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스트라이커중의 스트라이커 (1) >
과르디올라는 생각했다.
"내가 틀렸군."
LEE의 영입을 원했던 수많은 구단중에, 과르디올라만큼 직접적으로 관심을 표명한 경우는 없다. 그만큼 그는 열의를 가지고 LEE의 영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중간에 발을 뺐다.
"주전은 쟁취하는 것이지."
거저 얻는 건 없다.
주전 자리는 오로지 감독만이 정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이다. 그걸 계약서에 명시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아직 어려서, 오만한 것인가?"
그에게는 세르히오 아구에로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가 있다.
나이가 들며 득점력은 비교적 떨어지고 있지만, 과르디올라가 원하는 모든 플레이를 해 주는 대단한 선수다.
백업 스트라이커 가브리엘 제수스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선수가 된 그는, 차후 몇 년간 맨시티의 최전방을 책임질 선수였다.
그런 두 명을 내버려 두고 18살짜리 미국의 유망주를 주전으로 내세운다?
그건 과르디올라가 용납할 수 없었다.
LEE가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건 한눈에 파악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런데, 과르디올라는 지금 그 생각을 다소 후회했다.
"적어도 EPL이 아닌 다른 리그로 가게 만들어야 했어."
2골 1어시스트.
후반 86분, 91분에 터진 추격골과 동점골.
맨시티는 중요한 승부처에서 무승부를 거뒀다.
경기 흐름은 완벽하게 가져갔고, 경기 자체를 지배했다. 모든 플레이가 그가 원하는 대로 진행됐다.
단 한 명.
LEE만 빼고.
"아니지. 마지막에 날뛰기 전까진 잘 막았는데."
수비 삼각 편대는 제퍼슨을 꽁꽁 묶었다.
"아니. 그게 제대로 묶은 걸까?"
가령 이럴 수도 있지 않나.
"수비의 압박이 심해지자, 오히려 마지막을 노리고 체력을 비축한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르디올라는 피부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단주에게 말해야겠군."
그러니까.
첼시에서 확실히 선수 가치를 테스트하고.
다음 시즌에.
"1억 파운드면 데려올 수 있겠지."
제퍼슨 리를 바라보는 과르디올라의 시선이 뜨겁게 타올랐다.
***
[첼시, 맨시티와 극적 3대 3 무승부.]
[리그 초반부터 점입가경 우승레이스!]
[LEE. City를 침묵시키다.]
[2골 1어시스트. LEE! 5경기 9골에 빛나는 압도적 성적.]
[이미 득점왕은 정해져있다? LEE의 득점력, 정확하고도 강력한 슈팅. 유효슈팅에서 EPL 1위!]
[과르디올라 감독 "그를 데려오지 못한 건, 이번 시즌 최대의 실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맨시티 페르난지뉴 "그가 백스텝을 밟는 순간, 마치 시간이 뒤로 되돌려진 기분이었다. 그는 완벽한 개인기로 시티의 수비진을 붕괴시켰다."]
[City 팬들 "도대체 저런 괴물을 왜 안 사온 거야?"]
[첼시 팬들, LEE의 이름을 연호하다!]
***
맨시티전은 나에게 있어서 뭔가 터닝 포인트 같은 느낌이었다.
가령.
"LEE!"
"당신의 빅 팬이에요!"
"우리 아들이 당신의 사인을 원해요!"
런던 시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사인을 요구하는 장면들이 흔해졌다.
"장난 아닌데?"
"그러게. 캉테는커녕,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나봐."
캉테와 풀리시치는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말은 저러지만.
사실 저들에게도 많은 팬이 몰렸다.
다만 나에게 좀 더 많은 팬이 몰려들었다는 거지.
이건 신기한 일이다.
캉테야 첼시팬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 중 하나고, 풀리시치는 나보다 1년을 여기서 더 뛰었으니까.
"맨시티전 멋있었어요!"
"고마워요."
"아뇨. 우리가 고맙죠. 첼시에 와 줘서."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사인을 해줬다.
"후아. 이제야 밥 먹네."
이들에게 내가 밥을 사러 나온 것이다.
내가 회귀 전엔 미드필더여서 잘 안다.
'밥 잘 사 주는 놈한테 패스를 좀 더 찔러줬었지.'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스트라이커는 미드필더와 친분이 깊어야 한다.
