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제 좀 스포츠 같네 (2)
“토마스! 수비는 포기하고, 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침투해!”
세레모니로 경기가 잠시 중단된 사이, 질리먼 감독이 다가와 빠르게 경기지시를 내렸다.
공격형 미드필더인 토마스는 지금까지 내려앉아서 수비하느라 공격력을 뽐내지 못했다.
그런 토마스보고 공간 침투를 하라는 건, 완전히 역습 축구를 한다는 얘기였다.
“리.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방금 골로 확실히 내 가치는 증명됐다.
질리먼은 특별히 내게 어떤 롤을 부여하지 않았다.
내 맘대로.
프리롤이었다.
‘골치 좀 아플 거다.’
잔뜩 굳은 상대팀 감독의 표정이 고소했다.
아마 내가 타겟터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는 맞춤형 전술을 써서 효과를 본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리 쉽게 내 움직임이 예측되지 않을 거야.
토마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마스!”
“응?”
“내가 뛰어오르면 무조건 뛰어들어.”
“뭐?”
“알겠지?”
삑!
토마스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경기 재개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감독님이 원하시는 축구를 한번 해볼까.
질리먼 감독은 이전에 말했듯이 영국에서 축구를 한 선수 출신이다.
지금 현대축구 같이 복잡하고 수많은 수 싸움이 이뤄지지 않던 30년 전에 현역이었던 사람이고, 정통의 잉글랜드 축구를 경험한 사람이다.
킥 앤 러쉬(Kick and Rush)와 빅 앤 스몰(Big and Small)로 대변되는 아주 클래식한 전술 말이다.
양쪽 날개에 발 빠른 윙어가 직선돌파를 한 이후, 크로스를 올리면 빅맨이 공을 지켜주고 스몰이 해결해내는 전형적인 전통축구 말이다.
현대축구에서 보기 힘든 유형이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축구에서는 구닥다리 취급을 받기까지 한다.
질리먼은 어쩌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유형의 전술을 가지고 온 셈이다.
전술적 역량은 아무래도 록하크가 더 좋아 보였다. 세련되고 선수별 개인대응도 뛰어났다.
내가 봐도 록하크 감독의 전술은 더 유기적이고 잘 짜였다.
‘그렇지만 전술은 어떤 선수가 수행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질리먼이 꿈꾸는 클래식한 축구.
단순하지만 강력한 한방이 있는 전술.
감독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축구가 경기장에 펼쳐지면 감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번 만들어줄 생각이다. 진짜 클래식을.
“저놈을 막아!”
선제골을 넣자 수비수들의 압박이 집중됐다.
중앙 수비와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내 주위를 맴돌며 강하게 압박해왔다. 공이 오기 직전까지 몸싸움은 예사였다.
“큭!”
“뭔 놈의 몸이 이렇게 단단해.”
수비수들은 탄식과 중얼거림과 함께 밀려 나간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저들에게는 무슨 바위하고 어깨싸움하는 느낌이겠지.
그러던 와중 시종일관 두들겨 맞던 우리 수비들 사이에서 로드릭이 별안간 튀어나오며 공을 커트해냈다.
로드릭이 곧바로 양 날개로 멀리 찼다.
왼쪽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패스가 이뤄졌다.
윙어가 공을 받고 빠르게 달렸다.
이전 같았으면 압박에 무너졌겠지만, 수비들이 나를 신경 쓰느라 공간이 만들어진 틈을 윙어는 비집고 질주했다.
뒤늦게 수비수가 지역방어를 하며 압박을 시도하지만, 필요 없다.
윙어는 돌파가 막히자 볼 것도 없이 크로스를 올렸다.
다소 높고, 긴 궤적으로 올라온다.
“막아!”
뒷걸음질 치며 뛰어올랐다. 발뒤꿈치부터 종아리, 허벅지로 이어지는 근육이 탄력 있게 출렁이며 내 몸을 띄웠다.
양옆의 수비가 앞과 뒤에서 밀치면서 같이 뛰어오르지만, 중심이 무너지지 않는다.
“토마스!”
내가 뛰어오르는 순간과 동시에 2선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가 스퍼트를 올렸다. 빈공간을 그대로 파고드는 토마스의 발끝에 공을 떨어뜨렸다.
훙!
슈팅? 아니다.
토마스는 그냥 뛰었다. 뛰고 있는 도중에 공이 떨어져서 발등에 맞았고, 골키퍼가 채 반응도 아래 전에 구석으로 그대로 꽂혔다.
“고오오오오오올!”
“우와아아! 또 골이다!”
“골골골골!”
축구에 시큰둥했던 우리 학교 전교생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며 환호했다.
“으하하하! 토마스! 골이야 골!”
“우와아! 토마스!”
선수들이 다가와 어리둥절한 토마스를 그대로 덮쳤다. 토마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안았다.
“미쳤어, 리! 난 아무것도 않았는데, 그냥 뛰었는데, 공이 막······막 왔다고!”
