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한 놈만 팬다 (1)
파죽의 4연승.
후반기 토론토는 전반기의 부진을 완벽하게 씻어 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MLS에서 가장 핫한 루키, 제퍼슨 리가 있었다.
[토론토, 올랜도 시티를 3:0으로 격파]
[제퍼슨 리, 이른 선제골로 경기를 지배하다]
[동부 컨퍼런스 24라운드, 토론토 1 :1 콜롬버스 무승부]
[아메리카 킹, 6경기 연속골! 지오빈코의 7경기 연속골까지 1GAME!]
[멈추지 않은 득점기계 제퍼슨 리. 6경기 10골 2어시스트!]
19라운드에서 데뷔한 제퍼슨은 24라운드까지 10골을 뽑아내는 미친 기록을 쏟아냈다.
제퍼슨의 활약에 힘입어 토론토는 6경기 동안 5승 1무의 엄청난 기세로 어느새 동부 컨퍼런스 5위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인 법.
거의 모든 라운드에 출전한 브래들리가 피로로 인한 부상을 호소하며 아웃되었다.
심지어 조지 알티도어도 발목 부상으로 4주가량 팀에서 이탈했다.
그랜드 감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엿 같군.”
“우선 브래들리의 빈자리는 홀딩 미드필더 조슈아로 메워야 할 것 같습니다.”
“조슈아는 너무 거친데.”
“적어도 브래들리 대신 경기장에서 투지 있게 팀을 이끌 선수는 그 친구밖에 없어요.”
“후. 그렇긴 하지.”
“조슈아도 이제 베테랑이니, 젊은 시절처럼 쓸데없는 카드는 받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리고 제퍼슨의 백업은?”
“···유스에서 끌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랜드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빈약한 스쿼드를 어떻게든 메워야 하니까.
“현재 유스팀의 산티아고 챠베즈. 7경기 11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퍼슨하고는 같은 학교에서 뛴 친굽니다.”
“아, 그 멕시코 친구?”
“지오빈코를 연상케 하는 친굽니다.”
“흠. 그래. 일단 1군 훈련에 참여시켜 봐. 내가 직접 보겠어.”
***
산티아고의 1군 콜업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다.
유스팀에서 벌써 10골을 넘게 넣었다던가.
“데뷔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1군 훈련장에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온 산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에 실패했던 선수였던 내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었던 슈퍼스타가 바로 산티였다.
하지만 아직은 데뷔조차 못 한 햇병아리.
그때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산티아고는 거친 면모를 숨기고 있지만, 평소에는 순하기 짝이 없는 친구였다.
그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이건 비밀인데, 네가 알티도어보다 잘하는 거 같아. 곧 국가대표도 갈걸?”
내 말에 산티의 표정이 이내 풀렸다.
단순한 녀석.
진짜 사실인데. 크리스티안 풀리시치와 함께 미국의 황금세대로 공격진을 이끄는 스타가 되니까.
“근데, 이번 훈련 각 잡고 제대로 해. 감독님의 눈에 들어야 뛸 수 있어. 조언이라 할 건 없지만, 압박을 잘 벗어나야 해.”
유스와 성인팀의 압박 강도와 스피드는 차원이 다르다.
산티아고는 이 격차를 빠르게 적응해야 1군에서 뛸 수 있을 것이다.
“제퍼슨, 이리 와 봐!”
팀 자체 청백전이 시작되고, 감독님은 나를 부르더니 산티아고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산티아고 어때?”
“좋은 선수예요.”
“친구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진짜로?”
“감독님 선수 보는 눈 좋으시죠? 만일 학교에 제가 없었으면, 감독님은 바로 산티를 1군으로 데리고 와서 출전시켰을걸요.”
“으흠.”
감독님은 팔짱을 끼고 산티의 경기를 지켜봤다.
“오!”
지켜보던 그랜드 감독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수비진을 라인 브레이킹으로 단숨에 무너뜨리고, 일대일 상황에서 침착하게 골키퍼의 머리를 넘기는 칩슛.
“좋군.”
그러나 산티는 추가골을 넣지 못했다.
상대팀의 파이터, 조슈아 때문이었다.
