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33화 (33/258)

33. 물리학의 반역자 (4)

물리학의 반역자 (4)

리그에서 고스트 스텝은 지금까지 치트키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죽지 않는 가속도로 사이드 스텝, 또는 크로스 스텝으로 상대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기술.

고스트 스텝으로 드리블을 치면, 웬만해서는 수비수를 제칠 수 있었다.

근데 지금 시셀도에게 막혔다. 완전히 공을 가로챈 것도 아닌, 그저 발끝으로 공만 툭 건드린 것이지만 사실상 막은 거나 다름없다. 극도로 미세한 볼 컨트롤이 필요한 상황에서 공이 살짝만 위치에서 벗어나도 실패하는 거니까.

역시. ‘철조망’이라 이거지?

하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언젠가는 막힐 줄 알았어. 예상보다 빠르긴 하지만.’

나 역시 제퍼슨의 몸을 갖게 되면서, 그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수많은 러닝백의 움직임을 이미 느껴 봤다. 어쩌면 그 기술을 접목해 축구에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축구에 미식축구의 기술을 접목하는 건 나로서도 대담한 시도였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구하고, 직접 공을 다루면서 사용해 봤다. 이런 노력은 훈련 때 결실을 맺었다.

몇 가지 연습한 기술이 훈련에서 훌륭하게 통했다.

‘미친놈!’

‘도대체 이건 뭐야?’

‘이걸 어떻게 막아!’

바카와 조슈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건 훈련이고, 그들이 시셀도보다 부족한 선수지만, 그래도 이미 프로 선수를 상대로 통한다는 자신감은 충만했다.

시셀도를 상대로 통할지는 모험이지만,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프로선수는 발전할 수 없다.

미식축구의 기술이 축구에 통하기 위한 핵심 요소는 바로 공에 대한 컨트롤이다.

미식축구는 공을 품에 안고, 손에 쥐고 하는 플레이다.

반대로 축구는 발끝으로 공을 다뤄야 한다. 풋볼 특유의 강렬하고 역동적인 무브먼트를 유지하면서 볼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술의 접목이 가능하다. 제퍼슨의 놀라운 운동신경은, 발끝에 공이 달린 것처럼 극도로 미세했고 이것을 가능케 했다.

‘자, 해보자고.’

저 의기양양한 시셀도의 콧대를 한번 눌러줘 보자고.

***

경기장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수많은 관중뿐만 아니라, 경기를 분석하는 다른 구단의 분석관들, 그리고······.

“역시 멕시코의 괴물 수비수라 이거지?”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일단 멕시코 친정팀으로 임대 복귀할 겁니다.”

“일단?”

“런던의 클럽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네요.”

“우리 미국으로선, 멕시코의 대형 센터백 등장이 좋지만은 않은데.”

“북중미 라이벌이니까요.”

“그리고, 우리 미국의 희망일 될 수도 있는 저 친구는 일단 막혔고 말이야.”

“아직 전반전일 뿐입니다. 오히려 시셀도를 뚫을 가능성을 보여줄 미국 스트라이커는 저기, 제퍼슨밖에 없어요.”

“흠, 더 지켜보지.”

“알겠습니다. 감독님.”

***

“미쳤군.”

“저 자식이 왜 미국에 있는 거야?”

“빌어먹을. 멕시코로 꺼지라고 해!”

“축구 엿같이 잘하네.”

관중들의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열정적인 토론토 팬들도 기죽을 정도로 시셀도의 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심지어 제퍼슨의 드리블이 막히는 광경에서 그들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패턴이었다. 제퍼슨은 과연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며 수비진을 뒤흔들고, 슈팅까지 만들어 냈지만, 골네트를 흔드는 것까지는 실패했다.

[경기 정말 재밌네요. 창과 방패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늪축구로 유명한 뉴잉글랜드지만, 제퍼슨을 막아 내기는 힘들어 보이네요.]

[그렇지만, 어쩌면 ‘철조망’ 시셀도를 필두로 막강한 수비진을 갖춘 뉴잉글랜드이기 때문에 지금 이런 경기력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오늘 눈이 환해지는 경기력입니다. 제퍼슨의 창이냐, 시셀도의 방패냐! 오늘 결과가 참 궁금해지는군요.]

제퍼슨이 공을 잡아 놓고 소리쳤다.

“넓게 움직여!”

핏대가 올라올 정도로 고함치는 제퍼슨.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지만, 팀원들은 모두 그의 말에 벼락처럼 움직였다.

제퍼슨을 축으로, 넓게 경기장을 쓰는 가운데 공이 돌았다.

위치를 지키며 공간을 커버하던 뉴잉글랜드의 수비가 점점 체력적으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설진이 점차 변하는 경기의 흐름을 캐치하고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상에. 놀랍습니다. 제퍼슨이 경기를 조율하고 있습니다!]

[제퍼슨이 다소 내려오고, 산티아고가 올라가면서, 패스의 중심이 제퍼슨이 되었습니다.]

제퍼슨의 존재감.

홀로 수비를 뚫고 슈팅을 끝끝내 성공시켰던 제퍼슨이 작정하고 내려와 공을 돌리면서 흐름을 되찾았다.

