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Real Blues (4) >
맨시티의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감독의 전술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경기장이었다.
구장 폭이 비교적 좁고 짧은 길이.
과르디올라 특유의 축구가 펼쳐지기에 최적의 장소다.
짧은 패스를 이용한 후방 빌드업과 점유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축구.
"중요한 경기다!"
우리 팀은 리그 4연승을 거뒀고,
그건 상대팀 맨시티도 마찬가지다.
아 리버풀도 마찬가지였던가?
어쨌거나 승점은 같다.
하지만 득실차가 다르다.
맨시티는 4경기 동안 1실점을 내줬다.
그러니까 공수양면에서 완벽한 팀이다.
펩 과르디올라라는 명장과 화수분 같은 팀의 재정. 감독이 원하는 세계적인 선수들로만 구성되는 압도적인 스쿼드.
이번 시즌 만나는 최대 난적.
솔직히 말해 나도 긴장된다.
지금 필드에서 몸을 풀고 있는 맨시티 선수들은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선수였으니까.
"긴장했어?"
캡틴, 아스필리쿠에타가 다가왔다.
"조금요."
"호. 그런 반응이니 의외인데. 어깨를 으쓱이면서 '별거 아닌데요.'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거야 골 넣고 말해야죠."
"하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 쟤들도 똑같아. 필드 위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캡틴은 그렇게 씩 웃으며 몸 풀고 있는 선수 모두에게 말을 걸었다.
비교적 모범생 스타일인 아스피는 파이팅 넘치게 선수들을 이끄는 역할보단, 이렇게 한 명씩 마음을 잘 다독여 주는 스타일이었다.
뭐,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 꿇릴 것도 없다.
우리 중앙에는 캉테가 있지 않나.
센터백도 뤼디거, 주마 조합이면 리그 탑이고, 풀백인 아스필리쿠에타야 두말할 것도 없다.
왼쪽 풀리시치도 잘해 주고 있고, 오른쪽은 음.
윌리안이 빠졌다.
대신 오도이가 투입됐다.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오도이와 벌써 두 골을 합작했으니까.
그리고 윌리안은 아직 폼이 올라오지 않은 건지, 아니면 기량 저하가 시작된 건지 근래 활약이 너무 저조했다.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윌리안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하다.
하지만 이게 축구다.
벤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냉정한 세계다.
등번호 10번?
그게 무슨 소용인가?
2억 원이 넘는 주급?
필마르크 감독에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필드 위에서 보이는 모습.
그것만이 중요했다.
수년간 팀에서 활약한 윌리안을 벤치로 내칠 정도로 필마르크 감독은 과감함과 냉정함을 갖춘 남자였다.
그 말은,
내가 9번이란 번호에 맞는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나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지금까지는 합격점이지만,
오늘 아예 굳혀 볼 생각이다.
맨시티 상태로 골을 넣으면?
뭐, 충분하지 않겠는가.
***
[언제 봐도 맨시티의 스쿼드는 정말 무섭네요.]
[4-3-3의 포메이션입니다. 진첸코, 라포르트, 존 스톤스, 카일 워커, 다비드 실바, 페르난지뉴, 케빈 데브라위너, 라힘 스털링, 세르히오 아구에로, 베르나르두 실바, 골키퍼는 에데르송입니다.]
[그에 맞서는 원정팀 첼시의 스쿼드는 4-3-2-1의 포메이션이네요. 에메르송 팔미에리, 안토니오 뤼디거, 퀴르 주마,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조르지뉴, 은골로 캉테, 메이슨 마운트, 크리스티안 풀리시치, 제퍼슨 리, 허드슨-오도이, 그리고 골키퍼에는 부상에서 회복한 케파 아리사발라가 선수가 복귀했습니다.]
[두 팀 다 만만치 않은 스쿼드와 현재 성적을 보여 주고 있죠.]
[4연승을 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4경기 4골의 세르히오 아구에로, 4경기 7골의 제퍼슨 리의 대결도 볼 만하겠네요.]
"Blue Moon-!"
맨시티 팬들의 응원가인 블루문이 펼쳐지는 가운데,
원정 섹터의 파란 유니폼의 첼시팬들도 목이 터져라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제-퍼슨 리!"
"LEE!"
"캉-테!"
팬들의 함성 크기에 따라 현재 선수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캉테를 외치는 목소리와 제퍼슨을 외치는 목소리가 서로 비슷하다는 건,
제퍼슨이 그만큼 첼시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그걸 떠나서 아스필리쿠에타는 팀의 새로운 9번이 마음에 들었다.
'아자르가 없어도 골을 넣어 주는 선수가 있으니까.'
작년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물론 그 전 시즌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땐 아자르가 어떻게든 결승골을 만들어 줬다.
작년은 그런 아자르마저도 없었다.
'얼마 만이야?'
스트라이커가 골을 잘 넣어 주는 게.
아스필리쿠에타는 씩 웃었다.
수비에서 아무리 잘 틀어막아도,
결국,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다.
