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36화 (36/258)

36. 캡틴 아메리카 (3)

[크리스티안 풀리시치와 제퍼슨 리의 합작골입니다!]

[제퍼슨이 드리블 돌파로 수비수 세 명을 제친 뒤에 풀리시치에게 완벽한 패스. 그리고 다시 욕심을 내지 않고 확실한 위치에 있던 제퍼슨에게 킬러 패스를 찔러 주네요!]

[제퍼슨. 데뷔전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며 분위기를 다시 한번 바꿉니다!]

경기를 지켜보는 해설진은 가장 먼저 흐름을 캐치한다. 장기도 훈수 두는 사람이 대국 전체를 더 잘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해설자들은 경기의 흐름이 묘하게 바뀌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미국에서 선수 한 명이 부족하다는 게 느껴지지 않아요!]

[제퍼슨의 투입 효과가 발휘되고 있는 것 같네요.]

[제퍼슨이 수비진과 골키퍼를 드리블로 제치고 만들어 낸 골에 분위기가 확실하게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거친 몸싸움으로 부딪쳐 주면서 과테말라가 조심스럽게 경기운영을 하게끔 만들고 있네요!]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감탄을 터뜨렸다.

이른바 제퍼슨의 투입 효과였다.

드리블 골로 상대 선수를 농락해서 분위기를 바꾸고,

흔들리는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 줬다.

“모두 진정하고, 조급해하지마! 이제 동점이야! 최대한 볼을 돌리면서 우리 흐름을 찾자고!”

제퍼슨은 이제 막 교체 투입되었지만,

필드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은 동료 선수들의 정신을 깨워 줬다.

‘저 자식, 17살 맞아?’

풀리시치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제퍼슨을 쳐다봤다.

저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지 않은가.

오랫동안 필드를 뛰어다닌 베테랑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심지어 캡틴 브래들리는 그런 제퍼슨의 말에 동조하고,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캡틴이 제퍼슨에게 힘을 보태 주는 상황.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가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것에 선수들은 어느새 모두 동조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경기는 제퍼슨이 주도하는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제퍼슨의 투입 이후 경기력이 상당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득점을 위해 제퍼슨을 투입한 게 아닌 것 같군요. A매치 데뷔전을 치르는 17세의 제퍼슨은 필드 위에서 어떤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엄청난 몸에 비교해 놀라울 정도로 우아한 볼 터치도 계속 눈에 들어오네요.]

[그렇다고 몸싸움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완벽한 피지컬에, 기술까지. 이 어린 선수는 데뷔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들의 말처럼, 제퍼슨의 투입 이후 마법처럼 경기력이 확연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제퍼슨을 처음 보는 관중들은 단지 그가 터프한 타겟터라고 여겼지만, 이내 제퍼슨의 발재간과 기술, 그리고 퍼스트 터치를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부드럽고도, 우아한 움직임.

그리고 순간적인 가속으로 수비진을 헤집는 모습. 팬텀 드리블로 단숨에 수비수를 벗겨 내고 드리블에 성공하는 장면까지.

현재 21명이 뛰는 필드.

그 필드에서 제퍼슨은 가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제퍼슨이 공을 ‘이쁘게’만 차지는 않았다. 그는 영리하게도 자신의 피지컬을 적재적소에 이용할 줄 알았다.

“반칙! 반칙이잖아요!”

삐빅!

방금도 과테말라 수비수가 가슴을 붙잡고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심판이 뛰어오고, 제퍼슨은 양손을 기도하듯이 모으고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려고 하다 보니 무리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알았어. 조심하라고. 더 그러면 카드야.”

“네, 심판님.”

제퍼슨의 공손한 어조에 심판은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가슴을 붙잡고 쓰러진 선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팔꿈치로 찍었다니까요!”

“그만해. 너도 아까 7번에게 위험한 태클 했잖아? 조심해. 너도 지켜보고 있어.”

“······.”

풀리시치는 심판과 과테말라 선수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제퍼슨을 바라봤다.

제퍼슨이 마침 시선을 마주하면서 씩 웃어 보였다.

“저 미친 자식. 하.”

풀리시치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아까 어시스트해준 거 보답이라고 생각해. 풀리식!”

“어후. 이거 맹랑하기 짝이 없네.”

