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스트라이커 중의 스트라이커 (2) >
토트넘과의 경기는 이번 라운드 최대의 화젯거리였다.
우선 런던의 두 팀이 붙는다는 점.
그리고 과거와 달리 토트넘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
토트넘은 최근 몇 시즌 동안 챔피언스리그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 줬다.
포체티노 감독의 지휘력과 선수들 간의 플레이에 유기성이 부여되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그러므로 토트넘은 결코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더구나 토트넘 핫스퍼는 지금 3경기 연속 승리를 챙긴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첼시는 3경기 연속 무승.
팀 분위기가 확연하게 갈릴 수밖에 없었다.
"흥. 그래도 토트넘은 잡아야지."
"수탉놈들이야 이겨야지!"
"빌어먹을 자식들은 꼴도 보기 싫어."
첼시팬들은 경기장에 가면서 연신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두 팀은 구단과 구단보단, 팬들끼리 골이 깊었다.
지금이야 덜해졌지만, 과거 첼시의 훌리건들은 유대인들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었다.
유대인 밀집 지역에 있는 토트넘으로서는 이를 곱게 볼 리 없었다.
그렇게 쌓인 악연은,
루카 모드리치의 이적요청 거부, 첼시의 윌리안 하이재킹.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첼시가 우승하고 4위였던 토트넘이 챔피언스리그에 못 나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두 팀 팬들 사이의 골은 깊어지다 못해 험악했다.
"Blues! 수탉들을 잡아먹으라고!"
"오늘 LEE가 출전하겠지?"
"뉴캐슬 전에서 골 맛을 못 봤으니까. 오늘은 또 골을 넣어 줄 거야."
"한 경기 정도는 골 못 넣어도 괜찮아. 하지만 수탉 따위한테는 충분히 넣어야지!"
"우리의 9번이니까!"
첼시팬들은 필드에 올라와 몸을 푸는 9번을 바라봤다.
"체격이 정말 다부져."
"키가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닌데, 주위 애들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니까."
"뭔가, 뭔가 거대해. 음.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몸이 단단한 느낌이야."
"대단한 녀석이야. 저런 두꺼운 근육으로 브라질리언같은 개인기를 펼치다니."
"스피드는 어쩌고? 육상선수보다 더 대단하던걸."
"미쳤어. 정말 LEE는 미쳤다고."
더비전은 LEE가 없어서 졌다.
첼시팬들은 그렇게 믿었다.
뉴캐슬전은 무승부였지만, LEE가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었다.
그가 없었다면 졌을 것이다.
뿐인가.
웨스트햄은 해트트릭, 미들즈브러전은 두 골, 아스날전은 결승골, 거기에 맨시티전도 2골 1어시스트의 극적 동점골.
거기까지 생각하자 첼시팬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왜?"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어."
"뭔데?"
"이렇게 잘하는 녀석이면. 아자르처럼 레알 마드리드 같은 녀석들이 데려가려고 노릴 거 아니야?"
첼시는 선수를 뺏길 생각에 노심초사할 팀은 아니지만,
그래도 LEE는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저 어린 나이에 팀의 승점을 온전히 다 얻어 낸 대단한 선수다. 당장 유럽의 모든 팀이 군침을 흘릴 현시점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음. 그럼 오늘은 한 골 정도만 넣어서 이기는 게 좋을 거 같아."
"맞아."
"더 많이 넣었다간 난리 날지도 몰라."
"제기랄."
첼시팬들은 애매한 웃음을 흘렀다.
LEE의 엄청난 득점력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8라운드 경기가 시작됐다.
***
토트넘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3연승의 분위기. 탄탄한 스쿼드. 젊은 선수 위주의 역동적인 축구.
그렇다고 우리가 쫄 건 없다.
하지만 지금 팀의 분위기는 명백히 지고 있었다.
