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캡틴 아메리카 (1)
90분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렸지만, 경기장은 아직도 뜨거웠다.
극적인 결승골로 이긴 승리의 여운에 관중들은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급하게 전화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남자가 있었다.
‘세상에. 도대체 뭐였지?’
남자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그는 구단의 영입 명단에 있는 ‘철조망’ 시셀도를 점검하기 위해 파견된 스카우터였다.
이미 시셀도의 영입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현재 구단이 이적제재를 받은 상황. 그래서 다음 시즌에 시셀도를 영입할 생각으로 면밀히 살피고 있었는데, 웬 새로운 선수가 눈에 띈 것이다.
“도대체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군. 폭발적인 스프린터, 화려한 개인기, 드리블, 그리고 그 사이드로 빠지는 스텝하고 마지막 강렬한 터닝 동작은······!”
스카우트에 잔뼈가 굵은 남자였지만 한 경기에, 한 선수에게서 저 모든 장면을 거의 동시에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말이다.
“시셀도보다 최우선이다.”
지금 구단의 공격수는 모두 좋지 못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 거기에 이적 금지라는 제재까지 더해진 상황.
만일 이번 시즌에서 유로파리그조차 나가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게 되면, 다음 이적 시장에서 거물급을 데리고 오는 건 어려워질 것이다.
한데 그런 ‘거물급’이 될 만한 재능이 발견됐다.
그것도 아직 다른 구단의 스카우터 망에 들어가지 않은, 순수하게 빛나는 보석이 말이다.
남자는 황급히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죠?
“아, 단장님. 실례했습니다. 방금 시셀도의 경기를 보고 나왔습니다.”
-시셀도? 그 친구 여전히 대단하죠? 아직 2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제가 같이 뛰던 존 테리의 냄새가 나던 친구던데.
“단장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네?
“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 대단한 시셀도가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해 버린 스트라이커를요.”
-스트라이커요?
“제가 자료 모아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꼭, 스카우터들하고 같이 확인해 주십시오. 꼭!”
-음, 알겠습니다. 자료 보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체흐(Petr Cech) 단장님. 블루스의 새로운 공격 옵션이 되어 줄 선수입니다. 면밀하게 살펴 주세요.”
-그렇게까지 강조하시는 걸 보니 기대가 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달칵.
전화를 끊고 남자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구단의 레전드들이 현 구단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하면서, 구단은 새로운 변화의 시발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발점에, 새로운 스트라이커가 되어 줄 재목을 발견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부디, 블루스(The Blues)의 일원이 되면 좋겠군.”
시셀도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던 런던의 클럽, 첼시(Chelsea F.C.)의 레이더망에 제퍼슨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
축구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는 스포츠다.
······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최근엔 같은 여름 스포츠인 메이저리그와 TV 중계 시청률에서 앞서기도 했고, NBA와 NHL(아이스 하키)을 평균 관중에 앞서며 NFL, MLB의 뒤를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특히 토론토 시내의 여론이 대단했다.
올해 NBA에서 토론토 랩터스가 기적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문에 지역을 연고로 하는 다른 스포츠팀에도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데, 마침 우리 토론토 FC가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이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 그 인기를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퍼슨. 그거 알아?”
“뭐가?”
“아까 구단 직원한테 들었는데. 이번 달에 가장 많이 팔린 유니폼이 누구의 유니폼일까?”
산티아고가 호들갑을 떨었다.
음, 대충 예상은 가는데······.
“알티도어?”
“아니.”
“캡틴?”
“아니.”
“산티아고?”
“야! 내 유니폼은 아직 안 나왔어!”
산티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내 유니폼 매출이 1위를 기록했다.
단순히 유니폼이라고 여길 건 아니다.
현재 구단의 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까.
“맞다. 우리 시내에 있는 타코집 가지 않을래?”
“타코집? 너 미국에서 태어나서 멕시코 타코 같은 걸 그리워하는 처지는 아니잖아?”
“저번에 지나가다 봤는데, 이런 현수막이 있더라.”
“뭔데?”
“카와이 레너드나 제퍼슨 리와 동행 시 음식 FREE!”
“······오늘은 엄마랑 로드릭도 데리고 가서 거기서 외식할까?”
“좋지.”
저런 현수막을 본 적이 있긴 한데.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고 엄청난 성적을 보였던, 한국 감독하고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음식점의 음식이 무료라던가.
