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9번의 저주 (4) >
한 경기 활약만으로 9번의 저주가 깨졌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적어도, 데뷔전에서 보여 준 제퍼슨 리의 활약은 기대를 심어 주기엔 충분했다.
[LEE의 플레이, 블루스들은 어떻게 생각해?]
[무슨 말이 필요해? 2골 1어시스트! 그가 승리를 결정지었어.]
[물론 그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계속 갈 수 있을까?]
[오, 세상에. 너희들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데뷔전에서 2골 넣은 선수를 믿어야지!]
[하지만 상대는 미들즈브러잖아. 그가 아니어도, 지루든, 풀리시치든, 윌리안이든 어떻게든 골을 넣었을 거란 말이지.]
[그럼 다음 경기를 보자고.]
[다음 경기?]
[그래. 아스날 전이잖아.]
2라운드, 아스날 전.
아스날은 미들즈브러와 비교도 되지 않는 강팀이다.
한때는 무패 우승이란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고, 꾸준히 대륙간 컵대회에 진출하는 강팀이다.
비록 우승한 지는 오래된 팀이지만 EPL의 상위권을 늘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제퍼슨이 9번의 저주를 확실히 깰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은 2라운드에 달렸다.
[한번 보자고. 과연 그가 9번의 저주를 확실히 깰 수 있는 스트라이커인지.]
팬들의 모든 관심이 2라운드에 쏠렸다.
***
감독님은 개막전이 끝나고, 나에게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다음 경기 널 선발로 쓰면, 믿음에 보답해 줄 수 있겠어?"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이란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기회란 찾아왔을 때 잡아야 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이긴 했다.
나는 5개월 동안 MLS를 뛰고 왔으니까.
그러나 트레이닝 팀도 런던으로 같이 왔다. 그들의 치열한 노력 끝에, 아직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60분 동안 두 골을 넣었습니다. 90분이면, 문제없죠."
"상대는 아스날인데?"
"아스날이라고 해도, 필드에는 11명이 있는 건 똑같으니까요."
내 대답에 감독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이번 훈련에서 좀 보여 줘라."
"네?"
"아직 너에 대한 불만을 가진 선수가 있거든."
감독님의 말은 사실이었다.
동료 대부분이 나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특히 개막전에서 나에게 어시스트를 선물 받은 캉테는 날 보며 자주 웃어 줬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특히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 많은 지출을 한 것에 불만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저기 반대편에서, 나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는 수비수.
이름이······.
맞다,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Andreas Christensen)이었지.
***
'미쳤어.'
크리스텐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영입은 당연했다.
한데 그 선수가 고작 19살이 되는 어린 선수라니? 심지어 대단한 리그에서 활약한 것도 아닌, 변방이나 다름없는 미국리그 출신이다.
'9만 파운드나 받는다고?'
크리스텐센은 못마땅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미쳤어. 19살 애송이한테?'
이적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구단은 제퍼슨의 영입에 한 발 빼려는 모션을 취했다.
그러나 필마르크 감독이 강력하게 영입을 요구하면서 끝내 영입하게 된 케이스다.
필마르크 감독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상황. 선수단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크리스텐센은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영입이야. 유스 시절부터 뛰었고, 잉글랜드 국대까지 갔다 온 타미가 이제 5만 파운드를 받아. 그런데 그 9번 자리를 빼앗고 9만 파운드를 준다고?'
사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유스에서부터 같이 뛰었던 타미 아브라함.
그는 첼시에 많은 공헌을 해 왔고, 작년에는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물론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해서 9번이란 등번호를 유지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제 갓 영입된 애송이의 어떤 면을 믿고 9번을 주며 9만 파운드를 준단 말인가.
물론 첫 경기 득점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상대팀은 미들즈브러였지 않은가?
크리스텐센은 그 한 경기만으로 제퍼슨을 완전히 인정할 수 없었다.
"미국 놈들 돈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해."
크리스텐센은 대놓고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못 들을 필마르크가 아니었다.
'역시. 화합이 문제인가.'
그가 파악한 첼시라는 클럽은 선수단 화합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해는 되는데.'
물론 자신이 선수여도 이해가 된다.
갑자기 영입된 녀석이 엄청난 주급에, 친했던 선수의 등번호까지 빼앗았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이건 제퍼슨이 해결해 줘야 한다.'
크리스텐센은 프로 선수다.
비록 지금은 불만을 표하지만, 제퍼슨이 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 주면 수긍할 것이다.