3경기 연속 무승이란 성적이, 알게 모르게 우리 팀의 위닝 멘탈리티를 갉아먹고 있던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우-!"
"Fuck! Blues!"
"니들이 그러고도 프로냐! 어?!"
홈관중의 야유가 쏟아진다.
실점을 내줬다.
토트넘은 해리케인이 몸으로 버텨 준 공을, 로 셀소가 침투하면서 거칠게 수비진을 흔들어주고, 그 틈을 타 파고든 쏘니가 선제골을 넣었다.
그 모습에 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긴 하네.'
회귀 전에 국가대표에서 한솥밥을 먹던 친구였으니까.
우리 사이는 제법 친밀했다.
쏘니가 마음에 들 만한 패스를 찔러주는 건 팀에 나밖에 없었고,
내 패스를 받아서 골로 연결해 줄 공격수는 또 쏘니 밖에 없었으니까.
과거 기억이 떠올라 감정이 묘했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중심을 잡았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우선 팀의 승리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필드에서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죽여야 한다.
"윌리안."
"······."
내가 필드에서 윌리안에게 직접 말 거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조금 전 세 번째 기회를 골대 밖으로 차 버렸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우리 모범생 캡틴이 잡아 주기엔 이 브라질리언은 너무 자기만의 세계 빠져있었다.
"넌 최악이야."
"뭐라고?"
"네 플레이 정말 끔찍한 음식을 먹는 기분이야. 나도 이런데, 저기 관중은 어쩌겠어?"
"뭐?"
"정신 똑바로 좀 차리라고. 경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마. 승리를 거두면 우리 열한 명이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
"빌어먹을. 골 넣고 싶으면 날 믿고 공을 좀 줘 봐. 내가 기회 봐서 골을 아주 완벽히 떠먹여 줄 테니까! 마지막에 무리해서 슈팅하지 말라고!"
윌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벌써 8라운드다.
그동안 윌리안은 단 하나의 공격 포인트도 올리지 못했다.
당연히 초조하겠지. 어떻게든 이 부진을 이겨 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는 팀 스포츠다.
한 명이 팀의 흐름을 깨버리면 모든 게 허사다.
난 내려오면서 소리쳤다.
"윌리안! 날 믿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봐! 한번 좀 믿어 보라고. 그냥 무조건 위로 올라가. 크로스 따위 생각하지 말고 침투해."
"······."
"캡틴, 오버래핑할 체력 있으시죠?"
"물론이지."
"그러면 적극적으로, 멀리서 올라오다가 크로스 좀 올려줘요."
캡틴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18살짜리의 유망주가 하는 말을 팀의 고참이 들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간 쌓인 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 주는 경기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이들은 프로페셔널이었고, 승리를 위해서는 뭐든지 할 선수들이었다.
캡틴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경기 플레이는 내가 원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후방에서부터 찔러주는 로빙패스가 장점인 조르지뉴.
조르지뉴는 캉테가 뺏은 공을 그대로 멀리 찼다.
왼쪽 수비진을 넘기는 긴 로빙패스는 침투하는 풀리시치의 왼발에 걸렸다.
그리고 풀리시치는 거침없이 반대편으로 공을 전환했다.
윌리안이 박스 안으로 파고들고,
그 공간을 향해 성큼성큼 오버래핑을 시도하던 아스필리쿠에타에게 전해지는 완벽한 방향 전환 롱패스.
그 순간 캡틴하고 눈이 마주쳤다.
캡틴은 한 차례 공을 받고, 정확한 킥을 날렸다.
뻐-엉!
훅 꺾이며 중앙으로 떨어지는 얼리 크로스.
'기가 막히다니까.'
공격수로서 이런 크로스는 정말 고맙다.
위치를 잡을 필요도 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뚝 떨어지는 공이니까.
하지만 완벽하게 형성된 토트넘의 수비벽.
그때, 내 주문대로 일단 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윌리안이 눈에 보였다.
