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누군가에겐 필사적인 이유 (2)
누군가에겐 필사적인 이유 (2)
“우승하기 위해 왔고, 즐라탄은 우승합니다.”
즐라탄의 인터뷰.
본인을 스스로 3인칭으로 말하는 특유의 화법에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전 남들처럼 우승한 이후에 이런 말 하지 않아요. 즐라탄은 경기 전에 말하고, 그리고 해냅니다. 이건 큰 차이죠.”
어찌 보면 거만하다 싶을 정도의 인터뷰.
그러나 ‘즐라탄스러운’ 인터뷰였다.
즐라탄의 어록을 보며 팬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뻑을 이토록 간지나게 할 수 있을까.
심각한 자기애(愛)라고 볼 수도 있지만, 즐라탄은 늘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가 월드클래스인 이유였다.
더구나 여긴 미국이다.
스포츠 영웅이 아닌, 스포츠 스타를 원하는 사회.
당당하고 거칠 것 없고, 그리고 실력마저 슈퍼스타 그 자체.
미국의 언론들이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축구 스타였다.
“토론토에는 미국의 왕,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신성이 등장했습니다. 알고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제퍼슨 리. 저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더군요.”
“센세이셔널한 활약으로 토론토를 이끌고 있는 제퍼슨 리와의 맞대결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자의 질문에 즐라탄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대단한 선수입니다. 부정할 건 없어요. 물론 저보다는 아니지만요.”
역시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와인은 원래 숙성되어야 맛있는 법이죠.”
자신의 유명 어록을 꺼내며 자신감을 보이는 즐라탄.
즐라탄은 기자들을 쭉 둘러보며 단언했다.
“나는 즐라탄입니다.”
***
즐라탄의 인터뷰를 보고 든 생각?
‘와, 존나 멋있다.’
진짜로.
솔직히 말해 즐라탄의 인터뷰는 문장만 놓고 본다면 거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의 바탕이 되는 이번 시즌 득점왕이라는 성적. 스스로를 와인 같은 남자라고 부를 정도로, 나이가 무색한 플레이.
어찌 됐건 그는 월드클래스의 범주에 속했던 스트라이커였고,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언론은 즐라탄과 맞대결을 펼치는 라이벌의 입장으로 나를 그리고 있었다. 현 상황이 놀랄 따름이다.
플레이오프 챔피언 결정전.
각종 언론 기사의 사진에는 즐라탄과 내 사진을 대비되게 찍은 구도 밑으로 경기 성적을 쭉 나열했다.
기사들 어조도 다 비슷했다.
[즐라탄 VS 제퍼슨 리]
[챔피언 결정전. 진짜 미국의 슈퍼스타를 가늠하는 경기]
[토론토와 갤럭시 중 누가 챔피언이 될 것인가.]
[챔피언을 향한 KEY는 ‘즐라탄’과 ‘LEE']
세상에. 즐라탄과 라이벌 구도라니.
출세했네, 출세했어.
물론 최정점에서 내려온 즐라탄이지만, 그래도 즐라탄은 즐라탄이었다.
“그자는 괴물이에요.”
디 파코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현재 미국에서 즐라탄보다 몸상태가 좋은 선수 얼마 없을 거예요. 20대를 포함해도 말이죠.”
즐라탄의 개인 트레이너였던 만큼, 디 파코는 즐라탄에 대해 잘 알았다.
“아, 물론 리, 당신만큼은 아니지만요.”
“칭찬 고마워요.”
“즐라탄을 나이 든 선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오히려 그 나이에 걸맞은 많은 경험과 노련미, 거기에 아직도 충분히 젊은 신체 능력을 지녔으니, 괴물이 아니고 뭐겠어요?”
“조언 고마워요. 디 파코.”
마지막 결승전을 앞두고.
나는 체력 점검에 힘을 썼다.
최상의 몸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덕택에 내 트레이닝 팀은 잠도 자지 않고, 실시간으로 내 신체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음. 돈값하네. 이 장비들도 그렇고.
그렇게, 결승전이 다가왔다.
***
원정경기.
LA 갤럭시의 홈구장, 디그니티 헬스 스포츠 파크(Dignity Health Sports Park)에 토론토의 원정버스가 도착했다.
‘좋은 기억이 있는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경기장의 관경.
제퍼슨은 씩 웃었다.
국가대표 데뷔전, 과테말라전을 치른 경기장이었다.
여기서 제퍼슨은 두 골을 넣었다.
좋은 기억이 있는 경기장이다.
관중들의 함성, 득점 후 머리끝까지 고양되는 감정.
그때의 기억을 살리자, 우승에 대한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
“와아아아!”
“Reds! Reds!”
선수단이 버스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붉은 유니폼의 토론토 원정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긴장된 얼굴로 내리던 선수들의 얼굴이 상기됐다.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원정팬.
