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10분의 마법 (2)
10분의 마법 (2)
경기는 분명 무승부로 끝날 분위기였다.
서로 공격에서 특별한 방도를 찾지 못하는 답답한 양상.
그런 상황에서 제퍼슨이 왼쪽 사이드를 초토화한 뒤에 결정적인 득점을 기록했다.
[오, 세상에. BMO 필드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경기장이 무너지는 것 같네요. 제퍼슨이 오늘 또 마법을 부리네요!]
[교체로 투입된 제퍼슨이, 고작 2분 만에 골을 기록합니다!]
[경기의 흐름을 바꿉니다. 경기의 승패를 바꾸는 선수를 게임 체인저라고하죠. 지금의 제퍼슨이 그런 선수네요. 게임을 바꾸고 있어요!]
“Fucking play! 빌어먹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자식!”
벤치의 그랜드 감독이 미친 듯이 팔을 휘저으며 방방 뛰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 환희가 느껴졌다.
고작 2분.
90분을 줘도 골을 넣지 못하는 선수가 즐비하다.
한데 제퍼슨은 2분 만에 결과를 만들었다.
감독으로서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교체 투입된 선수가 게임을 결정짓는 모습.
그야말로 가슴 짜릿한 순간이었다.
“그래, 제퍼슨! 더 부숴 버려! 시카고 애들이 질질 짜면서 가게 만들라고!”
남은 정규 시간은 8분.
역전골을 내준 시카고는 남은 시간 동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 라인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리그 10위지만, 한두 번의 결과에 따라 플레이오프로 진출할 수 있는 승점이었으니까.
Ohhhhh!
Ohhhhh!
My team, My Toronto!
모든 관중이 일어나 양손을 뻗으며 응원가를 불렀다.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라인을 올리는 전술은 양날의 검이었다.
득점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뒷공간을 내줘서 점수를 줄 수도 있다. 특히나 제퍼슨같이, 공간만 생기면 상대팀을 말 그대로 찢어버릴 수 있는 ‘크랙’이 있다면.
그리고 제퍼슨에게 공이 갔다.
[오, 이번 여름 영입된 조슈아가 공을 커트합니다! 몸으로 공격수를 쓰러뜨리고 공을 키핑하네요. 바로 전방으로 찔러줍니다. 제퍼슨이 받습니다!]
[제퍼슨 같은 선수에게 공간을 내주면 안 되죠!]
[지쳤습니다. 시카고의 수비수 레글리온. 제퍼슨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제퍼슨! 그야말로 시카고의 수비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17살의 어린 선수가 노련한 시카고의 수비수들을 농락합니다!]
제퍼슨의 활약은 한 마디로 종횡무진이었다.
그의 드리블에 수비수들은 우르르 무너졌다.
공을 달고 달리는 속도임에도, 그 누구도 제퍼슨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는 먼저 움직이고, 먼저 드리블을 치며 순식간에 박스 코너 라인까지 질주했다.
그리고 박스를 향해 돌진하는 조지 알티도어.
그의 발끝을 향한 낮은 땅볼 크로스.
[제퍼슨, 골문 쪽을 향해 낮은 크로스!]
[아! 아쉽네요. 알티도어가 발끝을 가져다 댔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위협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완벽한 골 기회였는데요!]
골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났던 관중들이 아쉬움을 토했다.
“아쉽군!”
“토론토! 한 골 더 넣자고!”
“제퍼슨이 왼쪽에서도 장난 아닌데?”
“스피드가 제대로야. 드리블도 미쳤어!”
“저걸 어떻게 막아?”
순식간에 이뤄진 공격 전개.
시카고 선수들은 얼얼한 표정이었다.
골키퍼만이 성난 기색으로 소리쳤다.
“정신 차리라고! 라인 지켜! 자리 지키라고! 저 괴물한테 공간을 주지 말라고!”
그러나 골키퍼가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제퍼슨은 공간이 없으면, 공간을 억지로라도 만들 줄 아는 선수였다.
**
80분까지 서로 지지부진하던 상황.
