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10분의 마법 (1)
“헤이, 제퍼슨!”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가려는 날 불러 세운 건 루니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
땀범벅이 된 루니는 오늘 그 명성에 맞는 활약을 보여 줬다.
그가 넣은 두 골은 우리 수비와 골키퍼가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날카롭고 깔끔했다.
“좋은 경기였어요, 루니.”
“동감이야. 제법 공 좀 차던걸? 너 17살 맞아? 축구 시작한지 2개월밖에 안됐다고 들었는데?”
한때 축구계를 풍미했던 대단한 선수에게 듣는 찬사였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해트트릭은 못 했는데요.”
“뭐? 허참. 역시 어려서 그런가. 자신감이 대단한데?”
2골 1어시스트.
내 기록이다.
하지만 루니도 두 골을 넣었다. 최전성기에서 내려온 선수임에도,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 법이다.
새삼 유럽 무대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이미 그 무대에서 내려온 루니가 이 정도인데, 별들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은 어느 정도냐 이 말이지. 그들과 뛰고 경쟁하고 싶었다.
“넌 당장 유럽에 가도 꿀릴 게 없어 보여. 지금 네 실력으로, 네 나이대에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얼마 없을 거야.”
“그런가요?”
“이미 음바페 같은 괴물들이 있긴 하지만.”
루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왕이면 말도 통하는 영국으로 가라고. 토론토도 붉은 유니폼인거 보니까, 거기도 붉은 유니폼이 좋지 않을까?”
어허.
근래 성적을 보면 쉬이 저렇게 권할 수 없을 텐데. 루니도 생각보다 뻔뻔하네. 그의 악의 없는 농담에 나도 가벼운 농담으로 대응했다.
“머지사이드에 있는 빨간 팀이요?”
“오···세상에. 한 방 먹었군.”
루니는 이마를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때 악동이라고 불렸던 루니는 이제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여튼. 오늘 경기 재밌었다. 만일 플레이오프에서 만나면, 오늘처럼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요. 루니. 플레이오프에서 보죠.”
“하하하. 알겠다고. 아메리카 킹!”
플레이오프는 7위까지.
그리고 오늘 경기로 우리팀은 7위에 껑충 올라섰다.
***
DC 유나이티드와의 치열한 격전은 꽤 화제였다.
중계방송사도 많았고, 경기 후에 각종 언론에 오르는 기사도 많았다.
또 이때다 싶어 자극적인 논조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많았고.
[유럽에서 온 슈퍼스타, 미국의 루키한테 패배!]
[토론토의 신성, 미국의 신성!]
[3경기 6골 2어시스트. 엄청난 페이스.]
음···.
뭐, 기사가 많아져서 내 인지도가 올라가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스포츠 선수는 결국 명성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띄워 주는 논조가 너무 많았다. 이러다가 한번 삐끗하면 매장당하는 건 순식간인데.
‘내가 잘해야지 뭐.’
그러면 이 페이스를 잘 유지해야지.
짝-!
“헤이, 리. 딴 생각하지 말고 집중!”
손뼉을 치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 나는 녹색의 벽 앞에 축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리, 표정! 다부진 표정 지어 주라고.”
지금 찍는 건 구단에서 다음 경기를 홍보할 포스터에 실을 사진이었다.
MLS는 유난히 마케팅에 힘을 쏟았는데, 그건 토론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연일 축구 기사에 오르면서 화제가 되자, 경기 홍보 포스터에 쓸 모델로 낙점한 것이다.
“역시. 키도 크고, 몸선도 이쁘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모델 그림이 제대로 나오네!”
수다스러운 사진사는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 댔다.
벌써 백 장은 넘게 찍은 거 같은데···.
“조금만 더 유명해지면 아디다스나 나이키 모델도 하겠어.”
“많이 유명해져야죠, 그러면.”
“내가 보기엔 이번 시즌 끝나기 전에 스폰서 낚을 거 같은데?”
“그래요?”
“그럼. 내가 이 구단에서만 10년째 사진 찍고 있는데, 일단 실력은 둘째 치고 모델이 너무 좋아. 응? 어떻게 사람 체격이 이렇게 멋질 수가 있지?”
사진사는 끊임없이 감탄하면서 셔터를 눌러 댔다.
“한번 보라고. 내가 찍은 사진을.”
확실히 괜찮긴 하네.
상남자 타입의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에게서 좋은 유전자만 물려받은 듯했다. 남자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면서도 진한 이목구비가 제법 괜찮은 미남이었다.
본래 제퍼슨이 풋볼스타로 인기를 끌었던 것도 이 외모가 어느 정도 한몫했으리라.
사진 구도도 좋았다. 슬쩍 뒤돌아보면서 얼굴의 옆선이 드러나는 모습. 이렇게 보니까 새삼 괜찮았다.
사진사가 씩 웃으며 가슴을 탕탕 쳤다.
“좋아. 기대하라고 리. 내가 이 사진으로 기가 막힌 작품을 뽑을 테니까!”
