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32화 (32/258)

32. 물리학의 반역자 (3)

MLS 동부 컨퍼런스 31라운드.

토론토가 리그 최다 득점 팀으로, 확실한 공격 축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면, 뉴잉글랜드는 토론토의 대척점에 있는 팀이었다.

두 팀이 붙는 경기는 동, 서부 통틀어 31라운드 최고의 빅경기로 주목받았다.

리그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뉴잉글랜드의 수비진에는 핵심 수비수가 있었다.

후안 카스텔로 시셀도.

일명 ‘철조망’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선수였다.

‘얘가 왜 여기 있어?’

전력 분석관의 자료를 받고 놀란 건 제퍼슨이었다.

‘멕시코에서 뛰다가 영국 간 거 아니었나?’

훗날 첼시 부동의 센터백으로 EPL 최고의 수비 중 하나로 뽑히는 선수였다.

첼시 팬들에게 존 테리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좋은 수비를 보여 줬던 멕시코의 국가대표 주전 센터백.

그가 지금 뉴잉글랜드에 있었다.

강력한 피지컬과 수비진을 지휘하는 카리스마. 영리한 수비. 부상을 도외시하고 몸을 날리는 투지와 팬들이 ‘걸레 수비’라고 부를 정도의 처절한 움직임.

물론 그건 다 미래의 일이긴 하다.

그래도 빛나는 재능은 어디 가지 않으리라. 제퍼슨은 시셀도의 이름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좋은 상대가 될 거 같은데.’

MLS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수비수가 아닐까.

“상대는 4-1-4-1의 포메이션으로 특유의 늪축구를 선보일 거다. 우리는 브래들리, 바스케스, 조슈아가 중원, 조나단, 제퍼슨, 산티아고가 쓰리톱. 4-3-3 포메이션으로 간다.”

브래들리가 다시 라인업에 복귀했다.

바스케스는 전진형 플레이메이커.

브래들리가 전천후 미드필더, 그리고 조슈아가 옆에서 볼을 끊어주는 볼위닝 미드필더의 역할을 수행한다.

“제퍼슨. 어쩌면 오늘 네가 결정을 지을 때까지 풀타임을 뛰어야 할지도 모른다.”

“네.”

“조나단과 산티아고. 제퍼슨의 움직임을 주의하여 보고, 호흡을 맞춰.”

“예쓰, 코치.”

“자, 집중해라!”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그랜드 감독이 손뼉을 소리 나게 치며 시선을 모았다.

그는 과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늪축구? 최고의 수비? 웃기지 말라고 해. 그냥 좀생이들뿐이다. 이길 자신 없으니 엉덩이를 뒤로 빼고 수비만 하는 얼간이들이다. 저놈들에게 진짜 축구가 뭔지 보여 주자. 진짜 스포츠가 뭔지 보여 주자. 알겠어?”

“예쓰, 코치!”

“박살을 내버려! 뉴잉글랜드가 지금 14실점이라지? 가서 20실점으로 만들어 주고 와!”

***

솔직히 말해 시셀도는 MLS에 있기엔 너무 강력한 선수였다.

그 대단한 루니도 뉴잉글랜드를 두 번 만나,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뉴잉글랜드가 당한 실점은 시셀도가 A매치를 뛰고 휴식을 취하거나, 경고 누적으로 결장할 때, 또는 부상으로 빠졌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쉽지 않은 상대다.

그러나 못 뚫을 방패는 아니다.

그가 EPL 최고 수비수가 되려면 몇 년은 남았다.

아직 최고는 아니라 이거지.

삐익-!

경기가 시작되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공을 주고받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깊게 내려앉은 뉴잉글랜드의 수비.

척 봐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수비진과 미드필더 라인의 간격이 촘촘하고 유기적이었다.

‘뚫을 틈이 보이지 않네.’

일단, 패스로 경기를 풀어내 봐야겠는데.

바스케스에게 백패스를 보낸 뒤, 라인을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수비의 시선을 끌었다. 동시에 바스케스가 눈빛을 번뜩이며 스루패스를 쏘아 보냈다.

오른쪽에서 돌아 들어가는 산티아고를 노린 패스였다.

산티아고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공을 발끝에 잡는 순간. 시셀도가 거짓말처럼 나타나 산티아고를 막았다.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산티아고는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퍽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내가 봐도 정당한 몸싸움이었다. 산티가 몸싸움이 특기인 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버티는 녀석인데······.

바닥에 힘없이 나뒹구는 산티. 그리고 그런 산티를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거구의 수비수, 시셀도.

와.

세 보인다.

***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맞붙는 경기입니다!]

[제퍼슨과 산티아고의 공격력이 수비진을 끊임없이 두들깁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철조망’ 시셀도가 막아내네요.]

[제퍼슨과 산티아고의 위력적인 공격력이 조금씩 빗나가고 있습니다.]

[과연 철조망답네요.]

[하지만 상대하는 제퍼슨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 대단한 뉴잉글랜드의 수비를 상대로 벌써 3회의 유효슈팅을 기록합니다!]

