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9번의 저주 (3)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첼시에는 9번의 저주가 있습니다. 9번을 달았던 선수는 모두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얘기죠.]
해설진의 얘기에 펍(Pub)의 첼시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9번의 저주!"
"마테야 케즈만부터였던가? 에르난 크레스포가 그나마 좀 잘했고."
"페르난도 토레스? 그 자식 이름은 꺼내지도 마!"
"라다멜 팔카오도 있잖아!"
"빌어먹을. 모라타 그 자식도 AT마드리드로 영영 꺼졌으니, 이제 그 이름 듣기도 싫어!"
하나같이 대단했던 선수들.
마테야 케즈만부터 알바로 모라타까지.
엄청난 기대를 모으고 영입된 9번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 후로 9번의 저주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전 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벌였어도, 첼시에서 9번만 달면 기대와 달리 저조한 성적을 보이는 것.
첼시는 언제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를 노리는 팀이다.
득점을 해 줄 스트라이커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18~19시즌까지는 에당 아자르라는 걸출한 월드클래스가 있어서 그나마 나았다.
문제는 아자르가 떠난 이후였다.
새로운 9번은 팀의 유망주 타미 아브라함이었고,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은 보여 주지 못했다.
다른 라이벌팀인 토트넘의 해리 케인이 시즌마다 득점왕 경쟁을 펼치는 것과는 무척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이 나타난 9번의 데뷔골은, 그야말로 런던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LEE! 제퍼슨 리! 미국에서 온 어린 공격수가 데뷔전 득점에 성공합니다!]
[오, 세상에! 엄청난 골입니다! 드링크워터의 긴 패스를 아름다운 터치로 붙잡고, 골키퍼의 머리를 넘기는 동작에 이은 간단한 슈팅까지!]
[주목하십시오! 미국의 원-더보이가 첼시의 새로운 9번으로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첼시! 개막전, 제퍼슨의 동점골로 1대 1, 경기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맙소사! Fucking lovely!"
필마르크 감독은 저도 모르게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들어가자마자 호쾌한 중거리 슛으로 번뜩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골키퍼를 제치고 농락하는 멋진 골까지 보여 줬다.
그 강력한 한 방에 필마르크는 등골에 짜르르 전율이 흘렀다.
그는 전율을 느끼며 거칠게 소리쳤다.
"내가 원했던 스트라이커가 바로 저런 거라고!"
그가 추구하는 전술의 핵심은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어야지. 바로 지금 저 자식처럼!"
득점력.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든, 어떤 자세로든, 무조건 득점을 성공시키는 게 바로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현대 축구에서 스트라이커에게 많은 게 요구된다.
강력한 전방 압박, 후방까지 내려오는 엄청난 활동량과 동료 선수들과의 연계 플레이.
그러나 필마르크가 요구하는 필수 사항은 아니었다.
"활동량? 그딴 거 없어도 돼!"
골만 잘 넣으면 활동량이 대수겠는가?
"전방 압박? Fuck! 압박할 시간에 슈팅을 한 번 더 때려야지!"
슈팅만 잘하면 압박할 필요조차 없다.
"연계 플레이? 뭔 개소리야? 스트라이커는 혼자서 골을 넣어야지!"
하지만 의외로 이런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는 근래 보기 힘들다.
많은 감독이 전술에 완벽하게 녹아드는 스트라이커를 요구하면서, 골만 잘 넣는 스트라이커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한데 방금 보여 준 제퍼슨의 첫 득점은, 그가 바라던 스트라이커의 전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연계도, 패스도, 전방 압박도.
그 모든 게 필요 없는.
혼자서 수비를 부수고 들어가 골키퍼까지 농락해 버리는 스트라이커의 전형.
"뭐? 5천만 파운드가 비싸다고? 하하하하! 올해 들어 본 말 중에 가장 웃긴 개소리야!"
필마르크 감독은 과격하게 소리쳤다.
"The Blues! 우리 팀의 9번을 보라고! 저게, 저게 바로 스트라이커라고!"
뜨겁게 달아오른 스탬포드 브리지.
비록 이제 한 골이지만.
필마르크 감독은 제퍼슨에게서 느꼈다.
타고난 골잡이의 향기를.
***
[Blues의 새로운 9번! 너무 사랑스럽다! #제퍼슨 리 #9번 #첼시 #The Blues]
[9번의 저주? 좆 까라 해! #제퍼슨 리 #스트라이커]
[지금까지 스트라이커에 투자했던 돈을 생각하면, 지금 제퍼슨에게 쓴 돈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아! #제퍼슨 리 #9번]
***
역습은 언제나 짜릿하다.
세트피스는 내려앉은 팀이 득점할 좋은 기회다.
반대로 역습 한 방에 무너질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정확히 노렸다.
'지루랑 비슷한 유형이라고 생각했겠지.'
큰 키와 건장한 체격.
나는 얼핏 보면 타겟터에 가까운 체형을 가지고 있다.
순간적인 스피도로 역습하는 형태에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을 터.
"첼시! 첼시! 첼시! 첼시!"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팀을 연호하는 우리 팬들의 응원가 아래.
