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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76화 (76/258)

< 76. Lee will Kill you (4) >

멕시코시티의 대표팀 캠프에 도착하자 전화가 울렸다.

필마르크 감독이었다.

-제프, 절대 다치지 마라. 절대로.

"네,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진짜로. 다치면 안 된다. 대표팀을 위해 뛰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몸을 먼저 생각해. 응?

필마르크 감독은 기자들을 상대할 땐 북유럽 신화의 토르처럼 거칠기 짝이 없더니,

나에게는 애처로운 강아지처럼 구셨다.

왜 이러시나 했더니.

[은골로 캉테, 대표팀 경기를 앞둔 훈련에서 햄스트링 부상!]

[부상으로 4주 아웃! 첼시 비상!]

······감독님이 저러시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된다.

나마저 다치면 감독님은 아마 FIFA를 저주하다 못해 아주 분노의 욕설을 쏟아 낼 것이다.

감독님에게 단단히 몸조심하겠다고 안심시키자, 이번에는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A매치 데이를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제크 팀장의 연락이었다.

-앞으로 모든 스포츠 언론에선 축구 얘기만 나올 겁니다.

북미의 스포츠 언론은 우리 에이전시가 꽉 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무리 축구가 인기 없어도 미국 시민들에게 국가대항전은 남다른 화젯거리죠.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나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기자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아는 기자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습니다. 아마 오늘 이후로 기사가 쏟아질 건데, 괜찮겠습니까?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남다른데요?"

-하필 멕시코전이니까요.

"양날의 검이라 이거군요."

-맞습니다. 역시 예리하시네요. 국가대항전은 축구를 안 보는 미국 시민들도 관심을 가지죠. 멕시코전은 더 그렇고요. LEE는 굳이 제가 손을 안 써도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예요.

제크 팀장의 말의 요지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축구를 보지 않는 시민들도 보는 게 국가대항전이다.

클럽경기는 챙겨 보지 않더라도, 국가대표전은 무조건 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미국에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란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는 경기가 북중미 최고 라이벌 멕시코전이다.

이미 나에게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축구선수가 나니까.

내가 활약해서 이기면 단숨에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

비단 축구팬들의 스타가 아니라, 미국 전역의 스포츠 스타가 되는 시발점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러나 만일 진다면?

엄청난 비난과 언론의 포화가 시작되리라.

바로 이것이 양날의 검이란 이유다.

그러나 문제 될 게 뭐가 있겠나.

"결과로 보여 줘야죠."

-하하하! 역시 쿨하시네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우호적인 기사들이 더 나올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사실 언론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나는 선수니까.

그저 필드에서 보여 주면 그만이다.

자. 일단 가 볼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제-퍼슨! 미국 국가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이번 멕시코전의 핵심으로 LEE를 지목하고 있는데요."

"제퍼슨!"

"멕시코전을 앞두고 어떤 심정이신가요?"

"현재 EPL 득점 1위에 올라 있습니다. 멕시코전에서도 엄청난 득점 행진을 이어 나갈 자신이 있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세례.

나에게 향하는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

나는 비교적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최선을 다할 것이며, 국가대표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말들을 남기며.

그리고 조금은 건방지게 보이더라도.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Badass답게 한마디.

"아마 경기가 끝나고 확실히 하나는 바뀔 것입니다."

"무엇이 말이죠?"

"이제 북중미의 맹주는 멕시코가 아니라 미국이 될 것입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죠."

***

"오랜만이야. 제프."

"반가워요, 캡틴."

"그거 알아? 이젠 네가 부주장이야."

"예?"

캠프에 도착하자 캡틴 마이클 브래들리가 웃으며 반겨 줬다.

근데 내가 부주장이라니?

"캐머런이 아파서 낙마했잖아. 감독님은 널 선택했어."

"저를요?"

"응. 다른 선수들도 찬성했고. 잘 부탁해, 부주장."

세상에 19살짜리 스트라이커를 부주장으로 삼다니.

그렉 버홀터 감독도 평범한 사람은 아녔다.

"제프!"

"산티!"

"맙소사. 내 득점왕 도둑이 여기 왔네!"

"미안해. 어쩌겠어. 네가 34골을 넣었어야지."

"······."

산티아고는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똥글똥글한 얼굴에 바짝 삭발한 머리 스타일은 여전하네.

"아, 그거 알아? 그랜드 감독님이 영국으로 갔어!"

