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올드 트래포드의 괴물 (2) >
"첼시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스쿼드의 변화는 거의 없지 않나?"
솔샤르 감독의 질문에 전력 분석관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리모콘을 조작해 스크린의 영상을 재생했다.
맨시티와 첼시의 경기였다.
[라포르테, 무너집니다!]
[제퍼슨 리! 환상적인 돌파입니다. 페르난지뉴와 라포르테를 동시에 무너뜨립니다. 이미 넘어진 로드리는 그런 제퍼슨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바라보네요!]
[제-퍼슨 리! 극적인 동점골입니다! 첼시를 패배의 수렁에서 끌어올립니다!]
스크린에 나오는 골 장면에 솔샤르 감독은 신음을 삼켰다.
"음······."
"수비수 시셀도와 공격수 제퍼슨 리만 영입했죠. 스쿼드 개편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제퍼슨 리'라는 선수 하나만으로 첼시는 이번 시즌 리그 어떤 팀보다도 완벽한 전력 보강에 성공했습니다."
솔샤르는 다소 과장된 발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얘기하는 전력 분석관은 퍼거슨 시절부터 맨유와 함께했던, 귀를 열고 경청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번 경기의 핵심은 LEE를 어떻게 막느냐입니다. 감독님."
"음."
솔샤르와 코치진은 입을 다물고 스크린을 쳐다봤다.
제퍼슨의 득점 행진과 무너지는 수비수.
영상이 계속될수록 코치진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어렸다.
"드리블 돌파도 미쳤군."
"몸으로 버텨 주는 것도 장난 아니야."
"수비 두세 명은 개인기로 제쳐서 공간을 만들어 내. 여차하면 그 공간을 혼자서 뚫고 들어가 득점에 성공하기도 하고."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양쪽 측면에 기회를 새로 마련해 주는군."
"타겟터에 침투에, 포쳐에."
"다 해 먹는군."
"공중볼은 이게 사람인가 싶은데."
"폭격기야."
"스토크 애들이 저렇게 연약한 친구들이었어? 몸싸움에서 완전히 밀리는데?"
"저기 화면에서 날아가는 친구가 내가 아는 그 쇼크로스인가?"
"맞아. 우리 맨유 출신. 그 깡패, 쇼크로스."
"쟤가 저렇게 인형처럼 나풀거리는 선수였어?"
"제퍼슨을 만나서 저런 거 같은데."
"허!"
영상이 흘러나올수록 코치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활발하게 얘기를 나누던 그들 사이에 점점 정적이 맴돌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제퍼슨의 장점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 장점은 바로······.
"무결점인가?"
"없어."
"그나마 약점이라고 하면 활동량인가."
"음. 사실 그건 약점이라 보기에도 뭐하지. 오히려 체력을 비축해 놓았다가 기회가 오면 폭발시키는 거 같은데."
"우리가 메시한테 활동량 없다고 억지로 비판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
"영리한 거지."
"맞아."
"허, 참. 이 친구 미치겠군."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친구가 19살짜리 애송이 스트라이커가 맞는 거지?"
"······."
그 말을 끝으로 코치진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영상에 나오는 선수가 팀을 위협할 가장 위험한 선수라는 사실을.
침묵을 깬 건 솔샤르 감독의 나직한 한숨 소리였다.
"쓰리백으로 가지."
"네?"
"쓰리백으로 수비수 세 명을 세우고, 그 위에 미드필더 둘을 세워서 LEE를 틀어막는다."
"하지만, 홈경기인데······."
"투톱에 마샬과 래쉬포드를 세운다. 두 명의 속도라면 역습 상황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해 줄 거야."
코치진은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홈경기였고, 맨유라는 팀의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고작 한 명을 잡기 위해 전술을 완전히 바꾼다. 그것도 수비적으로.
'어쩔 수 없어.'
그 모습에 솔샤르는 피식 웃었다.