뭐······. 하여튼 인기를 느낀 건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어머니와 외식을 하는데, 마침 몬트리올 더비가 있던 그다음 날이었다.
“제퍼슨 리와······ 같이 있는 분은 혹시 여자 친구입니까?”
이탈리아 출신 주방장의 센스.
어머니는 애써 좋아하는 기색을 감추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얘 어머니예요.”
“이런, 고마워요. 이렇게 훌륭한 축구선수를 만들어 주셨기에, 제 아들이 축구장에 갈 때마다 행복해합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특별한 음식을 대접해 드리죠.”
그날 주방장이 내놓은 회심의 고급요리는 본래 식당에서 볼 수 없던 특별한 음식이었고, 어머니는 무척 만족하셨다.
심지어 그 음식들도 돈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 미안해하시면서 주신 팁만 예의상 받을 뿐.
“여기에선 내가 받는 대접이 참 달라.”
“무슨 소리세요?”
“다른 곳에선 미국의 육상 영웅이라고 바라봐 주는 시선만 받았는데, 여기 토론토에서는 미국의 왕을 낳은 엄마라고 하잖아. 기분은 더 좋아”
“하하······.”
“아버지도 이런 너의 인기를 느껴 보셔야 할 텐데.”
어머니의 아쉬움은 금방 해결됐다. 아버지가 토론토에 오셨다.
“아니, 누굴 어수룩한 동양인 관광객으로 생각했나 봐. 택시비를 사기 치려 하더라고.”
공항에서 여기까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바가지요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데 아버지는 잘 모르셔서 그냥 돈을 건네주셨는데, 때마침 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 도중에 언뜻 내 이름이 몇 번 나왔나 보다.
통화를 얼핏 들은 택시 기사가 조심스레 물었다고 한다.
“혹시 토론토 FC의 제퍼슨하고 아는 사이입니까?”
“제 아들입니다.”
“오, 세상에. 죄송합니다. 왕을 낳으신 분께 실례했네요. 여기 요금 돌려드리겠습니다.”
“네?”
“공짜입니다. 가서 제퍼슨에게 몬트리올 전 해트트릭 아주 잘 봤다고 해주세요!”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웃으셨다.
“세상에. 내가 우리 아들 때문에 택시를 공짜로 타는 날이 오다니.”
“신기하네요.”
그러게, 진짜 신기하네.
토론토 FC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 토론토 지역 신문과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축구 얘기가 흘러나왔다.
늘 라디오를 듣고 사는 택시 기사가 나를 알 만하겠네. 그래도 사기 치려던 요금을 돌려줄 줄이야.
***
토론토 FC의 12경기 11승 1무의 엄청난 기세.
이런 분위기에 레딧에 축구 칼럼으로 유명한 축구 전문가의 글이 올라왔다.
[토론토 FC,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일 것.]
[후반기 MLS 동부 컨퍼런스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축구팬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현재 토론토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다 못해 파괴적입니다. 후반기 12경기에서 11승 1무를 기록하며 엄청난 기세로 동부리그를 흔들고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 시민으로서 토론토 FC의 팬입니다. 그런 저도 지금의 토론토의 상승세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17시즌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사실 그건 지오빈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거든요. 그런데 지금, 지오빈코를 잊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스트라이커가 토론토를 이끌고 있습니다.]
제퍼슨 리.
레딧의 ‘축구’관련 게시판에서 제퍼슨의 이름은 단연코 화제였다.
MLS를 지금까지 지배해 온 선수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온 슈퍼스타였다.
그것도 아니면 남미 출신의 유망주였다. 그러나 제퍼슨은 미국인이다.
미국 국적을 가진 선수가 이토록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보여 줬던 적이 있던가.
[공격 축구를 신봉하는 토론토였지만, 알티도어는 혼자서 결정짓는 스트라이커는 아니었습니다. 좋은 능력을 갖췄지만, 두꺼운 수비벽을 뚫고 홀로 해결할 능력은 부족한 선수였죠. 전반기를 본 팬들은 아실 겁니다. 답답하게 빈공만 때리다가 역습 한 방에 무너지는 경기가 얼마나 많았나요. 그런데 미국의 왕이 토론토에 온 이후로 달라졌습니다. 엄청난 득점력으로, 12경기 동안 무득점 경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게 전반기와 같은 팀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왼발, 오른발, 머리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퍼펙트(Perfect)한 스트라이커입니다.]