"캉-테!"
우리 팀 7번, 은골로 캉테(N'Golo Kanté)가 볼을 잡았다.
"Wooooooaaaa!"
첼시가 가장 사랑하는 선수. 캉테가 공을 잡고 상대 미드필더를 밀쳐 내면서 전진 드리블을 펼치자 스탬퍼드 브리지가 일제히 울린다.
빠른 발과 낮은 무게 중심.
거친 몸싸움에도 밀리지 않는 힘으로 순식간에 저돌적인 돌파.
그리고 우측 대각선으로 향하는 패스.
"윌리안! 윌리안!"
공을 부드럽게 받은 윌리안은 발재간만큼은 대단한 선수였다.
흑인 특유의 유연성과 탄력까지 가졌다.
역시 브라질 선수는 다르구나.
"죽여 버려!"
"미들즈브러를 죽여 버리라고!"
나도 본능적으로 틈을 파고들었다.
"윌리안!"
손을 들어올리며 달려들었지만,
아쉽게도 돌아오는 패스는 없었다.
윌리안은 한 차례 공을 끌었다.
음.
날 못 믿는 건가. 아니면 스타일이 원래 저런가.
하기야, 이제 나는 첫 경기다. 호흡 한 번 맞춰 보지 않은 사이니까.
윌리안은 다소 무리하면서 공을 접었다.
그사이 미들즈브러의 수비는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막아!"
이미 단단히 자리 잡은 수비의 벽.
윌리안이 수비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다시 뒤에서 달려오는 캉테에게 백패스.
그 순간. 캉테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수비를 등진 채 소리쳤다.
"캉-테!"
훈련장에서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않은 사이.
그저 인사만 가볍게 나눈 사이였지만, 캉테는 내 외침과 동시에 딱 좋은 세기로 패스를 보냈다.
발바닥으로 공을 트래핑하는 순간, 느낌이 딱 왔다.
'좋은 패스!'
느낌이 좋았다.
가볍게 볼을 트래핑하자, 상대 수비수 두 명이 양쪽에서 강하게 어깨를 들이민다.
"놔, 이 새끼들아!"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며 거칠게 그들을 밀어붙였다.
EPL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거칠고 터프한 리그.
하지만 미들즈브러는 승격팀이라 수비조직력이 탄탄하단 느낌은 없었다.
그들과 부딪칠 때마다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지금처럼.
"컥!"
수비를 밀친 뒤에 나타난 빈 공간.
그리고 그 뒤를 향해 크게 돌아가는 풀리시치.
국가대표에서 맞춘 호흡은 저절로 발끝으로 나타났다.
"풀리-식!"
그에게 패스를 찌르고.
바로 몸을 돌려 박스 안으로 저돌적으로 파고들었다.
풀리시치가 골라인 근처까지 파고들면서, 골문 쪽을 향해 낮은 크로스를 올리는 장면이 슬로우 화면처럼 스쳐간다.
'발을 뻗을까?'
지금 상체는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
여기서 슬라이딩으로 공을 밀어넣기엔 힘들다.
그렇다면?
'머리로!'
나는 달려가면서 그대로 엎어지듯 상체를 기울이며 쓰러졌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공이 오는 방향을 끝까지 노려보며.
정확한 타이밍에 머리에 공을 맞혔다.
"Wuuooooooaaaaaa!"
"The Blues!"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 고오오오올!"
생각보다 강했던 크로스는 내 머리를 맞고 그대로 골문을 갈랐다.
아무튼.
몸을 날리는 다이빙 헤더골.
두 번째로 터진 역전 골에 관중석이 크게 울렸다.
"오, 미친 자식-!"
"빌어먹을 자식아! 넌 블루스야! 이제부터 블루스라고!"
팬들의 사랑을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골을 넣으면 된다.
지금 관중석에서 미친 듯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에게 푹 빠졌다.
그리고 팬뿐만이 아니다.
"이 자식! 진짜 날 도움왕으로 만들어 주려고?"
풀리시치가 내 얼굴을 붙잡았다.
나도 마주 보며 웃었다.
"에당 아자르보다 풀리시치가 어시스트만큼은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해 줄게."
"하. 데뷔전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제 두 골인데?"
풀리시치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대표팀에서도 그렇고, 넌 진짜······"
"왜?"
"존나게 멋있다고. 빌어먹을 자식아."
"그러면 크로스 좀 잘 올려줘."
"물론이지. 널 득점왕으로 만들어 줄게. 난 도움왕이 되고. 오케이?"
"좋은 생각이야. 풀리식."
풀리시치와 짧은 환호를 나누고.
나는 나에게 패스를 찔러 준 캉테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줬다.
"좋은 패스였어!"
캉테는 다소 어설프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작은 체구와 동글한 얼굴이지만, 필드에서 캉테가 끼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좀 친하게 지내야지.
***
[봤어? LEE가 두 번째 골을 넣었어! #제퍼슨 리 #데뷔골]
[지금 너무 이상한 기분이야. 우리 팀 스트라이커가 저렇게 쉽게 득점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라서. #제퍼슨 리 #스트라이커 #The Blues]
[그를 영입하는데 5천만 파운드를 썼다고? Fucking! 존나 싸네!]
