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누군가에겐 필사적인 이유 (1)
누군가에겐 필사적인 이유 (1)
MLS는 마케팅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경쟁해야 하는 종목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연고의식을 강화시키기 위한 팬서비스를 자주 했다.
“우와아아! 캡틴 아메리카다!”
“나 저 형 봤어! 저번에 골 넣었어!”
“와아! 멋지다!”
음.
대여섯 살 먹은 꼬맹이들이 달려와 나한테 매달리는 것도, 그런 팬서비스의 하나였다.
“옷 잘 어울리는데?”
“넌······ 뭐냐.”
산티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녹색 옷에 활과 화살.
내 물음에 산티는 화살통에서 장난감 화살을 꺼내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로빈 훗!”
“피터팬 아니고?”
“······.”
아무리 봐도 피터팬인데.
산티아고는 자신의 코스프레가 피터팬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애들도 똑같은 반응인데.
“피터팬이다!”
“······응, 그래. 피터팬이야.”
에휴.
슬쩍 돌아보니 다른 선수들도 제각각 알록달록한 복장으로 애들과 놀고 있었다.
토론토에 있는 한 보육원.
우리 팀은 할로윈을 맞이해 지역사회에 봉사도 하고 언론에 보도할 사진도 찍을 겸해서 이곳에 찾아왔다.
다행히 다음 플레이오프 경기까지 9일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이렇게 팀의 마케팅을 위해 하루쯤 나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할로윈이니까.
나도 난생처음 할로윈 코스프레를 해 봤다.
캡틴 아메리카 특유의 쫄쫄이를 입고, 모조 방패에 담긴 사탕을 애들한테 나눠 주는 게 내 일이었다.
뭐, 애들이 귀엽기도 했고.
“캡틴 아메리카 아저씨! 저기 저 아저씨는 뭐야?”
“어······ 글쎄.”
애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조슈아가 과묵한 표정으로 한 여자아이를 목마 태워 주고 있었다.
코스프레는······ 음, 잘 모르겠다.
옆에 칼을 찼고, 무슨 게임 캐릭터 같은데······.
하여튼 이 아이들은 다음 DC전에 우리 손을 잡고 입장할 어린 친구들이었다. 구단에서 초청했다나.
나쁘지 않은 팬서비스다. 이런 마케팅은 구단의 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니까. 더구나 이런 식으로 찍히는 홍보사진은 선수 개인의 이미지에도 꽤 도움이 된다.
가령 은근슬쩍 볼워치에서 제공해 준 시계를 찬 모습을 찍히는 것도, 내가 스폰서쉽을 위해 할 일이기도 했고.
“아저씨! 다음 경기 이길 거야?”
그때 조슈아의 목에 올라탄 여자아이가 소리쳤다.
딱 조슈아의 딸과 비슷한 또래라 그런지, 조슈아는 과묵한 얼굴로도 은근히 자상하게 아이를 대해 줬다.
“이겨야지.”
“루니가 있는데!”
“너 축구 좀 보는구나. 하지만 우리에게는 왕이 있어.”
“왕?”
아이고, 저 아저씨가.
“우린 이길거다. 약속하지.”
“응!”
조슈아가 흘깃 나를 바라봤다.
진지한 얼굴.
늘 과묵한 사람이긴 했지만, 저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좀 다르게 읽혔다.
무언가, 굳은 결의가 느껴진 표정.
음. 너무 진지해 보이긴 하지만, 나 역시 우승에 대한 열망은 뒤지지 않는다.
“여기 캡틴 아메리카가 박살낼 거니까 걱정 말라고.”
“와!”
방패를 들어 보이며 사탕을 우수수 뿌려 주자 애들이 환호를 터뜨렸다.
자.
DC전만 이기면 결승이다.
***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쓰리톱으로 수비를 부수는 게 바로 DC였다.
그러나 이번에 상대하게 된 DC는 이전에 붙은 강했던 DC가 아니었다.
웨인 루니가 피로로 인한 허벅지 근육 부상을 호소하며 경기 전에 아웃된 것.
덕택에 루니를 축으로 한 연계플레이가 장점이었던 DC는 비교적 밋밋한 팀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오는 필드는 미끄럽다.
짧은 패스로 유기적인 플레이를 가져가는 DC가 불리한 상황. 그에 반해 우리는 바스케스의 위협적인 롱패스가 장점인 팀이었다. 거기에 상대적으로 측면에서의 파괴력이 뛰어난 장점을 살려 역습을 시도했다.
“Gooooooooo!”
중원에서 터프한 몸싸움으로 볼을 빼앗은 조슈아가 곧바로 바스케스에게 공을 배달했다.
