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69화 (69/258)

< 69. 올드 트래포드의 괴물 (1) >

어렵다고 생각할 때, 의외로 잘 풀릴 때가 있다.

[첼시 유로파리그를 포함해 9월 전승!]

[3연속 무승 기록 이후, 컵대회 포함 6연승을 달리는 첼시!]

[제퍼슨 리! 첼시 연승 행진의 주인공!]

[왼발, 오른발, 머리, 온몸이 무기 그 자체! 'LEE' 만나는 팀마다 공격포인트 기록!]

[EPL 유효 슈팅 1위, 득점 1위, 공격 포인트 1위!]

토트넘전 대승 이후 첼시는 전승을 거뒀다.

리그컵 승리, 9라운드 크리스탈 팰리스전 승리, 10라운드 스토크 시티 원정 승리.

거기에 중간에 끼어 있던 유로파 조별리그 두 경기도 모두 승리를 거뒀다.

리그, 컵, 유로파 통합 6연승.

전승이었다.

이래서 축구가 재미있다.

이 살인적인 일정은 첼시가 가장 곤혹스러워할 만한, 한 달에 일정이 몰려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유로파의 사나이 지루가 있지 않은가.

나는 정말로 유로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루는 내가 교체로 들어갈 틈도 안 주고 두 팀 모두 부숴 버렸다.

그렇다고 유로파 상대들이 완전 약체는 아니었다.

유로파리그 C조

첼시, AC 밀란, 레알 베티스, 슬라비아 프라하.

많은 언론이 죽음의 조라고 예측했다.

1포트의 강팀, 첼시.

2포트에서 가장 명성 있는 팀, AC 밀란.

3포트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 레알 베티스.

4포트는 뭐······ 일반적인 축구팬들이 잘 모르는 유럽 변방의 팀들이고.

감독님도 3-4일 꼴로 진행되는 경기 일정 때문에 로테이션을 많이 고민했다.

한두 경기는 패배할 각오까지 하셨다.

그런데 다 이겨 버렸다.

유로파 첫 경기 레알 베티스는 지루의 두 골.

두 번째 경기 프라하는 코바치치의 중거리 골로.

두 경기 동안 내가 뛴 시간은 교체로 15분 정도 될 것이다.

동료 선수들이 활약해 준 덕택에 체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유로파는 밀란만 꺾으면 무난하게 32강에 진출할 것 같았다.

그러나 리그 상황은 정말로, 복잡했다.

[맨체스터 시티, 맨유와의 더비전에서 1:1 무승부!]

[리버풀, 토트넘과 무승부! 9승 1무, 리그 1위 단독 선두!]

[승점 30점의 고지가 머지않은 리버풀. 정말 리그 우승을 바라보나?]

[맨시티, 챔피언스리그 대비 로테이션. 번리에게 충격 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초반 부진 털어 내고 아스날, 토트넘 잡으며 리그 6위로 껑충]

1. 리버풀 승점 28

2. 맨체스터 시티 승점 23

3. 첼시 승점 23

4. 아스날 21

5. 토트넘 승점 21

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승점 19

"한두 경기 삐끗하면 순식간이네."

대표적으로 맨시티가 그렇다.

챔피언스리그 대비 로테이션. 그리고 그날따라 엄청난 기세를 보여 줬던 번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또 맨유와의 더비전 무승부로 리버풀이 치고 나갈 틈을 만들어 줬다.

뭐, 아직 리그는 많이 남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는 많이 남았고.

"제프."

"그랜파!"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사람 좋아 보이는 넉넉한 웃음을 짓는 노인.

바로 첼시의 전속 사진 기사인 할리 할아버지다.

첼시 선수나 스태프가 모두 그랜파라고 부르는, 첼시의 터줏대감이다.

듣기로는 로만 구단주도 이 사람에겐 함부로 못 한다던가.

하기야 40년 동안 첼시의 역사를 손수 찍은 사진가니까.