“대단해, 리. 미친 어시스트야!”
“사실상 0.9골이지!”
“아냐, 토마스. 네가 잘 때렸어.”
토마스는 감동한 얼굴로 내 팔뚝을 꽉 잡았다. 잔뜩 상기된 얼굴을 보니 아마 나와 함께해야 골을 더 넣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했다.
“한 번 더 가자고, 토마스.”
“오케이. 알았어!”
점유율을 다 가져가면 뭐하나.
패스 세 번으로 골이 만들어졌는데.
잔뜩 붉어진 록하크 감독의 얼굴이 볼만했다.
**
“막아! 막으라고!”
록하크 감독은 목이 쉴 정도로 소리쳤다.
분명히 경기 양상은 압도적이다.
록하크는 시종일관 상대를 두들겼다. 밀어붙였다. 그러나 롱패스 두어번으로 이뤄지는 전술에 수비진들은 무너졌다.
로드릭은 수비진에서 굳건했다. 빠르고, 단단했으며, 높이 뛰었다. 심지어 로드릭은 간혹 공을 차고 올라오면서 양쪽 날개로 긴 패스를 뿌렸다.
그 긴 패스는 비교적 평범한 윙어들의 발에 떨어졌다.
크로스도, 속도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러나 수비수들이 모두 공격수 하나에 달라붙어서 윙어들은 마음껏 공간을 휘저었다.
“9번이 뛰지 못하게 막아! 점프 못 하게 방해하라고!”
제퍼슨 리라고 했던가.
미친 피지컬이다.
첫 골은 혼자 네이마르처럼 만들어내서 뒤통수를 치더니, 그다음부턴 전형적인 타겟형 스트라이커의 모습을 보여줬다.
문제는 알면서도 대응이 안 된다.
수비수 둘, 셋이 어깨를 밀치고 같이 뛰어올라도 공 한번 따내지 못했다.
저 괴물은 수비수가 아무리 달라붙어도 꿋꿋이 뛰어올라 공을 따냈다.
“으하아!”
“아깝다!”
방금도 머리로 떨궈준 공을 토마스가 아깝게 놓쳤다. 골대 옆을 스쳐나가는 슈팅.
말 그대로 심장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감독님. 공간이 너무 많이 나고 있습니다.”
“수비수들도 많이 흔들려요.”
“차라리 내버려 두죠?”
코치들이 조언했다.
수비수를 아무리 많이 붙여서 압박해도 이겨내지 못한다. 오히려 공격수 하나에 수비가 몰려 공간이 너무 만들어져 찬스를 계속 내준다.
코치들은 차라리 제퍼슨을 비교적 자유롭게 놓고 아예 공을 가지 못하게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수비가 안된다면 말이다.
록하크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압박해도 막아내지 못하면,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그러나 그건 악수였다.
경기의 흐름이 바뀌는 걸 느낀 제퍼슨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박스에서 싸워주고 등지고 뛰어오르는 플레이가 아니라, 하프라인까지 내려와 적극적으로 공을 소유했다.
압박이 느슨해진 제퍼슨은 그야말로 짐승이었다. 양 떼를 휘젓는 맹수였다.
공을 돌리며 두들기던 록하크 중원 사이로 별안간 짐승이 난입했다.
제퍼슨은 어깨를 들이밀며 그대로 공을 뺏어냈다.
동시에 힐킥으로 공을 뒤로 빼낸 후에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놓치지 마!”
제퍼슨의 스피드는 어마어마했다.
타겟터로 박스에만 머무르면서 힘을 비축했던 제퍼슨은 순식간에 최고속도에 이르렀다. 수비가 달라붙기도 전에 페널티 박스 모서리에 도달했다.
하지만 조력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석이라면 여기서 공을 끌면서 뒤따라온 2선들의 백업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제퍼슨은 그러지 않았다.
툭!
모서리에서 그의 드리블이 시작됐다.
우선 한명은 가볍게 알까기로.
다음 수비수는 상체 페인트로 속였다. 적당한 거리. 바로 슈팅을 때릴 수 있는 각도가 열렸다.
수비수가 황급히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한다.
“······!”
슈팅은 없었다. 슛 페인팅으로 수비의 태클을 유도한 것이다. 단숨에 세명의 수비를 벗겨낸 다음 골대 사각을 향해 아웃 프런트의 정확한 슈팅이 꽂혔다.
골키퍼가 차마 손을 뻗지 못하는 지점으로.
“Gooooooooooal!”
“고오오오올!”
“또 리다! 리가 또 넣었어!”
“리! 다 부숴버리라고! 넌 우리학교 최고 러닝백이야!”
“리이이이이이―!”
“우하하! 록하크 자식들, 리한테 쳐맞고 질질 짜겠네!”
벤치 뒤, 괴물 같은 풋볼 선수들의 우렁찬 함성은 록하크 감독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유소년 축구에 괴물을 넣는 건 반칙이잖아.”
