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Go Toronto, Go LEE! (4)
MLS는 비행기를 타고 원정 경기를 간다.
아······.
진짜 북미 땅이 더럽게 넓긴 하구나.
토론토에서 뉴욕 레드불스가 있는 뉴저지까지.
뉴욕 레드불스는 티에리 앙리가 말년에 뛴 팀으로 유명했다.
대표적인 동부의 강호로 통했는데, 늘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마셔 ‘콩’라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내일 낮 비행기야?”
“응.”
“이번에도 보여 줘, 리. 저번 경기 진짜 소름 돋았다니까.”
“꼴찌 팀이었는데 뭘.”
찾아보니 3주 전에는 DC 유나이티드한테 7:0으로 깨지기도 했다. 그런 팀으로 해트트릭을 한 건 엄청나게 자랑할 만한 얘긴 아니었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이미 1군에서 데뷔전을 치른 나에게 동경하는 시선을 보냈다.
음, 좀 부담스러운데.
“유스팀은 어때?”
어머니가 해주신 샌드위치를 욱여넣고 있던 로드릭이 대신 대답했다.
“처음엔 텃세 같은 게 좀 있었는데. 산티가 아주 혼쭐을 내줬어.”
“산티가?”
저렇게 순진한 애가?
“자체 청백전에서 두 골 넣은 뒤에 무시하던 선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박았어.”
헐.
난 살짝 놀란 눈치로 산티아고를 바라봤다.
산티아고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저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을 뿐이다.
잠깐, 생각해보니까.
산티아고는 프리메라리가에서도 되게 난폭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여차하면 경기장에서 선수를 발로 차는 건 예삿일이었다.
난 동그란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산티아고를 바라봤다.
음. 본래 성격을 숨기고 있는 건가.
얘 좀 무서운데.
“리. 난 네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까지 열심히 해서 1군으로 갈 거야.”
산티의 눈동자가 열정적으로 불타오른다.
음.
그래, 어서 와라.
“빨리 1군에 가서 보여 주자고. 우리가 학교에서 보여 줬던 호흡을.”
“응. 넌 어때 로드릭?”
로드릭은 우물우물 먹으면서 대답했다.
“음. 바카가 많이 알려 주고 있어 배우는 것도 많고. 바카가 곧 1군 간다던데? 그 자리를 내가 메꿀 것 같아.”
확실히 로드릭도 빨리 성장하고 있네.
어쩌면 내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애들하고 1군에서 또 같이 뛰게 될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이 둘하고 호흡이 제법 잘 맞았기도 했으니, 같이 뛰면 재미있을 거 같긴 하네.
***
25,000석의 레드불 아레나는 붉은 유니폼의 관중이 가득 찼다.
일명 황소군단.
레드불스는 플레이오프에 17회 진출했을 정도로 역사적인 강호였다.
역사가 짧은 MLS에서도 명성과 역사가 확실한 팀.
“Ohhh, Ohhh! Go Newyork!”
레드불스 팬들은 유난히 강성적인 훌리건으로 유명했다. 최근에는 지역 라이벌로 떠오른 뉴욕 시티의 팬들과 패싸움을 벌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토론토의 원정팬들도 만만치 않았다.
Ohhhh, Ohhh!
Go Toronto, Go Reds! Ohohoh!
홈 관중에 비교해 적은 숫자지만 원정팬들도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홈팀 뉴욕 레드불스와 원정팀 토론토 FC가 여기 뉴저지 레드불 아레나에서 두 번째 맞대결을 치릅니다!]
첫 맞대결에서는 토론토의 홈에서 레드불스가 3:2로 승리했다.
후반 90분까지 서로 치고받는 난타전이었는데, 고질적인 수비불안을 노출한 토론토가 패배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제퍼슨은 공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는 양쪽 날개.
제퍼슨은 바로 밑에서 플레이 메이커 빅토르 바스케스에게 백패스를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100경기 이상을 뛴 바스케스는 경기를 보는 시야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패스를 받자마자 왼쪽 사이드라인을 타고 달려나가는 조나단을 향한 긴 스루 패스.
