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classic, class (3)
축구란 이래서 모르는 거다.
수백 번의 패스, 6할 이상의 압도적인 점유율과 비교도 되지 않는 슈팅 숫자.
그러나 우리팀은 단 세 번의 패스와 한 번의 슈팅으로 앞서갔다.
이런 식으로 선제 실점을 당하게 되면 수비 입장에서는 허망해진다. 더구나 10대들의 경기라면,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선수가 없어서 멘탈리티 측면에서 더 그렇다.
빠르고, 간결하고, 간단한 역습 축구.
차고, 달린다.
킥 앤 러쉬의 전형.
현대 축구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는 정통 축구, 클래식한 축구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님의 입장에서는 퍽 감동적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 감독님은 전술적 역량이 훌륭하지 않다.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 축구에 있어서 정통만 고집하는 건 구닥다리 발상이다.
그러나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과거 축구에 대한 향수 말이다.
감독님은 평생 그런 시대를 살았고, 경기를 뛰었다. 지도자가 된 지금 그 축구를 자신의 손으로 재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구닥다리 취급받는,
클래식한 축구.
“보여 주자고, 산티아고.”
나 혼자라면 그저 원맨쇼에 불과한 역습이겠지만, 산티아고가 있다.
킥 앤 러쉬와 빅 앤 스몰로 대변되는 클래식한 축구를 클라스있게 보여 주자고.
***
심판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재개됐다.
장 미쉘은 소리치며 선수들의 동요를 막았다. 다행히 시카고 선수들은 침착해졌고 라인을 올리면서 패스를 통한 점유율을 점점 가져갔다.
확실히 프로 유스팀이 맞았다. 끈끈한 조직력을 발휘하면서 압박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로드릭은 끈질기게 수비진을 조율했으며, 깊게 자리한 미드필더는 정말 ‘개처럼’ 뛰고 있었다. 선제골이 들어간 이상 그들의 머릿속엔 ‘이길 수 있다’라는 생각이 가득했고, 그것은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어 엄청난 활동량으로 나타났다.
그 압박에 시카고는 결국 무리한 중거리슛만 뻥뻥 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축구는 90분 동안 하는 스포츠다.
어느 한 팀이 90분 내내 우세를 유지할 수 없다. 어느 순간에 흐름은 반드시 바뀐다. 가령, 지금처럼.
산티아고가 깊숙하게 내려가서 압박하자 공을 잡고 있던 선수는 황급히 수비수에게 백패스를 보냈다.
그 순간, 천천히 내려오면서 기회를 엿보던 제퍼슨의 눈이 번뜩였다.
“빌어먹을! 복귀해! 수비진 뒤로 물려! 역습이다!”
장 미쉘이 소리쳤다. 유령처럼 내려온 제퍼슨이 볼을 탈취했다.
장 미쉘은 이전의 실점 상황이 재현될까 싶어 곧바로 수비 복귀를 지시했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제퍼슨은 공을 잡고 곧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등을 진 채 버텼다. 복귀하던 수비수 두 명이 곧바로 달라붙어 태클을 시도했다.
하지만 양팔을 벌리고 무게 중심을 낮춘 제퍼슨은 공을 간수한 채 뺏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박은 거목이었다. 그 순간 제퍼슨의 발이 움직였다.
“컥!”
제퍼슨은 왼쪽의 수비수를 강하게 밀어내며 떨쳐 냈다. 엄청난 힘에 수비수는 헛숨을 들이키며 밀려났다. 동시에 생긴 틈을 통해 패스를 터치라인 쪽으로 찔러줬다.
빈 공간을 빠르게 찌르는 패스.
갑작스러운 패스에 수비들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순간. 공이 굴러가는 공간에 조그마한 체격의 산티아고가 벼락처럼 나타났다.
“우와아아아!”
그림 같은 역습이 펼쳐졌다.
백패스를 제퍼슨이 탈취하여 버티면서 수비를 끌어낸 뒤, 빈 공간을 침투해 가는 산티아고에게 이어진 긴 패스.
수비진은 단숨에 궤멸했고, 산티아고는 터치라인을 따라 질주했다.
“막아! 뛰지 못하게 막으라고!”
수비수가 달라붙으며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하는 순간, 산티아고가 인사이드로 공을 길게 올려 줬다.
