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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54화 (54/258)

< 54. 9번의 저주 (5) >

삑, 삑.

연습 경기가 끝났다.

세 골을 터뜨리긴 했지만, 솔직히 이 플레이를 실전에서 보일 수는 없다.

우선 내 상대였던 퀴르 주마와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은 EPL에서도 알아주는 수비진이다.

오늘 내가 골을 넣은 건, 그들이 나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짧은 시간, 내가 모든 역량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전은 90분이다.

내 약점은 지구력이다.

이번 연습 경기처럼 풀타임 내내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 없다.

그리고 상대 수비수들도 경기 전에 나에 대한 분석을 충분히 해 올 테고.

경기 템포와 압박 강도, 그리고 동기부여까지.

모두 실전보다는 연습경기가 훨씬 널널하다.

그렇다고 내가 연습 경기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Lee? 음 제퍼슨?"

"크리스텐센."

나에게 연신 불만을 감추지 못했던 크리스텐센이 멋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그냥 편하게 제프라고 불러."

"아, 그래. 제프. 어······ 음. 미안하다. 대단한 걸. 정말, 못 막겠더라. 내가 널 너무 무시했던 거 같아. 사과할게."

난 씩 웃었다.

이래서 스포츠가 좋다.

스포츠만큼 '실력'하나로 명확하게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분야가 있을까.

나는 웃으면서 크리스텐센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젠 우린 팀이니까. 날 상대하면서 골 먹힐 걱정은 안 해도 돼."

"······미국인은 원래 그렇게 쿨한 거야?"

크리스텐센도 멋쩍게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툴툴거리다가 사과를 하려니 얘도 멋쩍은 거다.

하지만 뭐 시간이 흐르고, 내가 좋은 플레이를 계속 보여 주면 서서히 이 어색한 관계는 좋아지리라.

급할 건 없다.

"제-프!"

감독님이 날 불렀다.

"당장 다음 경기 선발로 나갈 준비해!"

물론이죠.

그럴려고 무리해서라도 내 실력 보여 준 건데.

***

"제퍼슨 리. 이 친구 어때?"

"솔직히 말해,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전력 분석관의 말에 아스날의 감독, 우나이 에메리(Unai Emery)는 미간을 좁혔다.

전력 분석관은 세비야 시절부터 함께 해 온 그의 친구였다.

신뢰할 수 있는 좋은 파트너였다.

그래서 분석관의 의견은 사실 다른 스태프들의 의견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분석관의 딱딱한 어조에 에메리의 얼굴도 굳었다.

"그 정도야?"

"현재 EPL에서 LEE에 대한 데이터를 가장 많이 가진 구단이 첼시 다음으로 저희와 맨시티일겁니다. 우리는 그를 영입하려 했으니까요."

때로는 아는 게 많을수록 걱정할 게 많아진다.

지금 아스날의 경우가 그랬다.

제퍼슨 리의 영입을 타진했을 만큼, 그에 대한 분석 자료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전력 분석관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극도로 위험한 선수입니다. 우리 아스날은, 다음 경기에서 그를 방어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음!"

에메리 감독이 신음을 삼켰다.

"그 정도인가? 우리가 가진 데이터는 MLS잖아. 거기 수비의 압박과 템포는 EPL과 비교도 안 돼."

세비야에서 유로파 우승을 여러 번 차지했던 에메리다.

그런 에메리도 EPL의 거친 플레이와 빠른 템포에 정신 차리지 못하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질문에 분석관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개막전에서 보여 준 움직임은······."

"상대는 미들즈브러야. 승격팀이고, 승격한다고 팀을 다 갈아엎어서 수비진도 호흡을 처음 맞춘 상태였어."

"네."

"하지만 우리는 변함이 없지. 참나. 구단에 돈이 없다고 수비진을 개편 못 한 것이, 오히려 호흡이 잘 맞아떨어지는 거라고 좋아할 수 있다니."

에메리의 자조적인 말에 분석관은 쓰게 웃었다.

어찌 됐건 그를 막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온 의견은.

"10대 선수인 만큼, 신경을 긁어야죠."

"그가 쉽게 흥분하는 성격으로 보이나?"

