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캡틴 아메리카 (4)
여러모로 화제가 된 극적인 경기였다.
두 골을 먼저 앞서 나가면서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수비수의 퇴장과 PK. 그리고 수적 열세에 세 골을 내주며 펠레스코어.
여기까지는 과테말라 팬들에게만 극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교체 투입된 A매치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 선수가, 두 골을 넣으며 다시 재역전극을 만들었다.
“누가 이딴 시나리오를 짠 거야?”
······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드라마 같은 경기였으니.
“덕택에 기사도 많이 나오네.”
[미국 4 : 3 과테말라]
[미국, 월드컵을 향한 산뜻한 첫걸음!]
[원-더보이 ‘LEE’ 극적인 동점골과 결승골]
[한국계 미국인, 제퍼슨 미국 국가대표로서 첫 데뷔전. 합격점을 넘어 환상적!]
[17살의 원-더보이 ‘LEE’. 토론토의 왕에서 미국의 왕으로!]
확실히 프로축구보다는 월드컵 예선전이 관심도가 더 컸다.
4대 리그와 비교하면 스포츠 뉴스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MLS였다. 월드컵 예선은 그 대단한 NFL 경기 기사를 밑으로 누르고 메인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 내가 광고판 위에 올라서서 엠블럼을 부여잡으며 포효하는 사진들이었다.
생각보다 잘 찍힌 사진들이었다.
저녁 경기, 어두운 경기장에서 필드를 비추는 붉은 조명. 그리고 조명 아래에서 엠블럼을 찢어지라 부여잡은 채 포효하는 내 얼굴.
그 너머로 기립해서 팔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관중들과 나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진 구도.
“그런 사진 한 번 더 찍어야지?”
경기가 시작되기 전.
라커룸에 들어온 감독님이 내 어깨에 두꺼운 손을 턱 하니 올리면서 하신 말씀이셨다.
“선발이다, 제퍼슨. 오늘은 처음부터 네 실력을 마음껏 보여 줘라.”
“예. 감독님.”
감독님은 이번엔 선발로 나를 실험하시려는 모양이었다.
상대팀은 약팀, 아이티였다.
과테말라도 미국보다 한두 수 아래로 평가받는 팀인데, 아이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물론 월드컵 예선인 만큼 경기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팀 기량 자체가 차이가 나니까.
***
삐-익!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북중미카리브 지역 4차 예선 B조 2차전 경기가 펼쳐집니다. 과테말라에게 극적인 승리를 거둔 미국이 아이티를 상대로 두 번째 경기를 치릅니다.]
“헤이, 맥케니!”
제퍼슨은 공을 웨스턴 맥케니에게 공을 보내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지칠 줄 모르는 샬케의 원더키드, 맥케니는 풀리시치와 더불어 기대 받는 미국의 유망주였다.
브래들리의 파트너로 낙점된 그는 왕성한 활동량으로 경기장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단단히 내려앉은 아이티.
원정에서 승점 1점이 목표인 팀.
[아이티가 작정하고 준비하고 왔군요. 수비로 버스를 세우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 빠른 선수가 많은 아이티는 역습에서 한 방을 보여 줄 수 있는 팀이었다.
미국은 점유율을 점점 끌어올리면서 침착하게 라인을 조금씩 올렸다.
그때 센터 서클에서 돌리던 패스를 아이티의 수비가 중간에 차단했다.
자칫하면 역습으로 이어질 상황이다.
깔끔한 차단 뒤에 볼을 지키면서 전진패스를 하려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수비수를 덮쳤다.
퍽!
“컥!”
강력하게 전방 압박을 시도하던 제퍼슨이 공격적으로 바로 압박을 시도했다. 피지컬로 찍어 누르는 압박에 수비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풀리식!”
제퍼슨은 공을 탈취하고 왼쪽을 파고드는 풀리시치에게 스루패스를 찔러 줬다.
“우오오오오오오!”
느린 템포로 운영되던 경기가 제퍼슨의 패스를 기점으로 극도로 빠르게 변했다.
왼쪽 라인을 파고드는 풀리시치.
화려한 발재간으로 왼쪽 라인을 그대로 초토화하면서, 골문을 향한 높은 크로스.
아이티 수비수들의 신장은 낮은 편이었고,
그사이로 달려간 제퍼슨이 허공에 떠올라 간단하게 마무리에 성공했다.
“Ohhhhhhhh―제퍼슨!”
“LEE!”
두 줄로 수비를 세우며 단단한 수비를 준비했던 아이티는, 제퍼슨의 말도 안 되는 고공폭격에 경기 시작 5분 만에 실점을 내줬다.
