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0화 (10/258)

10. classic, class (2)

부모님 두 분 다 록하크전 경기에는 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북미 한인 태권도 협회의 위원이셔서 시카고에서 열린 태권도 대회에 다녀오셨고, 어머니 역시 지도하고 계시는 대학 육상팀 선수가 대회에 출전해 바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실 거죠?”

“당연하지! 아빠가 너무 바빠서 못 간 거 정말로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건 고등학교 공놀이였는데요.”

퇴장 때문에 좀 거칠어졌지, 경기 자체는 쉬웠다. 적어도 내 수준에서는 말이다.

내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노심초사하시던 부모님께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유를 넣어 부드러워진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번에는 컵대회가 있어요.”

“컵대회?”

“미네소타 유나이티드에서 주최하는 유스컵대회에요. 프로팀 유스들이 참여할 거예요.”

“어? 큰 대회 아니냐? 프로 유스팀이면. 이번에도 혹시 선발이냐?”

“당연하죠.”

내 말에 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뜨거운 홍차를 조금씩 음미하던 엄마가 환해진 얼굴로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놨다.

“아들! 이번에도 선발이야? 역시, 우리 아들이네! 금방 축구도 곧잘 하는 것 봐봐.”

“그럼, 누구 아들인데.”

“내 아들이지.”

“날 더 닮았지.”

“당신 닮은 건 동양인들 냄새 안 나는 것 빼곤 안 닮았는데.”

“피부색도 황인종인데?”

“아냐. 백인에 가까운 밝은 황색이잖아. 내 피가 더 들어갔어. 머리도 약간 곱슬머리이고.”

아니, 또 싸우시네.

뭐 말릴 필요는 없다. 저렇게 유치하게 싸우시다가 또 금방 화해하실 거다.

아버지가 곱슬머리란 얘기에 불현듯 어머니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와이프는 곱슬머리가 참 예뻐.”

“흠흠··· 당신도 참 향기가 좋아. 운동하고 나서도 어떻게 냄새가 안 날까? 동양인들은 참 신기해.”

“당신도 향긋한 냄새가 나.”

“아까 샤워했어.”

“크흠······. 밤도 깊어가는데 와인 한잔할까?”

“준비할게요.”

에휴.

또 시작이네. 이런 장면은 몇 번 봤는데도 익숙하지 않는단 말이야.

오붓한 시간 가지시게 방으로 피해야지.

**

미네소타 유나이티드가 주최하는 컵대회는 규모가 컸다.

참여하는 팀은 총 다섯팀이었고, 프로 유스팀이 세팀, 그리고 고등학교 축구팀이 두 팀이었다.

미네소타 유나이티드.

시카고 파이어.

토론토FC

그리고 나한테 된통 깨진 록하크가 참가했다.

훈련에 임하는 팀 분위기는 뭔가 비장했다. 곧 방학을 앞두고 어수선할법한데 비장미까지 감돌았다. 대회서 활약을 보이면 대학교에서 모셔가는 풋볼, 야구, 농구와는 달리 축구는 프로리그로 직행할 수 있었다.

선수들이 프로팀 유스와의 대결에 눈을 번뜩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첫 상대는 시카고 파이어다.

시카고 파이어는 4-1-2-3 포메이션을 사용하는 팀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포백을 보호하고, 두 중앙 미드필더가 간격을 좁히며 그 수비진을 더 두껍게 한다. 나머지 세 명의 발 빠른 공격진이 역습에 특화된 플레이였다.

“문제는 우리 팀에도 그 전술을 들고나올지는 모른다.”

우리 팀은 약팀이니까 말이다.

아마 포메이션을 약간 변경해서 4-3-3으로 할지도 모른다. 중앙에 힘을 더 줘서 점유율을 가져가고 양쪽 윙과 스트라이커를 통해 공격하는 스타일로 변경할 확률이 높다.

“어찌 됐건 우린 역습 위주다. 이 대회에서는 우리는 가장 약팀이야. 록하크를 이기긴 했지만, 경기 내용은 쉽지 않았다.”

질리먼 감독은 불독이 되어 강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팀은 4-4-1-1이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전술이었고, 중앙을 더 깊게 내려앉히면서 수비적으로 운영했다.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산티아고가 들어오면서 사실상 4-4-2의 형태였다.

요즘 현대 축구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4-4-2의 클래식한 전술인 셈이다.

“너희들에게 복잡한 전술, 복잡한 플레이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애당초 나 또한 전술 능력이 썩 좋지 못해. 그냥 치고 달려라. 개같이 뛰고, 개같이 달려서 개같이 물어뜯어라.”

어우, 불독 같은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살벌하다.

질리먼 감독도 평소와 달리 진지하다.