풀리시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과테말라 선수는 오늘 몇 번이나 풀리시치를 위험한 태클로 쓰러뜨린 선수였다.

제퍼슨은 그걸 유심히 지켜보다가 보복성 파울을 범한 것이다.

“짜식.”

풀리시치는 왠지 저 덩치 큰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저 자식이 나보다 더 캡틴 같지 않아?”

“그러게요. 캡틴. 나중에 은퇴하실 때 완장 물려줘야겠는데요?”

“허. 나보고 벌써 은퇴 종용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풀리시치는 다가온 캡틴 브래들리와 실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두 명 다 프로 무대 경험이 많은 선수다. 제퍼슨이 무엇을 위해 저런 행동과 경기 플레이를 보여 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제퍼슨이 보여 주는 모습은 평소하고는 달랐다.

많이 뛰고, 더 거칠고, 일부러 거친 파울을 범하고.

‘열정적이군.’

침체된 팀 분위기를 바꾸는 플레이.

그것도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 이제 막 데뷔하는 햇병아리가 팀을 위해 미친 듯이 뛰는 모습은 팀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선수들은 제퍼슨의 플레이에 무언가를 느꼈다. 더 빠르고, 더 거칠고, 더 많이 뛰고 달려들었다. 맹렬한 움직임에 과테말라는 한 명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확연하게 바뀌는 경기 흐름.

브래들리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제퍼슨이 하는 걸 보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국가대표의 캡틴으로서 얼마나 경기를 많이 뛰었던가. 센츄리 클럽까지 들 정도로 미국의 캡틴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도 이제 늙었음을 실감하고 있었고, 90분 내내 저렇게 열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자식이 진짜 캡틴이네.’

브래들리가 씩 웃었다.

***

흐름은 되찾았다.

슬쩍 전광판을 바라봤다.

88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미국은 이겨야 했다.

원래는 2:0 스코어였으니까. 그에 반해 과테말라는 아쉬워도 무승부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벌써 선수를 내리고 수비에 힘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선수를 수비 진영 쪽으로 내린다고 수비가 좋아지는 건 아니다.

앞을 가로막는 미드필더 둘.

내가 공을 지키면서 천천히 접근하는 사이, 왼쪽에서 풀리시치가 빠르게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툭툭!

우선 눈앞의 선수를 스텝 오버로 제친 뒤에, 풀리시치에게 전진 패스를 찔러 주고 곧바로 나도 깊숙하게 들어갔다.

“제―퍼슨!”

풀리시치가 왼쪽 공간을 말 그대로 찢어 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향해 찔러 주는 날카로운 패스가 발끝에 걸렸다.

“막아!”

“Mierda(제기랄)!”

수비진을 헤집고 도착한 패스.

공을 잡기 전부터 이미 머릿속에서 빠른 계산이 지나갔다.

골문까지의 거리, 수비의 위치, 골키퍼의 방향, 모두.

찰나의 시간에 내가 공을 잡고 움직여야 할 최적의 상황을 계산했다.

여기서 슈팅?

아니다.

수비수 하나가 급하게 다가온다.

때렸다간 몸에 맞고 굴절될 것이 뻔했다.

잔뜩 흥분한 얼굴의 수비수. 아, 아까 그놈이다. 오늘 풀리시치에게 거친 반칙을 해대다가 나한테 팔꿈치로 얻어맞은 자식.

이놈을 유의 깊게 봤더니 대충 플레이 스타일이 보였다.

여기서 적극적으로 발을 뻗으면서 공을 빼내려고 하겠지.

그러면 한 번 벗겨 낸 뒤에.

툭!

역시 발을 길게 뻗는 적극적인 태클.

왼발로 공을 오른쪽으로 살짝 빼면서,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부드럽게 돌렸다. 그리고 빠진 공이 있는 위치에 거짓말처럼 내 왼발이 도착했다.

“······!”

걸렸다!

그때 오른쪽에 있던 수비수가 달려들었다.

슈팅을 때리려는 타이밍.

순간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수비수의 거친 태클.

몸의 무게 중심이 일순 흔들리면서 무너진다.

그러나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오른발로 중심을 최대한 유지한 채, 그대로 골문 구석을 향해 슈팅을 때렸다.