나는 그대로 뛰어올라 공을 윌리안이 파고드는 공간에 떨어뜨려 줬다.
"Bluuuuues!"
"그래! 이거라고!"
두 번의 롱패스와 긴 얼리 크로스.
답답한 경기 흐름을 순식간에 관통해 버리는 그 세 번의 다이렉트한 패스는, 관중들의 환호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툭!
그리고 침투한 윌리안이 공을 잡았다.
그 순간에 모든 시선이 윌리안에게 쏟아졌다.
방금까지 무려 3번의 기회를 놓친 윌리안.
그리고 윌리안에게 달려드는 토트넘의 수비.
윌리안은 공을 잡으면 지금까지 무조건 슈팅이었다.
때문에 토트넘 수비의 선택은 당연하다.
윌리안의 슈팅 각도를 막아 버리는 것.
패스?
이미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으로 패스를 찔러줄 선수가 아니란 걸 토트넘 선수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윌리안 앞에서는 순식간에 수비가 슬라이딩을 시도하며 몸을 던졌고, 비교적 나는 프리해졌다.
즉. 나에게 공간이 열렸다.
"윌리안-!"
과연 내 주문대로 날 한번 믿어 줄까.
아니면 저기서 무리하게 또 슈팅을 때릴까.
윌리안의 오른발이 뒤로 빠졌다.
슈팅 모션이었다.
'어쩔 수가 없군.'
사실 그렇다.
모든 미드필더들에게 패스를 받는 건 불가능일지도 모른다고. 모든 선수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과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 주는 건 어려운 일이다.
윌리안은 결국 혼자 해결하는 선택을······.
툭!
페이크였다.
윌리안은 브라질리언 특유의 재치 있고 간결한 발재간을 보였다.
한 차례 슈팅 페이크를 주고, 왼쪽 뒤로 빠지는 기가 막히는 힐패스.
그리고 공은 내 발밑으로 정확히 왔다.
'······프로군.'
순간 윌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다소 묘한 표정과 잔뜩 흥분한 눈빛.
윌리안은 마지막에 프로페셔널한 선택을 했다.
아무리 윌리안이 지금 팀워크를 헤치는 플레이를 자주 펼쳤다고 해도, 그는 수년간 첼시에서 군림했던 프로페셔널한 선수였다.
실룩.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축구는 팀 스포츠다.
그리고 선수 간의 믿음은 불가피한 것이다.
윌리안은 마지막 순간에 개인의 공격 포인트보단, 팀을 위한 선택을 해 줬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믿음을 줘야하지 않겠는가?
다급하게 내 앞길을 막아서는 수비수.
상체를 크게 뒤흔들며 왼발에서 오른발로 공을 툭.
그다음에 슈팅을 찰 듯 움직이다가 한 번 접었다.
골문 앞에서 서성이는 윌리안을 향해 찔러주는 패스.
뻥!
음.
정확히 말해서 패스는 아니다.
뭔가, 슈팅 같은 패스?
그러니까 내가 준 패스는 윌리안의 발끝을 맞고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Goooooaaaal!"
"The Blues!"
첼시팬들이 미쳐 날뛰면서 소리치고.
윌리안은 골문 앞에서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골을 넣긴 했는데,
뭔가 이상하겠지.
아마 저 자리에 허수아비를 세워 놔도 골은 들어갔을 것이다.
어찌됐건 골은 골이다.
윌리안은 그간 부진에서 탈출하는 득점을 드디어 터뜨렸다.
"윌리안! 봐봐. 믿어 보라니까. 패스 준다고."
"허."
윌리안은 묘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가 쳐다보는 시선에 호기심과 호감이 느껴진다.
음. 좋아.
이제 다 포섭한 건가.
풀리시치부터 해서 페드로, 오도이, 캉테, 조르지뉴, 드링크워터, 그리고 윌리안까지.
자.
이제 나한테 패스만 찔러주라고.
