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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75화 (75/258)

< 75. LEE will Kill you (3) >

리그가 12라운드쯤 진행되면 뭔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아스톤 빌라, 성적 부진으로 딘 스미스 (Dean Smith)감독 경질]

[리그 무승 아스톤 빌라,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아스톤 빌라 회장 '리그 강등탈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

드디어 첫 감독 경질이 나온 것이다.

현재 리그 최하위.

승리가 단 한 번도 없는 아스톤 빌라의 감독이 경질됐다.

우리하고는 먼 얘기지만, 축구판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어디 감독뿐이겠는가.

이제 슬슬 팀에서 필요 없는 선수들이 가려지고 정리될 것이다.

임대를 내보내든, 판매하든 방출이 이뤄지겠지.

뭐, 아스톤 빌라 감독이 경질된 건 우리와 관련 없는 일이긴 했지만, 감독님은 꼭 그렇지 않나 보다.

"제기랄. 진작에 아스톤 빌라를 만났어야 했는데."

감독교체 효과란 게 있다.

연패를 거듭하던 팀들이, 감독을 교체한 후 말도 안 되는 연승을 거두는 일은 의외로 정말 자주 일어난다.

심지어 연승중에 수많은 강팀이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아스톤 빌라가 흔히 말하는 '승점 자판기'일 때 만나지 못한 건, 우리로선 좀 억울한 일이지.

AC 밀란전이 끝나고, 숨 가쁜 일정을 달려온 우리 팀에게 한숨 돌릴 시간이 다가왔다.

A매치로 2주간의 리그 휴식기가 찾아왔다.

감독님은 이 2주 동안 선수의 체력 회복과 새로운 전술 훈련을 시도할 생각이셨지만,

"빌어먹을! 주전 선수들 다 데리고 가면 어쩌겠다는 거야!"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전 선수들이 국가대표팀에 차출됐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EPL에서 뛴다는 것 자체가 일단 실력이 남다르다는 걸 인정받은 셈이다. 심지어 리그 상위권 팀, 첼시의 주전 선수들인데 국가대표 차출이야 당연한 일.

감독님은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언제였지.

캡틴 아스피가 이런 적이 있었다고 했다.

필마르크 감독이 리그 초반에 리버풀과 맨시티의 경기를 비디오로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단다.

'이런 식으로는 리그 마지막 경기까지 뛸 수 없어.'

그러자 옆에 있던 캡틴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우리는 저렇게 계속 뛰어요. 끝날 때까지.'

'아니, 불가능해. 저 템포, 압박으로 38라운드를 뛴다고? 선수 잡을 일 있어?'

'이게 EPL이에요.'

'말도 안 돼!'

음.

사실 지금 선수진과 코치진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체력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필마르크 감독의 실수였다.

EPL을 경험하지 못한 감독님은 지금의 압박과 템포를 생각하지 못하고 프리 시즌을 치뤘다.

한시즌 농사가 프리시즌에 7할 이상 결정된다봐도 무방하다.

프리시즌때 몸을 만들고 전술적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전술적인 부분은 성공을 거뒀지만, 몸을 만드는 것에는 감독님은 실패하셨다.

자신의 기준과 EPL의 기준이 너무 달랐던 것.

박싱데이도 펄펄 나는 체력으로 버티는 강한 체력의 소유자들이 벌써 퍼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건, 우리팀에게 비상등이 켜졌음을 의미했다.

나야 프리 시즌을 치르지 않고, 개인 트레이닝 팀의 조력 아래 버티고 있으니 아직 할 만했지만,

이젠 모를 일이다.

리그, 유로파, 컵경기에 심지어 A매치까지.

다행히 팀 분위기가 좋아서, 아직 문제가 되진 않지만.

만약 우리가 연패라도 한다면, 현재의 불만이 폭발할 수도 있다.

팀 성적도 내려갈 수 있고.

"그래서 너한테 고맙다."

"저요?"

"네가 얻어 준 승점이 도대체 몇 개냐. 우리는 분명 무너질 수도 있었어. 특히 최근 몇 경기는 말이야."

아스피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은 과묵한 캡틴은 내가 웃으며 넘기려고 해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넌 모르겠지만, 대부분 널 좋아해. 그럴 수밖에. 패스를 찔러주면 다 골로 만들어 주는데, 안 그래?"

"그야 뭐 패스가 좋으니까요."

"그랬다면 작년에 풀리시치는 20어시스트를 기록했겠지."

"지금 몇 개죠?"

"걔가 11개야. 도움왕 페이스지. 하여튼 네 덕분에 우리 팀 성적이 유지되고, 무너지지 않았어. 캡틴으로서 고맙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기야 내가 벌어다 준 승점이 몇 갠가.

