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61화 (61/258)

< 61. Real Blues (3) >

브리아나는 어렸을 때부터 첼시 팬이었다.

구단의 전속 사진가로서 40년째 첼시의 팬이신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 첼시팬이 되신 아버지.

그리고 아빠 손을 잡고 5살 때부터 경기장을 갔던 브리아나까지.

삼대가, 아니 어쩌면 그 윗대까지 첼시팬이었던 집안이다.

그런 브리아나는 집에 첼시 선수들의 유니폼이 모두 있었다.

딱, 한 명의 선수 것만 빼고.

"그러니까. LEE 유니폼이요!"

"다 팔렸습니다."

"그게 말이 돼요? 어제, 오늘 나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오자마자, 일단 오늘 나온 물량은 다 나갔어요."

브리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눈에 'SOLD OUT'이라고 붙여져 있는 팻말이 아른거렸다.

"그러면 다음 물량은 언제 풀려요?"

"바로 제작하면······. 음 한 삼 일 정도요?"

"그럼 다음 경기 때 못 입잖아요?"

"어쩔 수가 없어요."

팬숍 직원의 말에 브리아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오기 전에 유니폼을 차지한 어린 꼬마 팬이 'LEE'라고 마킹된 유니폼을 입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부럽다.'

새삼 그 꼬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별수가 없다.

"이제 영입한 선순데 너무 인기 많은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미국인이라 그런가. 심지어 아시아계라 그런가. 온라인 쇼핑몰 물량도 주문 폭주 중이래요. 미국하고 한국 양쪽에서."

"오, 세상에."

"이렇게만 보면 단순 마케팅 선수인가 싶은데, 실력도 대단하니."

"웨스트햄 해트트릭은 대단했죠!"

"울브스 애들 입 다물게 하는 강슛도 멋졌죠."

팬숍 직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난 지금까지 지안프랑코 졸라와 드록바가 그리웠어요. 그런데 LEE를 보니까 그 그리움이 옅어질 거 같은 기분이에요."

그 말에 브리아나가 다소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은 그제야 브리아나의 앳된 외모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졸라하고 드록바가 누군지는 알죠?"

"알죠. 제가 6살 때 아빠 손 잡고 경기장 가면 드록바가 골 넣고 포효했으니까요."

새삼 나이차가 느껴졌다.

그러나 직원은, 나이차가 느껴지는 데도 지금 좋아하는 선수인 'LEE'를 두고 딸뻘인 여자아이와 얘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단 사실에 신기했다.

'이런 게 축구지.'

축구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 중 하나였다.

***

짝짝짝!

코밤 훈련장에서 쏟아지는 박수 세례에, 뻔뻔한 나도 태연할 수만은 없었다.

풀리시치뿐만 아니라, 캉테, 아스필리쿠에타, 페드로, 뤼디거, 조르지뉴 등등.

유명 선수들이 나를 보며 손뼉을 치는 광경에서 어떻게 태연함을 계속 유지하겠나.

"축하드립니다. 잉글리쉬 프리미어리그 8월, 이달의 선수상을 받으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세요?"

빨간 머리의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카메라가 나를 향해 줌인.

"굉장히 감사합니다. 사실 예상하여서 그렇게 놀랍지는 않네요."

"예상했다고요?"

"웨스트햄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린 순간, 인터뷰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막상 카메라 앞에서니 말이 술술 나온다.

마치 내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처럼, 혀가 절로 움직이는 기분이다.

하기야.

본래 제퍼슨은 고교 MVP를 차지하면서 온갖 인터뷰를 다 하고 다녔으니까. 이미 몸이 이 긴장감과 상황에 익숙한 것이다.

"4경기 7골 1어시스트!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결이 무엇인가요?"

"우선, 제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오!"

"이곳에 올 때부터, 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세뇌를 하듯이 중얼거렸어요.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 골을 넣을 수 있다, 이길 수 있다고요.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훌륭한 동료들의 지원이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네요."

"동료들의 지원이요?"

"특히 웨스트햄전에서 터뜨린 해트트릭은 머리로만 넣었죠. 마침 그 전 훈련에서 지루가 헤더하는 방법을 알려 줬거든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슬쩍 보니, 저 멀리서 지루가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난 적당히 자신 있는 표현을 하면서도, 선수상을 받은 공로를 온전히 내가 가져가지 않았다. 적절히 동료들에게 공을 넘겼다.

난 스트라이커니까.

스트라이커는 패스를 받아야 한다.

좋은 패스, 좋은 어시스트가 있어야 골 넣을 확률이 높아진다.

패스를 해 줄 동료들과 친화력은 물론이고, 신뢰도 쌓여야 한다. 이런 식의 간단한 인터뷰만으로도, 나에 대한 동료들의 호감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축구판에서 괜히 20년 구른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럼, 다음 9월의 선수상도 목표이신가요?"

