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스트라이커 중의 스트라이커 (4) >
런던의 왕이라.
너무 거창한 칭호긴 하다.
그런데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파란 유니폼을 입은 홈관중이 일제히 나를 연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들끓는 기분이다.
엄청난 희열에 손끝, 발끝이 저릿저릿하다.
우리는 승리를 거뒀다.
3경기 연속 무승을 깼고,
난적 토트넘을 잡았다.
그것도 홈에서 시원한 득점으로 5대 1이란 어마어마한 스코어로.
"제—프!"
"제—프!"
"넌 영원한 블루스의 9번이야!"
"아예 9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들게끔, 평생 여기서 9번으로 뛰어 달라고!"
음. 그건 너무 무리인데.
어떻게 9번이 영구결번될 수 있나.
하여튼 쏟아지는 환호에 미소를 지으며 터널에 들어가기 전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러던 도중 터널 옆 동양인 관중들이 보였다.
한 열 명쯤 됐을까.
동양인은 다 알아보지 않나.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다 투블럭인걸 보니 한국인이네.'
토트넘에 있는 쏘니를 보러 단체로 온 팬들 같았다.
몇몇은 토트넘 유니폼을 입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사복 차림이었다.
음. 쏘니의 팬이긴 하지만, 토트넘의 팬은 아니라 이건가.
하긴, 대부분 그렇다. 한국 선수가 해외리그에서 뛰면, 그 팀의 팬이라기보단 선수의 팬일 때가 많다.
'내 팀'이 생기기 이전에는 마음에 드는 선수의 팬이 됐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내 팀이 되는 것이니까.
잠깐만.
그렇다면 첼시 팬으로 만들어 볼까.
"한국분들이시죠?"
"어?"
"우와!"
"와, 대박!"
터널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한국어로 말을 걸자 한국인 관중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내가 한국말로 인사를 걸어올 줄은 몰랐겠지.
"쏘니 경기 보러 온 거예요?"
"네! 맞아요!"
"와! 한국말 진짜 잘하시네."
"한국계라시더니. 진짜 대단하네요."
축구선수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면, 당연히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다.
난 피식 웃으면서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관중 중에 가장 어린 꼬마에게 살짝 던지듯 줬다.
"온 김에 LEE의 팬이 되어 주면 좋겠네요. 한국 가서도 첼시 응원 많이 해 주세요."
"와아!"
"대박! 미쳤다!"
"뭐해? 감사하다고 해야지!"
꼬마의 어머니로 보이는 젊은 여성분이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유니폼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 오늘 경기는 대승이어서 나도 기분이 좋다.
이런 식으로 팬서비스하면서 팬들이 환호해 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나에게는 그저 짧은 시간을 허비해서 유니폼을 던져 준 것이지만, 먼 영국까지 온 저 사람들에겐 큰 추억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오늘부터 당신의 팬이에요!"
"대박! 저 이제부터 첼시팬이에요!"
"야! 너희 토트넘 응원한다며!"
"제퍼슨 리! 한국에서도 응원할게요!"
스포츠 선수는 팬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공을 차면서 행복할 수 있다.
어찌 됐건 행복한 저녁이다.
이기기도 했고, 팬서비스도 했고, 한국에 팬들도 만들었고.
자.
이제 연승 기록을 세워 봐야지!
***
['LEE' 첼시를 이끌고 런던의 중심에 깃발을 꽂다]
[7경기 12골 4어시스트의 엄청난 기세!]
[LEE의 활약에 첼시, 승점 17점, 리그 4위 상승세!]
[압도적 득점 랭킹 1위 제퍼슨 리. 2위 해리케인과 4골 차!]
[LEE는 큰 경기에 강하다. 런던 세 팀, 웨스트햄, 아스날, 토트넘 상대로 7골 폭발!]
[첼시, 런던의 주인이 될까?]
[첼시팬들, LEE에게 '런던의 왕'이라 연호!]
***
첼시는 3연속 무승을 깼다.
그것도 껄끄러운 난적, 리그 3위의 토트넘을 5대 1이란 스코어로 대파했다.
3연승으로 분위기가 좋았던 토트넘이 이렇게까지 깨질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퍼슨으로 시작해서, 제퍼슨이 끝내버린 경기야.]
[런던 킬러군.]
[웨스트햄, 아스날, 토트넘까지. 런던팀만 만나면 날아다니는데!]
[그가 8라운드 동안 기록한 해트트릭이 무려 두 번이야! 남들은 EPL에서 평생 한 번도 못 하는 해트트릭을, 두 달 만에 터뜨렸다고!]
[심지어 해트트릭을 터뜨린 두 팀이 다 런던이지.]
[자, 이제 누가 런던의 주인이지?]
[솔직히 말해, 첼시가 런던의 주인이라기보단 LEE가 런던의 주인이 아닐까?]