[이게 뉴잉글랜드 전이 어려운 점이죠. 수비진을 뚫기도 힘들지만, 뚫어도 골키퍼가 미국 국가대표 골키퍼, 브래드 구잔이니까요!]

철조망이란 별명처럼 시셀도를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는 특유의 늪축구를 보여 줬다.

“경기 더럽게 안 풀리네.”

“이상하네.”

“우리 팀 경기가 지루한 날이 있다니.”

“우리가 밀어붙이고 있는데도 그러네.”

“빌어먹을. 이게 늪인 건가.”

팬들의 뜨거운 응원 열기도 점차 식어 갔다.

경기 흐름은 묘했다.

토론토가 거의 7할에 이르는 점유율을 가져가면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슈팅까지 이어지는 장면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어렵군.”

벤치의 그랜드 감독도 얼굴을 찌푸렸다.

“주도권을 내주되, 득점은 내주지 않는다.”

뉴잉글랜드의 모토였다.

이탈리아 출신 감독이 팀을 맡은 이후, 뉴잉글랜드는 진짜 불쾌한 늪축구를 구사하고 있었다.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군.”

왜 ‘늪’인지 알 것 같았다.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끊임없이 두들기지만, 점점 뉴잉글랜드의 수비에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시셀도가 있었다.

영리한 플레이였다.

수비진 전체를 진두지휘하면서, 완벽한 수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설령 슈팅을 때릴 공간을 내주게 된다면, 시셀도는 거리낌 없이 공간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영역을 최소화해서 완벽한 슈팅을 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제퍼슨 슈팅! 아, 막힙니다.]

[공간이 부족했어요. 슈팅 각도가 열리긴 했습니다만, 미리 구잔 골키퍼가 예상한 방향으로 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제퍼슨이 유효슈팅을 많이 기록하고 있지만, 득점까지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방금처럼 말이다.

제퍼슨의 돌파는 여전히 환상적이었고, 공간을 창출하는 기민한 움직임도 최고였다.

그러나 시셀도는 영리하게 그 공간을 최소화했고, 슈팅을 때릴 각도를 자신의 의도대로만 내줬다. 제아무리 제퍼슨이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게 있는 법이다.

설령 수비들을 어찌 뚫어낸다고 해도, 미국 국대 골키퍼인 브랜드 구잔까지 뚫기가 너무 힘들었다.

벤치에서 지켜보는 그랜드는 지금 뭐가 문제점인지 파악은 했다. 문제는 그걸 뚫어 낼 뾰족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선수 개인 기량만 믿어야 한다니.’

그의 시선은 제퍼슨에게 향했다.

깔끔하게 이어진 패스에 제퍼슨이 공을 잡고 순식간에 수비 하나를 벗겨내고 스퍼트를 올렸다.

“또 온다!”

시셀도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느새 땀방울이 눈 앞을 가릴 정도로 숨이 격했다.

‘오늘 경기 힘드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시셀도는 오늘 경기가 엄청나게 힘겨웠다.

‘저 자식.’

동부리그를 파괴하고 있는 괴물 제퍼슨.

그 제퍼슨을 상대하는 시셀도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피지컬부터 시작해서 수비진을 찢어버리는 드리블까지.

심지어 쓰리톱끼리 유연하게 스위칭하면서 바뀌는 매끄러운 움직임까지.

[제퍼슨의 크로스!]

[기가 막히네요! 시셀도가 빠르게 달려가 산티아고에게 떨어지는 크로스를 걷어 냅니다!]

[비록 철조망, 시셀도가 막았습니다만. 역시 대단합니다. 저기서 올린 짧은 크로스는 순식간에 두꺼운 수비벽을 무너뜨리고 단숨에 득점 찬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뉴잉글랜드가 지금까지는 잘 막아 내는 모습입니다만, 제퍼슨 리를 완전히 틀어막지 못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제퍼슨! 제퍼슨!”

“Oh my King, Oh my Jefferson!”

“믿을 건 제퍼슨뿐이지!”

제퍼슨의 플레이에 홈팬들이 열광했다.

묘한 경기 흐름을 뒤흔들어 버리는 제퍼슨의 번뜩이는 플레이.

이대로 늪에 말려 들어가는가 싶었지만, 제퍼슨은 약점을 파악한 것처럼 끊임없이 공격진과 스위칭하면서 뉴잉글랜드를 공략했다.

당연히 BMO 필드의 분위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시셀도, 장난 아닌데?’

제퍼슨은 수비진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 지휘하는 시셀도를 보며 감탄했다.

뉴잉글랜드의 다른 수비수들도 뛰어나지만, 시셀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늪축구는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시셀도는 좋은 수비를 보여 줬다. 제퍼슨마저 감탄할 정도로. 아마 프로리그에 와서 거칠 것 없던 제퍼슨을 처음으로 멈추게 한 브레이크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제퍼슨도 승부욕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기록에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11경기 연속골이란 기록을 세웠지만, 제퍼슨은 정규리그가 끝날 때까지 그 기록을 계속 경신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반드시 여기서 시셀도를 뚫고 골을 넣어야 한다.