캐나다에서 여기까지의 거리와 비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원정팬이었다.
“토론토! 오늘 있는 힘껏 싸워라!”
“제퍼-슨! 너만 믿는다!”
특히 제퍼슨이 내리는 순간, 함성은 더욱 커졌다.
현재 리그 후반기와 플레이오프까지.
절정의 폼을 보여 주고 있는 제퍼슨의 인기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퍼슨은 몰려든 원정팬을 보며 손을 흔들어 줬다.
“오, 제퍼슨! 너만 믿는다!”
“우리에게 우승컵을 선물해 줘!”
그야말로 열렬한 응원.
제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와중 팬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랑 같이 온 듯한 어린 아이.
‘아, 저번에 원정경기에도 따라온 애.’
여자 발롱도르를 타겠다고 장담하던 맹랑한 아이.
제퍼슨이 씩 웃으면서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오늘 여러분은 우승컵을 들고 비행기를 타게 될 겁니다! 반드시 저와 우리 팀 모두가 서포터즈 여러분께 선물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제퍼슨의 말에 같이 움직이던 선수단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열렬하게 터지는 함성에 모두 웃음을 머금었다.
‘저 자식. 어린애 같지가 않단 말이야.’
그랜드 감독이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제퍼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
사실 자신의 공로라기 보단, 오로지 제퍼슨의 공이 컸다.
자신의 공이라면.
‘그를 찾고 기회를 준 것뿐이겠지.’
뭐, 감독이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나.
그랜드 감독은 웃으면서 경기장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챔피언이 가려진다.
***
“우리는 강하다.”
라커룸에서 그랜드가 들어오자마자 던진 말이었다.
“우리는 강해. 무패를 달리고 있고, 최근 10경기에선 경기당 1실점도 되지 않는다. 공격만 애매하게 잘하는 팀? 웃기는 소리. 우린 공수 양면이 완벽하다. 제퍼슨, 산티아고, 조나단, 브래들리, 조슈아, 바카, 너희 모두 완벽하게 해 주고 있다. 우리가 질 것 같나?”
“아닙니다.”
“우린 이긴다.”
“반드시요!”
선수들의 반응을 쭉 지켜본 그랜드가 웃음을 머금었다.
선수들의 얼굴에 새겨진 굳은 각오. 승리에 대한 열망. 우승을 향한 목적의식.
그랜드 감독이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소리쳤다.
“가자! 은하계 자식들을 박살 내고 트로피를 가져오자고!”
***
“제프. 내가 즐라탄 저 자식, 철저하게 막을 테니까. 넌 골만 넣어.”
필드에 올라서자, 조슈아가 다가와서 한 말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
결승전여서일까. 늘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조슈아의 얼굴에 부담감이 보였다. 난 씩 웃어줬다.
“걱정 마요, 조슈아. 설령 즐라탄이 골을 넣어도, 제가 무조건 그보단 한 골 더 넣을 거니까.”
“······멋진 놈.”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공이 센터 서클에 놓이고.
난 드디어 그와 마주하게 됐다.
“안녕.”
“안녕하세요, 즐라탄.”
“네가 내 파트너를 빼앗아간 그 친구구나.”
“파트너?”
아, 디 파코를 말하는 거구나.
“크리스티아누에게 추천한 트레이너였는데, 네가 채갈 줄이야.”
“좋은 트레이너던데요.”
“물론, 이 즐라탄의 트레이너였으니까. 하여튼, 오늘 경기 잘 치러 보자고. 물론 우승 메달은, 내 개인 메달박물관에 보관되겠지만.”
“즐라탄. 애석하게도 은메달일 것 같네요.”
내 말에 한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은 즐라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잡담 그만해. 경기 시작할 거다.”
심판이 날카로운 얼굴로 센터 서클로 다가왔다.
즐라탄은 어깨를 으쓱이며 눈인사를 보냈고, 나 역시 고개를 간단히 숙여 보임으로써 그에게 존중의 의미를 밝혔다.
근데, 존중은 존중이고.
금방 내가 한 말은 진심이다.
우승 메달은 내가 가져갈 거다.
삐익!
휘슬이 울렸다. 나는 침착하게 공을 뒤로 보내고 빠르게 전진했다
그리고 곧바로 산티아고에게 이어지는 공.
산티아고는 툭툭 공을 치다가 갤럭시의 수비수, 지안카를로 곤잘레스(Giancarlo González)에게 막혀, 다시 침투하는 나에게 횡패스.
공을 그대로 툭 치고 달려 나가려는 순간.
퍽!
“······!”
거대한 그림자가 날 덮쳤다.
“오, 세상에. 더럽게 단단하군!”
즐라탄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날 쳐다봤다.
“젊은 게 좋아. 몸 좋은데.”
하지만 놀란 건 나였다.
올해 즐라탄이 몇 살이지?
