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6화 (16/258)

16. 프로 무대로 (3)

알렉산더 바카.

고작 19세의 이 어린 수비수는 프로 데뷔도 하지 않았건만, 성인 대표팀 얘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인정받는 수비수이기도 하다.

이미 유수의 유럽팀에서 이적 제안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

‘아파.’

그런 알렉산더가 제대로 된 유스팀에서 훈련도 받지 않은 애송이에게 당했다는 건 불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쾌한 느낌보단 어깨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 몸이 돌 같아.’

몸으로 부딪치는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아프다.

마치 트럭에 부딪힌 충격이었다.

순간적으로 얼얼한 기분에 한 발짝 물러난 사이. 제퍼슨은 거짓말 같은 발재간으로 백업 수비수까지 벗겨 내서 골을 넣어 버렸다.

‘쉬운 놈이 아니야.’

앞선 세 번의 경기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는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진짜였다.

무엇보다 저 피지컬과 화려한 발재간.

그리고 공간으로 치고 달리는 시야와 때때로 공을 지키며 동료 선수들에게 찔러 주는 패스.

알렉산더는 직감했다.

‘이놈. 프로다.’

아마추어?

웃기는 소리.

이 실력이 아마추어라면, 지금 프로 리그를 뛰고 있는 선수들은 받는 연봉을 다 반납해야 한다.

알렉산더는 무게 중심을 낮췄다.

무리한 어깨싸움보단, 그의 장점인 깔끔한 태클로 공만 빼내야 한다.

자칫 제퍼슨의 화려한 발재간에 당한다면 또 먹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하게 계산된 듯한 궤적의 골은 운이 아니었다.

‘무섭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였지.

시즌을 앞두고 1군 선수들과 팀 내 자체 청백전을 치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대했던 1군 공격수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한 느낌이다.

제퍼슨 리가 다시 공을 몰고 전진해 온다.

그를 막아서던 미드필더는 제퍼슨 특유의 스텝, 팬들이 지어 준 일명 고스트 스텝이라고 불리는 말도 안 되는 무브먼트에 나동그라졌다.

꿀꺽.

저걸 어떻게 막아?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전진하던 제퍼슨이 문득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의 오른발이 살짝 뒤로 빠졌다.

‘중거리 슛?’

완벽한 슈팅 모션.

‘저기서 슛을 찬다고?’

골대로부터 무려 40m 가까이 떨어져 있는 거리.

섣불리 중거리 슛을 때릴 엄두를 낼 수 없는 위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던 알렉산더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선제골을 생각하면, 제퍼슨은 정확한 위치에 완벽한 슈팅을 꽂아 넣는 괴물이다.

저 중거리 슛도 할 만하다고 판단되니까 시도하는 것일 터.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알렉산더는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살려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

그리고 그가 본 건 옆으로 툭 빠져나가는 볼이었다.

‘엿 같군. 슈팅 페인트라니!’

당했다.

이번엔 슈팅 페인트다. 심리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선제골로 위축된 심리를 노려서 먼 거리지만 중거리 슛을 시도하려는 듯한 페인트.

그러나 토론토 FC의 장점은 알렉산더가 아니다.

그와 오래 발을 맞춘 수비수들의 끈끈한 조직력.

알렉산더가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하며 달려나간 순간, 이미 파트너 수비수가 그 자리를 커버했다.

······커버했을 뿐이다.

“Goooooooalalalal!”

“LEE! LE―EEEE!”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골포스트 사각지대를 향해 쏘아지는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

설마 슈팅 페인트를 하고 곧바로 중거리 슈팅을 시도할 줄은 몰랐던지 수비수는 발을 뻗지도 못했다.

그건 골키퍼도 마찬가지.

그물을 철렁이며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을 보며 알렉산더는 생각했다.

‘해트트릭만큼은 안 돼!’

***

음······.

살벌하다. 살벌해.

나를 노려보는 알렉산더의 눈빛은 레이저 같았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기세.

하기야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겠지.

처음 경기장에 들어서서 알렉산더를 본 순간, 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헤딩 골 넣은 놈이지.’

2026 북중미 월드컵.

그 무대에 나는 국대 상비군으로 있다가, 선발 선수의 부상으로 인해 막차에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뛴 건 고작 10분도 안 될 거다.

조별 탈락했거든.

그리고 탈락의 이유가 바로 저 알렉산더 바카였다.

미국팀과 붙은 조별 리그 최종전.

0:0 흐름에서 89분 헤딩골을 넣어 미국은 조 2위, 한국은 조3위로 떨어졌다.

‘쩝. 그때 미국이 워낙 잘나가긴 했지.’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이라고 우승까지 가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하필 8강에서 어마어마한 상대를 만나서 떨어졌지.

어쨌든 알렉산더는 훌륭한 선수지만 아직 그도 애송이다.

프로 데뷔를 앞뒀지만, 어쨌거나 아직이잖아.

