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35화 (35/258)

35. 캡틴 아메리카 (2)

캡틴 아메리카 (2)

그렉 버홀터는 엔트리를 발표하면서 많은 논란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선발.

연령별 대표 기록은 전무하고, 심지어 축구를 시작한 지 반년밖에 안 된 17살의 유망주를 대표팀 엔트리에 집어넣었으니까.

“제퍼슨 리를 깜짝 선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연령별 대표 경험도 없는, 17살의 선수를 이번 월드컵 예선 엔트리에 넣은 건 무모한 선택이 아닐까요?”

“감독님. 이는 협회의 뜻입니까? 코칭스태프의 뜻입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플래시 세례.

‘허.’

버홀터 감독은 헛웃음을 흘렀다.

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 실패.

그로 인해 사람들은 22년 월드컵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다.

버홀터는 내심 만족했다.

프로축구뿐만 아니라, 북미 내 축구의 인기는 엄청나게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그거고, 지금 버홀터는 이 회견에서 확신을 표해야 한다.

감독이 선수 선발에 확신이 없다면, 수많은 풍파에서 팀을 지킬 수 없다.

버홀터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선 차례대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제퍼슨 리의 깜짝 선발은 너무 당연합니다. 리그 15경기 24골 6어시스트. 뭐가 더 문제죠?”

“하지만 이번 경기는 월드컵 예선입니다. 이 예선에 성인대표 경험은커녕, 연령별 대표 경험도 없는 어린 선수가 엔트리에 포함되기에는 도박이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미국 국적을 지닌 선수 중에 제퍼슨보다 득점 기록이 좋은 스트라이커가 누가 있죠?”

“······.”

“협회와 저와 코칭스태프 모두의 뜻이 일치했습니다. 제퍼슨은 이번 엔트리에 포함될만한 충분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이 선수가 현재 노쇠화 되고 있는 대표팀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거라고 보십니까?”

그 질문에 버홀터는 한차례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새로운 바람이, 허리케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

집에 도착하자, 이미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집에 들어온 나를 본 어머니가 빙긋 웃으셨다.

“아들, 홍차? 아니면 커피?”

“음, 커피 주세요.”

“설마 아빠처럼 얼음 넣어서?”

“네.”

“세상에. 대체 블랙커피에 얼음을 넣어 먹는 건 누가 시작한 거야?”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가 얼음이 둥둥 뜬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말했다.

“그···일단 축하한다. 대표팀 뽑힌 거.”

“감사합니다. 저도 이렇게 빨리 뽑힐 줄은 몰랐네요.”

사실 언젠가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올지는 예상치 못했다.

아버지는 다소 아쉬운 기색을 감춘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국적 포기 신고를 해야겠구나.”

“···어차피 해야 할 건데요. 뭘.”

“한국에서 운동선수로 생활하기는 힘들더구나. 아빠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에 반해 미국은 스포츠 천국이니······ 더구나 제프, 너는 한국에 가본 적도 없잖으냐. 기껏해야 이 아빠 따라 태권도 배운 거 말고는 뭐.”

“네.”

사실 아버지는 다소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의외로 큰 문제는 없었다.

본래 제퍼슨은 자신이 미국인이라 여겼고, 한국은 그저 아버지의 고국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국과 연관된 건 어렸을 때 배운 태권도와 서툴게 하는 한국어뿐.

그 때문에 내가 미국 대표팀 엔트리에 뽑히고, 아버지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에 약간의 아쉬움만 표할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도 뭐··· 한국에서 먼저 선발 제안이 왔으면 몰랐을까.’

애석하게도 한국은 MLS에서 뛰고 있는 선수까지 주목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고작 반년.

반년 동안의 플레이를 보고 나를 엔트리에 넣은 미국 대표팀의 감독이 더 신기한 거지.

감독이 언론 회견에서 선발 엔트리에 대한 확신을 표하는데, 내가 흔들릴 여력은 없다.

