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57화 (57/258)

< 57.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3) >

"엿 같은 일정!"

첼시팬들의 심정이었다.

유로파 3차 예선, 리그 개막전, 2라운드 아스날전, 그리고 다시 유로파 플레이오프 1차전, 4일 후 바로 리그 경기.

리그 개막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정이다.

물론 경기가 많아 즐길 수 있는 팬들은 좋아하지만, 하필 이어지는 상대가 '웨스트햄'이었다.

런던을 연고로 하는 또 다른 라이벌 클럽.

비록 클럽의 명성은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라이벌 클럽은 그런 걸 다 무시할 정도로 치열하다.

"웨스트햄에게 지는 건 용서 못 해!"

"런던의 최고 클럽은 우리라고!"

"The Blues! 런던의 주인!"

져서는 안 되는 경기.

심지어 무승부도 용납할 수 없는 라이벌 경기.

그리고 웨스트햄은 사실 만만치 않은 전력의 팀이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사령탑을 잡았던 마누엘 펠레그리니(Manuel Pellegrini)는 명장이라 불러도 무방할 전술가였다.

선수진도 탄탄했다.

중위권 팀이지만, 기세만 타면 상위권까지 바라볼 만한 강팀.

때문에 3라운드는 체력적으로 지친 첼시가 불리하단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웨스트햄도 해 볼만 하단 얘기가 나왔다.

"아니요. 첼시가 이깁니다."

BBC 매치 프리뷰 방송.

잭 헤럴드의 단언에, 사회자는 눈을 크게 떴다.

헤럴드가 비교적 첼시에 우호적인 칼럼니스트이지만, 이렇게 단언했던 건 방송에서 처음이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9번의 저주를 깬 스트라이커가 스탬퍼드 브리지에 왔습니다. 첼시의 약점은 늘 그거였죠. 스트라이커의 부재. 나머지 선수진은 대단합니다. 수비부터 중원, 공격진까지. 마지막 퍼즐이 바로 스트라이커였죠."

"스트라이커라면, 'LEE'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제가 첼시의 승리를 장담하는 이유가 바로 'LEE' 때문입니다."

해설자가 다소 놀란 얼굴을 지었다.

"이거 의외네요. 저번 방송에서는 분명······."

"그를 영입하는데 5천만 파운드를 쓴 첼시 수뇌부를 비난했죠. 예. 인정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첼시 수뇌부들은 칭찬받아야 해요!"

"네?"

"적어도 나였다면, 그를 1억 파운드를 주고 내보내줬을 겁니다! 1억 파운드짜리 선수를 절반에 샀으니 칭찬받아야죠! 체흐 단장과 로만 구단주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헤럴드의 격렬한 발언에 사회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개막전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헤럴드는, 아스날전을 보고 'LEE'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제퍼슨 'LEE'는 1억 파운드짜리 선수!]

[유명 칼럼니스트 헤럴드, 1억 파운드를 5천만 파운드로 사기를 친 첼시 수뇌부에게 찬사!]

[1억 파운드의 사나이, 'LEE' 웨스트햄 상대로 3경기 연속 득점행진 이어갈까?]

***

"좋구먼."

올해 63세가 되는 할리는 오늘도 경기장으로 출근했다.

저녁 경기라서, 오후 2시의 경기장은 뜨겁고 한적했다.

할리는 조용한 경기장을 쭉 둘러봤다.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용광로처럼 들끓을 것이다.

40년.

그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사진을 찍어 온 시간이었다.

할리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카메라를 세팅했다.

"확실히 작년보단 분위기가 좋아."

할리는 올해 초반 분위기가 최근 시즌과 비교해서 남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홈과 원정을 모두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는다. 선수들이 그를 그랜파라고 부를 정도로 구단에겐 익숙한 얼굴이다. 심지어 로만 구단주도 할리를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를 할 정도다.

그만큼 첼시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할리였다. 할리는 오랜 경험으로 선수단의 분위기를 묘하게 읽을 수 있었다. 40년의 경험이 그저 얻은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할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카메라 렌즈를 닦았다.

"오늘은 아무도 안 다쳤으면 좋겠네."

웨스트햄전.

치열한 라이벌 경기라 부상도 잦다.

관중들끼리 다툼도 크다. 아마 오늘 경기장에 배치될 경찰의 수는 엄청날 터.

심지어 웨스트햄은 리그에서 인종 차별적인 구호를 가장 많이 하는 훌리건이 있지 않은가.

"그 어린 친구가 크게 맘 안 상했으면 좋겠군."

할리는 자신의 손녀딸이 최근 좋아하는 새로운 선수를 생각했다.