"동료 선수가 당하면 보복성 플레이를 했던 모습이 MLS에서 있었습니다. 덕택에 루카스 그레이엄이란 선수는 두 경기 동안 평점 3점을 받았죠."

"허!"

"그러니까 적당히 신경을 긁을 수 있는 선수로······"

"소크라티스가 좋겠군."

"그렇죠. 투사니까요."

"그리고 파트너로는 체임버스가 그나마 낫겠군."

"수비진에서 그를 잘 막으면, 우리 공격진이 충분히 첼시의 수비를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렇게 준비하지."

에메리 감독은 손뼉을 짝 부딪쳤다.

분석관은 고개를 간단히 숙이고 나가려는 찰나.

에메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LEE'를 영입하지 못한 게,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런데 때로는 그 강렬한 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분석관은 불길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그 말을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리그 2라운드.

개막전에서 뉴캐슬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2라운드에서 라이벌 구단을 상대로 이긴다면.

아스날은 기세를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꼭 잡아야 하는 경기였다.

***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Emirates Stadium)은 킥오프까지 한 시간이 남았는데도 엄청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런던 더비.

런던을 대표하는 최고의 클럽은 어디인가?

매 시즌 나오는 질문이다.

양 팀은 중요한 순간마다 서로 발목을 잡았고, 팬들끼리도 자주 부딪쳤다.

첼시는 풀럼이나 토트넘보다 아스날을 런던 최대의 라이벌로 꼽기도 했다.

특히 저번 시즌, 첼시는 리그 6위. 아스날은 4위로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냈기 때문에, 지금 아스날을 바라보는 첼시팬들의 심정은 복잡했다.

"Good old Arsenal!"

아스날의 응원가가 경기장을 뒤흔드는 가운데, 아스날 선수들과 첼시 선수들이 워밍업을 위해 필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발표되는 라인업.

그 라인업을 보고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와 씨! 이거 뭐야?"

"올리비에 지루, 제퍼슨 리."

"뭐야? 투톱이야?"

"미친!"

근래 들어서 점점 보기 힘들어지는 투톱 전술.

올리비에 지루와 제퍼슨 리의 투톱이 아스날 원정경기에서 나타났다.

***

내가 저번에 말했던가.

필마르크 감독이 나중에 불릴 별명이 '스트라이커 성애자'라고.

그 말대로, 필마르크 감독은 스트라이커 수집을 좋아했고, 또 라인업에 잔뜩 올리는 것도 좋아했다.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4명 출전이 있었지.'

한때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던 적이 있다.

투톱에 스트라이커 두 명, 양쪽 윙어에 또 스트라이커 두 명.

라인업에 네 명을 넣은 적이 있을 정도.

'놀라운 건, 그 네 명이 전부 다 득점했었고.'

그 이후에 필마르크는 스트라이커 성애자, 그리고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는 감독이란 찬사를 받았다.

올리비에 지루는 확실히 감독님이 원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연습 경기에서 보여 준 모습으로, 지루와 함께 투톱을 선다면 파괴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리.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나하고 주전 경쟁을 할 줄 알았던 지루는, 뜻밖의 투톱에 웃으면서 어깨동무를 걸어왔다.

뭐, 지루 정도면 베테랑이고, 연계만큼은 기가 막히게 해 주는 선수니까.

"잘 부탁해요. 지루."

감독님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말씀하셨다.

'스트라이커가 두 명이니까, 골도 두 배로 터지겠지?'

흠.

갑자기 든 생각인데.

스트라이커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는 감독이란 칭호가 붙기에는 아직 부족한 건 아니겠지?

***

[EPL 2라운드 최대의 빅매치입니다! 아스날과 첼시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맞붙습니다!]

2라운드 최대 빅매치.

런던 더비가 심판의 휘슬과 함께 시작됐다.

아스날 홈팬들의 뜨거운 응원가가 경기장을 울리면서 시작된 경기는, 첼시의 선축으로 시작됐다.

첼시는 공을 잡고 천천히 볼을 돌렸다.

아스날도 처음부터 빠르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탐색전.