브래들리와 바스케스의 백업을 맡아줄 조슈아는 타고난 파이터였다.
각진 얼굴과 선 굵은 외모.
날카로운 눈빛과 다부진 체격. 두꺼운 팔뚝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타투까지.
언뜻 보면 축구 선수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로 보일 정도로 터프했다.
그는 패스 길을 읽고 미리 위치를 선점해서 산티에게 가는 공을 전부 다 끊어 냈고, 설령 산티가 공을 잡더라도 터프한 수비로 좀처럼 게임을 풀 수 없게 만들었다.
산티가 오늘 된통 당하는군.
그렇게 연습경기는 종료됐다.
“으으. 저 아저씨, 너무···”
“너무, 뭐?”
“무서워. 짜증이 나서 한번 기 싸움 좀 해보려고 했는데, 눈 보고 쫄았어.”
산티는 풀 죽은 얼굴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미래에 그라운드에서 선수를 걷어차는 산티는 아닌 건가.
“어이. 멕시칸.”
“·····?”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산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싸울 거면 눈을 피하지 마. 네가 눈을 피하고 공만 보는 순간, 수비수는 네가 약골이라고 생각할 거다.”
조슈아는 손가락으로 산티아고의 가슴을 쿡쿡 누르더니 이내 자리를 피했다.
“저 아저씨 싫어.”
“이해해. 과묵하긴 한데 좀 거칠더라”
“나 멕시칸 아닌데······. 미국 시민권 갖고 있는데······.”
**
Ohhhhh Ohhhhh
Oh my team Oh my Reds
Oh my toronto, Go toronto!
BMO 필드.
붉은 물결이 가득한 가운데, 푸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 뉴욕의 원정팬들이 배정된 좌석을 가득 메웠다.
프랭크 램파드, 다비드 비야, 안드레아 피를로가 말년에 불꽃을 불태운 팀.
토론토의 이번 경기 상대.
뉴욕 시티.
거칠고 터프한 팀.
토론토가 캐나다의 마초팀이라면, 뉴욕이 바로 미국의 마초팀이었다.
공격 축구를 모토로 삼지만, 우선 터프하다 못해 폭력적인 팀이었다.
리그 내 파울 수와 경고가 압도적으로 1등인 팀이었다. 그런 뉴욕을 상대하는 팀들의 걱정은 딱 한 가지다.
“빌어먹을. 부상자가 나오면 큰일인데.”
“우리 선수가 다치면, 뉴욕 애들 집에 못 갈걸. 내가 다리를 분지를 생각이거든.”
“제퍼슨이 경기장에서 박살 내줄 거야.”
“조슈아가 싸움 좀 하니까, 우리 애들 지켜 주겠지.”
“그러고 보니, 오늘 제퍼슨이 지오빈코의 기록을 깰까?”
지오빈코가 세운 MLS의 7경기 연속골이란 기록.
오늘 그가 골을 기록하면 연속골 타이기록을 세우게 된다.
“지오빈코가 중동으로 떠나고, 이렇게 골을 잘 넣는 선수가 나타날 줄은 몰랐어.”
“조지도 좋은 스트라이커지만, 골 넣는 기계는 아니지.”
“그런데 제퍼슨은 힘도 좋고, 남자답게 잘 싸우고, 골도 기가 막히게 너무 잘 넣어.”
“이러다가 다른 팀에서 채 갈까 두렵군.”
토론토의 팬들에게 지오빈코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엄청난 실력으로 매 시즌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토론토의 공격 축구가 정착될 수 있는 데 큰 공헌을 했으니까.
그런 지오빈코를 잊게 할 정도로 제퍼슨의 최근 활약은 대단했다.
“제퍼슨이 오랫동안 우리 팀에서 뛰었으면 좋겠어.”
“실력도 좋고, 팬서비스도 좋아.”
“잘생기기도 했고.”
“남자답지.”
“무엇보다 내 딸이 가장 좋아해.”
“내 6살 된 아들도.”
“우리 와이프도···.”
“그건 좀 위험한데?”
6경기.
두 달 동안 제퍼슨은 토론토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훔쳤다.
경기장에선 골을 넣고 야수 같은 거친 셀레브레이션을 보여주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팬서비스가 유난히 좋았다.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팬들에게 자상한 모습을 보여 줬다.