[제-퍼슨! 미국의 원더보이, 제-퍼슨이 선제골을 만들어 냅니다! 흡사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 같네요. 미국! 제퍼슨의 멋진 헤더골로 앞서 갑니다! 아이티의 낮은 수비진을 그야말로 박살을 냈어요. 제퍼슨, 첫 유효슈팅을 첫 골로 이어버리네요. A매치 2경기 연속골입니다!]
***
약팀이라고 상대를 얕봐서는 안 된다.
특히 축구라는 스포츠에서는 약팀이 강팀을 잡는 자이언트 킬링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초반부터 맹공을 시도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 자식아. 잘못 올린 크로스인데 그걸 집어넣었어?”
풀리시치가 뛰어와 내 얼굴을 붙잡았다.
어쩐지, 좀 높더라니.
덕택에 평소보다 더 무리해서 뛰긴 했다.
“그 정도 타점까지는 무리 없어.”
“허. 말도 안 돼. 알티도어도 그 정도 타점에선 공을 못 따는데, 이 괴물 같은 자식!”
선제골을 집어넣은 후, 우리 팀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플레이를 보였다.
“Ohhhhh!”
경기장을 채운 건 대부분 미국 관중이었다.
그들은 신바람을 내며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호응에 힘입어 우리는 끊임없이 골문을 두드렸다.
7대 3에 이르는 점유율.
우리는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었다.
끊임없이 패스, 패스, 패스.
설령 중간에 패스 실수가 나도 문제없었다.
이런 선 수비 후 역습의 팀에겐 패스 미스로 기회를 내줄 수도 있지만,
퍽!
“억!”
난 거리낌 없이 몸으로 부딪치며 패스 미스로 끊긴 공을 다시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저 자식 마킹해!”
“제기랄. 몸이 바위 같잖아!”
“미친!”
내가 최전방에서 거칠게 싸워 주자 수비들은 점차적으로 나에게 몰려들었고, 그건 곧 다른 선수에게 공간이 생기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
왼쪽과 중앙, 그리고 오른쪽까지 활발하게 스위칭을 하는 풀리시치가 눈에 들어왔다.
고작 두 경기.
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풀리시치와는 두 눈만 마주쳐도 서로 어떤 생각인지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빈 공간을 향해 달려 들어가는 풀리시치.
내 발끝에서 공이 떠났다.
“우오오오오!”
“풀리시치!”
순간적으로 라인을 찢어 버리는 풀리시치의 날카로운 움직임.
그가 깔끔하게 볼을 트래핑하고, 동시에 달려드는 수비수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빼냈다.
단숨에 수비의 압박을 벗겨 낸 풀리시치는 고개를 돌렸다.
이내 박스 안으로 파고드는 나에게 볼을 찔러주는 컷백(Cut back).
아, 이 욕심 없는 친구.
직접 넣어도 충분할 텐데.
뭐, 어쩔 수 없다.
어시스트라도 기록하게 만들어 줘야지.
패스를 퍼스트 터치로 받아 내자 달려드는 수비수들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정신은 놀랄 정도로 차가워졌다.
뜨거워지는 가슴이 아닌, 침착한 이성으로 공을 때려야 할 궤적을 바라봤다.
여기서 아이티는 실점을 내주면 패배가 거의 확실했다. 그 때문에 아이티는 몸을 날리며 수비를 시도할 것이다.
컷백 후 발리슛.
아마 그걸 생각하고 몸을 날리는 슬라이딩을 시도하는 거겠지.
이미 의도는 파악됐다.
태클을 시도하는 순간, 발로 공을 돌려놓으며 가볍게 제쳤다.
그리고 골문 구석을 향해 안정적으로 밀어 넣는 슈팅은 골네트를 흔들었다.
철렁!
‘그래, 이거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사실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어서 기쁘기보단, 골을 넣고 낙담하는 수비와 골키퍼들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는 경우가 많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도 그랬다.
“우오오오! Fucking America king!”
“제―퍼슨!”
“Leeeeeee―EE!”
***
“빌어먹을. 정신 차리자고! 이제 전반 30분이야! 두 골 차이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아이티의 주장이 어떻게든 동료들을 다독였지만, 한번 불이 붙은 미국의 공격력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미국의 화력이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거죠. 미국이 잘하는 화력전이죠. 마치 폭격기들이 적진에 폭탄을 우수수수 떨어뜨리는 것 같네요!]
[제퍼슨이 두 번째 골을 넣고, 곧바로 2어시스트를 해준 풀리시치에게 다시 어시스트로 골을 넣을 수 있게 보답합니다!]