[맞아. 런던 세 팀을 상대로 7골! 런던의 왕이라고!]
[미친놈들. 미국 놈한테 런던을 넘겨줄 셈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 팀 선순데.]
[응. 런던의 왕은 LEE라고.]
[런던의 왕, LEE! #제퍼슨 리 #런던의 왕 #첼시 #런던의 주인 #런던 킬러]
영국 사람이 미국인에게 런던을 흔쾌히 넘겨주는 장면이 나타나는 것도 축구판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첼시는 토트넘을 잡은 후, 리그컵 3라운드에서 허더스필드를 박살 내며 기세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크리스탈 팰리스 전에서 제퍼슨이 한 골, 윌리안이 두 골을 터뜨리며 3:0 승리를 거뒀다.
9경기 13골이란 기록에 모든 축구 관련 전문가들, 은퇴한 선수들, 감독들은 LEE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가령, 이런 것들.
[알렉스 퍼거슨 경, LEE에 대한 찬사를 보내다. "내가 만일 아직도 맨유의 감독이었으면, 그를 얻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집을 찾아갔을 것이다. 현 10대 선수 중 최고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세 무리뉴 감독 "LEE의 활약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가 보여 준 퍼포먼스는 EPL을 진동시키고 있지 않은가."]
[아르센 뱅거 "아스날은 저 만한 선수를 놓친 것에 평생 후회할 것."]
18살, 이제 19살이 되는 선수라고 보기에는 엄청난 득점력.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감독들의 찬사.
스포츠 언론들은 모두 LEE를 중심으로 기사를 쏟아 냈다.
원래 핫한 선수가 등장하면, 그를 중심으로 기사가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들은 뭔가 이번에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어디 가나 다 LEE 얘기뿐이네?"
"축구 잡지, 신문, 인터넷 가릴 것 없이 다 LEE 얘기야."
"빌어먹을 미국 놈 얘기를 왜 이렇게 떠드는 거지?"
언론의 호들갑이야 늘 있던 일이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지금이 기회야! 미친 듯이 쏟아 내! 기자들에게 술도 사고, 전화도 하고 응! 막 하란 말이야! 돈이 부족해? 본사에서 자금 좀 끌고 와!"
제퍼슨의 에이전시 팀장, 제크가 사무실에서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의 오더에 사무실을 가득 메운 20명의 직원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게 아메리칸 스포츠 엑스포트의 무서운 점이다.
고작 한 명의 고객에게 20명이 넘는 사람이 달라붙는다.
회계, 홍보, 계약, 스폰서, 그 모든 걸 각각의 전문가가 담당한다. 그것도 미국에서 이미 4대 스포츠로 잔뼈가 굵은 대단한 에이전트들이 말이다.
제크 팀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고객인 제퍼슨 리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상황.
이미 기삿거리가 충분한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몸값을 올려야지!"
제아무리 엄청난 활약을 해도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몸값이 오르는 것에 한계가 있다.
에이전시에 있어서 제퍼슨은 축구계로 진출하는 첫 고객이자 발판이다.
그들은 모든 걸 동원해서 제퍼슨의 몸값 올리기에 나섰다.
"우리 고객님이 스폰서에 대한 문의를 했었지?"
"예. 다소 돈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흠! 참 신기한 친구야."
제크 팀장은 피식 웃었다.
돈이 좀 필요하다고 스폰서에 대한 계약 얘기를 했을 때, 제크 팀장은 '제퍼슨도 역시 10대긴 10대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각종 운동기구와 첨단 재활기구를 넣을 큰 집이 필요하다니."
슈퍼카를 사는 것도 아니다.
클럽에 가서 돈을 뿌리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본인의 운동을 위해.
그 모습에 제크 팀장은 감탄을 터뜨리다 못해 혀를 내둘렀다.
"정말 축구를 사랑하는 고객님이군."
어찌됐건 제크 팀장은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줘야 했다.
그래서 몸값을 올리기 위해 기사를 마구잡이로 터뜨렸다.
언론에서 쉼 없이 기사가 오르락내리락하자, 수많은 기업에서 관심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
"나이키와 아디다스, 퓨마라."
이젠 정말 '공룡'들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건 LEE의 의견을 물어보고."
"팀장님. 집을 제공하겠단 회사가 있는데요?"
"집을?"
"런던에 있는 주택을 첼시에서 뛰는 동안 무상으로 임대하겠답니다."
"오호라! 얼마짜린데? 아니 LEE가 원하는 운동기구랑 재활기구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충분해?"
"영국 귀족이 살았던 집이랍니다. 지금 시가로, 음 620만 달러(75억 원)이네요."
"······그런 집을 무상 임대한다고? 스폰서 조건으로?"
"네."