어쩌면 양 팀 코치진도 ‘무승부’를 떠올리고, 뛰고 있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터뜨린 결승골은,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다들 힘겨워 보이네.’
체력이 고갈되고 있는 상황.
라인을 끌어올려 득점해야 하고, 나를 막기 위해 공간까지 커버해야 하는 시카고 수비들의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좋은데 이거?’
프로의 무대는 확실히 달랐다.
강한 압박과 빠른 템포. 70분쯤 되면 미식축구에 특화된 근육 때문에, 나 역시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들은 완전히 지쳤지만, 나는 멀쩡했다.
내 파괴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란 거지.
앞에서 수비와 싸워 주는 알티도어에게 패스를 주고 전진했다. 체력은 넘쳐난다. 이 공간을 활용하려면 활발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툭.
알티도어의 리턴 패스.
별다른 개인기를 쓰지도 않고, 앞을 막는 수비수에게 어깨를 밀어 넣었다.
“윽!”
확실히 지쳤군. 제대로 힘을 주지도 않았건만 수비는 필드에 나동그라져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흘끔 심판을 보니 문제없다는 상황.
그리고 다시 수비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알티도어에게 패스.
역시 국대 주전 선수는 다르긴 하네.
알티도어는 노련한 움직임으로 공을 받고, 방해하는 수비를 어깨로 밀어 넣으며 압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뛰어!”
바라던 바다.
알티도어가 외치기 전에도, 이미 나는 수비진을 몸으로 이겨 내면서 빈 공간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속 시원하게 라인을 가르고 쏘아지는 긴 패스.
발끝으로 가볍게 잡고, 달려드는 수비수를 달고 뛰었다.
어깨를 밀어 넣으며 공에 발을 갖다 대보려 하지만, 난 그런 방해에도 무리 없이 속도를 끌어올렸다.
스피드로 수비수 하나를 제치자, 앞에선 오늘 동점골을 넣었던 슈바인슈타이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슈슈!’
바이에른 뮌헨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슈바인슈타이거.
그 클래스를 증명하듯이 오늘 멋진 중거리 슛과 좋은 수비를 보여 줬다.
그러나 그는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고, 강력했던 피지컬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상황. 심지어 풀타임을 뛰며 지친 상황이었다.
‘오히려 기술이 아닌, 힘으로.’
수많은 경험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다.
기술로 승부하면 오히려 당할 수도 있다.
그러면, 차라리 힘으로 밀어붙인다.
퍽!
“컥!”
반 박자 빠르게 어깨를 밀어 넣어 위치를 선점했다. 슈바인슈타이거는 충격받은 얼굴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 작은 빈틈. 내가 달리기에는 충분하다.
“우오오오오!”
“가라고! 제퍼슨! 달려!”
공이 발끝에서 자유롭게 노닐었다.
이런 속도로, 이런 볼 컨트롤이라니.
오늘, 컨디션 완벽하다.
박스 안의 수비수 한 명이 달려들었다.
‘오른쪽!’
수비의 중심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순간적으로 속도를 줄이면서 잔발로 빠르게 전진했다. 그리고 수비가 발을 뻗는 순간 왼쪽으로 살짝 볼을 찬 뒤에 수비수를 어깨로 밀쳐 내며 전진했다.
흘끔 전방을 바라봤다.
옆에서 알티도어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렸다.
박스로 뛰어가는 움직임이다.
‘크로스?’
아니야. 지금 수비를 달고 뛰고 있어. 알티도어도 지쳤고. 크로스를 받지 못할 거야.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지.
내 위치는 페널티 박스 좌측 모서리였다.
한 번 더 치고 갈까.
아니다. 그러면 타이밍을 놓치겠어.
여기서 때려야 한다.
먼저 앞서간 오른발이 45도 각도로 디딤발이 된 채 중심을 잡았고, 동시에 왼발의 안쪽이 공의 중심을 정확하게 때렸다.
‘됐다!’
슈팅은 힘도 중요하지만, 공을 맞히는 정확함도 중요했다.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묵직함이 머리끝에 닿았다.