러닝 크로스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가며 박스로 향했다. 골키퍼가 빠르게 튀어나와 뛰어오르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패스를 주고 미친 듯이 박스로 뛰어가던 제퍼슨이 방해하는 모든 수비수를 떨쳐 내고 붕 뛰어올랐다.
서전트 점프 96cm.
달리면서 충분히 도움닫기를 시도한다면 과연 그 점프력은 얼마나 될까.
흡사 호날두가 수비들 사이에서 홀로 솟구치는 돌고래처럼, 제퍼슨의 단단한 몸뚱이가 하늘을 날았다.
정확한 타점과 아름다운 크로스.
두 개가 합쳐져 골문 구석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
축구는 아름답다.
약팀이 강팀을 잡을 수 있고,
슈팅 20개를 두들겨 맞아도, 두 개의 슈팅으로 두 골을 넣을 수 있다.
그렇기에 감동적이고 가슴 뛰는 스포츠다.
단, 그것이 우리 팀일 경우다.
“개 같군.”
장 미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첫 실점을 했지만 괜찮았다. 경기는 우세였고,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두 번째 골마저 그림 같은 한방에 당했다. 수비수들은 멘탈이 크게 흔들렸다. 이들은 10대들이니까. 장 미쉘이 아무리 의욕을 다지려고 열정적으로 소리쳐도 한번 무너진 수비는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된다.
‘하프타임까지만 버티자.’
하프타임 때 팀을 재정비해야 한다.
아니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저 괴물 같은 9번의 아시안계와 7번의 히스패닉이 수비진을 말 그대로 파괴하고 있었으니까.
버티자. 어떻게든 버티자.
하프타임 때 팀을 재정비하고 반격하자. 그러면, 역전할 수 있다. 우리는 프로가 아닌가?
단지 수비들이 방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그냥 고등학교 축구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처음 보는 상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달성하기 직전까지는.
***
축구가 즐겁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플레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경기.
선수라면 누구나 꿈꾼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승리를 얻고 값진 명예를 얻는 것.
승리는 하더라도, 난 극단적으로 허약한 피지컬 때문에 주인공은 될 수 없었다. 그것이 한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경기의 주인공은 나였다.
“리. 프리킥, 네가 차.”
골대에서 대략 32m.
산티아고가 얻어 낸 프리킥이다.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산티아고도 프리킥 실력이 제법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나에게 해트트릭을 흔쾌히 양보했다.
“리. 이건 너의 패스가 완벽해서 얻은 반칙이었어. 네 것이 맞아.”
그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나를 마치 우러러보는 듯한 시선.
그 낯선 시선에 헛웃음이 나왔다.
‘얘가 날 동경하고 있다고?’
미래의 축구스타, 미국의 슈퍼스타 산티아고가?
묘하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은 스포츠 선수에게 훌륭한 덕목이다. 망설임을 없애 주고 근육을 작동시키는데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32m 프리킥은 직접 넣기 부담스럽다.
아마 그 때문에 선수들은 간접 프리킥을 노릴 것이라 예상할 수밖에 없다. 원래의 나라면 우리 선수의 머리를 노리고 공을 보내 주겠지만,
이 발목을 믿는다.
서전트만 96cm를 뛰는 발목과 종아리, 허벅지의 폭발적인 파괴력을 믿는다.
왼쪽 골문 사각지대.
구석을 노렸다.
발등에 공이 맞는 순간, 임팩트가 제대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무회전의 강슛이 직선거리로 수비벽 사이를 기가 막히게 뚫고 지나가 그물을 찢을 것처럼 꽂혔다.
“Goooooooal!”
“리――이!”
“해트트릭이야! 리!”
“으하하하! 살살하라고, 리! 쟤들 울겠다. 울겠어!”
모든 선수가 모여들었다. 그때 관중석에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부르르 떠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액자 속 젊었을 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마 마지막 올림픽 무대였던가?
결승전에서 상대방을 돌려차기로 끝장내는 순간을 찍은 사진이 대형 액자로 걸려 있었다.
난 아버지 쪽으로 달려가며 그대로 허공을 향해 멋진 돌려차기를 보여줬다.
뭐, 아버지 전성기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돌려차기지만, 이 정도도 세레모니로는 썩 훌륭하잖아?
***
“봤어?”