"미친. 유럽 축구판도 규모가 대단하잖아? 본사에 보고서 올려. 여긴 황금이 있는 땅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 스폰서는?"
"LEE에게 물어보고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해."
"네. 팀장님."
"후후. 이거야 원. 스폰서 고르는 것도 일이네."
***
율리아겐은 생각했다.
"대체······ 이게 말이 되는 데이터인가?"
디 파코가 받았다.
"저희가 관리하는 선수가 사람인지, 어디 영화 속 터미네이터인지 구분이 안 가요."
그러자 대학 풋볼 코치였던 아놀드가 콧방귀를 끼었다.
"아직이야. 제프는 더 자라고 있다고. 더 성장할 거야. 이 정도면 대학 풋볼리그에서도 날아다닐 수준이지. 좀만 더 크면 NFL에서도 최고일걸?"
"이게 완성된 게 아니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본 풋볼 선수만 수백 명이야. 괴물들이 참 많았지. 지금 제프는 그런 괴물 중에서도 괴물이야. 분명해. 아직 미완성이야."
아놀드의 말에 율리아겐과 디파코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키는 6.16ft(188cm)에 몸무게는 205파운드(93Kg). 그런데 체지방률은 8.1%까지 떨어졌고, 골격 근량은······ 허어. 이게 미완성이라고요?"
"음. 확실히 괴물 같긴 하네. 당장 NFL가도 어느 정도 버티겠는걸."
아놀드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대단하군. 정말 믿기지 않아. 경기를 뛰면 뛸수록 성장이 빨라져."
"그치만 위험해요. 체중이 증가해도, 아놀드의 특훈 때문에 속도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힘도 강해졌지만, 무릎에 부담은 심해질 수밖에."
"일단 방안을 찾아봐야지."
"그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겠는데."
율리아겐과 디 파코는 과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트레이닝을 시도하는 타입이다. 그에 반해 아놀드는 오로지 경험을 중시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의견 충돌이 잦았지만, 최근 들어서 아놀드의 의견이 많이 도움이 되고 있었다.
거친 플레이에서도 몸을 보호하는 방법, 미식축구 선수 특유의 과격한 움직임에서도 최대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방법.
그 모든 방식의 트레이닝 방법이 아놀드에게는 노하우로 축적되어 있으니까.
과학적인 데이터와 풋볼 코치의 경험이 합쳐져,
제퍼슨은 더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첼시가 만나게 된 스토크 시티에게, 천적이 나타난 셈이다.
***
"죽여 버려!"
"머리통을 날려 버리라고!"
"이빨을 깨부숴!"
관중들이 쏟아 내는 살벌한 말만 보면 UFC 경기장인가 싶었지만, 여긴 축구경기장이었다.
bet365 스타디움.
이번 시즌 EPL로 승격한 스토크시티의 홈구장.
그리고 스토크의 팬들은 축구장에서 나오기엔 더 살벌한 말을 마구 쏟아 내고 있었다.
[아! 윌리안! 날아가는군요!]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집니다! 하지만 이게 스토크의 축구죠. 옐로카드를 받지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깨를 으쓱여 보입니다.]
[정말 거치네요. 첼시, 오늘 곤욕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EPL 10라운드. 스토크 시티전.
첼시는 원정을 와서 곤욕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비교적 피지컬이 부족한 윌리안과 풀리시치가 거친 스토크의 수비를 맞이해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제퍼슨이 쓰러진 윌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윌리안은 다소 넋 나간 표정이었다.
"방금 하늘을 난 것 같은데."
"그러더라. 좀만 더 날아갔으면 브라질까지 갔을걸."
"이 자식들 축구를 안 하고 격투를 하는 거 같아."
"맞아. 우스갯소리인데, 애들은 상대 선수를 때려눕히면 수당을 받지 않을까?"
제퍼슨의 농담에 윌리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퍼슨이 피식 웃었다.
"복수는 해주지."
"뭐?"
"이 자식들이. 누구한테 감히 '축구3'을 시전해?"
"축구3?"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제퍼슨을 보며 윌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제퍼슨이 그런게 있다는 듯이 웃었다.
"있어. 축구1, 축구2, 축구3. 축구1은 우리가 흔히 하는 축구고. 축구2는 음, 뭐 점유율하고 기록만 따지는 그런 거였나?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리고 축구3이······ 바로 이런 거야."
제퍼슨은 그렇게 말하면서 공을 몰고 달려오던 스토크의 미드필더를 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어깨로?
아니.
심판이 못 보는 사이, 아주 은밀하게 팔꿈치로 크게 찍어 버렸다.
"······."
"이런 거야."
윌리안은 천연덕스럽게 웃는 제퍼슨을 보며 말을 잃었다.
< 67. 스트라이커 중의 스트라이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