***
“와, 포스터 봐. 기가 막힌데?”
“그러게. 잘 만들었네.”
로드릭이 감탄을 할 정도로 포스터는 잘 뽑혔다.
시카고의 상징물인 클라우드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내 뒷모습. 왼쪽 옆구리에는 축구공을 끼고 얼굴의 옆이 살짝 비치는 느낌의 구도였다.
그리고 그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는데, 바로 헐크였다.
붉은빛이 감도는 헐크가 클라우드 게이트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레드 헐크는 좀 아닌 거 아냐?”
“뭐, 잘 어울리는데! 네 몸을 보라고. 이게 헐크가 아니면 뭐야?”
로드릭의 반응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벌써 구단 공식 SNS에 포스터가 업로드 되었다. 리트윗수는 순식간에 상승했고 곳곳에 포스터 사진이 퍼졌다.
[미쳤어. 포스터 퀄리티 봐봐! #시카고전 #제퍼슨 리 #토론토FC #레드 헐크]
[우리 구단 포스터 퀄리티 장난 아니야!]
[헐리우드 포스터 저리가라네.]
[제퍼슨이 혼자 시카고를 부수러 가는군! #제퍼슨 리 #헐크]
[모델이 너무 좋은데? 헐크하고 엄청 잘 어울려! #제퍼슨 리 #모델 #토론토]
[시카고 놈들 지리겠네.]
[미국의 왕이 시카고를 정벌하러 가신다! #시카고전 #22라운드]
[제퍼슨이 시카고를 짓밟아 줄 거야!]
***
21라운드까지 진행된 리그.
토론토는 승점 33점을 확보하여 7위로 껑충 올라섰다.
그리고 DC 유나이티드가 승점 42점으로 1위. 뉴욕 시티가 승점40점으로 2위였다.
되게 촘촘한 리그 테이블.
한번 삐끗하면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질 수도, 계속 승승장구하는 팀은 우승권까지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지친 게 눈에 보여서 문제군.”
그랜드 감독은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다.
선수진이 전체적으로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 상황.
체력 부담을 덜어 줄 새 선수들의 보강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플레이오프가 가시권에 들어오니 구단의 수뇌부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스쿼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구단은 FA 시장이 끝나기 전에 선수 한 명을 영입했다.
[토론토 FC, 파이터 ‘조슈아 매튜’ 영입으로 중원 강화]
캐나다 출신으로 MLS에서 잔뼈가 굵은 미드필더.
이제 선수 생활이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고향에서 마무리하려는 욕심, 그리고 브래들리의 백업을 맡아 줄 선수가 필요한 구단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졌다.
“아무래도 시카고전은 로테이션을 돌릴 필요가 있겠어.”
리그 일정으로 인해 3일 만에 치르는 경기.
DC와의 격한 일전 이후 아직 회복이 안 된 선수가 많다.
시카고 파이어는 현재 동부 리그 10위까지 떨어진 팀이었다.
MLS 초창기에는 우승도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지만 2010년대 들어와서 하위권을 맴도는 일이 잦았다.
그런 이유로 그랜드 감독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그간 혹사로 인해 피로를 호소하는 선수들을 대거 벤치로 휴식을 부여했다.
[오늘 토론토의 라인업이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저번 DC전 선발진에서 무려 네 명의 선수가 바뀌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루키, 제퍼슨이 벤치에 있네요.]
[바스케스를 대신해 파이터형 미드필더 조슈아가 첫 선발 출전합니다. 영입되자마자 출전하는군요.]
[공격진에는 돌아온 조지 알티도어가 있습니다.]
[조지 알티도어, 제퍼슨에게 요즘 밀린 느낌이 있는데, 오늘 보여 줘야겠죠?]
경기는 치열했다.
주전 선수들이 빠졌지만, 토론토는 특유의 공격력을 연신 뽐냈다. 그리고 그간 제퍼슨에게 밀려 벤치를 전전했던 조지 알티도어가 아주 의욕적이었다.
[조지, 또 한 번 헤딩 경합에서 승리합니다!]
[대단하네요. 역시 조지 알티도어입니다.]
경기는 전반전 조지 알티도어가 선제골을 넣었으나, 시카고의 슈바인 슈타이거가 멀리서 때린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1:1의 팽팽한 상황.
그러나 그랜드 감독은 승점 1점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이마를 한차례 쓸어 올린 그랜드 감독이 벤치를 쳐다보며 과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퍼슨! 나갈 준비해! 가서 시카고를 부수고 오는 거다!”
***
공격수의 목적은 골을 넣는 것에 있다.
현대 축구는 공격수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많다. 수비 가담부터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그러나 결국엔 골을 넣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90분 풀타임이 아닌, 고작 10분의 교체 출전이어도 말이다.
그게 스트라이커다.
“뛰어들어! 뒤를 돌아보지 말란 말이야!”