완벽한 임팩트.
그리고 둥근 궤적을 그리며 감아지는 슈팅.
태앵!
공이 감기며 마치 크로스처럼 휘는 듯한 슈팅은 우측 골포스트를 강하게 때리고 골네트를 출렁이게 했다.
“Gooooooooal!”
***
“빌어먹을!”
슈바인슈타이거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괴물 같은 자식.’
그는 질린 눈빛으로 선수들과 함께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단 한 번의 부딪침.
그 부딪침으로 직감했다.
‘이놈 물건이다.’
미국 무대에 와서 처음으로 충격을 먹었다.
단 한 번의 부딪침이건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몸싸움이 아닌, 상대의 타이밍을 뺏고 약점을 파고들었다. 손도 쓸 수 없는 영리한 플레이였다.
‘젊었을 적이었으면 할 만했을 텐데.’
새삼 이젠 황혼기에 접어든 자신의 신체가 아쉬웠다.
그는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슈바인슈타이거는 장담하지 못했다.
‘20대의 몸이어도, 쟤는 좀 힘들 것 같긴 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저 어린 선수에게 감탄사를 보냈다.
[제퍼-슨! 왼발 인사이드 슈팅으로 쐐기골을 집어넣습니다!]
[놀랍네요, 제퍼슨. 왼발을 이렇게 잘 썼나요?]
[아드리아누를 연상케 하는 슈팅이었습니다. 악마의 왼발이 여기 토론토에서 나오네요!]
[제퍼슨. 오늘 경기 대단합니다. 10분 사이에 경기가 바뀌었습니다!]
[제퍼슨이 마법을 부리네요. 제퍼슨 매직입니다!]
해설자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잔뜩 흥분한 두 명은 침을 튀기며 제퍼슨의 득점에 찬사를 보냈다.
후반 89분.
이제는 시카고의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리는 쐐기골이었다.
관중석에서 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리고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선창했다.
“제-퍼슨!”
그리고 뒤이어 따라 외치는 관중들.
“Oh my team, my Toronto!”
“제-퍼슨!”
“Oh my king, my Lee!”
“제-퍼슨!”
“Oh my team, my Toronto!”
“Oh my king, my Jefferson!”
3만 명의 붉은색 물결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한 명의 이름을 연호하는 광경.
그 광경은 소름 끼칠 정도로 장엄했으며, 이미 의욕을 잃어버린 시카고의 고개를 떨어뜨리는 장면이었다.
제퍼슨의 교체 투입 10분.
결승골과 쐐기골이 터지며, 시카고와의 22라운드는 토론토가 3:1로 승리를 거뒀다.
***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서 앉자마자 그랜드 감독은 질문을 받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제퍼슨은 미쳤습니다.”
그가 팀에 합류한 이후 팀은 4연승을 거뒀다. 모든 경기에서 제퍼슨은 득점을 기록했다.
그것도 아주 순도 높은 골들을.
신시내티전 해트트릭.
뉴욕 레드불스전 결승골.
DC 유나이티드전 2골 1어시스트로 모든 득점 상황에 관여.
오늘 시카고전에선 결승골과 쐐기골을 집어넣었다.
순전히 제퍼슨의 힘으로 얻은 승점이 무려 12점이었다.
심지어 제퍼슨의 4경기 플레이 타임은 총합 200분이 채 되지 않는다. 고작 두 경기 풀타임 시간인 180분 정도에, 8골을 넣어 버렸다.
“센세이셔널하죠.”
“대단한 선숩니다.”
감독과 팀의 주장, 브래들리의 발언.
기자회견에 참여한 기자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으니까.
제퍼슨 리는 이제 고작 17살이다.
미국 축구계에서 17살의 나이에 이정도로 충격적인 활약을 보여 준 선수는 이제껏 없었다.
미국의 축구 영웅, 랜던 도노반?
그도 17살 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랜던 도노반은 미국의 영웅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월드클래스는 아니었다.
몇몇 기자들은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미국에서 월드클래스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니, 북미 대륙 역사상 말이다.