할리가 날 찾은 건 간단한 이유였다.

"사진 인화가 이제 됐네. 여기, 토트넘전 해트트릭 사진이야."

할리는 이렇게 구단 SNS나 홍보물에 쓰는 사진 외에도, 그 경기에서 특출 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의 개인 사진을 선물해 주기도 한다.

내가 받은 사진도 토트넘에게 마지막 세 번째 골을 터뜨리고, 세레모니하는 장면.

이런 식으로 보니 사진이 멋지다.

어두운 경기장. 새하얀 조명이 번쩍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미쳐 날뛰는 듯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관중들을 배경으로, 내가 무릎을 꿇은 채 격렬하게 세레모니 하는 구도의 사진.

"사진 좋네요."

"모델이 좋아서 대충 찍어도 그림이 살더라고."

"고마워요, 그랜파."

"아, 그러면 혹시 이 사진에 사인 좀 해줄 수 있나? 우리 손녀에게 줄 거야."

"물론이죠."

"손녀분 이름이?"

"브리아나일세."

"예쁜 이름이네요."

슥슥.

'널 사랑하는 제퍼슨이. 브리아나에게' 라는 식으로 썼다.

나름 정성스럽게 썼다. 어린아이일 테니까.

"손녀분이 몇 살이죠?"

"16살이야."

"한창 예쁠 나이네요. 음. 음?"

순간적으로 혼란이 왔다.

16살이면, 본래 내 나이를 생각하면 한창 귀여울 어린아이긴 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19살이 아닌가.

슬쩍 사진에 쓴 문구가 조금 민망해지는데.

하지만 이미 사진은 할리의 품으로 들어갔다.

"고맙네. 우리 손녀가 아주 좋아할 거야."

"어, 음. 그러면 좋겠네요."

뭐, 팬서비스니까.

***

첼시는 분명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늘 그렇듯이, 잘나가는 팀에겐 여러 시기와 질투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시기들이 '비판'이라고 둔갑하여 공격의 무기가 된다.

[첼시의 어두운 그림자. 빅6 중 최다 실점!]

[리그 3위, 첼시. 실점은 리그 13위.]

[첼시의 수비, 과거의 탄탄한 수비는 어디로?]

[선제골이 먹히는 게 일상적.]

첼시의 실점률이 높았다.

안토니오 뤼디거는 대단한 센터백이다. 그는 충분히 제몫을 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파트너들이다.

퀴르 주마는 피지컬적으로 완성됐으나, 지능적인 수비가 불가능한 약점을 노출했다. 크리스텐센은 훈련에서는 좋았지만, 실전에서는 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수비는 갈수록 나아지겠지만, 언론은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비판이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제퍼슨에게 향했다.

[현대 축구의 최전방 수비수, 첼시에서는 실종.]

['어슬렁' 제퍼슨 리. 전방 압박은 어디로?]

바로 제퍼슨에 대한 비판이었다.

현대 축구는 스트라이커에게 많은 걸 요구한다.

강력한 전방압박을 비롯해 후방까지 내려와 수비에 가담하는 것까지.

한데 제퍼슨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 제퍼슨 리의 히트맵을 보시죠."

"음. 확실히 눈에 띄네요."

"다른 클럽의 스트라이커하고 비교하면 더 그렇습니다. 페널티 박스, 양쪽 날개를 중심으로 많이 분포되어있죠. 더구나 실제 90분간 뛴 거리도 많지 않고요."

"게으르다는 건가요?"

"그렇게도 볼 수 있죠. 비록 골은 잘 넣어 주고 있지만, 요즘엔 스트라이커를 최전방 수비수라고 하죠. 전방에서부터 강력한 압박으로 후방 빌드업을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퍼슨은 그러지 않아요. 상대의 빌드업이 자유로워지죠. 이게 첼시의 높은 실점률에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죠."