처음으로 시도되는 투톱 전술이다. 그러나 조지는 베테랑이었고, 나 역시 전생을 포함하여 경험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둘은 어떻게 플레이해야 할지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지친 조지 대신 내가 수비를 찢어야 한다.
수비 라인을 파괴한다.
저들은 지쳤고, 지금 내 몸은 쌩쌩하다. 체력이 완벽하게 비축된 상태. 폭발력이 근육 속에서 당장이라도 분출될 것처럼 뛰어오른다.
“막아!”
왼쪽 윙어, 조나단 대신 투입된 나는 비교적 프리롤에 가까웠다.
“제퍼슨!”
중원에서 오는 패스를 가볍게 발 안쪽으로 방향만 돌려놓은 채, 그대로 터치라인을 타고 질주했다.
풀백과 미드필더 둘이 달려와 막아서지만, 이미 가속하기 시작된 내 속도는 그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잡아!”
따라잡기 힘들다고 여긴 걸까.
풀백은 몸통 박치기처럼 몸을 던졌다. 그러나 이젠 이런 무리한 태클과 몸싸움을 피하는 데 도가 텄다.
“우오오오!”
몸을 날리는 수비의 옆으로 공을 길게 찼다. 터치라인을 따라 직선으로 굴러가는 공. 그리고 우측 대각선으로 스텝을 밟으며 수비를 피했다.
대여섯 명의 라인맨들을 피하는 무브먼트를 가진 나에게 고작 수비수의 태클 하나를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라인을 달리며 다시 공을 잡는다.
“빠, 빠르다!”
“미쳤어! 제퍼슨은 마치 치타 같아!”
“엄청나게 빠른데?”
관중들은 속 시원한 플레이에 환호했다.
단숨에 수비수를 피한 뒤 길게 찬 치달로 페널티 박스 근처까지 도달했다.
박스 좌측에서 수비수 한 명이 자리를 지키며 막아선다.
그러나 이미 가속도가 최대치에 이른 나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후반전 모두가 지친 상황.
이럴 땐 때로는 단순한 플레이가 무시무시한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다리가 공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스텝오버(헛다리짚기)로 수비를 속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툭, 공을 가볍게 밀어 넣는다.
완벽한 넛메그(알까기)는 수비수에게 엄청난 굴욕감을 주는 법.
“제기랄! 이, 개자식!”
그래도, 옷깃을 잡으면서 늘어지는 건 추하지 않나?
허벅지에 힘을 주고 무게 중심을 낮춘 채, 밸런스를 유지했다. 그리고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을 툭 치면서 몸을 돌려 공의 방향을 바꿔 놓는다. 동시에 나를 향해 중심이 쏠려 있던 수비수가 볼품없이 나동그라졌다.
그사이 박스에는 복귀한 수비수가 바글거렸다.
그러면 여기서 중앙으로 패스.
내려앉아서 공을 커트하기만 하던 새로운 선수, 조슈아가 상당히 전진해 공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우측 터치라인을 타고 가는 닉 대런에게 패스.
닉 대런은 지친 움직임으로 공을 받고, 그대로 크로스를 올렸다.
다소 부정확한 크로스.
그러나 조지는 미국의 드록바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형적인 타겟터.
그는 훌쩍 뛰어올라 공을 머리로 떨어뜨렸다.
“제-퍼슨!”
수비수들이 조지에게 몰린 그사이.
벌어진 간격에 나타난 빈 공간.
조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빈 공간을 향에 낙하하는 볼.
그리고 내 발끝에 닿는 공.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공을 멈춰 세운다. 나도 놀랄 정도로 완벽한 퍼스트 터치.
‘오늘 감 좋은데?’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공을 잡는 순간, 공의 회전과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발에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 드는 날.
선수들은 그런 날을 흔히 ‘그 날’이라고 표현한다.
뭘 해도 되는 날.
조지가 떨어뜨려 준 공을 한 번 잡고, 급하게 슬라이딩 태클하는 수비수를 피해 오른발로 공의 위치를 바꿔 놓으며 피했다.
“막아! 막으라고!”
골키퍼가 외치며 각도를 좁혀 온다.
수비수의 슬라이딩 태클이 실패하는 순간, 나와 골대 사이를 막는 건 골키퍼밖에 없다.
그리고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하는 아주 깔끔한 슈팅.
골키퍼가 급하게 다리를 오므리지만, 늦었다.
팡팡팡!
1:1의 흐름을 깨버리는 결정적인 골.
관중석에서 폭죽이 터지며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승부로 끝날 수 있는 경기 흐름을 단번에 엎어버리는 결정적인 골은,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이다.
봐라.
저기 일어나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외치는 40대 마초 아저씨들을.
···으으!
“제-퍼스은!”
“오, 리!”
“제기랄. 오늘 또 제퍼슨이야!”
“제퍼슨, 이 자식은 나를 게이로 만들 셈인거야? 미쳤어. 사랑에 빠질 거 같아!”
“사랑한다고.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