그대로 수비수를 달고 속도를 죽이지 않습니다!]

경고를 각오하고 옷깃을 잡아끄는 코스타리카 수비수.

말 그대로 옷이 고무줄처럼 쭉 늘어났다.

그런데도 제퍼슨은 넘어지지 않았다.

"미친!"

"끌려가잖아?"

"아니, 지가 무슨 썰매야 뭐야?"

가장 당황한 건 제퍼슨의 바지춤을 잡고 끌려가는 수비수였다.

그는 온몸의 체중으로 제퍼슨을 잡아끄는데도, 자신이 끌려가는 상황에 넋이 나가 버렸다.

"미친······."

놀라운 건 자신을 달고 뛰면서도 스피드는 줄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무게 중심이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고,

골문 앞.

모든 수비수가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몇 번 달리던 제퍼슨은 상대방의 타이밍을 빼앗아 버리는,

기습적인 중거리 슛을 시도했다.

뻐엉!

발등에 정확히 맞은 공은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골네트를 찢을 듯이 꽂혔다.

[Gooooooal! 제퍼슨! 오늘도 골을 터뜨립니다! 수비수들이 달려들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때린 멋진 중거리 슛! 미국! 2대 0으로 앞서갑니다!]

[대단합니다. 수비수가 거의 바지를 벗길 정도로 끌어당겼는데,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저런 완벽한 자세로 슈팅을 성공시키나요?]

[놀라운 선수입니다. 놀라운 무게 중심과 피지컬, 그리고 슈팅입니다. 제퍼슨 리! 우리는 어쩌면 세계적인 축구선수의 탄생을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탁.

"어이. 너 혹시 남자 좋아해?"

"뭐?"

제퍼슨이 자신의 바지춤을 잡아 끈 수비수의 손을 쳐 내며 피식 웃었다.

"왜 내 엉덩이를 보고 넋 나간 얼굴이야?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경기장에서 바지 벗기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그 말에 수비수는 얼굴을 붉혔다.

반칙을 했으면 제대로 막기라도 했어야 했건만,

오히려 반칙을 해 놓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은 프로선수에게 치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중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난 쟤가 캡틴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너 그런 말 했다간 이제 돌 맞을지도 몰라."

"응. 그런데 지금 이제 인정하기로 했어."

"왜? 골 넣어서?"

"아니. 저 엉덩이를 봐 버렸다고."

"······."

"저게 바로 캡틴 아메리카의 엉덩이지!"

< 78. 첼시의 8할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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