"좋아! 모두 모여! 연습 경기다!"
***
"제-퍼슨. 난 너랑 같은 편 할래."
"나도."
풀리시치와 시셀도가 다가왔다.
팀 내 자체 청백전.
그리고 감독님은 이 연습 경기를 시작하게 앞서 확실하게 말했다.
'찍어 눌러 버려. 불만이 쏙 들어가게끔.'
나에게 불만을 가진 선수는 몇몇 있다.
그들을 모두 내 편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도 프로 선수다.
프로판에서 실력만큼 가장 확실한 증명방법이 뭐 있겠는가.
실력으로 보여 주면 된다.
그래 놓고도 수긍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애당초 그런 선수니까. 개막전에서 내가 보여 준 퍼포먼스로는 아직 불만을 다 해소하기에 어렵다는 거지.
삐익.
경기가 시작됐다.
주전과 비주전을 적당히 섞은 양 팀이 빠르게 부딪쳤다.
아직 리그 초반.
감독의 베스트 일레븐은 정해지지 않았다.
때문에 연습 경기는 치열했다.
공의 소유권을 주고 양 팀의 중원이 거칠게 부딪쳤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내 반대팀에 캉테가 있었다.
캉테는 엄청난 활동량과 압박으로, 우리 중원을 휘저었다.
캉테와 오래전부터 같은 팀이었던 드링크워터가 공을 빼앗겼고, 캉테는 빠른 몸놀림으로 전진해 왔다.
수비형 미드필더부터, 전천후 미드필더까지.
세계적인 미드필더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난 그걸 가만히 볼 생각이 없었다.
"풀리식! 올라가!"
풀리시치를 전방으로 보내고.
나는 빠르게 밑으로 내려갔다.
감독님은 오로지 골만 제대로 넣는 스트라이커를 원하지만,
이왕이면 골도 제대로 넣고 압박도 잘하는 공격수면, 더 좋지 않겠는가?
퍽!
"음!"
후방까지 내려가 전진하려는 캉테를 강하게 압박했다.
거칠게 몸싸움을 걸었다.
캉테는 신음을 삼키며 휘청거렸고, 공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뛰어가던 풀리시치에게 가볍게 밀어 넣는 패스.
"오!"
풀리시치는 공을 받은 후 라인을 타고 들어갔다.
동시에 나는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달려갔다.
캉테가 따라붙으며 수비에 힘썼지만.
공 없이 달리는 내 스피드는 캉테조차 따라잡기 힘든 것이었다.
풀리시치와 한 번 시선을 마주치고, 그가 높은 크로스를 올렸다.
박스로 파고듦과 동시에 중앙 수비수, 크리스텐센과 같이 뛰어올랐다.
"······흡!"
높이 떠오르는 크로스.
국가대표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춘 풀리시치는 내가 원하는 타점에 정확히 크로스를 배달했다.
그리고 크리스텐센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으로 무너졌고,
나는 이마에 정확히 공을 맞혀 골문을 철렁였다.
"골!"
"좋았어!"
우리 팀 선수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를 보냈다.
나는 쓰러진 크리스텐센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툴툴거리지 말고, 한번 제대로 막아보라고."
"······!"
***
'미치겠군.'
크리스텐센은 신음을 삼켰다.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저돌적인 돌파에 숨이 턱하니 막히는 기분이었다.
제퍼슨은 그야말로 '탱크'였다. 특별한 개인기 없이 단순하고 묵직한 돌파에 굳게 버틴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음먹고 맞부딪치면 가슴팍이 얼얼할 정도였다. 그 충격이 계속 누적되다 보니, 이제는 부딪칠 때마다 몸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약했나?'
크리스텐센은 자신 정도면 제법 괜찮은 몸싸움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생각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지금 제퍼슨하고 부딪치면서.
'피지컬은 괴물이야.'
인정했다.
장신과 두꺼운 근육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크리스텐센은 치열하게 싸웠지만 계속해서 밀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툭!
"······!"
거칠게 몸을 부딪치고, 살짝 생기는 빈 공간을 향해 욱여넣는 슈팅.
"미쳤군."
"개막전에 보여 준 활약이 운이 아니라 이거지."
"슈팅 때리는 것 봐. 발목 힘이 장난 아니야."
"크리스텐센이 오늘 아주 혼쭐나는데?"
"저 녀석, 진짜 공 좀 찰 줄 아는데?"