***
윌리안은 드디어 뭔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애송이······."
그의 시선이 중앙에서 싸워 주는 LEE에게 닿았다.
이상하게 이번 시즌은 경기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서 온 애송이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활약했다.
윌리안은 점점 다급해졌다.
골은 터지지 않고, 시간은 흘러갔다.
한때 아자르가 없을 때 팀을 구해 냈던 에이스의 면모는 사라졌다.
그의 등 뒤에 새겨진 10번이란 등번호는 무거운 짐이 되어 그를 짓눌렀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러다간 자신은 팀에서 버림받아질 거라고.
그래서 오늘 반드시 골을 넣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세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쳤을 때만해도, 초조함이 머리끝까지 솟구쳐 경기장이 보이지 않았다. 동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이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제퍼슨 리는 훨씬 대단한 선수였다. 생각이 깊었고, 본인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자신을 다그칠 배짱도 있었다.
"멋진 놈."
윌리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팀의 동료들이, 모두 저 녀석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제는 알겠다.
"혼자서 득점까지 결정짓는 스트라이커면서, 동료를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고?"
왜 동료들이 저 녀석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됐다.
윌리안은 경기장을 둘러봤다.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기적인 패스 플레이.
어느새 팀은 제퍼슨 리를 중심으로 개편되고, 맞춰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 사실에 윌리안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작 8라운드.
팀의 중심은, 제퍼슨 리였다.
하지만 윌리안은 그 사실에 질투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이제야 게임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감이 잡혔다.
[윌리안! 공을 잡고 치고 들어갑니다!]
[화려한 개인기입니다! 오른쪽 측면을 휘젓습니다!]
그가 마음먹고 플레이하자 토트넘의 측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윌리안이 측면을 부수는 사이.
거침없이 전진한 제퍼슨이 중앙에서 수비와 부딪쳤고, 그 밑에는 어느새 올라온 마운트가 자리했다.
윌리안은 선택은 이전과 달랐다. 혼자서 공간을 만들어 슈팅을 때리는 것보단.
팀을 먼저 생각했다.
[윌리안! 환상적인 패스! 마운트가 공을 잡습니다! 마운트! 램파드의 후계자란 별명 그대로, 때립니다! 중거리 슛!]
태앵!
마운트가 마음먹고 때린 강한 슈팅은 골대를 맞고 튕겨 나왔다.
이런 세컨볼 상황에서의 집중력이, 클래스의 차이를 가르는 법이다.
수비들의 시선이 튕겨 나오는 공을 따라가는 순간.
어느새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던 제퍼슨이 튀어나와 공을 향해 발리슛을 날렸다.
뻐-엉!
잡지도 않고, 그대로 때려 버리는.
그러면서도 완벽한 통제능력과 원하는 방향을 향해 정확하게 꽂히는 슈팅.
[제퍼슨-리! 결정짓습니다!]
[튕겨 나오는 공을 끝까지 따라가 해결합니다!]
[제퍼슨 리! 다시 한번 득점 레이스에 시동을 겁니다! 대단한 골이에요!]
[이거죠. 윌리안의 측면에서 수비를 끌어 주고, 뒤에서 공간이 열린 마운트에게 패스. 마운트가 골을 넣었으면 좋았겠지만, 첼시에는 완벽한 스트라이커가 존재합니다!]
해설진들의 격양된 어조처럼.
첼시의 중심에는 말 그대로 완벽한 스트라이커가 존재했다.
"좋아! 윌리안. 되게 멋졌어. 이 팀에 와서 처음으로 너에게 감탄한 거 알아?"
윌리안은 제퍼슨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하지만 제퍼슨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네가 날려 먹은 거 생각하면, 오늘 세 골 정도는 더 넣어야 해. 그러니까 빨리 패스 줘, 윌리안."
제퍼슨은, 아직 골이 더 고팠다.
< 65. 스트라이커 중의 스트라이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