몸을 던져가면서 실점을 막아도, 기회를 날려 버리는 공격진에게 얼마나 속이 쓰렸던가.
그런 그에게 있어서 제퍼슨 리의 출현은 정말 기쁜 것이었다.
삐익!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아스필리쿠에타는 상념에서 깨어나 경기에 집중했다.
툭, 툭!
"City! Go City! We are City!"
중원에서부터 빠르게 이뤄지는 짧은 패스.
중앙에서 다소 쳐진 위치에서 공을 잡은 페르난지뉴가 중심을 잡아 주고, 양옆에서 다비드 실바와 데 브라위너가 활발하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가져갔다.
패스, 패스, 패스.
짧게 전후좌우 오가던 패스가 어느 한순간.
[스털링! 스털링이 공을 잡고 질주합니다!]
양옆으로 넓게 뿌려졌다.
가끔 펩의 맨시티에 대해 착각하는 게 있다.
티키타카!
이전 바르셀로나의 전술이 워낙 인상적이었으니까.
하지만 펩은 맨시티에서 점차 티키타카의 색채를 버렸다.
윙포워드에게 찔러지는 대각선 침투 패스.
그리고 윙어로서의 움직임까지 함께 가져가는 넓은 윙 플레이.
거기에 이어지는 빠르고 낮은 크로스에 아구에로의 완벽한 마무리.
중원에서의 패스플레이도 완벽하지만, 양쪽 날개에서 이뤄지는 공격패턴도 무시무시한 팀이다.
[스털링-! 아스필리쿠에타를 돌파합니다! 그리고 골문 가까이 찌르는 낮은 크로스!]
[아구에로! 아구에로 귀신처럼 나타나 발끝을 갖다 댑니다!]
[케파의 손끝을 스치는 슈팅! 아! 골포스트를 스치고 지나가네요!]
"City! Oh, City!"
예티하드 스타디움이 크게 진동했다.
전반 3분 만에 만든 엄청난 득점 기회.
아구에로의 슈팅이 빗나가면서 아쉽게도 무위에 돌아갔다.
그러나 원정 경기를 따라온 첼시팬들은 단숨에 무너진 수비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친······."
"빌어먹을, 돈으로 저런 선수들을 사 모으다니. 비겁하다고!"
"음.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요즘엔 그래도 돼."
"그건 맞아. 우리 한창때와 비교해도 지금 맨시티 돈 쓰는 거 보면 욕부터 나온다니까."
다른 팀 팬들이 듣는다면 어처구니가 없는 대화였지만,
어차피 이쪽 축구판이 내로남불 아니겠는가.
아스필리쿠에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스털링의 드리블 돌파는 눈앞이 팽팽 돌 정도로 대단했다.
순간적으로 그를 완전히 놓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평소 모범생 같은 이미지에 안 어울리는 험한 욕설을.
"축구 좆 같이 하네."
극찬이었다.
***
"와, 씨. 미친놈들."
어.
내 입에서 절로 욕 섞인 감탄이 나온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우리는 전반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한 골을 내주고 끌려갔다.
전방에서부터 이뤄지는 쓰리톱의 강한 압박은 전진을 못하게 막았다.
그들의 의도대로, 우리의 공격 방향은 왼쪽으로만 몰리게 됐다. 하지만 에메르송 팔미에리는 쉬이 오버래핑을 시도하지 못했고, 베르나르두 실바와 케빈 데브라위너의 폭발적인 공격력에 풀리시치가 내려가서 수비에 힘써야 할 정도였다.
거기에 중원에서 이뤄지는 거친 압박은 묘했다. 격렬하게 압박하면서도 공은 소유하게끔 거리를 내줬다. 하지만 전방을 향한 패스를 찔러주지 못하게 압박했고, 자연히 의미 없는 백패스와 횡패스가 남발.
그리고 중간에 끊기면 바로 역습.
틈을 포착한 케빈 데 브라위너의 중거리 골.
이러다 보니 나도 수비진의 압박을 피해 점점 밑으로 내려가게 됐고, 우리 팀 라인까지 같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니까.
'가패 당했어.'
가둬 놓고 두들겨 맞는 중이다.
감독님은 의외로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롱패스다. 공을 잡으면 측면하고 바로 박스로 뿌려. 풀리시치, 공격에 더 힘써라. 오도이, 공 잡고 돌파하고 크로스. 오케이?"
필마르크 감독의 주문은 간단했다.
전방 압박부터 모든 게 밀리고 있는 상황.
후방 빌드업은 애당초 포기했다.
그냥,
뻥축구다.
단순하고도 간결하면서 어쩌면 확실한 효과를 가진 전술.
그러나 이 전술의 핵심은 측면과 바로 중앙의 스트라이커, 나였다.
"제-프. 이길 수 있겠지?"
"박살 내죠."
"괜찮나? 좀 두들겨 맞은 거 같은데?"
"저도 그만큼 패줬으니, 걔들도 아플 거예요."
내 말에 감독님하고 선수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상대팀 수비수, 존 스톤스하고 라포르테.