"오늘은 골 넣는 장면을 멋지게 찍어야지. 이쪽이 상대편 진영일 때 넣어 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손녀딸도 좋아할 테니까.

"여어! 벌써 카메라 세팅하쇼?"

"어. 브래던!"

브래던은 56살의 잔디 관리사다.

자칭 런던 제일의 잔디 관리인.

사실 그 말은 맞다.

한때 웸블리의 잔디를 맡을 정도였으니까.

그도 3대가 첼시의 서포터즈인, 아주 대단한 첼시팬이었다.

"잔디 깎으러 왔나?"

"아니. 오늘은 내버려 둘 거야."

"응? 그럼 잔디가 좀 길지 않나?"

"감독이 요구했어."

"짧은 잔디가 아니라?"

"응."

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루를 쓰려나?"

"롱볼 축구?"

"웨스트햄이 수비를 내려앉히는 팀은 아닌데."

잔디가 길고 건조하면 짧은 패스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즉, 롱볼 축구를 한다는 거다.

"LEE도 공중볼 잘 따지 않나?"

"그렇긴 한데. 일단 그 친구는 어떻게든 머리에 맞히기만 하는 느낌이던데."

할리는 과연 40년 동안 축구만 본 게 헛것은 아니라는 듯, 제퍼슨 본인이 걱정했던 점을 정확히 짚었다.

"그럼 지루 선발인가."

"조금 답답할 거 같은데."

"유로파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렸으니, 폼은 절정인거 같은데. 믿어 볼 만하지."

"뭐. 그렇지. 오케이. 알았어. 오늘 경기 끝나고 맥주나 한잔할까?"

"좋지!"

***

[EPL 3라운드 첼시 대 웨스트햄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첼시의 스타트 라인업입니다. 윌리 카바예로 골키퍼, 에메르송, 뤼디거, 크리스텐센, 아스필리쿠에타, 캉테, 메이슨 마운트, 코바치치, 풀리시치, 허드슨-오도이, 제퍼슨 리가 라인업을 구성하네요.]

[유로파에서 교체 출전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한 LEE가 이 경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원의 캉테, 공격진에는 LEE와 리그 첫 선발인 오도이를 주목해야겠네요.]

[요즘 폼이 좋지 않은 윌리안 대신 오도이를 투입한 건 생각할 게 많아 보입니다.]

[직선 드리블 돌파와 정확한 크로스가 장점인 선수죠.]

[아마도 오늘 양쪽 측면에서 크로스가 많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런던에 시퍼런 놈들은 필요 없어!"

"블루스를 박살 내 버리라고!"

"돈으로 런던을 산 놈들이야! 죽여 버려!"

웨스트햄 원정팬들은 소수였지만 목소리만큼은 대단했다.

살벌한 응원을 펼쳐 내는 가운데.

웨스트햄이 공을 잡고 천천히 볼을 돌렸다.

"음?"

웨스트햄의 주장 마크 노블(Mark Noble)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묘한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잔디가 길잖아?'

평소처럼 패스를 하는데, 느낌이 좋지 않다.

공이 느리다.

웨스트햄은 4-3-3의 전형을 유지해서, 전방에서부터 빠른 원투패스로 압박을 풀어내는 스타일을 유지한다.

한데 이런 식이라면, 빠르고 간결한 패스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그때.

[아-캉테! 캉테! 영리하게 마크 노블로부터 공만 빼냅니다!]

"······!"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체구.

첼시를 상대할 때마다 가장 위협적인 미드필더, 캉테로부터 공을 뺏겼다.

캉테는 볼을 잡고 망설임 없이 뛰어 들어가는 마운트에게 패스.

마운트는 공을 잡고 돌격 대장처럼 밀고 들어갔다.

"오-도이!"

오른쪽 측면으로 뛰어가는 오도이에게 긴 롱패스.

오도이는 첼시의 아카데미에서 발굴한 최고 유망주중 하나다. 작년부터 좋은 모습을 보였던 오도이는, 정확하고 깔끔한 킥이 장점인 선수다.

하지만 하필 그쪽 방향이 웨스트햄 원정팬이 있는 장소였다.

그가 공을 잡자마자, 엄청난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어린 선수인 오도이가 순간적으로 당황할 정도로, 엄청난 욕설. '어젯밤에 네 어머니하고······.'라고 시작하는 욕설에 오도이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수비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제기랄!"

잠깐 멈칫한 사이 압박해 오는 수비.

그 순간, 박스 안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달려드는 제퍼슨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오도이는 입술을 깨물고 크로스를 올렸다.

뻥-!

[아! 오도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크로스를 올립니다!]

오늘 전술이 그랬으니까.

필마르크 감독은 크로스를 자주하라고 요구했다.