**
세 번째 골이 들어가면서 수비수가 무너진다.
이제 도미노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 없는 유소년 축구에서 한번 무너져버린 멘탈은 쉽게 회복될 수 없다.
이제 참사가 시작될 것이다.
‘어쭈?’
내가 공을 잡자마자 수비수가 발을 들어 올린 위험한 태클을 가해온다.
이건 파울을 각오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담그겠단 마인드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잔뜩 흥분한 얼굴. 선을 넘은 거다.
본래 나는 유리몸이었다. 그래서 부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 태클을 피하는 방법은 도가 텄다.
그래도 피할 생각은 없다.
그럴 듯하게, 당해줘야지. 그럴 듯하게 말이다.
빡!
순간 경기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무언가 제대로 맞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기장을 휘저은 내가 쓰러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는 내 발목에서 나는 게 아니었다. 넘어지면서 태클을 한 수비수의 얼굴을 무릎으로 그대로 찍어버렸다.
삐익! 삑!
좋아, 심판이 뛰어오고 있어.
난 발목을 잡고 바닥을 뒹굴뒹굴 굴렀다. 진짜 고통스러운 기색으로. 자, 떠올려보자. 회귀 전에 다쳤던 경험을 표정으로 드러내 보자.
“저 개자식이!”
“저 자식이 리의 발목을 박살내려 했다고!”
“저 새끼 죽여버려!”
관중석에선 내 옛날 풋볼팀 동료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로드릭은 수비진에서부터 올라와 핏대를 세우며 욕을 했다. 심지어 감독님마저 벤치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어···음, 그냥 아픈 척 하는 건데.
“아니, 저 자식이 무릎으로 일부러 찍었다고!”
한데 록하크 감독은 제대로 봤나 보다.
억울한 기색으로 다가와 심판에게 소리친다.
그러자 우리 질리먼 감독이 불독이 되어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이! 뭐? 어린애 발목을 아작내려 했으면서 지금 무슨 개소리야!”
“개자식? 이 불독 자식아. 저 자식이 어딜 봐서 어린애야! 저자식이 무릎으로 일부러 찍었다고. 영악한 저 개자···억!”
퍽!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감독님은 진짜 불독 같았다.
침을 튀기며 소리치던 록하크 감독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린 것이다.
삑! 삑! 삑!
대기심까지 뛰어온다. 상황이 심각해졌다. 벤치의 코치진들이 일제히 서로 달라붙었다. 이거 난투극이라도 벌어지겠는데. 이제라도 일어나야 하나?
“감독님, 참아요, 감독님!”
“놔! 저 불독 자식이 날 때렸다고!”
“참아요, 감독님! 저기 관중석을 보시란 말입니다. 제발!”
“뭐?”
록하크 감독은 그 말에 코피를 흘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벤치 뒤 관중석에는 살벌한 표정의 풋볼팀이 있었다.
“죽여버릴 거야!”
“노망난 늙은이! 오늘 총은 갖고 왔겠지? 제발 갖고 있어라! 아니면 널 찢어버리는데 망설임이 없을 것 같거든!”
“갈비뼈를 부숴주마!”
“머리를 깨뜨려줄게. 록하크 늙은이!”
조세프를 비롯한 풋볼팀 선수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러댔다.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 2m에 100kg이 넘는 말 그대로 곰 같은 괴물들이 살인예고를 하자 록하크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결국, 의외로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질리먼 감독은 퇴장을 당하며 물러났다.
“리! 다 부숴버려!”
저런 주문을 남기고.
음.
내가 괜찮은지 물어보지도 않네.
영악한 불독 같으니, 내가 부상이 아닌 걸 본 거잖아?
**
“여. 불독이 한건 했군.”
“멋졌어. 내 새끼가 당했으면 그런 터프함은 있어야지.”
관중에 있던 헤딕과 레드먼 코치가 반겼다.
질리먼은 심통 난 얼굴로 그사이에 앉았다.
“잘했어. 질리먼.”
“뭐야, 자네도 왔어?”
풋볼팀의 코치가 캔맥주를 하나 건넸다.
그는 아쉬운 눈길로 방금 또 한 번 골대를 흔드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잘 해주라고. 저 괴물은 진짜 괴물이니까.”
“걱정마. 내 새끼처럼 생각할 거다.”
“그래. 방금은 진짜 스포츠 같았다. 축구가 샌님이나 하는 건줄 알았는데, 스포츠 같은 면모가 있긴 있었네.”
“뭐?”
“이게 스포츠지. 서로 치고받는 거 말이야. 거칠기 짝이 없는.”
“그렇지!”
“스포츠는 서로 치고받아야지!”
헤딕과 레드먼이 맞장구쳤다.
질리먼도 피식 웃었다.
하여간 마초들이란.
“이제야 좀 스포츠 같네.”
맥주가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