필드에서의 플레이가 다소 무겁고 컨디션이 나빠도, 그간 형성된 신뢰와 친밀도는 미드필더가 좀 더 신경 써서 패스를 해 주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우리 팀의 중요한 미드필더인 캉테랑, 이젠 여기선 친구나 다름없는 풀리시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거다.
"요즘 플레이 날아다니던데? 이대로면 월드컵까지 가는 건 문제없겠어."
"월드컵? LEE, 월드컵을 노리고 있어?"
풀리시치의 말에 캉테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응."
"대단한데. 아직 20살도 아닌데 벌써 월드컵을 꿈꾼다니."
"22년이면, LEE가 딱 스무 살이네."
"벌써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국가대표팀의 핵심이라니. 대단해."
캉테는 순박하다 싶을 정도로 착한 친구였다.
그의 감탄은 순수하게 호의만 가득했다.
"2022년 월드컵은 우리 위대한 아메리카가 접수할 거라고. 여기 캡틴 아메리카랑."
음.
풀리시치 얘는,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 장난기 가득한 어조지만.
하여튼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둘 다 모나지 않는 성격의 친구였으니까.
"다음 월드컵 트로피는 내가 들 거야."
하지만 캉테는 그 점에서 순박한 모습을 버렸다.
"22년 월드컵은 레 블뢰(Les Bleus: 푸른 군단)가 차지할 거야."
캉테의 순박했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른다.
레 블뢰.
프랑스 국가대표팀을 일컫는 별칭이다.
하긴, 프랑스 강하지.
멤버들도 장난 아니고, 언제든 월드컵 우승을 노릴만한 대단한 팀이지.
저번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이기도 하고.
근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캉테, 설령 월드컵에서 좋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
"흠. 그럴 리가 없어."
글쎄.
내가 회귀 전에 프랑스는 16강에서 탈락했던가.
메시의 마지막 월드컵 도전.
은퇴 전 커리어 마지막 국제대회 우승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메시한테 무너졌었지.
워낙 대단했던 경기라 인상이 깊다.
"그럼 미국은? 자신 있어? 월드컵에서?"
미국은 22년 월드컵에서 꽤 준수한 활약을 보인다. 조 2위로 16강 진출. 하지만 그땐 산티아고가 없었다. 스트라이커의 득점력 빈곤으로 인해 탈락한다.
그렇지만.
"내가 있잖아."
"오, 이래야 미국인답지! 위대한 아메리카!"
풀리시치가 짓궂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훈련장 분위기 좋지 않아?"
"맞아. 역시 팀 성적이 좌우한다니까."
"특히 대니가 LEE, 너한테 고마워하는 눈치더라."
"대니?"
드링크워터?
걔가 왜?
"네가 대니의 패스 2개를 다 골로 만들어 줬잖아. 안 그래도 대니가 많이 힘들어했거든. 이번 활약으로 감독님 눈에도 띄었고."
캉테는 조용히 말했다.
레스터시티에서부터 함께한 동료였기에, 캉테는 드링크워터를 좋아했다.
"그래서 다시 주전 경쟁을 위해 싸워 보겠다고 의욕이 넘치더라. 걔가 아직 낯을 많이 가려서. 대니가 좀 더 친해지면 너한테 많이 고마워할 거야."
난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드링크워터의 롱패스 실력은 좋은 편이다.
다만 첼시 스트라이커의 스타일에 그간 맞지 않았다.
알바로 모라타, 올리비에 지루, 바추아이 등등.
제이미 바디처럼 드링크워터의 패스를 받아 주기엔 다소 스타일이 달랐다.
때문에 레스터에서 활약했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점점 후보로 밀려났다. 현재 방출 1순위였던가.
그런데 나는 그가 잘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덕택에, 우리 팀은 공격 옵션이 더 늘어난 셈이고
미드필더진은 드링크워터의 활약에 긴장감이 흘렀다. 캉테를 제외하고 중앙은 아직 확실한 주전이 없으니까.
이런 선의의 경쟁은 팀의 활력을 북돋아 준다. 긍정적인 시그널이다.
"맞다. 윌리안은 오늘 훈련장에 안 나왔지?"
"응."
풀리시치가 갑자기 꺼낸 얘기에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한때 첼시의 에이스, 아자르에 이어 첼시를 이끌었던 윌리안은 이번 시즌 부진했다.
폼이 올라오지 않은 것도 있고,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스스로 흔들리는 느낌도 있었다.
"루이스도 없으니까."
윌리안이 말을 터놓고 지내던 다비드 루이스도 이적했으니.
윌리안은 알게 모르게, 필드에서나 훈련장에서나 따로 놀고 있었다.