무엇보다 미래에서 미국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순항하고, 북중미 월드컵에서 폭발하며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지만,

한국 축구는 그야말로 암흑기에 휩싸인다.

오죽하면 내가 국대에서 부상투혼으로 경기를 뛰었겠나.

그러면서 부상은 더 심해지고 몸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지.

과거를 떠올리자 입 안이 썼다.

“하지만 아들아. 네 몸에 흐르는 핏줄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음을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구나. 비록 너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지만, 그래도 아빠의 고국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느낀 바와는 달리 아버지는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하신 듯했다. 한국인으로서 올림픽메달까지 따며 국위선양 하셨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버지.”

“그래. 그럼 오늘 로드릭하고, 산티하고 다 같이 외식이나 할까?”

“외식이요?”

“그래. 여기 타코집이 맛있다던데?”

“혹시 저나 랩터스의 레너드하고 동행하면 음식이 공짜라는 식당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크흠. 흠흠.”

***

“18년 러시아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필코 카타르 월드컵에 진출하고, 다음 라운드를 향해 갈 겁니다.”

-처음으로 별과 스트라이프(The Stars & Stripes)의 일원이 되어 국민들의 기대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혹시 최연소 출장자, 프레디 아두의 전철을 밟는 거 아니냐는 걱정이 있습니다. 부담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프레디 아두(Freddy ADU)

만년 유망주.

아마 지금도 아직 20대일 거다.

미국 축구계에서 ‘제2의 펠레’라고 부르던 선수였다. 나보다 한 살 빨리 A매치 데뷔전을 치를 정도였으니까.

16살에 미국 국가대표에 데뷔한 신성.

그러나 그는 거짓말처럼 몰락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짤막한 답변을 남기고 취재진의 인터뷰를 끝냈다.

17살 나이의 대표팀 선발.

프레디 아두라는 전례가 있어서,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물론 내가 리그에서 벌인 엄청난 활약 때문에 그 정도가 심한 건 아니지만, 어딜 가도 무조건 까고 보는 사람들은 있지 않나.

결국, 축구 선수는 경기력으로 말해야 하고, 스트라이커는 득점으로 말해야 한다.

북중미 월드컵 4차 예선.

하지만 상대팀들이 강팀은 아니었다.

‘과테말라, 그리고 아이티.’

절대 강팀이라고 볼 수 없는 팀.

그 때문에 버홀터 감독도 부담 없이 나를 선발한 것이리라.

“C’mon. 제프!”

공식 훈련장에 도착하자 마이클 브래들리(Michael Bradley)가 먼저 반겨 줬다.

팀의 캡틴이자, 국대의 캡틴.

브래들리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선수들에게 소개를 해 줬다.

“이 친구가 그 친구예요? 캡틴. 팀에서 조지를 벤치로 보내 버린?”

잘생긴 얼굴의 크로아티아계 선수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크리스티안 풀리시치(Christian Pulisic)’

현재 미국의 명실상부한 에이스.

도르트문트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올해 첼시로 이적한 퓰리시치는 미국의 공격진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헤이, 반가워. 제퍼슨.”

“잘 부탁해. 풀리시치.”

“경기 몇 번 봤어. 득점력 죽여주던데?”

그 이후로도 몇몇 선수를 소개받았다.

특히 조지 알티도어는 나를 국가대표에서도 보게 될 줄은 몰랐던지 다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제프, 팀에서는 내가 밀렸지만, 여기선 나도 호락호락하게 안 밀려. 미안하지만 이번엔 벤치만 달구다가 돌아갈지도 모르겠네. 제프.”

“하하. 조지, 전 당신의 플레이를 좋아해요.”

“나도 네 플레이가 좋아. 이왕이면 투톱으로 같이 나가면 좋겠다만, 감독님의 의중을 아직 모르겠네.”

“훈련하면 알겠죠.”