경기 끝나고 기다리는 팬들에게 일일이 싸인과 사진을 찍어 주는 건 일상이었다.
아이와 함께 경기장을 찾은 부모들은 제퍼슨에게 싸인을 받고 함박웃음 짓는 아이들을 보며, 진심으로 제퍼슨이란 선수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술집이나 클럽에서 목격된 적이 없고, 팬서비스도 좋은 선수.
어느새 팬이 사랑하는 선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왔다. 그때 제퍼슨의 유니폼을 확인한 걸걸한 목소리의 팬이 벌떡 일어나 선창했다.
“제―퍼슨!”
“Oh my team, my Toronto!"
“제―퍼슨!”
“Oh my king, my Lee!"
“제―퍼슨!”
“Oh my king, my Jefferson!”
***
[BMO 필드에서 토론토와 뉴욕 시티가 맞붙습니다. 홈팀 토론토의 선발진에 변화가 있습니다. 부상으로 아웃된 캡틴 브래들리의 자리엔 조슈아가, 그리고 알티도어의 아웃으로 유스팀의 산티아고 차베즈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원정팀 뉴욕은 4-3-3의 포메이션입니다. 알렉산드로 미트릿서, 헤수스 메디나, 막시밀리아노 모랄레스가 쓰리톱을 이룹니다. 모랄레노는 다소 밑으로 쳐져서 경기를 조율할 것 같네요.]
[공격 축구의 두 팀이 맞붙습니다. 토론토는 신인선수와 새로운 선수를 내보내면서 4-4-2의 포메이션이지만, 뉴욕은 강력한 쓰리톱을 그대로 유지하네요.]
[오늘 경기, 상당히 재미있을 것으로 예상되네요.]
[원정팀 뉴욕의 선축으로 경기 시작됩니다.]
선축은 뉴욕이었다.
짧은 패스로 미드필더 라인과 수비 라인을 오가는 패스.
중원에서부터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며 볼을 소유하는 전술이었다. 그리고 템포도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공격적으로 볼을 소유해서 중원을 차지하겠단 속셈인가?’
제퍼슨은 오래전부터 습관이 하나 있다.
경기가 시작되면, 잠깐은 흐름을 관조한다는 것.
상대팀이 어떤 식으로 플레이하는지, 또 우리 팀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마치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경기의 흐름을 한번 관조한다.
‘중원을 거치지 않고 단숨에 가야 하겠는데.’
상대의 미드필더와 수비진의 간격이 촘촘하다.
그리고 좋은 수비력과 거친 몸싸움으로 중원에서부터 볼의 소유권을 가져가는 움직임.
이럴 땐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 중원에서부터 싸워 줄 이유가 하등 없다.
‘그리고, 모든 패스가 저기 10번을 거쳐 가고 있어.’
뉴욕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전형적인 테크니션, 10번 막시 모랄레스.
그를 거치지 않고 패스가 이뤄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대라면, 오히려 파훼법은 간단하다.
패스를 뿌려 주는 선수를 철저하게 끊어 준다.
그리고.
‘초반에 골을 넣어서 박살을 내야지.’
그 순간. 제퍼슨의 시선이 중앙에서 치열하게 싸워주는 조슈아와 마주쳤다.
조슈아는 베테랑이었고, 제퍼슨도 몸은 어렸지만, 그의 정신은 노련하기 짝이 없다.
시선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이 확실하게 전해졌다. 제퍼슨이 은근슬쩍 모랄레스를 가리켰고, 조슈아도 흘끔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막시 모랄레스가 공을 잡았다.
“막스!”
과연 모랄레스는 좋은 볼터치로 공을 받아 낸 뒤, 경기를 조율했다.
그리고 앞으로 스루패스를 찔러주려는 순간.
퍽!
“컥!”
거칠기로 유명한 조슈아가 그대로 몸을 던지며 공을 빼앗았다.
파울성이 강한 거친 수비였다.
“심판! 완전히 밀었잖아요!”
그러나 심판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경기를 속행했다.
“빌어먹을!”
조슈아는 그대로 볼을 잡고 바스케스에게 짧은 패스를 보냈다. 바스케스는 공을 받고 전방을 흘끔 바라봤다.