일반적인 찬사를 보내는 찬양에 가까운 칼럼이었지만, 글에 대한 반응도 다 비슷했다.
[축구는 여자애들이나 히스패닉 애들만 보는 건줄 알았는데, 죽여주더라. 특히 제퍼슨 경기는 몇 번 챙겨 봤는데 미쳤어. 거칠고 터프하고, 화끈해!]
[경기 진짜 재밌더라. 미친 듯이 두들기고, 골 넣고, 불도저처럼 수비들 다 부수고.]
[터프해. 그리고 미치도록 섹시해.]
[솔직히 요즘은 메이저리그보다 토론토 경기가 더 재밌음.]
[토론토로서는 아주 좋은 영입이야. 저 정도 기록을 세우려면 루니나 즐라탄은 돼야 하는데, 그 정도 급의 유럽 스타면 얼마나 돈을 줘야 하는데?]
[근데 제퍼슨의 실력이라면 유럽 빅클럽이 노리지 않을까?]
[그럴 듯. 적어도 다음 시즌이면 나갈 듯.]
[신대륙 출신이 구대륙을 정벌하는 건가?]
[식민지 출신이 본국을 정벌하러 가는 그림이네.]
[미국의 왕이 유럽의 왕이 되는 거지.]
[재미겠네, 그거]
[그건 그렇고, 토론토가 이제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지금 기세가 좋아도 우승은 힘들지 않을까?]
[그러게. 동부엔 루니의 DC, 서부엔 즐라탄의 갤럭시가 있잖아?]
[그리고 토론토엔 왕이 있지.]
[삼파전이군.]
[삼파전이야.]
***
우리 팀은 정규리그의 남은 세 경기에서 모두 1승 2무를 거뒀다.
DC 유나이티드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토론토가 2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직행 열차에 탑승했다.
‘로테이션이었으니······.’
이미 플레이오프는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랜드 감독은 마지막 세 경기에서 본인의 공격적인 색채를 지우고 현실을 선택했다.
10월 중순부터 시작될 플레이오프에 대비하기 위해 로테이션을 시도한 것.
이 과정에서 리그 마지막 경기에 로드릭이 감독의 부름을 받아 1군에 데뷔했다.
심지어 그 경기에서 상대방의 결정적인 찬스를 막아 내는 활약을 보여 주며 그랜드 감독의 눈에 띄었다.
아마 추후에 바카의 짝으로 조금씩 출장 수를 늘려갈지도 모르겠다.
전반기가 끝났을 당시, 팀 순위가 11위였음을 생각하면, 우리 팀이 후반기에 보여 준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14경기 무패니까.
상당히 고무적인 성적은 팬들에게 플레이오프와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 줬다.
[킹, 제퍼슨! 14경기 연속골,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리그 종료!]
[득점기계의 기록은 플레이오프까지 이어질까?]
최종 개인 기록은 14경기 24골 6어시스트로, 이번 시즌 목표했던 15개의 공격 포인트의 딱 두 배가 되는 수치였다.
‘나도 이렇게까지 기록을 세울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말해 나도 놀랐다.
MLS의 수준이 낮은 게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경험과 기술, 미친 피지컬,
그런 피지컬의 단점을 없애 주기 위한 부단한 트레이닝 팀의 노력.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이 기록을 세울 수 있던 것이다.
거기에 개인 수상도 몇 개 받았다.
‘MLS 올해의 신인왕’
‘MLS 골든부츠 3위 (득점)’
‘MLS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덕택에 집에 보관할 메달도 몇 개 얻게 됐다.
“우리 목표는 우승이다. 다음 시즌 CONCACAF 챔피언스리그를 나가 우승하는 게 목표인 만큼, 플레이오프를 잡는다!”
그랜드 감독이 짧은 휴가를 주기 전에 외쳤다.
북중미 챔피언스리그의 출전권은 동부 우승팀, 서부 우승팀, 그리고 FA컵 격인 US오픈컵 우승팀과 플레이오프 우승팀에게 주어진다.
우리 팀이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려면 방법은 결국 하나다.
플레이오프의 우승을 차지해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것.
어차피 플레이오프는 토너먼트고, 우리 팀처럼 스쿼드가 얇은 팀도 불리할 게 하나도 없다.
모두 자신감에 가득 찬 채로, 플레이오프 직전까지 짧은 휴식을 취하려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고 했다.
“A매치요?”
갑작스럽게 발표된 성인 대표팀 엔트리.
그곳에 내 이름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