뭔가 제대로 마음먹었는데.

“그럼 나가서 개처럼 물어뜯어!”

**

시카고 파이어 U20의 감독 장 미쉘은 프랑스 출신이었다.

미국 프로축구는 유럽의 축구를 벤치마킹하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유럽의 유수한 코치 인력들이 대거 수혈됐다. 장 미쉘도 그중 하나였다.

장 미쉘은 상대를 얕보지 않았다.

어쩌면 축구가 스포츠 중에 가장 매력적인 이유가 자이언트 킬링의 순간이 가장 짜릿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긴장을 풀 수가 없다.

비록 친선 컵대회라지만, 어린 친구들한테는 이런 대회가 중요한 법이다.

“역시 수비적이군.”

상대는 완전히 내려앉아 수비적인 운영이었다. 미친 듯이 뛰면서 압박하고 시카고의 공격을 방해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시카고도 비교적 수비 후 역습 전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 상대가 어떤 전략인지 쉽게 파악이 됐다.

상대가 완전히 내려앉아서 장 미쉘은 이전에 쓰던 포메이션이 아닌 4-3-3의 전술을 들고 왔다. 중앙에서부터 점유율을 가져가서 경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전술이었다.

“저기 5번이 누구지?”

“제이미 로드릭입니다.”

특히 센터백 로드릭은 수비진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적절한 위치에서 태클을 가하는 모습은 장 미쉘도 감탄할 정도다.

“프로필 좀 뽑아놓아 봐. 제법 탐 나는데.”

“네.”

일단 흐름은 생각대로였다.

상대는 맞고, 시카고는 계속 볼을 소유하며 두들겼다.

골이 터지면 비교적 쉽게 경기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빅 앤 스몰이라. 빌어먹을 영국 선수 출신이라더니.”

장 미쉘은 슬쩍 질리먼 감독을 바라봤다. 태생은 미네소타주이지만 거의 영국 2부, 3부리그에서 뛰었다던가?

그것도 30년 전쯤이니, 촌스럽다고 할 전술이었다.

말이 좋아서 클래식한 전술이지. 이제는 구닥다리다.

물론 선제실점을 당하면 뼈아프겠지만, 상관없다. 먼저 넣으면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장 미쉘은 이어지는 플레이에 흠칫했다.

페널티 박스 앞에서 공을 돌리다가 패스 미스가 발생했다. 수비진에서 로드릭이 별안간 튀어나오면서 공을 커트했다. 로드릭은 툭툭 공을 차다가 길게 패스했다. 패스가 빠르고 낮게 깔리며 왼쪽 날개로 이어졌다.

커트 후 패스.

단 한 번의 미스와 커트, 그리고 이어지는 패스로 공수가 완전히 바뀌었다.

시카고 선수들의 압박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윙어는 드리블조차 하지 않고 공을 길게 올렸다.

수비의 머리를 넘기는 로빙패스.

그리고 그 너머로 수비보다 더 빨리, 제퍼슨이 달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막아!”

장 미쉘이 황망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순식간에 라인을 부수고 들어가는 움직임은 결코 ‘빅맨’이 아니었다. 본래의 빅맨이라면 라인 침투를 하지 않고 버텨서 공을 지키고, 라인을 침투하는 ‘스몰’을 향해 찔러준다.

이것이 클래식한 공식이다.

장 미쉘은 그렇게 생각했고, 수비진에도 스몰의 침투 움직임을 조심하라고 지시했다.

한데 전혀 반대였다.

스몰, 산티아고는 라인 침투가 아니라 높은 활동량으로 수비의 시선을 빼앗았고, 그 틈을 타서 빅맨, 제퍼슨이 말도 안 되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라인을 부수고 침투해나갔다.

완벽에 가깝다고 할 정도의 라인 브레이킹.

축구의 교과서가 있다면 라인브레이킹의 전형이라고 실릴만한 움직임이었다.

더구나 그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공을 발에 달고 뛰는 게 아닌 것처럼.

육중한 곰이 표범처럼 미친 듯이 달리면 저런 모습일까.

수비수들 역시 이를 악물고 뛰었다.

공을 달고 달리는 것과 공 없이 전속으로 질주하는 것.

당연히 후자가 빠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수비수들은 간신히 뒤만 쫓은 채 억지로 몸을 갖다 대며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수비수들의 얼굴이 이내 새하얗게 질렸다.

제퍼슨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유령처럼.

“······!”

멀리서 보던 장 미쉘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직선으로 치고 나가는 질주.

수비수가 뒤와 왼쪽에서 몸으로 밀어붙이며 달려들자 제퍼슨은 몸의 방향은 정면을 그대로 본채, 상체만 좌우로 살짝 흔들다가 스텝만 우측으로 빠르게 밟으며 빠져나갔다.