몇몇 분석가의 말에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계속 마뜩잖은 기색을 보이는 헤럴드에게 질문했다.

"잭 헤럴드 씨는 어떤 의견이신가요?"

"정말 개소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네?"

"저 소리는 개소리라고요."

"······."

사회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편집이겠군.'

헤럴드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면모가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었지만, 때로는 방송에 부적합할 때가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최전방 수비수? 뭐······ 필요하긴 합니다. 요즘 축구에서 전방부터 강력하게 압박해 줘야 상대는 빌드업을 할 수 없죠. 맞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애당초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는 포지션 입니다."

"그렇죠."

"골을 잘 넣고, 기회만 생기면 득점을 해내는 선수에게 왜 많은 활동량과 수비 가담을 요구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음. 하지만 수비 가담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요?"

"수비 가담에 쓸 체력을 보전해서 그걸 득점으로 연결하는 것이, 팀의 승리에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보지 않습니까? 이걸 보시죠."

헤럴드는 비디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화면에서는 제퍼슨의 경기 장면이 나왔다.

토트넘전에서 보여 줬던 모습이었다.

은근슬쩍 공을 몰고 전진하려던 수비수, 얀 베르통언을 옆에서 거친 몸싸움으로 저지하는 장면.

"보시죠. 여기 가만히 머무르고 있다가, 후방에서부터 은근슬쩍 전진하는 베르통언을 몸싸움으로 이겨 내서 방해하는 장면입니다."

"오, 압박이 강력하네요."

헤럴드는 그 외에도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보여 줬다.

"무작정 뛰어다니면서 히트맵을 넓히고 활동량 높이는 것만이 전방압박은 아닙니다. 이 장면처럼 제퍼슨은 중요한 순간에, 압박을 실행해서 빌드업의 흐름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우 영리한 플레이죠."

그 말에 반대편에 있던 전문가가 피식 웃었다.

개소리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그는 다소 날카로운 어조였다.

"음. 고작 저 몇 개의 장면으로 영리하다고 판단하기엔 무리죠. 아마 헤럴드씨가 LEE의 팬이라서 그런 것 같으신데······."

"우습네요. 그럼 보시죠. 다음 경기가 맨유와 첼시의 경기죠? 그쪽이 맨유팬인 걸로 아는데, 저희 내기 하나 합시다."

"허? 내기요?"

"어차피 우리가 왈가왈부해 봤자, 축구는 결과로 나오는 스포츠죠. 어때요? 결과를 보면 누가 옳은지 알 수 있겠죠."

"좋아요. 알겠습니다."

헤럴드가 크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지는 쪽이 라이벌 팀의 유니폼을 입고, 보육원에서 봉사하도록 하죠. 축구공하고 유니폼도 기부하고요."

***

맨유는 이번 리그 초반 성적이 좋지 못했다.

잠깐이나마 16위로 쳐지기도 했다.

수비들이 부상당해서 복귀가 늦었으니까.

그러나 수비들이 복귀하고 나서는 남다른 횡보를 보였다. 아스날과 토트넘을 잡더니, 맨시티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뒀다.

오히려 그 경기는 맨유가 아쉽다고 할 정도였다. 골대를 세 번이나 맞지 않았으면 4대 1로 맨유가 이겼을 거다.

한국에서 '맹구'라고 놀리는 것과 달리 맨유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이번 맨유의 전형을 본 나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쓰리백?"

"수비적인데?"

"굳이 왜?"

맨유 감독 솔샤르는 쓰리백 카드를 들고 왔다.

비교적 수비적인 전형.

우리 팀은 이전에 말했듯이 수비가 약하다.

실점률이 높은 게 그걸 증명한다.

때문에 오늘 뤼디거의 파트너로 시셀도가 출전했다.

뭐, 어찌 됐든 우리의 실점률을 보면 상대팀은 공격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맨유 같은 수준의 팀이라면 꿇릴 것도 없단 말이지.