그중 몇 경기를 패배하거나 무승부였다면, 팀은 상승세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뭐, 나도 A매치까지 다녀오면 몇 경기는 플레이 타임을 조절해야할 것 같다.

트레이닝 팀에서 체력적인 문제를 거듭 경고해오고 있으니까.

리그는 길다.

아직도 몇라운드가 남았나.

한, 두경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길게 봐야했다.

"A매치도 잘 다녀오라고. 월드컵 가려면 말이지."

"물론이죠. 월드컵 본선까진 가야죠."

"음, 미국이 이번에 어디랑 붙더라?"

"멕시코요."

"호, 라이벌전이군."

***

토론토는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했단다.

[MLS 최초 전관왕 팀 탄생!]

[쿼트러플! 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리그컵까지!]

[MLS 역사에 기록된 토론토!]

[토론토 그랜드 감독, 명예의 전당에 입성!]

전관왕이다.

모든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니까.

엄청난 업적이다. MLS최초 전관왕 팀의 탄생.

그것이 내 첫 프로팀이란 사실에 나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옛 은사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감독님."

-하하하! 제-프! 다 네 덕택이다. 내가 아니라, 네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야 해!

"그러게요. MLS 운영진들이 뭔가 잘못 파악한 거 같아요."

-오, Fuck! 건방진 놈! 뭐, 농담은 아니지. 북중미와 캐네디언 챔피언십까지 모두 네가 얻어 냈으니까. 하여튼 고맙다. 네 경기 잘 보고 있어.

"EPL도 보고 있어요?"

-당연하지. 최고의 리그 아니냐. 엄청나게 활약을 하던데? 5천만 파운드라니. 너무 쌌다고. 한 1억 파운드였어야 했는데.

옛 은사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고등학교에서 프로무대로 이끌어 줬던 사람이고, 재밌는 공격 축구를 했던 분인지라 나에게도 인상 깊은 그랜드 감독이다.

-그래, 조만간 다시 보자고 제프.

"네, 감독님. 다시 한번 명예의 전당 축하드리고요. 잠깐, 조만간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으하하하하. So long! 제프. 이번 A매치에서도 멕시코를 박살 내라고!

음.

뭔가 이상한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상한 느낌의 원인이 밝혀졌다.

[아스톤 빌라, 토론토 FC의 그랜드 감독 선임!]

[그랜드 감독, 아스톤 빌라와 3년 계약!]

[토론토 전관왕을 이끈 미국 최고의 감독, EPL에서 아스톤 빌라 지휘봉을 잡다]

허.

조만간 보자는 게 이런 뜻이었군.

***

회귀 전과 비교해 제법 많은 것들이 본래 역사에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토론토의 신성, 산티아고 차베즈 A매치 승선!]

[MLS를 지배했던 토론토의 LEE-산티아고 투톱. 국가대표에서 재현?]

[토론토 우승주역, 산티아고 차베즈! 미국 그렉 버홀터 감독의 선택을 받다. 조지 알티도어 대신 엔트리 등록!]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산티아고는 내가 토론토를 떠난 이후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이러면 카타르까지 같이 가겠군.'

카타르 월드컵이 기대된다.

미국은 상당히 좋은 경기를 보여 주면서 16강에 올랐지만, 더 올라가진 못했다.

후에 전문가들은 만일 제대로 된 공격진이 갖춰졌다면, 높이 올라갈 수도 있었으리라고 아쉬움을 표했었다.

한데 벌써 산티아고도 뽑혔고,

나도 있으니까.

월드컵이란 목표가 나에게 좀 더 확실하게 다가왔다.

"카타르. 카타르."

"흥. 카타르를 가려면, 우선 우리부터 이겨야 될 걸?"

내가 카타르 노래를 부르자, 옆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시셀도, 비행기가 뜨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벌써 동료에서 적이 된 거야?"

"넌 미국인이잖아."

"그렇군. 이제부턴 같은 블루스가 아니라 이거지?"

"흥. 이건 국가 대항전이라고. 우린 적이야. 이건 전쟁이야! 축구는 전쟁이라고. 너희 양키들이 우리 멕시코 땅을 안 가져갔으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미안하지만 역사엔 젬병이라서."

난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월드컵 북중미 최종 예선 첫 경기는 바로 멕시코전.

미국과 멕시코는 한일전 같은 양상을 띤다.

북중미 최대 라이벌이니까.

"시-셀도, 벌써 너무 몰입하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 미국이 이기겠지만."

내 옆에 있던 풀리시치가 빙글빙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멕시코 원정경기였기 때문에, 나하고 풀리시치는 곧바로 멕시코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시셀도는 멕시코 국가대표여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사이좋게 갈 수밖에 없었다.