[바스케스의 환상적인 스루 패스. 왼쪽 날개의 조나단이 잡습니다!]
빠른 주력의 조나단은 단숨에 수비진을 허물고 왼쪽 사이드를 그대로 휘저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이뤄지는 페널티 박스를 향한 강한 움직임.
조나단이 공을 잡고 질주했을 때부터, 제퍼슨과 바스케스, 그리고 오른쪽 날개인 닉 대런이 앞으로 뛰었다.
그리고 왼쪽 사이드를 질주하던 조나단이 약속했던 플레이를 그대로 펼쳐 보였다. 인사이드로 올려 주는 크로스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박스로 향했다.
[뉴욕의 센터백 팀 브렉이 뛰어오릅니다! 제퍼슨도 같이 뛰어오르네요!]
188cm의 팀 브렉은 어린 시절 농구를 했다. 그래서 점프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선수였다.
단단한 체격과 정확한 헤딩, 공중 볼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능력.
레드불스의 핵심수비였다.
그러나 그런 상대로 서전트만 96cm를 뛰는 제퍼슨은 아주 가볍게 헤딩을 따냈다.
텅!
골포스트 상단을 맞추는 헤더 슛.
[제퍼슨 리. 팀 브렉과의 공중 볼 싸움에서 헤더를 따냈지만 아쉽게도 골포스트를 맞습니다!]
[레드불스 입장에서는 다행이군요!]
[맞습니다. 홈팬들에게는 심장이 철렁한 순간이었을 거예요!]
선수들은 본능적으로 경기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느낀다.
특히 제퍼슨과 헤딩 경합을 했던 팀 브렉은 그 느낌을 정확히 캐치했다.
단 한 번의 경합.
그리고 허무하게 놓친 공중 볼.
팀 브렉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이 아쉬워하는 제퍼슨에게 향했다.
‘빌어먹을. 쉽지 않겠어.’
팀 브렉의 예상은 정확했다.
토론토 특유의 공격력에 불씨를 당겼다.
경기장 전체를 보는 바스케스의 시야. 그리고 이어지는 좋은 패스. 양쪽 날개를 파괴하는 빠른 발의 조나단과 닉 대런. 그리고 중앙에서 수비수와 힘껏 싸워 주는 제퍼슨 리.
이들의 공격력에 홈 경기장은 점점 침묵에 빠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정신 차리라고! 공간을 내주지 말란 말이야!”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개자식들. 어제 분명 술이나 처먹었겠지.”
홈팬들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때 분위기를 최악으로 끌어내릴 플레이가 펼쳐졌다.
토론토의 긴 패스가 하프라인에서 중원을 거치지 않고 한 번에 날아왔다.
패스가 아닌 다소 급하게 걷어 내는 듯한 공.
당연히 세컨볼을 따내야 하는 건 레드불스였다.
그러나 제퍼슨 리가 벼락같은 속도로 단숨에 공이 떨어질 위치를 먼저 선점했다.
“막아! 놈이 공을 잡지 못하게 막으라고!”
팀 브렉이 급하게 뒤를 쫓았다. 공중 볼 싸움이 장점이긴 하지만, 발도 느린 편이 아닌 팀 브렉이다. 그러나······.
‘왓 더··· 뭐가 이렇게 빨라?’
제퍼슨이 지구력이 떨어지는 편이더라도, 순간 속도. 본인이 가진 최대 속도에 도달하는 가속도만큼은 현재 MLS에서 비교될 선수가 없을 정도였다.
“달라붙어!”
팀 브렉이 접근도 하지 못하고 거리가 벌어지자 골키퍼가 황급히 외쳤다.
뒤늦게 달라붙은 수비수가 제퍼슨의 옷깃을 붙잡았다.
MLS는 미국 특유의 과격함 때문에 반칙에 관대한 편이다.
이 정도로는 휘슬을 불지 않는다.
‘무슨, 이렇게 힘이!’
한데 쓰러지지 않았다. 속도는 전혀 줄지 않는다. 공을 잡고 전진하는 제퍼슨은 마치 탱크가 질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낮은 무게 중심과 탄탄한 근육의 허벅지.