뉴잉글랜드의 늪축구는 오히려 제퍼슨이 이끄는 흐름에 밀려갔다.

제퍼슨은 계속 패스를 통해 주도권을 쥔 채, 공격을 시도했다.

‘나에 대한 분석을 많이 했단 건 확실해’

제퍼슨이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비단 시셀도뿐만 아니라, 다른 수비수도 제퍼슨의 자그마한 움직임마저 주의하여 살피고, 또 잡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후반 30분쯤.

뉴잉글랜드가 공을 커트해 내고, 역습 기회를 맞이했다.

“제기랄! 토론토! 막으라고!”

“Reds! Reds! 막아!”

[뉴잉글랜드, 역습을 시도합니다!]

[이게 무섭죠. 90분 내내 웅크리고 있다가 터뜨리는 한 방! 이 한 방에 얼마나 많은 팀이 무너졌습니까!]

[달립니다. 수비와 공격수 3:3! 빠르게 올라갑니다.]

[아! 알렉산더 바카!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공을 다시 잡습니다!]

[오 세상에, 깔끔한 태클. 그리고······ 전방을 향해 망설임 없이 롱패스를 뿌립니다!]

[제―퍼슨! 제퍼슨이 달려갑니다!]

역습에 이은 커트, 그리고 또다시 역습.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환되는 극도로 빠른 템포.

그리고 역습 때문에 순간적으로 올라간 뉴잉글랜드의 수비 라인.

그 틈을 파고드는 제퍼슨의 발끝에 공이 걸렸다.

역습으로 모든 라인이 올라가면서 끈끈했던 뉴잉글랜드의 수비가 완전히 무너진 단 한순간.

그 순간에 제퍼슨의 몸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빌어먹을!”

시셀도가 이를 악물고 빠르게 복귀했다.

시셀도가 복귀하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다른 수비가 몸을 날리며 거칠게 제퍼슨에게 태클을 시도했다.

카드를 각오한 파울성 플레이.

“우오오오오!”

툭툭!

그러나 그 순간, 제퍼슨의 발이 마법을 부렸다.

그의 발끝에서 공이 우아하게 움직이면서 잔스텝으로 속도를 유지한 채 대각선으로 빠져나갔다.

‘또 저거냐?’

단숨에 수비의 태클을 피해 버리는 제퍼슨의 고스트 스텝에 BMO 필드가 일순 달아올랐다.

“달려! 달리라고!”

“Go! 제퍼슨!”

순식간에 태클을 피하고 거침없이 공간을 지배하는 러닝백의 모습.

그 짜릿한 모습에 경기장의 모든 관중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마지막 수비수, 시셀도를 바라보는 제퍼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남은 시간은 없다.

뉴잉글랜드의 엄청난 수비력을 보건대, 지금이 오늘 경기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기회일 게 분명했다.

그러면 여기서 저 녀석, 시셀도를 뚫는다.

시셀도가 자리를 지키면서 동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온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공을 치고 달렸다. 그리고 공을 발끝으로 세심하게 컨트롤하면서 왼쪽 대각선으로 스텝을 밟았다.

빠르게 밟히는 잔 스텝.

시셀도가 조금 전에 막았던 고스트 스텝이었다.

‘역시!’

시셀도는 놀랍게도, 그 스텝을 따라오면서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처럼 그의 발이 별안간 툭 튀어나왔다.

공의 궤적만 살짝 틀어도 이 드리블은 실패한다.

그러나 이미 미식축구에는 고스트 스텝을 대체할 기술이 있단 말이지.

자. 이것도 막을 수 있겠어?

***

‘됐다!’

시셀도는 직감했다.

발끝에 걸리는 공의 느낌.

이게 핵심이다.

그가 비디오를 보며 수없이 분석했던 제퍼슨의 저 유령 같은 드리블은, 볼 컨트롤이 핵심이었다. 발끝으로 타이밍을 파고들면서 공의 궤적을 살짝만 비껴 놓으면, 파훼할 수 있다.

아까처럼, 이번에도 말이다.

“······!”

옆으로 살짝 빠지는 공.

그 순간 스텝을 밟던 제퍼슨이 왼발 안쪽으로 공을 자신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찰나의 시간, 짧은 공간에서 공이 양발 안쪽을 빠르게 오갔다.

그리고 거칠고 빠르게, 강렬한 스핀을 먹은 듯한 터닝(Turning)!

휘리릭!

‘턴 한다고? 여기서?’

시셀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퍽!

“헙!”

그간 수많은 테크니션들이 보여 줬던 우아하고 부드러운 턴은 아니었다.

마르세유 턴 같은 우아한 움직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금의 속도를 유지한 채 강렬한 스핀을 먹이는 듯한 거칠고 빠른 회전!

‘이 무슨!’

고스트 스텝의 엄청난 가속도를 유지한 채. 심지어 그 찰나의 순간에 공은 양발 안쪽에서 마치 핑퐁(ping-pong)처럼 빠르게 오가면서 벗어나지 않았다.

고스트 스텝을 밟으면서 동시에 스핀이 가미된 허리케인 같은 턴이었다.