"큰 목표는 아닙니다. 받으면 감사하고 좋지만, 못 받아도 크게 상관없어요."

"네?"

"이왕이면 올해의 선수상 정도는 되어야 목표가 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인터뷰 마지막은 자신 넘치게.

인터뷰가 끝났다.

모여든 선수들은 다시 훈련장 곳곳으로 분분히 흩어졌다.

난 손에 든 트로피를 바라봤다.

이런 게 은근히 동기 부여가 잘 된다.

왜?

"이거 수당이 얼마였더라?"

내 주급은 1억 2천만 원 정도.

확실히 엄청나다. 18살짜리가 받기에는.

그러나 내가 MLS에서 보여 준 엄청난 활약과 점입가경으로 치닫던 영입 경쟁, 그리고 요즘 미쳐 버린 이적시장판에선 엄청나게 높다고만 여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에이전시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언론에 쉽게 노출이 되는 주급은 굳이 높이지 않았다.

대신 온갖 수당을 다 갖다 붙였다.

출전, 미출전, 득점, 승리 수당은 미국에서 받던 것에 1.5배에서 2배에 이르렀고.

기타 5득점 이상 수당,

10득점 이상 수당,

이런 것들도 어지간히 많이 붙었다.

결국 내 주급은 거의 두 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지금 받은 이달의 선수상도 따로 수당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집을 사야하는데."

클럽하우스가 있긴 하다.

시설도 엄청 좋고, 웬만한 호텔급이다.

또 어머니가 친척들의 도움으로 얻은 집도 있다.

문제는 여러 운동 시설을 두기엔 큰 집이 아니라서.

개인트레이닝 팀과 효과적인 트레이닝을 위해서라면 집이 필요하다. 마당이 딸린 넓은 집.

그런데 런던의 집값이 어마어마하다.

"골 좀 많이 넣어야지."

동기부여 제대로 된다.

***

올리비에 지루는 유로파의 사나이라고 불린다.

유로파리그에서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준다. 첼시가 유로파 우승을 차지한 시즌에서는 득점왕과 최다 공격 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이번 시즌도 저번 예테보리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번 홈에서 열리는 경기에서도 선발이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장염에 걸려 엔트리에서 이탈했다.

"LEE는 리그에서 써야죠."

"홈경기고, 이미 원정 3득점을 했습니다. LEE는 10대에요. 그렇게 보이진 않긴 하지만요. 10대 선수는 금세 지치는 법이죠."

"음. 그래. 바추아이는 요즘 어때?"

"시즌 시작하자마자, 경미한 부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유로파 본선이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

유로파 최종 플레이오프 2차전에 힘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첼시의 3옵션 스트라이커, 미키 바추아이(Michy Batshuayi)가 출전했다.

문제는.

삑-삑!

"제프. 5분 동안 빠르게 몸 풀어라."

필마르크 감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 수비의 위험한 태클에 바추아이가 쓰러졌다. 급하게 뛰쳐나간 의료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벤치를 향해 손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결국, 전반 9분, 휴식을 위해 벤치에 앉았던 제퍼슨이 투입됐다.

[바추아이의 부상, 지난 경기 웨스트햄전에서 해트트릭, 울브스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LEE가 교체 투입됩니다.]

[LEE의 투입에 홈팬들이 환호하네요.]

[카메라에 LEE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어린 꼬마가 보이네요. 하하! LEE의 인기가 벌써 대단합니다.]

예텐보리는 3골 이상을 넣어야 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경기를 뛰었다.

거칠고, 강하게.

2군과 어린 선수들로 로테이션을 한 첼시 선수진이 일순 당황할 정도였다.

[제퍼슨이 다소 굼떠 보이네요.]

[아무래도 풀타임 경기를 치룬지 삼 일밖에 안됐으니까요.]

제퍼슨도 투입 직후 특출 난 활약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체력적으로 아직 회복이 안 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교체 투입 전에 몸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들어갔다.

0대 0의 흐름.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거칠고 미친 듯이 전방 압박을 하는 예텐보리 선수들.

제퍼슨도 거친 몸싸움에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의 몸에 부딪혀 봤자 넘어지는 건 상대 수비수들이지만,

충격은 계속해서 근육에 누적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EPL에 비교하면 확실히 압박이 약하지만.'

때로는 실제 실력보다, 동기부여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제퍼슨은 지금 그 경기의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어떻게든 득점을 기록해서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겠다는 예텐보리 선수들의 열망.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예텐보리 선수들은 제퍼슨을 강하게 압박했다.

'시간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어느 순간 무너질지도 몰라. 단 한 번, 의욕을 꺾어 버려야 해.'