거기서 나오는 힘과 폭발적인 스피드는 단순히 잡아당긴다고 무너질 종류가 아니었다.
조나단을 마킹하던 수비수가 내려와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제퍼슨은 순간 엄청난 가속도에서 급정지한 것처럼 공을 발바닥으로 붙잡고 일시적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왼발로 오른쪽을 향해 가볍게 터치.
상대를 속여 넘기는 플립플랩이 너무 쉽게 펼쳐졌다.
“······!”
단 두 번의 터치로 태클에서 빠져나온 제퍼슨 앞에 슈팅 각도가 활짝 열렸다.
뻐엉!
제퍼슨은 망설임 없이 슈팅을 때렸다.
“Goooooooaaaaal!”
수없이 두들겨 맞으며 집중력이 살짝 떨어진 상태에서 제퍼슨 리가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살려 선제골을 만들어 냈다.
“오, 리! 리!”
“미친 슈팅이었어, 제퍼슨!”
“슈팅 몬스터(Shooting monster)인데?”
수비수 팀 브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세레모니를 하는 제퍼슨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느꼈던 불길한 느낌이 현실로 다가온 셈이다.
제퍼슨은 동료들과 함께 원정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유니폼에 새겨진 엠블럼에 키스.
“오, 사랑스러운 자식!”
“Redsssss!”
“제퍼슨 리! 리! 넌 우리 팀 최고야!”
오늘 경기만 봐서 누가 상위팀이고, 하위 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만큼 토론토는 원정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 줬고, 제퍼슨의 골은 경기력에 화룡정점을 찍어 준 것이다.
심지어 레드불스의 홈팬들마저 멋진 골에 감탄을 터뜨릴 정도니까.
[아! 뉴욕 레드불스. 단 한 번, 수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선제 실점을 내주고 맙니다.]
[수비 집중력이 아쉽긴 합니다만, 이건 사실 제퍼슨 리의 완벽한 퍼포먼스입니다. 수비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진 드리블로 공간을 창출해 낸 뒤에 때린 강력한 골! 제퍼슨 리! 토론토의 새로운 스타가 레드불 아레나를 침묵에 빠뜨립니다!]
전반 20분 1:0.
제퍼슨의 선제골로 토론토가 앞서갔다.
***
레드불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곧바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선수를 교체하면서 대응했다. 내 슈팅이 아쉽게 골대를 한 번 맞고, 골키퍼가 슈퍼세이브를 선보이면서 추가 득점은 나오지 못했다.
‘쩝.’
목표는 최소 공격 포인트 15개.
이제 다섯 개 찍었나.
오늘 더 찍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뭐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감독님은 약속대로 67분쯤에 나를 빼줬다.
티는 나지 않지만 어린 선수일수록 체력 소모가 빠르다. 특히, 나는 좀 더 심한 편이다. 아무래도 미식축구에 적합한,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만 내는 근육을 가진 내 신체는 더 빨리 피로가 누적되는 편이었다.
‘하······ 빨리 트레이닝을 시작해야 하는데.’
내가 아는 율리아겐이라면 나에게 적합한 방법을 금방 찾아 줄 것이다.
그때까진 내 나름대로 체력을 관리하고, 플레이 스타일을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교체되어 투입된 조지 알티도어는 아직도 체력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굼뜬 움직임이었다.
또 우리 팀 중앙 수비수가 햄스트링을 호소하면서 교체됐다. 그 덕택에 수비가 여러 번 흔들려서, 무작정 공격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레드불스에서 몇 번의 위협적인 기회를 만들어 냈으나, 토론토는 오랜만에 무실점 승리를 챙겼다.
1:0 신승.
뉴욕 원정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셈이다.
Ohhh, Ohhh, Oooohhh-!
My team, my Toronto-!
Go Toronto Go Reds!
Go Lee Go Jefferson!
토론토 특유의 응원가에 내 이름이 섞여 들린다.
원정팬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토론토의 이름과 내 이름을 노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짜릿한 광경이었다.
“제퍼슨, 우리 팬들의 마음을 언제 이렇게 다 훔친 거야?”
조나단이 살짝 부러운 눈길로 원정팬들을 쳐다봤다.