음. 지금 그렇게 사이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흥. 풀리식, 골드컵 결승전 기억 안 나?"

"······그게 언제인데?"

"나한테 몇 번이고 막혀서 허망하게 골문만 바라보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데?"

"웃기지마. 그땐 알티도어가 골을 못 넣어서 진 거라고."

"뭐, 그렇겠지. 암. 그게 미국 공격진 수준이었지."

풀리시치가 '팩트'로 당하며 부들부들 떠는 게 좀 가여웠다.

하기야 골드컵 결승전 패배는 아직도 뼈아프겠지.

그때 멕시코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던 선수가 시셀도였고.

그래도 풀리시치가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는 모습에 동정심이 생겼다.

"시셀도, 그 수준 낮은 미국 공격진에 나하고 산티아고가 들어갔는데, 이번엔 어떨 거 같아?"

"······!"

"부디 좋은 경기를 보여 주길 바랄게 내가 해트트릭이라도 터뜨리게 된다면, 넌 멕시코 관중들에게 온갖 오물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허! 내가 그, 그렇게 내가 쉽게 뚫릴 거 같아?"

자신만만하게 말하지만, 시셀도는 급격하게 말이 없어졌다.

여러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긴.

연습경기에서 나한테 몇 번이나 골을 먹혔더라?

***

영국은 축구의 나라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축구가 일상인 나라다.

곳곳에 축구팬들이 존재한다.

가령 지금 멕시코시티로 향하는 항공기의 승무원들도, 각자 응원하는 팀이 있는 축구팬들이었다.

"맙소사! LEE라고!"

늘 미소를 유지하며 친절하게 승객을 대하던 엠마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소리야?"

"LEE! 첼시의 LEE가 지금 탑승했다고."

"첼시?"

"엠마, 첼시 팬이잖아."

"아, 그렇지."

"흥. 관심 없어. 첼시 선수 따위."

엠마는 동료 승무원들이 뭐라 떠들던 간에 급하게 무언가 챙겼다.

그녀는 오래된 첼시 팬이었다.

아버지가 손잡고 경기에 데려갔을 때부터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제퍼슨 리는 정말 소중한 선수였다.

현재 첼시의 상승세는 모두 그 때문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새로 온 감독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건, 환하게 웃으면서 좌석에 앉아있는 LEE를 본 이후였다.

LEE가 이 항공기에 탑승했다!

'11시간!'

런던에서 멕시코시티까지 걸리는 비행시간.

그러니까 엠마가 LEE를 계속 볼 수 있는 시간이란 셈이다.

엠마는 이것저것 챙기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후웁, 하!"

크게 심호흡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제퍼슨 리가 있는 좌석으로 향했다.

"혹시 불편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고객님?"

"아, 네. 괜찮습니다."

두 눈이 마주치자, 엠마는 그저 LEE를 평범한 고객으로만 대할 수 없었다.

"LEE! 첼시의 제퍼슨 리, 맞죠? 그렇죠?"

"아, 네. 맞습니다."

"세상에. 당신의 엄청난 팬이에요!"

"고마워요."

"오, 믿을 수 없어요. 정말 LEE가 여기 있다니.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항공기가 이륙하면 엄청 추워요. 여기 담요하고, 또 따뜻한 우유도. 아 축구 선수는 발이 중요하죠. 여기 슬리퍼예요. 아주 편하실 거예요."

"아, 네네."

"잠깐만요. 혹시 와인 즐기시나요? 지금 준비된 와인이······."

극도로 흥분한 엠마의 모습에 제퍼슨이 당황한 얼굴로 만류했다. 어느새 근처의 승객들이 모두 여길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아, 아뇨, 아뇨. 제가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아, 네. LEE. 제가 말한 건 모두 지급되는 서비스랍니다."

"네."

그 이후로도 엠마는 연신 제퍼슨에게 다가왔다.

비싼 고급 초콜릿,

와인,

따뜻한 음료,

각종 서비스······.

제퍼슨이 다소 부담스러워하자, 엠마는 웃으며 말했다.

모든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이며, 자신이 첼시의 팬이기 때문에 살짝 더 챙겨주는 거라면서.

엠마는 이후로 제퍼슨과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았다. 휴대폰 케이스, 수첩, 손수건 등등 한 다섯 개 정도의 사인을.

그리고······.

"왜 우리한텐 말을 안 걸지?"

"그러게."

"첼시 팬이라서 더 챙겨 준다면서."

"왜 우리한텐?"

"우리도 첼시 선순데."

"······."

소외된 시셀도와 풀리시치는, 언제 싸웠냐는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면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 75. LEE will Kill you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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