***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두 번째 다이빙 헤더골이 골문을 가르자, 스탬포드 브릿지는 무너질 것처럼 크게 울렸다.
해설진들도 격양된 어조로 소리쳤다.
[믿기지 않습니다. 전반 30분에 투입된 제퍼슨 리가 경기의 흐름을 바꿔 버립니다!]
[데뷔골과 역전골을 동시에 만들어 내네요. 대단합니다!]
제퍼슨 리.
그의 존재감이 무섭게 두드러졌다.
이전에도 흐름은 첼시가 가져갔다.
그러나 답답한 면모가 분명히 있었다.
강력하고 거친 수비에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퍼슨의 투입 후, 전세가 역전됐다.
"빌어먹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자식!"
"오, 제퍼슨! 벌써 마음에 들어!"
"내가 아들을 낳는다면, 이름을 제퍼슨이라고 지을 거야!"
팬들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최전방에서 위협적인 슈팅을 성공시키는 제퍼슨.
그에 따라 미들즈브러의 수비진이 계속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골이 터질 것처럼 들끓어 오르는 열기.
제퍼슨은 여전히 위협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뻐엉-!
"Wuuaaaaa!"
"제---퍼슨!"
묵직한 슈팅이 수비 사이를 가르고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잔뜩 내려앉은 밀집 수비를 상대로 과감하게 때리는 강력한 중거리 슈팅.
그리고 최전방에서 거친 잉글랜드의 수비수들을 몸으로 떨쳐 내며 어떻게든 공을 지켜 내는 피지컬.
거기에 골문 안으로 유효 슈팅을 욱여넣는 슈팅 능력까지.
"제기랄!"
"도대체 뭐야?"
수비진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단 한 명.
그 한 명의 존재감 때문에 미들즈브러의 수비진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틈을, 제퍼슨이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었다.
[오! 제-퍼슨! 허공에 떠올라 공을 받아 냅니다!]
[믿기지 않는 타점입니다! 자신보다 더 키가 큰 수비들을 상대로 월등히 높은 위치까지 뛰어오르네요!]
[떨어진 공, 뒤따라오는 은골로 캉테에게!]
[캉-테! 중거리 슛! 골, 골입니다!]
저 멀리서 올라오는 롱볼을 몸으로 수비수들을 떨쳐 내면서 헤더로, 정확히 동료가 들어오는 공간에 떨어뜨리고,
달려오는 캉테가 그대로 발리슛으로 득점.
어시스트까지 해내는 그 모습에, 첼시 팬들은 미친 듯이 열광했다.
2골 1어시스트.
센세이셔널한 데뷔전.
관중석 중에 누군가 소리쳤다.
"빌어먹을! 뭐? 18살짜리 미국 애송이를 데리고 온다고 했다고?"
"엿이나 먹으라고 해!"
"세르히오 아구에로? 그 늙은 선수가 뭐가 필요한데!"
"우리는 젊고 싱싱한 스트라이커라고!"
"봤냐고! 우리 첼시에도 엄청난 스트라이커가 드디어 왔단 말이야!"
***
경기는 끝났다.
EPL 개막전, 첼시가 3대 1로 미들브러를 잡으면서 시원한 승리를 챙겼다.
경기가 끝나고 화제가 된 건 단연코 데뷔전을 치른 제퍼슨 리였다.
2골 1어시스트라는 기록은 첼시가 넣은 모든 득점에 관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에게 진짜 9번다운 9번이 온건가?"
"아직 첫 경기잖아?"
"그래도 데뷔전이야! 오히려 데뷔전에 이런 성적이라고!"
스트라이커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데뷔전.
지금까지 9번의 저주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스트라이커의 활약이 저조했던 첼시.
드디어 나타난 제대로 된 스트라이커의 모습에 열광했다.
특히 MOM 수상을 받고 간단한 인터뷰는 첼시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데뷔전에서 멋진 활약을 펼쳤는데, 지금 기분은?
"환상적이다. 환상적인 팬과 환상적인 경기장, 아름다운 경기였다."
-이적료가 비싸단 얘기가 아직도 흘러나온다. 그 얘기에 부담감을 느꼈나?
"부담스럽다."
-······본인에 대한 기대가 부담스러운가?
"내가 해트트릭을 터뜨리지 못한 걸 보니, 아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곧 부담을 떨쳐 낸 모습을 보여 주겠다. 아마도, 해트트릭 정도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BBC 프리뷰 방송에서 거친 어조로 첼시를 비난했던 잭 헤럴드의 트위터가 경기가 끝나고 올라왔다.
@Jack_Harold
고작 한 경기다. 무슨 이리도 호들갑인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인정한다. 오늘 제퍼슨은 완벽했다.
적어도 오늘 보여 준 제퍼슨 리의 모습은 완벽한 스트라이커의 전형이었다.
그가 오늘 모습을 다음 라운드, 아스널전에서도 보여 준다면, 어쩌면······ 첼시는 마지막 퍼즐을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 52. 9번의 저주 (3)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