또 한 번 그물이 흔들렸다.
경기를 지켜보던 코치와 선수들의 수군거림이 점점 번져갔다.
당연히 연습 게임에서 두 골을 기록한 제퍼슨의 평가는 상승.
그리고 그를 막지 못한 크리스텐센의 평가는 비교적 박했다.
'제기랄!'
계속해서 뚫리자 크리스텐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거는 뭐 기술이고 뭐고 필요 없다. 몸으로 부딪치는 데 버틸 재간이 없다.
'그래. 미국 최고 유망주라 이거지?'
막상 상대해 보니 미들즈브러 수비수가 왜 막지 못하고 무너졌는지 이해가 된다. 자신이어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제퍼슨을 인정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주마. 네가 몸으로 싸워 줘. 공은 내가 뺏을게."
피지컬 괴물은 이쪽에도 있다.
퀴르 주마(Kurt Zouma)
프랑스의 센터백으로 190cm의 신장에 96kg의 체중.
EPL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피지컬을 지닌 수비수.
크리스텐센은 주마와 협력 수비를 시도하며 제퍼슨을 괴롭히기로 했다.
'좋아 인정한다고. 그렇다고 네가 9번을 달고 9만 파운드를 넘게 받아갈 놈은 아니야.'
확실히 대단한 선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순히 피지컬 능력만 따지면, 굳이 저 엄청난 이적료와 주급을 주지 않고도 영입할 자원이 분명 유럽 어딘가에는 있었다.
크리스텐센은 주마와 협력수비를 펼쳤다.
주마가 부딪쳐주고, 크리스텐센이 공을 뺏는 플레이.
그러자 제퍼슨은 저돌적인 돌파를 멈췄다.
'통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제퍼슨의 몸이 우아하게 돌더니, 오른쪽을 파고드는 윌리안에게 아름다운 패스를 찔러줬다.
"······!"
크리스텐센과 주마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수비벽을 허물고 정확한 빈틈을 노리며 빠지는 패스.
윌리안은 공을 잡고, 한 번 접은 뒤에 때렸다.
"아!"
다행히 골대를 스치는 슈팅.
골은 먹히지 않았지만, 크리스텐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대체 저 패스는 뭔데?'
어떻게 그 빈 공간을 본거지?
커트 주마가 압박하고, 크리스텐센이 태클을 하는데,
공간을 보는 시야와 과감한 패스.
'도대체 무슨 선수야?'
크리스텐센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제퍼슨 리.
그 이름이 심장을 무섭게 옥죄어 왔다.
***
감독님이 원하는 건 골을 잘 넣는 골게터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골을 완벽하게 집어넣는 스타일.
하지만 난 생각했다.
'골게터가 패스도 잘하면 더 좋지 않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골도 잘 넣고, 패스도 잘하면 더 좋지 않을까.
난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재능을 필마르크 감독 앞에서 보여 줬다.
'어떤 플레이를 지시해도, 그 플레이를 해낼 수 있는 선수라는 걸.'
그런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준다면,
감독님은 나를 쓰지 않고 못 배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껏 싸웠다.
사실 처음 목적은 나에게 불만을 가진 크리스텐센을 설득하는 거였지만.
지금은 목적이 바뀌었다.
'쇼케이스다.'
다음 경기뿐만 아니라, 그다음, 다다음 경기까지.
내가 주전 스트라이커라고. 내가 9번을 달고 있는 핵심 공격수라고 감독님 앞에서 시위한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골게터 능력까지 덤으로 보여 주고.
퍽!
튀어나와 몸으로 부딪쳐 오는 퀴르 주마.
과연 대단하다.
나보다 체중이 더 나가고 키도 크다.
그렇지만 내가 밀리는 건 아니다.
본래 러닝백은 120kg이 넘는 거구의 디펜스맨들을 상대로도 뚫어내는 괴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나에게 퀴르 주마 정도라면.
절대 무섭지 않다.
"윽!"
달려오는 커트 주마를 팔로 한번 밀쳐 내고.
공을 살짝 잡은 뒤에.
골대 우측 모서리를 향해 인사이드 슈팅을 정확히 감아 찼다.
그리고.
"미친! 연습 경기에서 해트트릭이야!"
상대 수비수들이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 팀 선수들도.
1군과 2군 모두 섞인 이 연습 경기에서.
선수들은 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첼시의 새로운 9번은 나라는 사실을.
< 53. 9번의 저주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