조슈아의 역할은 딱 그것이다.
차단, 태클, 그리고 플레이메이커에게 배달.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이 움직임은, 바스케스의 창의력을 극대화했고,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조나단에게 긴 로빙패스가 기가 막히게 찔러졌다.
나는 조나단의 스피드에 맞춰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비가 내려 시야가 좁았다. 잔디가 미끄러워 몸이 굼뜨고, 공의 바운스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때문에 내가 조나단에게 주문한 건 딱 하나였다.
‘그냥 높이 올려!’
물에 흠뻑 젖은 잔디.
이런 잔디에서는 내 특기인 빠른 돌파와 드리블이 어렵다.
공의 바운스는 예측불가. 세심한 볼컨트롤도 무리다. 고스트 스텝이나 제퍼슨 턴 같은 기교는 어림도 없다.
이럴 때는.
‘당연히 뻥 축구지.’
뻐엉!
조나단이 크게 크로스를 올렸다.
다소 부정확한 듯한 궤적.
물이 잔뜩 묻어 공의 회전이 이상했다.
너무나 높은 공.
수비들은 오히려 반대편으로 향했다. 공이 높아서 중간에 커트하기 힘들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럼 고맙지.’
물론 나에게도 높다.
나도 가만히 서서 점프했으면 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폭발적으로 내달리고 있다.
스탠딩 점프와 러닝 점프는 타점 자체가 다르다.
“막아!”
골키퍼는 달려오는 날 보고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센터백 하나가 급히 자리를 잡고 뛰어 오르지만.
미안하지만, 내가 더 높아.
내가 떠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타점.
그리고 이마에 공이 접촉되는 순간. 있는 힘껏 골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강한 크로스를 방향만 살짝 바꿔 놓는 완벽한 헤더.
끝까지 공의 궤적을 노려봤다.
내가 정점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
골키퍼가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손을 뻗었지만, 골대를 크게 때리면서 안쪽으로 굴절되어 들어갔다.
철렁!
“으아아아아아아!”
“제------퍼슨!”
“제퍼슨! 제퍼-스은!”
수중전에서 속도감 있는 역습과 시원한 롱패스에 의한 헤더골은, 관중들을 미치게 하지.
관중들은 답답한 속을 뻥 뚫는 골에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제-프!”
“끔찍한 크로스였어. 조나단.”
“으하하하! 이젠 크로스가 너무 쉬워졌어. 대충 올려도 맞추니까 말이야.”
아, 그렇다고 대충 올리지는 말라고.
***
토론토의 팬들은 플레이오프 결승전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이번 1년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전반기 극심한 부진으로 리그 11위.
2년 전 리그 우승, 플레이오프 우승이란 기록을 남긴 팀 치고는 너무 처참한 결과였다. 그래서 이적시장을 기대했다. 현 상황을 타파할 선수를 사올 거란 믿음을 갖고.
한데 데리고 온 선수가 17살짜리였다.
어디서 뛴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라고 욕했던 새끼들은 다 죽어야해!”
“암! 그렇고말고!”
“저 사랑스러운 자식 때문에 우리가 웃으면서 경기를 본다고!”
뜬금없이 나타난 17세의 원더보이는 말도 안 되는 순도 높은 활약을 펼치더니, A매치까지 다녀왔다.
“지오빈코를 이렇게 빨리 잊을 날이 올 줄이야!”
리그 후반기 들어서 극적인 대반전.
이번 시즌은 중위권만 해도 다행이겠다 싶었던 팬들은, 결승전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모두 들떠 있었다.
그렇게 우승을 향한 관중들의 열망을 느꼈을까.
“제---프!”
“오, 달려! 미국의 왕!”
제퍼슨이 깊숙하게 내려와 공을 잡더니, 단순한 패턴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공을 길게 전방으로 차고, 순간적인 가속도를 살리면서 선수를 밀어뜨리며 전진했다.
비에 젖은 잔디도 제퍼슨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막지 못했고, 수비들은 그런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제퍼슨은 흘깃 전방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산티아고에게 스루패스를 보냈다.
“Go Reds!”
관중들의 응원가도 더 높아지는 가운데.
산티아고는 침착하게 공을 잡고 스텝 오버로 선수를 제쳤다. 그리고 정 반대방향. 조나단에게 다시 방향을 바꿔 버리는 롱패스.
조나단은 공을 받자마자 다시 한 번 박스로 크로스를 올렸다.
“또 크로스다!”
순전히 공격진들의 힘만으로 이뤄지는 투박하고 단순한 전술.
크로스라는 원패턴의 전술이지만, 지금 DC는 그 원패턴을 막지 못해 쩔쩔맸다.