“봤어.”
“으하하하하. 우리 아들 태권도 시켰어도 세계 무대 제패했을 것 같은데?”
“좋아 죽네, 좋아 죽어.”
“흠흠. 뭐 당신이 삐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쟨 나를 닮았어. 돌려차기 폼을 보라고.”
“흥. 달리는 폼은 완전 내 폼이거든?”
“응. 나를 위한 세레모니했음.”
“······다음엔 내 세레모니할 거야.”
“단거리 육상에 세레머니가 어딨어?”
“시끄러워.”
이성학은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에이. 차가 막혀서 늦게 왔는데, 벌써 세 골이나 넣었어? 하나도 못 봤네.”
“걱정 마. 우리 아들인데. 이제 전반전 끝나가.”
시카고 파이어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나간다.
그러나 경기장의 흐름은 완전히 넘어갔으니까.
이제 남은 건 대참사였다.
***
이미 무너져 버린 수비진은 이전의 끈끈함을 보여 주지 못했다.
멘탈이 완전히 나간 선수들 사이로 산티아고가 한 골을 추가했으며, 산티아고가 올려준 코너킥에 로드릭이 헤딩골을 넣었다.
“우하하하하하학!”
“······넌 이마로 헤딩을 한 거냐. 눈으로 한 거냐.”
이거야 원.
왼쪽 눈하고 광대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로드릭은 그저 실실거리며 웃었다.
쯧.
내일이면 팬더가 될 거 같은데, 속도 좋아.
산티아고의 강력한 코너킥은 사실 잘못 때린 거다. 너무 강해서 멀리 빠져나갈 거였는데, 로드릭이 뛰어올라서 공이 얼굴을 맞고 그냥 들어가 버린 것이다.
뭐, 어찌 됐건 5:0.
게임은 끝났다.
프로 유스팀인 시카고 파이어가 평범한 고등학교 축구팀에 탈탈 털린 것이다.
적어도 지역 신문지에는 오를 만한 토픽감이었다.
“······잘했다.”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온 감독님은 한동안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간신히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라커룸안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다.
로드릭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감독님 왜 화나신 것 같지? 우리 대승 했는데?”
“화난 게 아니야. 참고 계신거야.”
“뭘?”
“눈물.”
“응?”
“그런 게 있다.”
눈매가 꿈틀거리고, 굳게 닫은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걸 봤다. 그건, 감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애써 감격을 참는 모습.
감독님이 왜 그런 심정인지 이해가 됐다.
***
질리먼은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크게 심호흡했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입에 담배를 물었다.
“멋졌어.”
질리먼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
평생을 영국 2부, 3부에서만 뛰었던 그는, 그 시대 축구의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구닥다리였다. 전략적인 식견이나 전술적인 역량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도 고작 고등학교 축구팀이나 맡은 거지.
하지만 욕심은 있었다. 자신이 현역시절 느꼈던 그 단순하고도, 재밌었던 축구.
그 매력을 잊지 못했고, 그리워했다.
그걸 한 번이라도 펼치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전, 그때의 축구가 재현됐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이끄는 팀에서 말이다.
물론 그건 본인의 능력이 아니었다.
“짜식들······.”
갑자기 나타난 제퍼슨, 순식간에 성장한 로드릭, 그리고 수줍은 산티아고까지.
“빌어먹을 정도로 짜증 나네.”
질리먼은 담배를 비벼 껐다. 자신이 능력만 있으면 저들을 데리고 프로팀을 가는 건데. 키워주는 건데.
어쩔 수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 품기엔 너무 좋은 선수들이었다.
그때 백인 중년인이 조용히 다가왔다.
“선배님?”
“오. 자네. 스카우터 하나?”
“예. 존스 감독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경기 봤나?”
“멋진 축구였습니다.”
“고맙네.”
“아름답기도 했구요.”
“아름답기는 무슨, 텐백이었는데.”
“저나 선배나, 약팀인데요. 약팀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보여 줬습니다.”
질리먼은 스카우터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어서 가봐. 그 아이한테. 아마 지금쯤이면 시카고나 경기를 보러온 미네소타, 토론토에서도 접근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중일 거야.”
“아, 알겠습니다.”
영국에서 온 스카우터는 간단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질리먼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축구라······.”
아니다.
축구는 원래 아름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