4-4-2의 첼시와는 다르게 아스날은 4-2-3-1의 전형적인 포메이션이었다.

이 포메이션은 미드필더 싸움에서 첼시에게 확실히 우위를 지닐 수 있었다.

"Good old Arsenal!"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술적 상성은 분명 존재하지만, 때로는 그 상성을 무시하는 선수가 존재한다.

[캉-테! 다시 공을 잡습니다!]

홀딩형과 중앙 전천후를 오가는 캉테는, 숫자가 부족한 중원에서 두 명분의 몫을 해내는 대단한 선수다.

중원에서 아스날의 패스를 차단한 캉테는 곧바로 전방을 바라봤고, 그대로 공을 뻥 찼다.

"막아!"

아스날의 수비수, 소크라티스 파파스타소풀로스(Sokratis Papastathopoulos)는 눈을 번뜩였다.

'누구냐!'

지루와 제퍼슨 리, 둘 다 키가 크고 포스트 플레이에 능하다.

과연 저 롱패스는 누구에게 향하는가 싶던 소크라티스는 원래 자신의 맨마킹이었던 제퍼슨에게 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루가 뛰어올랐다.

포스트 플레이에 엄청난 장점이 있는 지루.

수비수 체임버스보다 더 높이 뛰어올라 이마에 공을 맞혔다.

그리고 그 공은 곧바로 제퍼슨에게 떨어졌다.

"The Blues!"

소크라티스는 본능적으로 제퍼슨에게 어깨를 밀어 넣었다.

먼저 수비 위치를 선점하고 공을 차단하려는 속셈.

그 순간.

퍽!

"컥!"

순간 트럭과 부딪치는 강렬한 충격에 소크라티스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제퍼슨이 반박자 먼저 자리를 잡고 어깨를 밀어 넣은 것이다.

둔중한 충격에 소크라티스는 신음을 삼켰다.

'미친!'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은 뭔가.

소크라티스도 파이터형 수비수로 유명하다. 웬만해선 공격수와 경합에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마치 튕겨 나가는 듯한 충격에 소크라티스는 기겁했다.

'잡아야 해!'

그래도 상황 파악은 빨랐다.

지루의 포스트 플레이. 그리고 공을 받고 치고 들어가는 제퍼슨 리.

단숨에 수비 두 명이 벗겨졌다.

소크라티스는 이를 악물고 제퍼슨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역습을 당하는 순간, 동료 선수들에게 수비 위치로 전환하는 데 시간을 벌어 주는 플레이를 자주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거칠고, 터프하게!

마치 영화 300의 투사처럼.

그러나 그런 거친 플레이도, 일단 몸을 부딪쳐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차례 소크라티스를 이겨 내고 폭발하기 시작한 제퍼슨의 가속도는 소크라티스가 따라잡기엔 너무나 빨랐다.

그리고 튀어나오는 골키퍼를 향해 강력한 슈팅!

뻐엉!

"아!"

하지만 골키퍼, 베른트 레노(Bernd Leno)의 엄청난 선방에 공은 골라인으로 빗겨 나갔다.

"와, 씨!"

"미쳤다!"

"먹힐 뻔 했다고!"

순식간에 이뤄진 롱패스, 그리고 지루의 헤딩과 제퍼슨의 빠른 돌파에 이은 슈팅.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실점 위기에 아스날 팬들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위협적인 순간이었다.

만일 레노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분명 먹힐 만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소크라티스는 입술을 깨물며 제퍼슨을 바라봤다.

"이거, 오늘 쉽지 않겠는데."

***

"와, 미쳤다. 제프 엄청나게 잘하는데?"

"오히려 토론토에서보다 더 잘하는 거 같아!"

"대단하다."

토론토 FC의 클럽하우스.

이른 아침인데도 산티아고와 로드릭은 모여서 제퍼슨의 경기 중계를 봤다.

같은 나이, 같은 동료였지만.

그들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비교도 할 수 없게 잘하는 선수라고.

그리고 미국 리그를 한없이 무시하는 저 유럽 애들에게, 제퍼슨이 한 방 먹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제-프! 유럽 무대도 부숴 버리라고!"

< 54. 9번의 저주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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