[세상에! 시셀도가 뚫렸습니다!]

[저걸 뭐라 하죠? 마르세유 턴? 크루이프 턴? 마라도나 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움직임이죠?]

[소름이 돋네요. 평생 축구만 본 저도 지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습니다. 제퍼슨 특유의 무브먼트에 마치 허리케인 같은 강렬한 스핀 동작!  그 와중에 공은 끝까지 제퍼슨의 발끝에서 움직였습니다!]

[제퍼스은! 제퍼슨! 시셀도를 벗겨 내고 달립니다!]

[그를 막는 건 골키퍼밖에 없습니다!]

해설진은 격양된 어조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 눈으로 봐도 믿기 힘든 화려한 개인기에 벌떡 일어나 목이 찢어질 것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설마 시셀도가 뚫릴 줄이야.

끝까지 집중하고 있던 구잔이 튀어나왔다.

빠른 판단이었다.

순식간에 각도를 좁히면서 달려드는 순간.

이미 반 박자 빠르게, 제퍼슨이 골키퍼의 움직임을 빼앗으며 강력한 슈팅을 때렸다.

골네트를 찢을 것처럼 꽂히는 슈팅.

“Gooooooaaaaal!”

“What the fuck!”

“제퍼슨, 제퍼슨이 넣었다고!”

“으아아아아!”

BMO 필드가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붉은색의 파도가 일제히 물결치는 경기장의 모습은 장엄했으며, 그 가운데로 달려가며 거칠게 포효하는 제퍼슨의 모습을 수많은 카메라가 담았다.

“빌어먹을 자식! 이 사랑스러운 자식!”

“오, 세상에. 내 와이프가 널 사랑하는 이유가 있어!”

“제퍼슨! 미국의 왕!”

“캐나다의 왕까지 하라고!”

“넌 북미의 왕이야!”

“Fucking lovely! Fuck! C’mon! 이리로 오라고! 제퍼슨!”

모든 팬이 일어나 제퍼슨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오늘의 경기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털썩.

시셀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방금 전 장면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대체······ 그게 뭐야?”

고스트 스텝만 해도 불가능한 개인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드리블 동작에서 강렬한 터닝 동작이라니. 그 와중에 볼을 지켜낸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 속도를 유지하면서, 스텝을 밟고 턴을 할 수 있다는 게?

시셀도의 얼굴이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저게······ 사람이야?”

***

[오늘 제퍼슨의 천금과 같은 결승골로, 토론토가 뉴잉글랜드의 철조망을 무너뜨립니다!]

[토론토 FC 1:0 신승을 거두며 동부리그 3위 자리를 지킵니다!]

[오 세상에. 오늘 제퍼슨이 넣은 골은 이주의 골, 아니 올해의 골로 선정해야 할 것 같네요.]

[제퍼슨 턴입니다. 저는 감히 저 동작에 제퍼슨의 이름을 붙이고 싶네요.]

[좋네요. 제퍼슨 턴! 제퍼슨의 화려하고도 강렬한 개인기가 뉴잉글랜드를 침몰시킵니다!]

[12경기 연속 득점 기록을 세우는 제퍼슨 리! 이쯤이면 그에게 붙은 미국의 왕이란 칭호가 아깝지가 않습니다!]

[제퍼슨의 창이 시셀도의 방패를 처참하게 부숴버립니다!]

“미쳤군.”

“감독님. 제가 본 게 뭐죠? 저걸 뭐라 하죠? 마르세유 턴? 아니, 저건 우아한 몸놀림이 아니에요.”

“거칠고 터프하지.”

“이미 폭발적인 가속도로 회전하면서 달라붙은 수비가 아무것도 못 한 채 나가떨어지잖아요. 다 부수고 찢어버리는 허리케인처럼요.”

“허리케인 턴이라고 부를까?”

“글쎄요. 저건 제퍼슨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제퍼슨 턴이 더 맞는 말 같네요.”

“제퍼슨 턴이라. 자네, 대학 나왔나?”

“대학이요? 예, 나왔죠.”

“내가 비록 축구만 해봤지만, 대학도 나왔단 말이지. 거기서 물리학도 배웠고 말이야.”

“네, 감독님.”

“물리학에서 저게 가능한 움직임인가?”

“네?”

“저 가속도를 유지한 채 사이드와 크로스로 빠지는 스텝. 그리고 관성까지 무시하는 듯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스핀 터닝 동작에, 정점까지 뛰어오르는 점프력. 이 모든 게···물리적으로 가능한가 말이야.”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렵습니다.”

“빌어먹을. 대체 내가 배운 물리학은 뭐지? 응? 뭐냐고.”

“······.”

“이건 물리학에 대한 반역이야!”

“저, 감독님. 그러면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긴! 뽑아야지.”

“네?”

“다음 엔트리에 무조건 넣으라고!”

남자가 거칠게 반응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코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음 성인 대표팀 엔트리에 가장 먼저 이름을 넣겠습니다.”

“좋아.”

“예, 버홀터 감독님.”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그렉 버홀터(Gregg Berhalter)는 경기장에서 포효하는 저 물리학에 대한 반역자를 묵묵히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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