[풀리시치! 한골을 추가하면서 미국 3대 0으로 달아납니다!]
폭격.
해설진의 말 대로였다. 제퍼슨을 기점으로 모든 공격은 아이티의 두꺼운 수비벽을 찢고, 파괴했다.
제퍼슨은 순식간에 두 골을 기록했고, 제퍼슨의 어시스트를 받아 풀리시치가 침착하게 한 골을 추가했다.
[오늘 미국의 공격력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상대가 비교적 약팀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약팀 상대로 다득점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거든요.]
[그렇죠. 보세요. 아이티의 두 줄 수비는 끈끈하고 단단합니다. 이 수비를 제퍼슨과 풀리시치의 환상적인 연계플레이로 박살 내고 있습니다.]
[제퍼슨이 정말 대단하네요. 수비진을 헤집는 움직임과, 오늘 공중볼 경합 성공률 88%입니다! 떴다 하면 다 따내고 있어요!]
[타점이 대단하네요.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강력한 헤더 슈팅에 아이티의 수비진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말 화끈하네요. 이런 말을 해설에서 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정말 터프하고, 섹시합니다.]
[하하하! 핫 가이(Hot Guy)네요.]
[할리우드의 금발 미녀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요?]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을 연호하는 환호가 더욱 커졌다.
이제 대표팀에 데뷔하는 17세 선수로 보이지 않는 배짱과 실력. 그리고 엄청난 득점력. 축구팬들은 화끈한 경기력에 행복에 겨운 함성을 질렀다.
삑!
[오늘 좋은 활약을 보여준 캡틴, 마이크 브래들리가 교체로 물러납니다.]
[좋은 플레이였어요. 버홀터 감독이 선수의 체력을 생각해주네요.]
브래들리는 완장을 벗어서 두리번거리다가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캡틴?”
“부주장인 캐머런이 필드에 없네. 네가 차고 있어.”
제퍼슨은 놀라워하며 완장을 받았다.
“이걸 제가 차라고요?”
“임마. 정식도 아니야. 부주장도 없으니까 네가 차라고.”
“······.”
“미국 스포츠에선 실력 좋은 놈이 최고인 거야. 뭐, 문제 있어? 다른 애들도 완장을 네가 받는 걸 싫어하는 눈치가 아닌데.”
브래들리가 씩 웃으면서 완장을 건네줬다.
제퍼슨은 주위를 둘러봤다.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동료 선수들. 제퍼슨은 멋쩍게 웃으면서 ‘C’가 새겨진 완장을 팔에 꼈다.
물론 정식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잠깐의 장면은, 미국 축구팬들에게 다음 미국 국가대표를 이끌어나갈 핵심 선수이자 캡틴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에 팬들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치며 환호했다.
환호 때문일까.
중원에서 공을 잡은 맥케니가 거침없이 전진 드리블을 치고 오다가, 풀리시치에게 스루패스를 찔러줬다.
풀리시치는 가볍게 선수 하나를 제치고 다시 제퍼슨의 발끝을 향해 그야말로 완벽한 ‘택배’를 보냈다.
그런 찬스를 제퍼슨이 놓칠 리가 없었다.
골문 왼쪽 공간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제퍼슨의 세 번째 골.
[4대 0입니다!]
[제퍼슨!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경기를 끝내버립니다!]
“WoooooOhhhhhh!”
“제퍼슨! 미쳤다! 해트트릭!”
절망하며 무너지는 아이티 선수들을 뒤로한 채, 제퍼슨은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관중석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대표팀의 엠블럼과 주장완장을 가리키면서 포효했다.
“우와아아아아!”
“빌어먹을! 저 자식 너무 멋있잖아!”
“터프함을 보라고. 마치 스티브 같잖아?”
“파란 쫄쫄이 스티브?”
“Oh, Fucking Captain America!”
“캡틴 아메리카!”
“나이가 너무 어린데?”
“미국은 나이 따위 상관없다고!”
“다음 캡틴은 너다, 제퍼슨!”
“캡틴 아메리카라고!”
관중 중 누군가 포효하는 제퍼슨에게 성조기를 던졌다.
제퍼슨은 성조기를 받아 어깨에 둘렀다.
그 모습에, 흥분에 겨워 농담처럼 캡틴 아메리카란 말을 던졌던 관중들은, 순간 환호도 잃고 침묵에 빠진 채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와, 진짜 잘 어울리잖아?’
외모와 체격, 그리고 성조기를 어깨에 두른 모습까지.
진짜로 ‘캡틴 아메리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