허공에 날아오른 제퍼슨의 헤더가 공을 정확히 맞혔다.
터엉!
“오, 쉣!”
“제기랄!”
골대를 맞고 튀어나오는 볼.
공이 골대를 맞고 나오면, 수비나 공격이나 모두 일순 당황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건 찰나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그 찰나의 순간이 결과를 바꾸기도 했다.
“산티아고!”
박스에 파고든 산티아고가 튕겨 나오는 공을 잡았다.
“막아!”
앞을 가로막는 슬라이딩 태클.
그러나 산티아고는 슈팅을 때리려는 척, 한 번 공을 접었다.
‘페이크!’
슈팅페이크로 수비 두 명이 슬라이딩을 하게 만든 산티아고는 그대로 왼쪽으로 툭.
데구루루 굴러오는 패스는 제퍼슨의 발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퍼슨은 그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선수가 아니었다.
중앙으로 짤려 들어오는 패스를 그대로 골문을 향해 밀어 넣는 제퍼슨.
“WooooooOhhhhh!”
토론토 FC,
플레이오프 결승 진출.
***
Ohhhhh, Oh, Oh
Oh my team, Oh my Toronto!
Oh my Reds! Go Toronto!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어깨동무하며 응원을 보냈다.
90분의 치열한 혈전은, DC의 루치아노 아코스타가 만회골을 넣어 2대1이 되었지만 그대로 경기는 종료되었다.
이제 플레이오프 결승전,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게 됐다.
“가자! 챔피언을 향해! Reds! 한 경기, 한 경기만 남았다!”
“Go! Reds! Go! Reds!"
“가자고! 빌어먹을 갤럭시를 박살 내자고!”
“와아아!”
캡틴은 경기가 끝나고 필드에 우리를 부른 다음 의지를 다졌다.
진짜, 이제 한 경기 남았네.
“제프.”
“응?”
“저기, 아저씨.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라커룸에 들어가려던 산티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조슈아가 조용히 필드의 잔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
상념에 빠진 표정이었다.
“부를까? 땀 식기 전에 샤워해야지.”
“아냐, 내버려 둬.”
“응?”
“그냥, 놔둬. 가자, 산티.”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뒤돌아서 조슈아를 바라봤다.
한참이나 경기장 전체를 바라보는 조슈아의 표정은 언뜻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벅찬 감정이 보였다.
‘커리어에 우승이 없다고 했던가.’
뉴욕 시티전에서,
그레이엄이 조슈아를 도발할 때 그런 말을 했었다.
평생을 프로 선수로 지냈지만 커리어에 우승컵 하나 없었다고.
의외로 그런 선수는 많다. 당장 이학현이던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그게, 은근히 한이 된다.
선수들이 자신의 고향팀을 떠나 강팀으로 가는 이유다. 우승컵에 가까운 팀이니까.
우승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팀이 받쳐 줘야 한다. 감독도 잘해야 하고, 구단의 지원도 좋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 커리어에 우승을 추가할 수 있다.
복잡해 보이는 조슈아의 얼굴.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조슈아는 이미 선수 생활의 황혼기다.
어쩌면 1~2년 안에 은퇴할지도 모르지.
그랬기 때문에,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런 표정으로 쉬이 필드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리라.
어쩐지.
근래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를 때마다 그는 더 격렬하고, 더 터프하고, 더 미친 듯이 뛰었다.
34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 열정에 팀의 어린 선수들은 감명 받았고, 우리는 원팀이 되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면.
보답해 줘야지.
우승.
반드시 차지한다.
***
“미쳤군.”
“이 친구 말이 안 되는데?”
“동부 팀들이 다 고꾸라진 이유가 있어.”
“이거 위험한데. 우리 수비로도 장담 못해.”
“음.”
LA갤럭시의 감독 기예르모 바로스 스켈로토(Guillermo Barros Schelotto)는 토론토의 경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날 상대팀.
토론토의 핵심 스트라이커 제퍼슨 리.
기예르모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당초 LA 갤럭시는 수비가 장점인 팀이 아니다.
강력한 창이었다.
“코치. 저 친구가 잘하긴 하네요. 그래도 뭐, 우리가 두 골 먹히면, 내가 세 골 넣으면 되잖아요?”
기예르모 감독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없이 웃었다.
어쩌면 거만하다 싶은 발언.
그러나 기예르모 감독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즐라탄이었으니까.
“그래. 아직 어린 친구한테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 주라고.”
“물론이죠. 코치.”
즐라탄은 씩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그의 시선이 득점에 성공하는 제퍼슨의 동영상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