둘 다 만만치 않았다.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격렬하게 부딪쳤다. 거기에 페르난지뉴가 틈틈이 내려와 압박하니, 도통 공을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저쪽도 힘들 거다.
심판 성향이 오늘 관대한 편이다보니, 거칠게 싸웠거든.
특히 스톤스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약간의 부상을 안고 있는 듯했다.
그를 노리면 후반에 돌파구가 생길 것 같았다.
"좋아. 후반전에 역전 한번 해 보자고."
"The Blues!"
"Go Blues!"
***
필마르크 감독의 주문은 쉽게 통하지 않았다.
후반 60분까지, 첼시는 이렇다 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공을 받아야 할 양쪽 측면이, 말 그대로 맨시티의 풀백들에게 털렸다.
오도이는 진첸코를 이겨 내지 못했고, 풀리시치는 카일 워커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페드로가 풀리시치를 대신해 투입됩니다.]
[풀리시치가 지친 감이 있죠.]
그리고 선수 교체.
그때 캉테가 끊어 낸 공을 받은 조르지뉴의 눈이 번뜩였다.
체력이 충분한 페드로, 풀리시치와 끊임없이 부딪쳐 지친 카일 워커.
선수가 교체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
그사이 페드로와 조르지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롱패스.
[페-드로! 공을 잡고 달립니다!]
[안쪽으로 파고들지 않고 측면을 달립니다!]
[쌩쌩한 체력이죠! 카일 워커를 떨쳐 내고 뜁니다!]
페드로는 박스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맨시티는 어차피 라인을 올린 상황.
페드로는 흘깃 박스를 향해 달려가는 제퍼슨을 보고 그대로 얼리 크로스를 올렸다.
아름답게 휘어지는 크로스.
"Oh!"
"Blueees!"
원정석에서 터져 나오는 팬들의 감탄.
그리고 중앙에서 스톤스와 라포르테와 경합하는 제퍼슨.
압도적인 피지컬과 수비능력을 자랑하는 수비수 둘이 양쪽에서 강하게 압박했다.
제아무리 제퍼슨의 피지컬이 대단하다고 한들, 그 둘을 이겨 내기는 어렵다.
EPL의 수많은 괴물을 상대했던 게 두 센터백이다.
그중에는 어마어마한 피지컬을 지닌 선수도 무척 많았다.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도가 튼 수비수들이다보니,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라고 존 스톤스는 생각했다.
"억!"
하지만 스톤스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
그리고 그 찰나의 틈에 놓친 좋은 위치.
먼저 위치를 선점한 제퍼슨이 반박자 빠르게 떴고, 더 높이 뛰어올랐다.
심지어 라포르테보다 더.
그러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얼리 크로스를, 이마로 맞혀 방향만 살짝 틀어 버린 것이다.
'뭐야?'
'분명 우리가 좋은 위치였는데?'
스톤스와 라포르테의 팔뚝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분명 두 명이 먼저 좋은 위치를 잡았건만.
거칠게 몸싸움하는 사이, 그 위치가 반대로 된 것이다.
심지어 은근슬쩍 스톤스의 어깨 뒤쪽을 누르면서 제퍼슨이 뛰어올랐다. 스톤스는 좀처럼 뛰지 못했고, 라포르테는 위치를 잘못 잡아 공에 머리를 댈 수 없었다.
그럼 뭐겠는가.
"Gooooooooaaaaaal!"
"The Blueeeeeessssss!"
"제----퍼슨!"
"LEE! 오, Fucking lovely Goal!"
"Wooooaaaaaaa!"
골문을 갈라 버리는 완벽한 헤더 득점.
원정 섹터의 첼시팬들이 미친 듯이 날뛰고, 경찰들이 급히 몸을 던져 울타리를 쳤다.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
"Fucking City! Fuck city! 아구에로? 걔가 몇 살이지? 우리 LEE는 18살이라고 이 자식들아!"
"축구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니야!"
제퍼슨 영입에 5천만 파운드가 들어갔지만,
그게 중요하겠는가.
제퍼슨은 첼시팬들의 환호를 들으며 골대 뒤로 달려갔다.
그러니까, 맨시티 홈팬들이 있는 위치로.
"저 미친!"
"야야!"
관중석에 자리 잡은 경찰들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는 순간.
제퍼슨이 다가와 소리쳤다.
"자, 이제 누가 진짜 Blues지? 시티즌?"
맨시티 팬들은 스스로를 블루스라고 부른다.
'Rip Blues'나 'Come on you Blues'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구단은 시티즌이란 이름을 언론에 표하지만, 서포터즈들은 스스로를 블루스라고 말한다.
한데 그들에게 저렇게 외친다는 건.
"저 개자식을 죽일 거야!"
"개 같은 자식!"
제퍼슨은 그런 시티 팬들의 야유를 들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심판에게 항의하는 스톤스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스톤스는 생각했다.
"축구 좆 같이 하네."
극찬이었다.
< 62. Real Blues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