제퍼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막말로 10분 동안 세 골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게 축구다. 약팀이 강팀을 5골 차로 이기는 자이언트 킬링도 가능한 스포츠가 축구다.

축구는 흐름의 싸움이고,

제퍼슨은 흐름을 박살 내기로 결심했다.

툭, 툭!

중앙에서 공을 잡고.

달려오는 수비 하나를 팬텀 드리블로 벗겨 낸 뒤에.

"Wuuuuuaaaaa!"

관중들의 환호 소리 속에서, 오른쪽으로 공을 길게 차고 달렸다.

단숨에 수비수 두 명을 스피드로 완벽하게 제쳤다.

그리고 슬쩍 중앙을 바라본 뒤에, 다시 방향을 꺾어 박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탱크처럼 묵직하고, 들소처럼 우직한 돌파.

그러면서도 발끝은 현란하게 공을 다뤘다.

"막아!"

수비들의 비명 같은 외침이 귀에 꽂히고,

오른쪽 측면에서 박스 바깥쪽으로 돌면서 파고든 제퍼슨은 골문을 흘깃 바라봤다.

그리고 수비와의 거리를 빠르게 계산하고, 왼발 인사이드로 공을 강력하게 감아 찼다.

뻐-엉!

완벽하게 감겨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골.

상대가 더 이상 역전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혼자서 수비를 무너뜨리는, 압도적인 골이었다.

0대 0의 흐름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오, 세상에! LEE! 제퍼슨 리가 결정짓습니다!]

[후반 69분! 제퍼슨이 왼발로 결정 짓습니다! 마치 아드리아누처럼 강력하게, 과거 첼시의 아자르처럼 돌파 후에 완벽하게 감아서 골을 집어넣네요!]

[첼시! 제퍼슨의 골로 유로파리그 본선에 진출 확정합니다!]

후반전 터진 제퍼슨의 깔끔한 골.

그리고 89분에 뒤늦게 예텐보리의 동점골이 터졌지만, 게임은 이미 끝났다. 1,2차전 총합 4대 1로 첼시가 유로파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막상 터널로 빠져나오는 제퍼슨의 표정이 영 좋지만은 않았다.

'피곤하네.'

***

EPL과 유로파를 병행하다 보니 일정이 빡세다.

이제 다음 달이면 리그컵, 그리고 그다음엔 FA컵까지 참여해야 하니.

새삼 EPL이 빡세다는 게 실감한다.

그래서 그런지 감독님은 날 따로 불렀다.

"몸은 괜찮나?"

"네. 나쁘지 않습니다. 약간 피곤하긴 하네요."

"체력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둬. 개인 트레이너 팀도 있다던데?"

"네. 미국에서부터 함께한 트레이너들이죠. 실력 좋아요."

"그런 것 같군. 10대 선수라면 지금쯤 벌써 한계를 보여야 하는데."

필마르크 감독은 코펜하겐에서 10대 선수들을 주로 썼다. 때문에 10대 선수가 비교적 성인 선수에 비교해 빠르게 지치고 무너지는 걸 잘 알았다.

뭐, 내 신체는 성인 신체를 뛰어넘지만, 지구력은 다른 문제라서.

사실 런던에 내 트레이너 팀, 율리아겐과 디 파코, 그리고 풋볼 대학코치 출신인 아놀드가 안 따라왔다면 지금쯤 나도 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EPL의 템포가 빠르고 거칠어 상대하는 선수의 압박도 차원이 달랐다.

빠르게 지치는 것도 문제였고, 90분 풀타임을 뛴 후 회복하려면 일주일이란 시간도 부족했다.

거기에 중간에 유로파까지 거의 풀타임에 가까운 시간을 뛰니.

솔직히 말해 나도 지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잘해 주고 있다. LEE. 널 믿었지만, 이 정도로 활약해 줄 줄은 몰랐어."

감독님은 진지한 말에 난 머쓱하게 웃었다.

"나에겐 솔직히 말해다오. 다음 경기, 맨시티전. 뛸 수 있겠나?"

난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하지만 6라운드 경기는 무리입니다."

"좋아! 6라운드는 휴식을 주지. 지루도 회복했으니까."

"감사합니다."

6라운드는 승격팀 더비와의 경기다.

율리아겐은 5라운드가 내 한계점이라고 명확하게 경고했다.

미국에서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까지 접목한 트레이닝 팀의 분석 결과.

5라운드까지는 버틸 만하지만, 6라운드부터는 부상 위험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던가.

다행이었다.

맨시티전은 나도 정말로 꼭 뛰고 싶었거든.

펩의 맨시티.

화려한 스쿼드와 전술적 완성도로, 현재 EPL의 최대 강자.

그들이 갖춘 선수진은 지금 유럽 최강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팀을 상대로 경기하는데,

빠질 수가 있겠어?

< 61. Real Blues (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