"응. 뉴스 봤어."

"감독님이 널 만나면, 리그에서 살살 해 달라고 전해 달래."

"살살? 그분이?"

"응. 강등은 피해야하지 않겠냐며, 자기 팀 만나면 한 골만으로 만족해 달라는데."

"흠. 감독님께 이렇게 전해 줘."

"뭐라고?"

"4골 넣을 생각이었지만, 해트트릭으로만 만족하겠다고."

"세상에. 영국 리그가 그렇게 쉬워?"

"어려워."

"그런데 네 득점 기록이······."

"어렵지. 미국이었으면 30골이었을 텐데, 영국이니까 16골이야."

내 말에 산티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사실, 나도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왔어."

역시.

연락이 안 올 리가 없지.

"어디에서?"

"첼시에서."

"뭐?"

"너희 감독님이 직접 연락해 줬는데."

"······그래서 올 거야?"

"생각해 보고. 그랜드 감독님이 겨울에 날 데려갈 거라고 장담하셔서. 고민 중이야."

음.

조만간 산티도 영국에서 보겠군.

그게 내 팀이든, 아스톤 빌라든 말이다.

***

[제퍼슨 리, 멕시코전 선발 대기!]

[LEE-산티아고 투톱, 멕시코전 출격!]

[미국 국가대표팀, 골드컵 결승전 패배 설욕할까?]

[미국 VS 멕시코 경기가 열리는 멕시코시티에 몰려드는 축구팬들!]

[월드컵 최종 예선임을 떠나, 치열한 맞대결 예고!]

[미국의 그렉 버홀터 감독, "국가의 영광을 위해 이기겠다. 북중미의 맹주가 어디인지 똑똑히 보여줄 것."]

[멕시코 감독, "골드컵부터 우승하고 오라!"]

***

멕시코는 북중미 최강이란 말을 넘어 북중미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팀이다.

7회 연속 월드컵 16강 진출에 월드컵 예선에서는 미국을 제치고 늘 1위였다.

골드컵은 11회 우승했으며, 5회 우승한 미국을 두 배 이상의 격차로 따돌릴 정도다.

만일 월드컵에서 유럽, 남미를 제외한 팀에서 우승팀이 나온다면 그건 멕시코가 될 거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상당한 퀄리티의 팀이다.

공격진에는 웨스트햄의 치차리토, 벤피카의 라울 히메네스와 아르빙 로사노가 유명하다.

미드필더에는 포르투의 미겔 에레라, 베티스의 안드레스 과르다도 등이 주축이고

수비진에는 이번에 포르투로 이적한 미겔 라윤, 로마의 엑토르 모레노 등등.

유럽과 멕시코에서 뛰는 선수들이 즐비하다.

"We are America!"

"USA! USA! USA!"

그러나 멕시코시티까지 원정 온 미국축구팬들 앞에서, 우리가 기죽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지 않나.

우리가 설령 상대 전적과 객관적인 전력에서 멕시코에게 밀린다고 한들.

"위대한 아메리카!"

저렇게 외치는 원정팬들이 있는데.

"가자! 멕시코 놈들을 박살을 내려!"

"Go! USA!"

골드컵 결승전에서 패배했던 미국의 치욕은, 아직도 축구팬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그리고 오늘, 그 기억을 뇌리에서 아주 싹 사라지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압도적인 승리로.

경기가 시작됐다.

***

[재미있는 라인업입니다.]

[미국의 투톱에 제퍼슨 리와 산티아고 차베즈가 있습니다.]

[한 명은 아시아계, 한 명은 멕시코 출신이네요.]

[미국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해설진의 말처럼, 팀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두 명의 스트라이커가 모두 아시아계와 멕시칸이란 사실은 흥미로운 점이었다.

-뭐야? 왜 미국 대표팀 공격수 두 명이 아시아계에 멕시칸이야?

-설마 스포츠에도 그 빌어먹을 정치적 올바름이 들어왔나?

-Fuck. 할리우드도 아니고.

-어이, 진정들 해. 저 멕시칸은 잘 모르겠지만, LEE는 진짜배기라고. 유럽 축구판에서 날아다니는 친구야.

본래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팬들 사이에는 문제없는 라인업이었지만,

국가대항전은 클럽경기를 전혀 챙겨 보지 않는 사람들도 보기 마련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두 명의 스트라이커는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경기가 빠르게 펼쳐졌다.