나랑 별 차이 없다고.

토론토 FC는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두 골을 내주면 유스팀 특성상 무너질 확률이 높은데, 토론토는 특유의 끈끈함을 유지했다.

결국, 전반 종료 직전.

로드릭이 온 힘을 다해 막아 낸 슈팅이 굴절되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오오오!”

“토론토! GO! 토론토! GO!”

역시.

쉽지는 않네.

전반전 2:1.

“어이, 로드릭!”

전반전이 끝나고 들어가는 라커룸에서 로드릭을 불렀다.

로드릭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이 완전히 붉었다.

많이 뛰었지. 혼자 뻥뻥 뚫린 수비 커버하느라, 목이 터져라 소리치느라.

그래도 한 골만으로 막은 건 다행이었다.

“헉헉, 왜?”

“괜찮아?”

“가뿐하지!”

“······진짜?”

“······아니. 힘들어.”

금세 축 처져 버리는 로드릭.

경기는 이기고 있지만 흐름은 묘했다.

골을 먹은 토론토는 오히려 더 불타올랐고, 특히 알렉산더는 나에게 더 골을 먹히지 않겠다는 듯 미친개처럼 날 막아서 골 찬스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

여기서 한 골을 더 먹힌다면 경기 흐름은 나조차 어찌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축구는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니까.

“로드릭, 상대 수비수하고 헤딩 경합할 때 팔을 써.”

“팔을? 그거 반칙이잖아.”

“걸리면 반칙이지.”

“헐.”

로드릭의 단점은 지나치게 순진하다는 점이다.

상대 선수하고 몸싸움할 때 적절히 팔을 쓰는 것은 수비의 핵심이다. 걸리면 반칙이지만, 오늘 심판 성향을 보건데 어느 정도 반칙에 관대한 느낌이 있었다.

자자. 속성 강의 들어갑니다.

“봐, 이렇게 같이 뛰어오를 때 경합하는 척, 팔을 상대 어깨에 살짝 올려.”

“응응.”

“그리고 지그시 눌러 버려.”

“그래도 돼?”

“지그시. 하지만 시선은 공을 바라봐야 해. 난 그냥 경합하다가 잠깐 터치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음. 오케이.”

“심판 눈치 잘 보고. 자, 나한테 한번 해 봐.”

“오!”

로드릭은 나와 헤딩경합을 했을 때,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내가 점프력이 좋기도 했으니까.

한데 로드릭은 나에게 팔을 쓰는 법을 속성으로 배우고는 제법 괜찮게 흉내를 냈다.

“알겠지?”

“오케이. 알겠어. 마스터!”

“마스터는 무슨.”

“성학 리가 그랜드 마스터잖아. 그분한테 태권도 배웠었으니까.”

싱겁기는.

이윽고 감독님이 라커룸에 들어와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다독여 줬다.

저들에겐 그저 친선 컵대회지만,

아마추어 축구부인 우리에겐 일생에 한 번 있을 결승전일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감독, 선수들 모두 동기 부여가 확실했다.

“캐나다 촌놈들을 집에 돌려보내자고!”

***

“빌어먹을, 심판! 이 자식이 내 어깨를 눌렀다고!”

헤딩 경합 상황.

얼굴이 잔뜩 붉어진 토론토의 공격수가 심판에게 달려가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심판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거칠게 항의하는 공격수에게 구두 경고를 날렸다.

슬쩍 로드릭을 바라보니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게······ 애써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자식, 잘 써먹는데?

여하튼 경기 흐름은 팽팽했다.

토론토는 후반전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왔다.

나에게 탈탈 털린 수비수 한 명과 다소 발이 느린 미드필더가 교체됐다.

알렉산더는 심기일전한 얼굴로 수비진을 진두지휘했다.

차츰 우리 팀이 밀리는 양상으로 경기가 전개됐다.

결국, 후반 19분쯤.

우리 팀 수비의 실수를 놓치지 않은 상대 공격수가 깔끔하게 공을 밀어 넣으며 동점골을 만들어 냈다.

“GO! 토론토!”

“프로의 무서움을 보여 주라고!”

“한 골만 더! 한 골만!”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혼자 경기에 영향력을 끼쳐도, 축구는 팀 스포츠다. 막말로 내가 아무리 골을 넣어도 수비가 실점을 헌납하면 지는 게 축구다.

토론토 FC는 이전에 상대했던 두 프로팀하고 확연히 달랐다.

끈끈함과 조직력은 한두 골 먹혔다고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여섯 명의 수비수가 잔뜩 웅크린 페널티 박스.

내가 공을 잡자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를 보냈다.

빈틈은 없다. 물리적으로 여섯 명 사이를 뚫어 버리는 슈팅은 불가능하다.

그때 저돌적으로 돌진해 오는 산티아고가 보였다.

높은 지구력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산티아고.