뻐엉!

터닝 슛.

쓰러지는 동작임에도 다행히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지어졌다.

됐다.

임팩트가 완벽하게 들어갔다.

골키퍼가 차마 반응도 못 하는 속도로 터닝슛은 강렬한 궤적을 그리며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렁!

“제―퍼슨!”

“제퍼슨! Lee! Lee!”

“오, 제퍼슨―!”

축구판에는 경기 시작 후 5분과 종료 직전 5분을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나는 추가시간 포함, 경기 종료 5분 전에 결승골을 과테말라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제기랄. 이 사랑스러운 자식!”

풀리시치가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어시스트가 최고였어!”

뭐, 내 슈팅이 더 좋기야 했지만.

달려오는 대표팀 동료 선수들을 뒤로 한 채, 골대 뒤 광고판을 뛰어넘어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성조기를 흔들고 있는 관중들을 향해 내 가슴팍에 있는 미국 대표팀의 엠블럼을 찢어 버릴 듯이 부여잡으며 포효하듯이 소리쳤다.

“Who am I?”

“Jefferson―Lee!”

“Who am I?”

“Fucking America King!”

***

[제―퍼슨! 골! 골입니다!]

[제퍼슨이 88분 극적인 역전골을 집어넣습니다!]

[태클에 쓰러지면서까지 때리는 강력한 슈팅에 골키퍼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합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적인 골입니다! 제퍼슨. 교체 투입 후 두 골을 기록하면서 수렁에 빠지는 미국을 살려 냅니다!]

88분.

펠레스코어를 다시 한번 뒤집는 거짓말 같은 재역전골에, 경기장의 미국 관중들은 말 그대로 뒤집혔다.

“우와아아아!”

“저 자식 대체 뭐야?”

“동부에서 지금 미쳐 날뛰고 있는 녀석이지?”

“오, 세상에. 저기서 쓰러지면서도 골을 넣었어!”

“미국의 왕이라니!”

“토론토 애들이 미국의 왕이라고 할 때 비웃었는데, 좋아. 오늘부터 저 자식은 진짜 미국의 왕이야!”

펠레스코어는 가장 재밌는 축구 스코어다.

그런데 그 펠레스코어를 한 번 더 뒤집는 스코어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스코어다.

더구나 고작 17살에 데뷔하는 선수다.

국가대표라는 엄청난 부담감 속에서 치르는 데뷔전.

거기서 골을 넣는다는 건 팬들이나, 코칭스태프나, 그리고 TV로 경기를 지켜보는 미국 시민 모두에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혹, 전 미국 시민은 무리더라도, 적어도 ‘축구팬’들에겐 제퍼슨의 이름이 똑똑히 각인되었다.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

팀의 에이스와의 아름다운 연계 플레이.

그리고 골문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멋진 터닝 슛까지.

토론토 팬들에게만 회자되던 미국의 왕이란 칭호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허.”

버홀터 감독은 광고판 위에 올라서서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제퍼슨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수비를 찢어 버렸군.’

그간 미국의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두고 많은 선수들이 경합을 벌였다.

하지만 확실한 공격수는 없었다.

알티도어는 좋은 선수지만, 혼자서 득점을 만들어 내는 골게터가 아니었다.

‘심지어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어.’

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 명의 퇴장, 펠레 스코어, 미쳐 돌아가는 필드의 분위기. 캡틴 브래들리도 진정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퍼슨은 단순한 골게터가 아니라 필드의 흐름을 열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팀의 중심처럼.’

마치 캡틴처럼 말이다.

특히 이렇게 답답한 상황 속에서 빛나는 능력이었다. 이런 건 단순히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선수들 사이에서 흐르는 심리를 아주 잘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주도적으로 무언가 플레이를 해내고, 그로 인해 경기력의 변화가 찾아온다.

필드위의 마에스트로.

경기의 지휘자.

그 생각이 들자 버홀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스트라이커가?”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났나.

“엿 같군. 이러면 월드컵이 기대되잖아?”

늘 16강 부근에서 한계를 경험했던 미국.

버홀터 감독은 가슴이 뛰었다.

확실한 공격수 하나만 있으면 그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단지 확실한 공격수가 아니라.

“완벽해.”

완벽한 스트라이커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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