제퍼슨은 다시 공을 잡고 전진 드리블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를 막아서는 선수.

‘지크였나?’

시셀도의 파트너. 역시 좋은 수비를 보여 주는 선수였다. 하지만 약점은 명확했다. 제퍼슨은 상대 선수를 분석한 자료를 떠올렸다.

‘피지컬이 약점인 선수. 오로지 영리하게 공만 빼내는 유형.’

이런 유형은 오히려 제퍼슨이 파훼하기 더 쉽다.

힘으로 뚫는다.

툭!

제퍼슨은 공을 툭 차면서 거칠게 돌파를 시도했다. 갑자기 액셀을 밟은 것처럼 순간적인 가속. 지크가 당황한 얼굴로 제퍼슨의 무게 중심을 흔들기 위해 몸을 부딪치지만, 제퍼슨은 피지컬 싸움에서 밀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퍽!

“흡!”

지크는 헛숨을 들이키면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열린 공간. 미드필더와 왼쪽 풀백이 공간을 틀어막기 위해 달려오는 순간. 제퍼슨은 한층 여유로워진 산티아고에게 패스했다.

“······!”

“우와아!”

[기가 막힌 패스입니다!]

[수비들의 시선을 끌고 곧바로 산티아고에게 보내는 스루패스!]

[제퍼슨의 움직임에 늪축구의 수비진이 흔들립니다!]

반대 방향에 있던 산티아고에게 패스가 연결됐다.

완벽한 패스였다.

수비진들이 일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의 목적은 제퍼슨을 틀어막는 것.

설령 공간을 내주더라도, 슈팅 각도를 최소화하는 것.

지금까지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간이 생겼음에도, 슈팅을 날리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방향 전환을 하며 기가 막힌 패스를 보냈다.

비록 산티아고에게 보내진 공은 시셀도의 거친 수비에 막혀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수비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했다.

‘이젠 패스 길도 막아야 해!’

단 한 번의 위협적인 패스.

수비진은 수비해야 할 범위가 더 늘어났음을 느꼈다.

그리고 단단하고 끈적끈적했던 수비진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할 조짐이 보였다.

제퍼슨은 그 자그마한 틈도 놓치지 않았다.

제퍼슨이 슈팅뿐만 아니라 패스를 찔러줄지도 모르니, 쓰리톱 모두에게 수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조나단과 산티아고에게 말이다.

자연히 제퍼슨의 압박이 비교적 약해지기 마련이고, 패스 경로를 신경 쓰는 수비들의 움직임은 보다 많은 공간을 내줬다.

그 순간, 제퍼슨의 눈이 번뜩였다.

툭!

순식간에 공을 치고 전진하는 드리블.

수비가 황급히 앞을 막아서자, 제퍼슨의 발이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정면승부하는 수비는 당황했다. 상체의 방향은 정면! 그러나 하체는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속도를 유지한 채 빠지는 크로스 스텝!

‘빌어먹을, 그 엿 같은 스텝이군!’

비디오를 보고 기함했던 제퍼슨만이 가진 고스트 스텝이 눈앞에서 현란하게 나타나자 눈이 팽팽 도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수비 하나를 벗겨 낸 제퍼슨은 무지막지하게 달렸다.

그리고 수비의 핵, 시셀도가 막아섰다.

시셀도를 흘끔 본 제퍼슨은 다시 한번 고스트 스텝을 시도했다.

그때, 거짓말처럼 시셀도가 발끝으로 공을 건드렸다.

툭!

“······!”

“우와아악!”

“시셀도가 공을 막았어!”

시셀도의 발끝에 걸린 공은 옆으로 빠졌고, 달려든 수비가 걷어 냈다.

순간 제퍼슨은 아연한 얼굴로 시셀도를 바라봤고, 시셀도도 거친 호흡을 고르면서 그런 제퍼슨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 엿 같은 고스트 스텝인지 뭔지, 이제 안 통한다. 이 자식아.’

시셀도는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그 얼굴이 조금이라도 찌푸려지면, 수비수로서 엄청나게 기쁠 것 같았다.

씩.

‘웃어?’

순간 시셀도는 제퍼슨의 입가에 걸리는 웃음에 정신이 멍했다.

비디오를 수없이 돌려보고 연구했던 움직임. 그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분석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완전히 공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발끝으로 공을 건드려 막아 내는 것에 성공했다.

드디어 제퍼슨을 막는 방법이 나온 것이다.

한데 제퍼슨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마치 즐겁다는 듯이.

‘드디어 이게 막히네.’

제퍼슨은 오히려 공이 막혔는데도 묘한 환희에 찼다.

그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진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야 좀 재밌네.’

제퍼슨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고스트 스텝은 분명 뛰어난 기술이다.

그러나 미식축구에서 유능한 러닝백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당연히 러닝백을 막아야 하는 디펜스맨들은 대처 방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그런 디팬스맨을 뚫기 위한 창은 더 날카로워지는 법이었다.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고.’

시셀도, 좋은 상대다.

새로운 기술을 점검하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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