"야 이 야이야-!"

멕시코 특유의 응원가인 시에르토 린토가 펼쳐졌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응원가.

멕시코의 홈구장답게 분위기는 멕시코만의 것이었다. 아무리 미국 원정팬들이 소리를 질러도, 거대한 함성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관중석과 필드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랐다.

"제프! 제프!"

"Waaaaaaaaa----!"

원정팬들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제퍼슨 리! 최전방에서 길게 올라온 패스를 가볍게 트래핑합니다!]

수비진에서부터 길게 걷어지는 긴 롱패스를, 제퍼슨이 가볍게 트래핑하자 멕시코의 수비들이 달려들었다.

[오, 대단합니다, 제퍼슨. 달려드는 멕시코의 수비진을 가볍게 속여 넘깁니다!]

달려드는 수비수 한 명은 몸으로 밀쳐 내고, 다른 한 명은 가랑이 사이로 공을 빼내며 단숨에 수비진을 허물자,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던 멕시코 관중이 일순 침묵했다.

"빌어먹을! 제프가 멕시코를 정벌하러 왔다고!"

"미국의 왕이 왔다!"

그리고 소수의 원정팬이 외치는 울림이 또렷하게 필드에 들리는 가운데.

[제퍼슨! 단숨에 공간을 파고듭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네요!]

툭, 툭.

간결하고도 재빠른 움직임.

수비진 사이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발놀림.

그리고 몸으로 버텨 주면서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들소 같은 폭발력.

단숨에 수비진을 허물고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든 것은, 전반 시작한 지 고작 5분여가 지났을 때였다.

[제-퍼슨! 그대로 슛! 아닙니다! 달려드는 골키퍼를 한 번 더 제치고, 완벽한 찬스를 만듭니다! 골문, 비어있습니다! 골문 안으로 때려 버리는 강력한 슈팅! Goooooaaaal! 제퍼슨! 멕시코에게 선제골을 터뜨립니다!]

롱패스 한 번에 박스에 밀집된 수비수들을 모두 제치고,

골키퍼까지 한 번 더 속여 넘기며 때린 강력한 오른발 슈팅에 원정팬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퍼슨!"

"미국의 왕이 멕시코를 정벌하러 오셨다!"

"빌어먹을 멕시칸놈들! 위대한 아메리카라고!"

-오, 세상에.

-미쳤어! 대단한 골이야!

-빌어먹을. 저 자식이 아시아계라고 안 좋게 보던 인종차별자놈들 아직도 여기 있나? 썩 꺼져 버려!

-정치적 올바름? 이게 진짜 올바른 것이지!

순식간에 팬들의 반응이 180도 바뀌었다.

축구팬들이야 제퍼슨의 존재감을 익히 알았지만,

국가대항전으로 그를 처음 접하는 대다수의 미국 시민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 제퍼슨! 다시 공을 잡습니다!]

-미쳤어! 저 아시아계가 경기를 지배하고 있어!

[제퍼슨, 중앙에서부터 공을 드리블하고 전진합니다!]

-존나게 빠른데? 마치 러닝백 같아.

-맞아. 그는 러닝백 출신이야.

-오, 세상에. 어쩐지! 저 움직임 보라고! 현란하잖아!

[산티아고와 2대 1패스를 주고받으며 파고드네요. 도저히 그를 막지 못합니다! 멕시코 수비진, 허둥지둥합니다!]

-저 멕시칸도 장난이 아닌 걸?

-제퍼슨과 저 멕시칸 투톱. 무서워. 멕시코놈들이 혼쭐이 나는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멕시코 수비들, 어제 술이라도 마셨나요? 제퍼슨의 전진을 막지 못합니다!]

-멕시코가 우리 상대가 못되는군!

-제퍼슨. 난 저 친구가 마음에 들어.

[제퍼슨! 슛! 아, 페이크였습니다! 한번 속이고 파고드는 산티아고!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볍게 밀어 넣습니다! 미국! 2대 0으로 앞서갑니다!]

-오, 세상에!

-Lovely goal!

-누가 저 투톱을 보고 정치적 올바름이니 뭐니 떠든 거야?

-이게 미국이라고!

-올바른 라인업이야.

-하하하! 멕시코? 북중미의 제왕? 개소리! 북중미에서 모든 스포츠의 제왕은 미국이라고!

< 76. Lee will Kill you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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