저것이 가능한가?

몸의 방향이 정면을 향한 채, 정면으로 가속 중인 상황.

거기서 측면으로 사이드 스텝을 밟으면서 속도가 하나도 줄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저 몸놀림과 발재간이 아예 보지 못할 건 아니다.

상체를 뒤흔들고 사이드로 빠르게 움직이는 개인기는 세계적인 선수들이라면 보여줄 수 있다. 핵심은 속도다. 저 어마어마한 가속을 유지한채 사이드로 빠져나가는 몸놀림. 우아하기 짝이 없는 세심한 볼 컨트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세계적인 선수나 보여줄 법한 움직임.

저걸 여기서 보여준다고?

달려들었던 수비수들은 일제히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어깨를 강하게 밀쳤던 상대가 사라지자 기댈 게 없어진 것이다.

“대체······내가 뭘 본 거야.”

지켜보던 감독도 이럴진대, 안에서 경합을 벌이는 수비는 어떻겠는가?

“대체 뭐야!”

바닥에 나동그라진 수비수의 얼굴은 귀신을 본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팬텀 드리블도, 넛 매그(알까기)도 사포도 아닌 괴상한 움직임.

마치 눈앞에서 상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기분이다.

유령을 본듯한 느낌이다. 뒤늦게라도 일어나서 쫓을 엄두가 감히 들지 않았다.

골키퍼가 황급하게 뛰어나오며 각도를 좁히지만, 공은 이미 발끝을 떠났다.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발등에 공이 정확히 얹혔다.

일대일 찬스에서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제퍼슨은 마음먹고 크게 때렸다.

허벅지에서 터져 나오는 강력한 힘이 실린 강슛이 골키퍼가 반응조차 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그물이 찢어질 듯 꽂혔다.

**

“Gooooooooal!”

“아드으으으을―!”

“제대로 들어갔다!”

“고올! 우와아아!”

“리! 제퍼슨 리가 또 넣었어!”

“봤어? 저 움직임 봤냐고!”

“고스트 스텝(Ghost step)!”

“러닝백의 고스트 스텝이었어! 맙소사. 축구에서 저걸 쓴다고?”

풋볼을 즐겨보던 학생 몇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크게 떠들었다.

러닝백 특유의 사이드로 빠지는 직선 스텝이 축구장에서 등장한 것이다.

“으하하하! 우리 아들, 엄청나다!”

이성학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다.

혼자 수비진을 궤멸시키고 때린 슈팅은 그야말로 호쾌했다. 학교에서 응원 나온 학생들도 그 호쾌한 슈팅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축구지! 아들!”

몇 번의 패스였지?

수비수에서 윙어. 그리고 로빙패스.

고작 패스 세 번에, 오로지 제퍼슨의 환상적인 라인브레이킹과 말도 안 되는 무브먼트로 골이 나왔다.

시카고가 수십, 수백 번 패스하는 동안 유효슈팅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 혹시 제퍼슨 아버님이세요?”

“응? 어···그래!”

어려 보이는 고등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학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해요! 리가 풋볼팀에서 뛸 때 우리학교 스타였는데, 축구에서도 명불허전이네요!”

“으하하하. 그럼, 누구 아들인데.”

축구장은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 분위기라면, 나이를 떠나, 인종을 떠나서 말이다.

이성학은 어느새 옆의 고등학생과 어깨동무를 하며 아들을 응원했다.

**

“어땠어?”

“세상에. 리······그 귀신같은 움직임은 대체 뭐야?”

“러닝백이지. 이게.”

귀신을 보는 듯한 산티아고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러닝백이라면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사이드 직선 스텝.

고스트 스텝(Ghost step)이라고 불리는 기술이었다.

상대하는 라인맨들 관점에서 갑자기 선수가 유령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

제퍼슨의 놀라운 운동신경과 내가 가진 기교가 합쳐진 합작품이었다.

“리······너무 환상적인 움직임이었어. 클라스가 있었다고!”

산티아고는 방금 내 움직임 하나만으로 마치 열렬한 서포터즈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켰다.

클라스라.

슬쩍 상대팀 감독의 얼굴을 바라봤다.

빅 앤 스몰인줄 알고 산티아고의 침투만 조심하던 걸 노렸는데, 대성공이었다.

자, 그러면······어디 한번 클래식하게 놀아볼까.

“산티아고.”

“응?”

“이번에는 클래식하게 가자.”

“클래식?”

“클라스 있게, 클래식 말이야.”

알고도 막을 수 있을까.

단순히 뻥 차는 클래식한 축구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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