아무리 이적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애송이인 나에게 팀에서 주전 자리를 내주고 감정이 상할 만도 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욕을 불태우는 꽤 쿨한 남자였다.

어찌 됐든 대표팀의 분위기는 좋았다.

감독의 젊은 리더쉽도 어느 정도 통하는 것 같았다.

‘후. 데뷔전이라.’

기분이 묘했다.

이제 경기를 치르고 나면,

몸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를 둘러야 한다는 사실.

이제, 나는 미국 국가대표다.

***

과테말라는 꽤 나쁘지 않은 팀이다.

월드컵 진출이 힘들긴 하지만, 북중미에서는 제법 충실한 전력을 갖춘 대표팀이다.

“오늘 조지가 열정적인데?”

“리가 국대까지 쫓아왔으니까.”

“소속팀에서 밀린 거야 그렇다 쳐도 국대에서 만큼은 아니다 이건가?”

벤치에 앉은 동료 선수들의 대화에 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알티도어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2대 0의 스코어를 만들어냈다.

최전방에서 격하게 싸워 주는 움직임은 그가 오랫동안 미국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인 이유를 증명하고 있었다.

‘쿨하네.’

이렇게 주전 경쟁을 위해 실력으로 보여 주는 모습은 베테랑 선수로서 충분히 멋졌다.

그때였다.

여유로운 경기에 흐름의 변화가 생겼다.

삐빅!

“제기랄!”

“오, 심판! 이건 할리우드라고!”

“과테말라 이 자식. LA에 왔다고 할리우드 찍는 거야?”

심판의 휘슬과 PK를 선언하는 손짓.

우리 벤치가 뜨거워졌지만, 사실 PK가 맞았다.

‘스티브 번바움, 저 녀석 이럴 줄 알았다.’

저번에 한차례 붙어 봤던 DC 유나이티드의 수비수.

실력은 있지만, 시야가 좁고, 반칙은 기본, 성질까지 더러운 녀석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과테말라의 9번하고 신경전을 펼치더니, 방금 페널티 박스 안에서 위험한 태클로 빨간 맛을 드셨다 이거지.

차세대 미국 수비수라면서, 왜 월드컵을 못 가고 중국리그로 갔는지 알 만했다.

대표팀에서도 저런 플레이를 보이니까.

아마 저 자리를 알렉산더 바카가 차지하겠군.

삐-익!

“우오오오오!”

소수의 과테말라 원정팬들이 환호했다.

9번이 침착하게 밀어 넣은 PK는 바로 득점으로 기록됐다.

“집중해! 집중! 경기 끝나려면 30분 남았어! 뒤로 빼지 말고 주도권 지키면서 공격 단단히 틀어막아! 예들린! 자리 지켜! 너무 올라가지마!”

감독님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수비수 한 명이 퇴장당한 상황.

감독님은 샬케의 중앙 미드필더 웨스턴 맥케니(Weston McKennie)를 빼고 센터백 맷 미아즈가(Matt Miazga)를 투입했다.

그러나 어린 선수인 미아즈가는 흔들리는 수비진에서 집중을 유지하기 어려워했다.

‘묘한데.’

흐름이 묘했다.

수비수의 퇴장과 PK골 헌납.

이어지는 과테말라의 파상공세.

그리고 걱정했던 끔찍한 일이 결국 벌어졌다.

“Gooooolalalalal!”

“Los Chapines! 과테말라!”

동점골이 들어간 것이다.

LA에 있는 홈 경기장은 침묵에 빠졌다.

소수의 원정팬은 미쳐 날뛰고.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린 과테말라 선수들은 벤치로 달려가면서 서로 끌어안기 바쁘다.

아무리 강팀이어도 10대 11의 싸움은 힘들다.

헐거워진 중원. 점유율을 내주고 주도권마저 내줬다. 또 후반전에 들어서서 선수들이 지친 상황. 그야말로 공간이 텅텅 비었으니 과테말라 선수들이 날뛸 수밖에.