‘역시. 제퍼슨이야.’
바스케스가 씩 웃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위협적인 움직임으로 전방을 들쑤시고 있는 제퍼슨.
그의 플레이 때문에 수비가 은근히 한쪽에 몰린 상황.
왼쪽 공간의 조나단이 압박에서 벗어난다. 제퍼슨의 영리한 움직임은, 플레이메이커에게 더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제퍼슨은 그런 면에서 아주 유능한 동료였다.
‘왼쪽, 조나단에게 보내서, 단숨에 수비진을 파괴한다.’
바스케스의 짧지만 확실한 판단. 그리고 공 밑동을 강력하게 차서 수비수의 머리를 넘기는 긴 로빙 패스를 보냈다.
[바스케스가 달려가는 조나단을 봅니다. 수비수를 넘기는 긴 로빙 패스를 보냅니다!]
[조나단 발끝으로 공을 잡습니다. 달립니다!]
조나단이 왼쪽 측면을 내달렸다.
동시에 제퍼슨, 산티아고, 오른쪽의 닉대런까지.
네 명의 공격진이 단숨에 최전방까지 달려들었다.
‘움직임 좋은데?’
흘끔 박스를 바라본 조나단이 감탄했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와 엄청난 힘으로 수비진을 파괴하고 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제퍼슨의 움직임.
언제 봐도 감탄스럽다. 덕분에 크로스를 올리는 입장에서는 너무 편했다. 조나단은 수없이 연습했던 패턴대로, 박스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둥글게 감아지며 박스로 향하는 궤적.
“막아!”
“제기랄! 미친 거 아니야?”
수비들 사이에서 경악 어린 신음이 터졌다. 수비들을 모두 힘으로 이겨 내고 솟구치는 제퍼슨의 머리에 공이 정확히 떨어졌다.
[제퍼슨! 떠오릅니다! 날았습니다!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수비들을 밀쳐 내면서 뛰어올라 공을 따냅니다. 공을 떨어뜨려 주네요!]
정확하고도 높은 타점에서 제퍼슨이 헤더로 공을 떨어뜨려 줬다.
자신에게 수비가 몰린 그 빈 공간으로.
아무도 없는 텅텅 빈 공간에, 산티아고가 별안간 난입했고, 그의 발등에 정확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이 떨어졌다.
마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플레이.
[오, 세상에. 그림 같은 플레이입니다!]
[제퍼슨의 센스가 빛납니다. 빈 공간에 정확히 공을 떨어뜨려 주고, 데뷔전을 치르는 산티아고, 산티아고, 산티아고! 때립니다!]
산티아고는 침착하게, 제퍼슨이 따낸 볼을 골문 구석으로 정확하게 밀어 넣었다.
“Goooooaaaall!”
경기 시작 5분 만에,
훌리건으로 유명한 뉴욕의 원정팬들을 모두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드는 토론토의 환상적인 플레이였다.
[제퍼슨의 헤더, 그리고 데뷔전을 치르는 산티아고가 집어넣습니다!]
[토론토의 그림 같은 플레이로 전반 5분 만에 선제 득점을 기록합니다!]
[제퍼슨은 정말 말도 안 되네요. 점프 보세요. 저게 가능한 타점인가요?]
[골키퍼가 손을 뻗어도 닿을까 싶은 높이의 공을 따냈습니다. 그리고 빈 공간을 향해 정확히 떨어뜨려 주는 예술적인 센스까지.]
[17살인데도 침착하게 슈팅에 성공하는 산티아고의 데뷔골도 대단합니다.]
[뉴욕시티. 오늘 경기 어렵겠는걸요. 토론토의 환상적인 플레이! 선취골을 얻어냅니다!]
“오 세상에. 제퍼슨! 내가 넣었다고!”
“축하해, 산티.”
잔뜩 상기된 얼굴의 산티아고에게 제퍼슨이 다가갔다.
“한 골로 만족할 건 아니지?”
“응?”
“오늘 공격 포인트 좀 다 채우려고. 두 개만 채우면 돼서 말이야.”
제퍼슨이 씩 웃었다.
“내가 두 골만 넣을게. 산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