박스에 머물러 있는 수비들 사이에 점차 균열이 만들어졌다.

“산티!”

산티아고에게 짧은 패스와 동시에 박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산티아고에게 수비수 한 명이 쏠리는 순간,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는 내 발끝에 산티아고의 아름다운 리턴 패스가 도착했다.

수비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는 박스 안.

협소한 빈 공간.

발끝에 한 번의 터치로 볼을 키핑한 후, 그 좁은 틈을 노려 빠르고 강하게, 밀어 넣는 침착한 슈팅.

뻐엉!

“큭!”

그러나 아쉽게도 골키퍼가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막아 냈다.

골키퍼는 자신이 막아 낸 사실에 얼얼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세상에!”

“저 공간에서 슈팅을 때렸어!”

“쟤 17살짜리 맞아? 무슨 애가 저렇게 침착해?”

“풋볼 출신이잖아. 이것보다 더 큰 무대에서 MVP까지 받은 녀석인데 뭐가 겁나겠어?”

골키퍼가 막아 낸 슈팅은 코너킥으로 이어졌다.

“산티!”

코너킥 키커인 산티아고가 침착하게 공을 차올렸다.

내 머리, 또는 로드릭의 머리를 노린 궤적의 크로스.

그러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골키퍼가 몸을 날린 펀칭으로 날려 보냈다.

나는 날아가는 공을 보고 스퍼트를 올렸다.

터치라인 아웃이라기엔 애매한 거리.

최대한 빠르게 달려 간신히 공을 키핑했다.

산티아고와 몇 번 공을 주고받으며 페널티 박스 밑에서 수비수들을 벗겨 냈다.

측면으로 빠진 상황.

“로드릭, 뛰어 들어가!”

순간 로드릭이 내 말에 반응하며 복귀하던 중에 방향을 틀어 다시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수비수를 산티가 어그로를 끌며 빼낸 후, 다른 수비수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빠른 크로스.

인사이드로 정확하게 올린 크로스는 그림 같은 궤적으로 박스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새 달려온 로드릭이 놀라울 정도의 점프력을 보이며 불쑥 튀어 올랐다.

이 자식.

제대로 뛰었는데?

로드릭의 강력한 헤더 슈팅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GOOOOAL!”

“우와아아악!”

후반 종료 직전 터진 극적인 결승골.

로드릭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슬쩍 보니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게 보였다.

짜식, 안 운다면서.

“리! 크로스 정말 기가 막혔어! 난······ 그냥 뛰어올랐는데 공이 머리에 닿았다니까.”

“얼굴에 닿은 거 같은데?”

“응?”

“너 쌍코피 나.”

“······.”

***

“크로스가 말도 안 되는군요. 전 스트라이커가 저런 크로스를 올릴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패스는 어떻고?”

“······.”

“봐봐. 쟨 그냥 클래식한 정통 중앙 공격수가 아니야.”

그랜드 감독은 흐뭇한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 봤다.

본인의 유스팀이 패배하긴 했지만 좋은 경기였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경기였다.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완벽한 스트라이커.”

“······그런 것 같군요.”

“어쩌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될지도 모르겠군.”

“저 친구 한국계라서, 아직 한국 국적 갖고 있습니다만······.”

그 말에 그랜드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친구가 순도 높은 활약을 보이면, 북중미 월드컵을 앞둔 미국이 가만히 있겠어?”

“아······!”

“자. 그럼 일어나자고.”

“지금 안 가 보실 겁니까?”

“승리를 만끽하게 놔둬야지. 먼저 선수들하고 토론토로 돌아가. 난 내일 저 친구를 만나보고 가지.”

“알겠습니다.”

***

그랜드 감독의 선택은 훌륭했다.

곧바로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승리를 만끽하고, 그 기쁨을 가족과 나누고 있는 제퍼슨이었으니까.

한데 훌륭한 선택을 하지 못한 팀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제퍼슨 리. LA 갤럭시의 스카우터 지미 카틀런입니다.”

“네.”

“이번 경기에서 리의 활약에 정말 감탄했······.”

“죄송합니다만, 제가 가족이랑 저녁 식사가 잡혀 있어서요. 나중에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제퍼슨은 명함만 받고 바로 돌아섰다.

그런 제퍼슨을 보고 이성학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LA 갤럭시라면 좋은 팀인데 그렇게 쌀쌀맞아도 되니?”

“가족하고 식사하러 가는데 붙잡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렇지, 우리 아들! 엄마가 맛있는 거 잔뜩 해 줄게!”

“그래도······.”

“아버지, 지금 이 상황에서 급한 건 제가 아니에요.”

“응?”

“자자. 식사나 하러 가자구요.”

제퍼슨이 씩 웃었다.

제퍼슨을 원하는 프로구단들은 많지만, 제퍼슨은 딱 한 명이다. 결국 이 상황에서 제퍼슨은 현재 확실한 ‘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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