동점골이 들어가고도, 파상공세를 멈추지 않는 과테말라.

결국, 미국 팬들이 끔찍하게 여기던 상황이 벌어졌다.

“What the Fuck!”

우리 팀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테말라의 슈팅.

미국 2 : 3 과테말라

끔찍한 스코어였다.

“제퍼슨!”

그때, 감독님이 손짓으로 날 불렀다.

“몸 풀어. 5분 후에 들어간다.”

**

‘이거 어려운데······.’

경기 분위기란 게 있다.

과테말라 쪽으로 휩쓸려 버린 분위기.

미쳐 돌아가는 필드에서 과테말라 선수들은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지면 안 되지.’

이건 자존심 문제다.

펠레스코어는 그 스코어를 만들어 낸 팀으로서는 아주 감격스럽지만, 당하는 처지에선 치욕적이다. 내가 뛰는 팀이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프!”

탁!

그때 캡틴 브래들리가 패스를 찔러 줬다.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

공을 잡고, 빠르게 주위를 살핀다.

나에게 몰려드는 수비들의 얼굴은 다소 들떠있다. 펠레스코어라는 흥분 때문이겠지. 흥분한 수비수는 개인기로 뚫기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그러면.’

공을 발바닥으로 긁으면서 전진했다.

그러다가 수비수 앞에서 상체를 크게 흔들어 페인트를 주면서 벗겨 내고,

그다음은 가뿐하게 왼발, 오른발을 오가는 팬텀 드리블로.

선수 두 명을 순식간에 벗겨 내자 텅 빈 공간이 보인다.

“달려가!”

뒤늦게 공간을 막기 위해 수비수 한 명이 이를 악물고 달려온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법이니까.

달려오는 수비가 공을 노리며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그 찰나의 타이밍에 공을 띄우면서 동시에 점프.

“······!”

내가 태클 피하는 연습을 20년 동안 한 거 알아?

한 번 맞으면 발목 골절은 기본이었어. 그 위협에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했지. 태클을 피하는 기술을 마스터하니 이런 건 일도 아니더라.

“La loco(미친놈)!”

슬라이딩 태클은 빠르게 공을 빼낼 수 있는 수단이지만, 실패하는 순간 만회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위기를 자초한다.

알 수 없는 스페인 말로 욕설을 지껄이는 수비를 떼어 내고 골대를 향해 드리블 치며 달려갔다.

마지막 남은 최종 수비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왼쪽을 보니 풀리시치가 이를 악물고 달려오고 있었다.

수비수 근처까지 짧게 스텝을 밟으며 전진하다가

툭!

왼쪽에서 파고들어 가는 풀리식에게 패스를 보내고.

나 역시 끝까지 박스를 향해 달려 들어간다.

그리고 골키퍼가 황급히 풀리시치를 향해 뛰쳐나오는 순간.

풀리식의 왼발이 오른쪽으로 공을 툭 밀어 넣었다.

“나이스 패스!”

여기서 패스를 주네.

직접 넣을 줄 알았건만.

완벽한 킬러 패스였다.

골키퍼까지 없는 빈 골문.

난 골대 뒤에 있는 미국 홈팬들을 흘깃 보고, 그대로 가볍게 공을 밀어 넣었다.

풀리식의 떠먹여 주는 패스에 의한 확실한 골.

“우오오오!”

“이 자식. 드리블 좋았다고!”

“미친 자식!”

“좋았어!”

국가대표 데뷔골이었다.

나 홀로 수비수 세 명을 드리블로 제치고 팀의 에이스인 풀리시치와 2대1 패스를 통한 골.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동점골에 관중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풀리식. 패스 좋았어!”

풀리시치는 해맑게 웃었다.

“한 번 더 하자고.”

그래야지.

2대 0으로 이기고 있던 걸 비기기에는 너무 아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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