자신도 그랬다. 아스날과 토트넘을 잡았다. 맨시티도 거의 이길 뻔했다.
첼시라는 팀이 뭐가 무섭다고 엉덩이를 뒤로 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하지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마음을 바꿔 먹을 수밖에 없었다.
-올레(Ole), 이기기 위해선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네.
은사였던 퍼거슨 감독의 전화.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전력 분석관의 조언.
솔샤르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
'LEE를 막는 걸 목표로, 마샬과 래쉬포드의 역습으로 득점 성공하여 이긴다.'
그렇게 나온 게 쓰리백이었다.
세 명의 수비.
중앙에는 EPL 최정상급인 해리 맥과이어가 존재했다. 수비진 전체를 조율하면서도 영리한 태클과 단단한 피지컬을 보유했다.
시즌 초반 맨유의 부진은 맥과이어의 부상 이탈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맥과이어가 돌아오자마자 맨유는 연승 행진을 하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맥과이어의 쓰리백이라면, 충분히 제퍼슨을 막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축구판에서 완벽한 예상은 없는 법이다.
[제퍼슨 리, 미드필더의 압박을 벗겨 내고 달립니다!]
"음?"
순식간에 미드필더, 스콧이 무너졌다.
그 짧은 찰나.
미드필더 한 명이 무너지자 아주 좁은 공간이 생겼다.
제퍼슨은 그 좁은 공간을 순간적으로 파고들었다.
역습을 위해 맨유의 라인이 조금 올라간 상태였기 때문에, 제퍼슨 앞에는 쓰리백밖에 없었다.
[제퍼슨 리! 맥과이어를 마주 봅니다!]
맥과이어가 먼저 튀어나가 자리를 잡았다.
솔샤르는 그 모습에 잠시 불안했던 마음을 접었다.
좋은 판단과 위치 선정이었다.
제퍼슨의 드리블을 막고, 동시에 윙백과 미드필더가 복귀하는 시간을 벌어준다.
[성급하게 달려들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맥과이어!]
[제퍼슨 리, 주위를 둘러봅니다! 오른쪽에서 윌리안이 달려갑니다!]
"측면 집중해! 달라붙어! 비사카!"
완-비사카가 달리면서 윌리안을 압박하는 사이.
제퍼슨 리의 시선이 오른쪽 측면을 향했다.
'막았다.'
솔샤르는 웃었다.
윌리안에게 패스가 닿는다고 한들, 막은 거나 다름없다. 이미 수비는 복귀할 테고, 윌리안은 오른쪽에서 완-비사카에게 뺏기거나 혹은 아쉬운 크로스나 올리겠지.
[아! 제퍼슨 리! 패스를 주는 척, 그대로 돌파를 시도합니다!]
"······!"
솔샤르가 벌떡 일어났다.
여기는 올드 트래포드.
순식간에 경기장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른쪽으로 패스를 주려던 제퍼슨이 그대로 속도를 올리며 돌파를 시도했다.
다른 선수들은 최고 속도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제퍼슨은 그것이 정말로 짧았다. 걷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최고 속도에 도달해 질주하는 것이다.
"······!"
맥과이어가 헛숨을 들이켰다.
예상치 못한 제퍼슨의 순간 가속도.맥과이어의 수비 타이밍을 빼앗았다.
[제퍼슨 리! 맥과이어를 제칩니다! 맥과이어! 순간적인 제퍼슨의 스퍼트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미친!"
"집중해! 따라가!"
맥과이어는 포기하지 않고 제퍼슨에게 따라붙었다.
어깨를 밀어붙이면서 발을 쭉 뻗어 보지만,
[아! 제퍼슨! 공을 지켜 냅니다! 뺏기지 않아요! 맥과이어의 발이 허공만 가릅니다!]
[제퍼슨 리! 맥과이어를 떨쳐 냅니다!]