지금이야 오도이가 잘해 주고 있어서 문제야 없지만, 나중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윌리안이 빨리 제 폼을 찾아야 팀에 도움이 된다.
"자자. 축구 얘기는 우리 그만하자. 밥이나 먹자고."
풀리시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긴.
밥먹는데 또 일 얘기하는 건 그렇지.
***
"휴식이 필요해요."
"음."
"제프, 물론 지금도 풀타임을 뛸 수는 있어요. 미세한 근육 부상은 시간이 흐르면 빨리 회복되니까요."
"하지만 무리입니다."
디 파코의 부드러운 어조와 율리아겐의 단호한 어조.
나는 미간을 좁혔다.
예텐보리 2차전부터 맨시티전 풀타임까지.
나는 거의 3~4일꼴로 경기를 치렀다.
3월부터 미국에서 휴식기 없이 지금까지.
사실상 40경기를 넘게 뛰었다.
이 정도까지 버틴 것만 해도 트레이닝 팀의 조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가 EPL을 만만하게 봤어요."
디 파코의 한숨에 율리아겐도 고개를 끄덕였다.
"MLS를 기준으로 맞춰 한 시즌을 충분히 치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죄송합니다. EPL이 생각보다 너무 거칠어요."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트레이닝 팀은 MLS 기준에 맞춰 내 몸의 밸런스를 맞추고 유지했다. 문제는 EPL로의 이적이다.
사실 나도 회귀 전에는 분데스리가에서 뛴 게 다였다. EPL이 거칠단 얘기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거칠고, 압박 강도는 엄청나고, 템포도 정말 빠르다.
MLS에서 풀타임을 뛰는 체력도 여기서는 5~60분만 되도 입에서 단내가 훅훅 날 정도였다.
그나마 내가 지금 잘 버티고 있는 건 의외로, 율리아겐도, 디 파코도 아닌 풋볼 대학코치 출신의 아놀드 덕택이었다.
"흥. 이게 뭐가 거칠다고. 중고등학생들 몸싸움하는 거 같구먼."
대학 풋볼의 세계에 있던 아놀드의 눈에는 EPL도 시시해 보였다.
하여튼 거친 플레이에 근육을 보호하고, 체력을 유지해 줄 트레이닝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아놀드 덕택에 트레이닝 팀은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휴식이 필요하다.
나 역시 동감하는 바.
그리고 다음 경기는 승격팀, 더비카운티 FC였다.
감독님은 맨시티전 이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나에게 휴식을 주셨다.
"지루의 컨디션도 좋은 상태니까. 한 경기 정도 푹 쉬면서 체력을 회복해. 리그는 기니까."
다음 팀이 약팀이니까.
감독님도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번 시즌 3라운드까지 3무를 기록한 더비니까.
그런데 축구에서 절대적인 건 없다.
레알 마드리드가 라 리가 꼴찌팀에게 잡히는 경우는 시즌을 치르며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다.
무패 우승을 노리던 바르셀로나가 약팀한테 그 대단한 기록이 깨지는 예도 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강자라고 해도. 패배는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가 아스날을 잡고, 맨시티하고 비겼어도.
승격팀인 더비에게 패배한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
골대만 두 번.
그리고 프리킥 상황에서 더비가 결승골을 터뜨리며, 우리는 리그 첫 패배를 기록했다.
사실 약팀이 강팀을 잡는 건, EPL에서 의외로 흔한 일이다.
우리 팀은 더비에게 충격 패를 당했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선수들은 이런 상황에 충분히 익숙했다.
문제는 다음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점.
뉴캐슬 원정에서 내가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결국 수비진에서 실수가 나오면서 2대 2 무승부가 됐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팀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감독님도 그걸 알았다.
"축구에서 3이란 숫자는 중요하지. 3연승이면 꺾이지 않은 기세로 치고 나가지만, 3경기 연속 무승이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힌다!"
3경기 무승은 묘한 숫자다.
맨시티전 무승부,
더비카운티 전 패배,
뉴캐슬 전 무승부.
2무 1패의 성적.
만일 여기서 무승 기록을 깨지 못한다면, 팀이 수렁에 빠질 수 있다.
분위기란 게 그렇다. 그래서 감독님은 열정적으로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다독였다.
4연속 무승이냐, 아니면 무승 기록을 깨느냐.
그 갈림길에 선 지금.
다음 경기는 토트넘전이다.
< 64. 스트라이커중의 스트라이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