고작 두 경기.
그 두 경기 만에 내 플레이가 팬들에게 인상적이란 얘기겠지.
난 어깨를 으쓱이고 원정석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부모님이랑 함께 온 듯한 어린 팬에게 유니폼을 벗어 줬다.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어린 팬.
그 해맑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졌다.
저런 팬이 많았던가.
내가 유니폼을 던져 주면 세상 모든 걸 얻은 것처럼 좋아해 주던 팬이.
이학현으로 살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성공한 선수는 아니었으니까. 유럽에 갔다가 실패해서 돌아온 선수였으니, 저렇게까지 좋아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지금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이 원정팬들이 그저 고맙게 느껴진다,
Go Toronto Go Reds!
Go Lee Go Jefferson!
***
[토론토 FC, 뉴욕 레드불스를 1:0으로 꺾고 파죽의 2연승!]
[여전히 날카로운 공격력의 토론토. 오랜만에 무실점 승리를 챙기며 플레이오프를 향해 정조준.]
[제퍼슨 리 결승골. 2경기 연속골로 축구팬들에게 이름을 각인!]
[동부의 강호 레드불스, 홈에서 11위 토론토에게 무너지다.]
[레드불스 감독 ‘경기 내용에는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 건, 저쪽엔 제퍼슨 리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제퍼슨 리 ‘2경기 연속 MOM. 동료들의 좋은 경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감독과 동료들에게 고맙다.’]
[토론토 감독 ‘추가 득점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원정 온 토론토 팬들에게 즐거운 경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Reds! 진짜 붉은색이 누군지 알려 주다. 토론토 FC 리그 9위로 상승!]
[제퍼슨 리. 다음 경기는 웨인 루니의 DC 유나이티드. 골 폭격 이어갈까?]
***
“리! 오늘 경기 멋졌어!”
“넌 우리의 영웅이야!”
“리! 여기 싸인 해줘!”
경기가 끝나고, 구단 버스를 향해 움직이는 데 팬들이 모여들었다.
90분의 격렬한 경기.
피곤이 쌓일 대로 쌓인 선수들이라 몇몇은 미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버스로 들어갔다.
나도 피로가 몰려오고 있어서 고민했지만, 펜스 옆에서 축구공을 들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잠깐 사인 좀 해 주고 가도 될까요?”
“그래. 그래라. 피곤한데 괜찮겠냐? 장거리 비행도 했는데.”
“괜찮습니다.”
난 씩 웃으며 팬들에게 다가갔다.
“Oh, 리! 잘생겼는데!”
“여기, 여기에도 싸인해 줘요!”
팬서비스는 스포츠 선수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생산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순한 공차기를 좋아해 주는 팬들이 있기에 선수들이 돈을 벌고 살아가는 거니까.
더구나 이런 팬들은 내가 부상당하기 직전, 축구 천재라고 불리던 때에만 몰려들었다.
‘그때 더 잘해 줬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자만했지.
그래서 팬서비스를 소홀히 했다.
나중에 유럽에서 실패하고 피지컬에 문제가 드러나면서 내 팬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때야 팬의 소중함을 깨닫고 팬서비스를 하려 해도 팬이 없었다.
“리. 여기, 여기에다 해 줘요!”
한 8살쯤 보이는 어린 꼬마아이가, 까치발로 축구공을 들어 보인다.
어떻게든 잘 보여서 싸인 받으려는 모양새가 귀엽다.
난 공을 받아 싸인을 했다.
“멋진 공인데.”
“리! 나도, 축구선수가 될 거예요.”
미국은 확실히 여자 축구가 강세니까.
난 씩 웃어 줬다.
“어떤 선수가 되고 싶어?”
“여자 발롱도르!”
“호! 꿈이 야무진데?”
발롱도르라.
멋진 꿈이다.
난 꿈도 꿔보지 못했던.
잠깐만.
근데, 지금 그 꿈을 꾸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순간 머릿속이 밝아진 기분이었다.
난 아이의 손에 조심스럽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래, 나중에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보자고. 넌 여자선수 발롱도르. 난 남자선수 발롱도르. O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