“단언컨대, 제퍼슨 리는 북미 최고의 선수가 될 겁니다.”
그랜드 감독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기자 한 명이 질문했다.
“아직 제퍼슨 리는 어린 선수입니다. 감독님께선 이 선수가 과연 어느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성장이요?”
그랜드 감독이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하신 기자님께선 제퍼슨이 아직도 어린 선수로만 보입니까?”
“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 상투적인 말이, 근래 저에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
“이미 미국 무대에 제퍼슨과 견줄 만한 선수는 없습니다. 동부에는 웨인 루니, 서부의 즐라탄 정도겠네요. 유럽의 빅클럽이 제퍼슨을 데리고 가려면 못해도 이적료 5천만 달러(한화 580억)는 줘야 할 겁니다.”
17살의 유망주에게 보내는 찬사라고 보기에는 과한 표현.
그러나 기자들은 내심 그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브래들리 선수에게 묻겠습니다. 제퍼슨은 현재 연령별 대표로도 뽑힌 경험이 없습니다만, 그가 훗날 미국 국가대표로서 활약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연령별 대표요? 허. 우스운 얘깁니다. 이 친구는 당장 성인대표팀에서 뛰어도 무방한 선숩니다.”
성인대표팀의 캡틴이기도 한 브래들리의 단호한 목소리.
키보드를 두들기는 기자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음 월드컵을 생각하면, 당장 이 친구를 뽑으라고요.”
***
[조지와 제퍼슨의 환상 투톱의 10분! 경기를 끝장내다!]
[조지 알티도어 1골 1어시스트, 제퍼슨 리 2골! 토론토, 시카고를 3:1로 제압하며 리그 6위로 상승!]
[4경기 연속골, 제퍼슨 리. 지오빈코의 7경기 연속골 기록을 경신할까?]
[후반 교체 투입 10분. 제퍼슨에게 골을 넣기까지 필요한 시간.]
[17살의 제퍼슨 리. 미국의 음바페가 탄생하다.]
[동부 컨퍼런스 후반기의 지각변동. 제퍼슨이 불러온 효과. 토론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캡틴 브래들리 ‘제퍼슨 리는 성인대표팀에서 뛰어야 한다.’]
[토론토 감독 ‘이미 리그 최고의 선수. 최소 이적료 5천만 달러 아니면 그를 데려가지 못해’]
[북미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라고 기대 받는 최고의 유망주, 제퍼슨 리. 다음 국가대표에 승선할까?]
***
“국가대표라.”
캡틴 브래들리의 발언 영향은 컸다.
그가 토론토의 주장이지만, 국가대표팀의 주장이기도 했으니까.
즉 대표팀의 주장이 나의 국가대표 발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공식회견에서 말이다.
여러 언론에서 기사가 올랐고 레딧을 포함한 미국 커뮤니티에서 여러 설전이 오갔다.
-당연히 뽑아야지!
-17살임. 평가전에서 검증해 보는 거 나쁘지 않음.
-솔직히 말해 이 녀석 경기 몇 번 봤는데, 죽여주더라. 유럽 애들도 박살낼 거 같던데.
-고작 네 경기로 대표팀에 부른다고?
-그 네 경기 동안 8골을 넣었지.
-미국의 왕이란 칭호도 너무 과장된 거야. 그 별명을 붙이려면 최소한 대표팀을 이끌 정도는 되어야지!
-그러니까 한번 뽑아보자고. 월드컵 예선 이전에 평가전 하잖아?
‘19살이 되면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데.’
한국계 미국인.
그러나 한국의 이중국적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제퍼슨은 자신이 한국인이란 자각보단 미국인이라고 여겼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국어를 배워서 서투르게 할 수는 있었지만······.
“미국 국가대표라.”
스포츠 선진국 미국.
북중미 월드컵에서 엄청난 활약으로 단숨에 축구 강국으로 떠오르기도 하지.
이미 축구에 투자되기 시작한 자본으로 미국 축구는 무시무시한 성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선택은 이미 정해졌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