물론 내가 피지컬에서 금방 밀린 건 아니다.
그런데 방금 느낀 충격은, 뉴잉글랜드의 시셀도와 몸싸움할 때보다 더했다.
과연, 괴물은 괴물이구나.
내가 즐라탄과 부딪친 사이.
공은 갤럭시에게 넘어갔다.
조나단 도스 산토스(Jonathan Dos Santos)가 화려한 개인기로 우리 미드필더진을 붕괴시키더니, 어느새 껑충껑충 달려간 즐라탄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 넣었다.
즐라탄은 긴 다리로 공을 잡고는, 앞을 막아서는 조슈아를 그대로 몸으로 밀어 넣었다.
“······!”
세상에.
저 터프한 조슈아가 당하다니.
즐라탄은 조슈아를 넘어뜨린 다음에, 한차례 공을 잡고는 그대로 강력한 중거리 슛을 때렸다.
“즐-----라탄!”
“이브라카다브라! 이브라카다브라!”
“Goooooaaaal!"
“Bravo! Los Galácticos(은하계)”
벼락같은 골이었다.
잠깐만. 우리가 얼마 만에 선제실점을 당하는 거지?
“다들 정신 차려! 이제 시작이야!”
우리는 늘 선제득점을 했고, 경기를 이끌어 나갔다.
그 때문에 이른 시간 선제실점은, 우리에게 충격이었다. 그 점을 느낀 캡틴 브래들리가 곧바로 선수들을 다독였다. 나는 흘깃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슈아를 바라봤다.
“조슈아! 걱정 마요! 아까 내가 한 약속, 지킬 테니까!”
그 말에 조슈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음. 즐라탄보다 무조건 한 골 더 넣겠다고 했으니까.
일단 두 골 넣어야겠네.
***
[즐라탄! 이브라카다브라! LA 갤럭시의 홈팬들이 주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아아! 즐라탄! 월드클래스가 무엇인지 보여 주네요! 공간이 열리자마자 벼락같은 중거리 슛으로 경기 시작 2분 만에 앞서갑니다!]
이른 선제득점.
LA 갤럭시는 즐라탄과 조나단 도스 산토스, 두 명의 조합에서 나오는 화려한 공격력을 뽐내는 팀이다.
한번 골이 터지면 댐이 무너지듯 미친 듯이 쏟아붓는 게 바로 갤럭시의 팀컬러였다.
“그래! 이거지!”
“캐나다 촌놈들을 박살 내자고!”
“즐라탄! 한 골 더!”
“이브라카다브라! 이브라카다브라!”
홈팬들의 응원 속에.
소수의 토론토 원정팬이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Go Toronto!”
그리고 다시 한 번 즐라탄에게 공이 도착했다.
즐라탄은 긴 다리로 공을 가볍게 트래핑하고, 거구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발재간으로 눈앞의 조슈아를 제쳤다.
툭!
“······!”
아니, 제치려고 했다.
그러나 집중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고 있는 조슈아는, 기적적으로 발끝에 공이 닿아 차단에 성공했다. 그 공을 곧바로 바스케스에게 패스.
바스케스는 받는 순간 앞서가는 제퍼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스루패스.
“WoooooooOhhhhhh!"
[아아아아! 바스케스의 킬패스가 들어갑니다!]
[제-퍼슨! 달립니다!]
아름다운 퍼스트 터치.
볼을 그대로 툭 치면서 전진드리블.
눈앞을 막아서는 미드필더 한 명을 스텝오버로 무너뜨리고, 거칠게 몸싸움을 해 오는 수비수를 그대로 들이박아 버렸다.
쿵!
[심판, 고개를 젓습니다! 반칙 아니에요!]
[아, 마치 전차를 보는 거 같네요. 적진을 향해 무소처럼 돌진하는 전차 같습니다!]
해설진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흡사 전차처럼 수비진을 궤멸시키는 제퍼슨의 전진드리블.
그리고, 제퍼슨은 다소 먼 거리에서 공간이 열리자마자 그대로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시도했다.
마치, 아까 전 즐라탄처럼.
그리고 골네트를 찢어 버릴 듯이 꽂히는 공.
골키퍼는 창백한 얼굴로 뒤돌아서서 굴러 나오는 공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제-퍼슨! 오, 우리의 왕!”
“Fucking lovely! 제퍼슨!”
[아아! 제퍼슨! 곧바로 동점골로 화답합니다!]
[즐라탄의 선제골과 유사한 위치에서 강력한 중거리 슈팅!]
[빨랫줄 같은 슈팅이 그대로 골문에 꽂힙니다! 제퍼슨! 곧바로 동점골을 만들어 내며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립니다!]
제퍼슨은 골문에 있는 공을 가지고 나오면서 즐라탄을 흘깃 보고는,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피면서 말했다.
“기다려 봐요. 아직 한 골 더 넣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