쓰리백이란 카드가 나온 건.

"우리가 투톱인 게 유출됐나?"

지루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우리는 오늘 4-4-2의 투톱이었다.

본래 쓰리백이 수비수 하나를 더 늘려서 투톱을 상대함으로 만들어진 전술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변칙적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수비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비교적 투톱을 막는데 효과적인 것이다.

"유출될 리가. 비공개 훈련이었는데."

"흠. 쓰리백이라."

선수들이 웅성거리더니 나를 툭 치며 짓궂게 웃었다.

"제프, 네가 무섭나 보다."

캡틴 아스피가 다가와 툭 쳤다.

"하기야. 너한테 안 무너진 팀이 없지. 맨시티, 토트넘, 아스날. 이젠 맨유 차례인가?"

"맨유가 겁먹을 만도 해."

"제-프, 박살 낼 수 있겠지?"

동료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툭 던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패스나 잘해. 도움왕 경쟁은 우리 팀 선수끼리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오, 세상에."

"대체 미국 놈들은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하하하!"

"근데 저 말이 맞긴 해. 풀리시치가 지금 리그 도움 1위지?"

"오도이가 3위고."

"윌리-안! 분발 좀 해!"

"혼자 하지 말고!"

"제프에게 패스하라고."

경기 시작 전, 서로 어깨동무하고 나누는 얘기가 참 유쾌하다.

분위기가 좋다.

특별히 문제 일으키는 선수도 없고.

윌리안도 각성했고.

난 웃으면서 그 대화를 끝냈다.

"시끄럽고, 나한테 패스나 해요. 오케이?"

"빌어먹을 자식!"

경기는 시작됐다.

수비에서의 실점이야 수비진의 몫이고.

나야 뭐 골만 터뜨리면 그만 아닌가.

'최전방 수비수?'

나도 그 방송을 봤다. 나를 비판하는 기사도.

근데 내용을 보면 허울 좋게 포장만 해놓은 것에 불과했다. 결국은 내가 망하기를 바라는 듯한 어조였으니까.

'보라지.'

전방압박? 물론 필요하다.

나도 인정한다. 근데 내 체력을 보전하면서, 순간적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활동량을 줄이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예 압박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는 흐름을 끊는 플레이를 반드시 한다.

경기 흐름이 보이니까.

38살까지 프로 경기를 뛰며 흐름을 읽고 경기를 바라보는 시야만큼은 지금 내 나이에서 아마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 내게 지금 흐름은 쉽지가 않다.

세명의 센터백.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두명의 미드필더.

수비상황에서 올라갔던 윙백이 복귀해서 순간적인 5백까지.

맨유답지 않은,

완전한 수비적 쓰리백.

'그래도 뚫어야지.'

최전방 수비수?

웃기지 소리. 언제부터 스트라이커가 수비수가 되었나.

최전방 스트라이커는, 스트라이커답게.

그 순간에 캉테로부터 패스가 도달했다.

중간에 미드필더가 차단하려다 실패했다.

워낙 날카로운 패스였으니까.

공을 잡고, 그대로 치고 달렸다.

"막아!"

맨유 미드필더, 스콧 맥토미니(ScottMcTominay)가 달려온다. 190이 넘는 큰 키의 위압적인 압박감. 그렇지만 피지컬이 다소 부족한 선수다.

"Woooooaaa!"

"큭!"

달려드는 맥토미니를 스텝 오버로 속여 넘기면서, 상체는 오른쪽으로 향하다가 순간적으로 왼쪽으로 공을 빼내며 무너뜨렸다.

맥토미니가 무너지자 쓰리백의 중심, 해리 맥과이어(Harry Maguire)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다부진 체격을 보니 호승심이 마구 치솟았다.

반다이크보다 더 높은 몸값을 가진 수비수랬나?

마.

네가 그렇게 수비를 잘해?

< 69. 올드 트래포드의 괴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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