[순식간에 철벽같던 쓰리백 라인이 무너집니다! 제퍼슨, 공간을 향해 뜁니다!]
쓰리백의 중심이 무너지자, 나머지 두 명의 센터백 에릭 바이(Eric Bailly)와 린될레프(Lindelöf)의 위치가 묘해졌다.
[제퍼슨 리! 좁은 공간, 그대로 치고 나갑니다!]
[공간이 없어요! 에릭 바이와 린될레프가 황급하게 공간을 좁히면서 강력하게 압박해 옵니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여기서 공을 뺏기거나 뒤로 돌리거든요? 아닙니다! 제퍼슨! 그대로, 그대로 돌파를 시도합니다!]
[맙소사! 에릭 바이의 태클이 허공을 가릅니다! 린될레프, 제칩니다! 제퍼슨이 린될레프를 제쳤어요! 린될레프가 바닥에 나뒹굽니다!]
터치라인에서 미친 듯이 지시를 내리던 솔샤르와 코치진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지금 뭐야?"
이해할 수 없었다.
촌각이었다.
제퍼슨이 공을 잡고, 단숨에 미드필더를 떨쳐 내면서 압박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부터.
지금 쓰리백을 유지하는 세 명의 센터백이 완전히 무너진 것까지.
솔샤르가 무언가 대비책을 세울 수도 없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감독이 어떻게 할 수 없이, 한 명의 선수가 모든 전술과 수비를 박살 내고 있는 상황.
윌리안에게 붙었던 완 비사카가 특유의 스피드와 볼만 빼내는 멋진 슬라이딩 태크를 시도하지만.
[제-퍼슨! 팬텀 드리블! 팬텀 드리블로 완 비사카의 태클을 피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때립니다! 강력한 슈팅!]
뻐-엉!
[아! 데헤아의 거짓말 같은 선방! 맞고 튕겨 나옵니······? 아! 제퍼슨 튕겨 나오는 공을 향해 돌진합니다!]
[다시 한번! 오, 세상에! 데헤아를 농락하듯이 그대로 쓰러진 데헤아를 제친 뒤에 골대를 향해 달려 들어갑니다!]
[제-퍼슨! 제퍼슨이 결정 짓습니다! 리그 15호 골! 맥과이어와 데헤아를 무너뜨립니다!]
[데헤아의 표정을 보세요. 허망한 얼굴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좋은 선방이었지만, 마지막엔 손만 뻗고 완전히 제쳤거든요. 제퍼슨이 그 다급한 순간에 여유롭게 골키퍼까지 제치면서 골문으로 공을 가볍게 밀어 넣습니다!]
[올드 트래포드가 침묵에 빠집니다!]
***
"미친놈."
"너 뭐야?"
"이 자식, 무슨 약 먹은 게 분명해."
"내가 보고 있는 게 누구지? 메시인가?"
"너랑 같은 팀인 게 다행이군."
골 셀레브레이션을 하면서 모여든 동료들이 모두 한마디씩 던졌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무아지경이었다.
공을 잡고, 제치고, 페이크 넣고, 다시 제치고, 제치고, 제치고, 그러다가 골키퍼까지 제쳐서 골을 넣었다.
"짜릿하군."
득점에 성공한 쾌감?
음, 아니다.
내가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느끼게 된 점인데.
바로 상대팀의 반응에 짜릿함이 느껴진다.
보라.
철벽으로 군림했던 데헤아의 짜증 어린 얼굴.
어이없다는 기색이 가득한 맥과이어의 표정.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린 벤치의 솔샤르 감독의 얼굴.
이 모든 게 짜릿함의 원인이었다.
조금 변태 같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상대팀의 표정을 보니 득점의 기쁨이 더 크게 느껴진단 말이야.
고로, 한 번으로 만족할 건 아니라 이거다.
"죽여 버려!"
"빌어먹을 아메리칸 새끼! 네놈의 머리 가죽을 벗겨 낼 거다!"