오도이는 뒤로 백패스 대신, 크로스를 선택했다.

'아!'

하지만 웨스트햄 원정팬의 엄청난 욕설에 멘탈이 약간 흔들린 상황.

그의 발끝이 흔들렸고, 강도도 좋지 않았다.

깔끔했던 크로스가 이상한 궤적으로 꺾여 들어갔다.

얼마 만에 얻은 선발기회였던가.

하지만 첫 크로스부터 낭패······.

"어?"

오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오히려 빗맞은 킥은, 수비수들이 도저히 예측 못 할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에서 묘하게 꺾여 버린 것이다.

그 때문일까. 수비들이 위치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제----퍼슨! 제---퍼슨 공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뛰어오릅니다!]

아무도 공의 낙하지점을 못 찾는 가운데.

제퍼슨만이 벼락처럼 나타나 불쑥 솟구쳤다.

[제퍼슨! 벼락같은 헤더골! 완벽한 헤더! 엄청난 헤더! 오, 믿기지 않습니다!]

"대체?"

크로스를 올린 오도이가 얼떨떨해할 정도로.

잘못 맞은 크로스를 그대로 골문으로 넣어 버리는 완벽한 헤더.

오도이는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누가 보면 마치 짠 것처럼 크로스를 올리고 헤더를 넣은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리고 제퍼슨은 골을 넣고 오도이 쪽으로 다가왔다.

"오도이! 같이 세레모니 하자고!"

"뭐?"

친하지도 않은 선수가 어깨동무를 하더니.

방금 전 오도이에게 험한 욕설을 하던 웨스트햄 원정팬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마치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과 제스처.

그 모습에 원정팬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막아!"

"진정해!"

날뛰는 원정팬. 그리고 몸으로 막는 경찰.

제퍼슨은 씩 웃었다.

"봐봐. 오도이. 저런 놈들은 실력으로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해."

"허."

"이 형만 믿고, 크로스를 올려. 오도이."

"형?"

그 말에 오도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LEE. 네가 나보다 어려."

"아. 그런가?"

제퍼슨은 멋쩍게 웃더니 말했다.

"원래 축구 잘하면 다 형이야."

"······미친놈."

오도이는 왠지, 이 새로운 영입생과 친해지고 싶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제퍼슨의 도발적인 세레모니는 원정팬들의 심리를 제대로 건드렸다.

"개자식아! 죽어 버려!"

"빌어먹을 아메리칸! 네 다리를 분질러버릴 거다!"

"Shit! Shit! Shit!"

격렬하게 터져 나오는 반응.

하지만 제퍼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는 제스처.

원정팬은 눈이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었고, 홈팬들은 그런 제퍼슨의 모습에 오히려 미친 듯이 환호했다.

"이거지!"

"저 자식 마음에 들어! 역시 미국인이라 그런가? 화끈해!"

"멋있어!"

"우리 팀에도 저런 친구가 한 명쯤은 있어야지!"

"좋아! 넌 우리 Blues의 일원이야!"

그리고 이런 제퍼슨의 행동은, 블루스의 마음을 얻었다.

고작 리그 3라운드.

제퍼슨은 팀의 일원으로 팬들에게 완전하게 받아들여졌다.

***

웨스트햄의 공격진의 이름값은 사실 중위권팀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다.

"Gooo---!"

긴 롱패스를 치차리토가 발등으로 받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필리페 안데르손(Felipe Anderson)에게 패스.

안데르손은 화려한 발재간으로, 우리팀 에메르송을 제치더니, 그대로 돌파했다. 그리고 슈팅 모션을 취하다가 뒤로 컷백.

달려오던 마누엘 란지니(Manuel Lanzini)가 캉테의 수비를 떨쳐 내면서 강력한 인사이드 중거리 슈팅을 꽂아 넣었다.

"Gooooooaaaal!"

"Hammers! Hammers!"

"정신차려! 에메르송! 오늘 왜 그래? 어!"

감독님이 벤치에서 거칠게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오늘 왼쪽이 영 좋지가 않다.

"음."

에메르송은 무리하게 오버래핑을 시도하다가 공간을 내주기 일쑤였다.

그 공간을 커버하기 위해 풀리시치는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그러다 보니 왼쪽에선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팀은 오른쪽 측면이 리그 어느 팀보다 막강했다.

"LEE!"

"?"

"수비수들이 견제하는데도 빠르게 뛸 수 있겠어?"

팀의 캡틴이자, 라이트백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César Azpilicueta)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브레이킹이요?"

"라인 브레이킹까진 필요 없어. 내가 오버래핑을 시도하다가 여차하면 얼리크로스를 올릴 거야. 잡을 수 있겠어?"

그 말에 난 씩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죠."

< 57.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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