"쓰레기 자식!"
맨유팬들의 저런 야유를 더 들으려면 말이지.
경기 흐름은 순식간에 묘해졌다.
내 선제 득점은 충격적이었겠지.
쓰리백이 제대로 발동하기도 전에, 그 전술을 무너뜨렸으니.
그러나 똑같은 득점 루트는 나오기 힘들다.
맥과이어가 내 스프린터를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무너진 게 컸다.
사실 그가 내 앞을 막아섰을 때만 해도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도저히 뚫을 각이 안 보여서 패스를 돌릴까 생각했으니까.
이제 내 스프린터를 알았으니, 아까처럼 타이밍을 뺏기지 않을 터.
그때 필마르크 감독의 지시가 떨어졌다.
"사이드 체인지래."
"사이드?"
"응. 내가 KEY라고, 친구."
"허. 망했군."
내 말에 윌리안이 피식 웃었다.
쓰리백을 풀어 가는 방법의 하나는 바로 양쪽 측면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쪽에서 수비의 시선을 끄는 침투로 선수들이 몰리게 한다. 즉, 윌리안이 그 역할을 맡고, 경기장을 넓게 쓰면서 중앙의 나나, 왼쪽의 풀리시치에게 한 번에 패스가 전달되어야 한다.
사이드가 순식간에 바뀌는 것.
이것이 잘만 통하면, 쓰리백을 공략할 수 있다.
우리는 재빠르게 그 지시를 이행했다.
캉테가 끊은 볼을, 조르지뉴가 받고 순식간에 윌리안에게 패스.
측면이 약한 쓰리백의 약점을 공략.
윌리안은 완비사카와 경합을 벌이면서 주구장창 오른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완-비사카가 쉽사리 뚫리진 않지만, 윌리안은 공을 지키며 측면을 공략할 재능이 있었다.
"빌어먹을!"
맨유 수비진이 알게 모르게, 점차 오른쪽으로 몰리는 사이.
"풀리식!"
윌리안이 넓게 왼쪽 사이드로 한번에 공을 길게 보냈다.
"······!"
단숨에 수비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풀리시치에게 배달된 크로스.
풀리시치는 박스 안으로 공을 치고 들어왔다.
동시에 나도 박스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안 놓쳐!"
내 마크맨인 에릭 바이는 맨마킹 능력이 뛰어난 선수다.
순식간에 내 움직임을 읽고 길목을 막아서는 눈썰미가 뛰어났다.
흠. 집중력이 최고라 이거지?
그러면, 요건 어떠냐.
휙!
"······!"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는 척, 왼쪽으로 급격한 방향 전환.
에릭바이가 헛숨을 들이키는 게 들린다.
그럴 수밖에.
거의 80도에 가까운 방향 전환이거든.
조금만 더 급했으면 직각이었어.
단숨에 맨마킹을 떨쳐 낸 내게 동시에 풀리식의 낮고 빠른 크로스가 도착한다.
"제---퍼슨!"
"막아!"
"오, 제기랄!"
맥과이어의 험상궂은 얼굴이 순식간에 확대된다.
오, 빠르다.
이럴 줄 알았다.
바이가 내 맨마킹을 하는 사이, 맥과이어는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공간을 지킨 채, 어디로든 발을 뻗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내게 공이 도착하자마자 맥과이어의 태클.
시선은 정면의 맥과이어를 노려본 채.
발꿈치로 뒤로 빼내는 힐 패스.
툭,
"헉!"
그리고,
"윌리아아안!"
어느새 침투한 윌리안이 넘어지면서 그대로 공을 집어넣었다.
데헤아의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들어가는 두 번째 득점.
2대 0.
나는 웃으면서 맨유의 수비들을 바라봤다.
허망한 표정의 맥과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다.
저 표정.
짜릿해.
< 70. 올드 트래포드의 괴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