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반칙 아닙니까? (3)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축구에서도 기본기가 가장 중요했다.
수많은 선수와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기본기를 강조한다.
15살에 축구를 시작해서 38살까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게 바로 기본기였다.
지독할 정도로 트래핑을 했다.
숨 쉬는 횟수만큼.
토할 정도로 슛을 때렸다.
발목 힘이 약해 강력한 슛보단 내가 원하는 지점에 정확히 꽂아 넣는 슈팅 연습이었다.
진이 빠질 정도로 패스를 했다.
상대의 틈을 비집고 단숨에 공간을 가르는 패스만 죽어라 연습했다.
그게 나였다.
이학현으로서 익혔던 기본기는 괴물 같은 운동신경을 만나 순식간에 발끝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삼십 분째 리프팅을 하면서 볼을 실수로 떨어뜨린 적은 없다.
아마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로드릭보다 두 배는 더 공을 튕겼을 것이다.
삑!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던 코치가 휘슬을 불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두 모여라! 이 망아지 같은 것들아!”
축구도 샌님이라고 조롱받을 뿐이지, 사실 선수와 코치들도 거칠었다.
미국 특유의 마초 문화는 스포츠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코치들은 하나 같이 입이 거칠고 표정이 험상궂었다.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친선전입니다!”
“어떤 새끼야! 친선전이라고 한 놈이? 제임스, 이 개구리 자식아!”
개구리처럼 생겼다고 개구리라고 불리는 제임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친선전이면 어쩔건데? 어? 마음 놓고 대충 뛸 거야? 설렁설렁 뛸 거야? 걔들은 그래도 되지만 너흰 안돼! 너흰 걔들에 비하면 개구리만도 못하다! 록하크를 한번도 못 이겨봤잖아!”
“······.”
“친선이라고 여기지 마라. 결승전이라고 여겨라. 풋볼, 농구, 야구, 아이스하키 모두 우리 학교가 이겼지만, 축구만큼은 지금까지 이겨본 적이 없다. 친구들 보기 안 창피해? 엉?!”
“예! 코치!”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하자 코치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경기는 중요하다. 왜냐면 우리 학교가 이번 미네소타 유나이티드에서 주최하는 유스 컵대회에 초청받게 됐으니까. 이번 경기를 통해 컵대회에 나갈 선발진을 결정할 거다!”
“와아아!”
선수들의 얼굴이 일제히 달아올랐다.
미네소타 유나이티드는 미네소타주에 있는 유일한 프로축구팀이었다.
“잘하면 The Loons 유스팀 애들하고 붙을 수도 있겠는데?”
로드릭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었다.
“Loons(아비새:북미 오리종류)?”
“미네소타 유나이티드 별명이야.”
“프로팀이 주최하는 컵대회라는 거지?”
“맞아 리. 그러면 유스팀하고 직접 한판 뜰 수도 있고, 잘하면 스카웃 될 수도 있다고.”
아마 그게 가장 큰 이유겠지.
로드릭을 비롯한 선수들이 일제히 상기된 이유가 있었다.
미네소타 유나이티드.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내 영상과 프로필을 담은 비디오를 보냈는데 아직 연락이 없었다.
솔직히 아예 연락이 없는 건 의아했다.
아버지가 비디오 하나만큼은 사람을 골라서 기가 막히게 편집했거든.
누구나 혹할 정도로 말이다.
아마 아직 안 봤거나, 아니면 대충 이메일만 읽고 영상은 안 봤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번 경기가 중요하긴 하겠네”
“응?”
“록하크랑 붙는 거. 아마 감독님은 선발명단을 결정하실 생각인 것 같은데.”
룩하크 하이스쿨.
미네소타주 고등학교 아마추어 축구 대회에서 우승한 팀이었다.
우리학교 수준에서는 쉽지 않은 팀이다.
한데 로드릭의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네가 있잖아!”
“···너 왜 이렇게 살가워졌냐.”
“내가 그놈들이랑 작년에 8강서 붙어봐서 알아. 웬만하면 다 막았어. 할 만하더라고. 근데 아직도 너를 못 막겠어. 니가 설렁설렁 뛰는 게 보이는데도.”
로드릭의 눈동자가 또 승부욕으로 불타올랐다.
쯧. 또 타오르네. 하여튼 훈련장에서 하는 미니게임이 아닌 진짜 실전이다.
사실 어느 정도 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시기다.
‘프로팀으로 가야지.’
이젠 자신이 생겼다.
내가 가진 신체와 머리가 완전히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 느껴진다.
이번 컵대회가 내게는 점검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확신을 가지고 더 큰 무대를 바라봐야 했다.
아버지가 미국 프로리그의 축구팀 유스를 알아보고 계시긴 하지만, 미국의 축구리그는 아직 세계적으로 변방 취급이다.
물론 관중동원력과 시설 등은 유럽을 벤치마킹하면서 빠르게 발전 중이지만 그뿐이다.
축구의 무대는 유럽이다.
부모님에게 보여드릴 생각이다.
부모님은 아직 내 경기력을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하면 보여줘야 한다. 확신을 줘서 미국 무대는 내가 뛰기엔 좁다고 시위해야 한다.
그래야 유럽으로 갈 수 있다.
내가 피지컬 때문에 실패했던 유럽을, 다시 한번 도전한다.
이번에는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
별들이 뛰는 무대로.
**
윙어가 공을 몰고 박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슬그머니 올라오던 윙백, 제임스가 좌측 터치라인을 타며 빈틈을 빠르게 오버래핑했다.
박스로 파고든 윙어가 힘껏 공을 감아찼다.
박스에 있던 로드릭이 훌쩍 뛰어올라 골대 구석으로 향하던 공을 헤딩으로 걷어냈다.
멀리 날아가지 못한 세컨볼이 제임스의 발아래 떨어졌다.
“올려!”
완벽한 크로스 기회다.
제임스는 망설임 없이 크로스를 올렸다.
뻥!
제법 괜찮은 궤적으로 올라가는 크로스. 박스에 공격수가 파고들면서 뛰어올랐다.
“헉!”
뛰어오르던 공격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가렸다.
분명 수비와 동시에 떠올랐는데, 두 명이 떠오르는 타점은 차이가 컸다.
로드릭이 한 뼘은 더 높이 뜬 것이다.
당연히 공격수는 공을 따내지 못했다.
로드릭이 걷어낸 공은 다시 쇄도하던 미드필더에게 떨어졌다. 미드필더는 달려가는 속도를 유지한 채, 공을 잡지도 않고 때렸다. 팡! 터지는 소리가 제대로 맞았다.
“으라차찻!”
착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로드릭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드러눕다시피 발을 뻗으며 낮게 깔리는 공을 그대로 막아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질리먼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내가 알던 로드릭이 맞나?”
“기량이 갑자기 늘었는데요?”
“한 뼘을 더 뛸 수가 있다고?”
“그게···요즘 리하고 어울린답니다.”
“뭐?”
“훈련 끝나고 늘 리의 집에 가서 특훈을 한다는데요?”
질리먼은 코치의 말에 다시 로드릭을 바라봤다.
“으라차! 다 덤벼보라고!”
주말 경기에 나설 선수를 점검하기 위한 미니게임이다. 그 때문에 과하게 기합이 들어간 로드릭은 연이어 쇄도해오는 공격수를 어깨로 밀어내며 간단하게 볼을 따냈다.
오늘은 거의 철벽이었다.
“로드릭 체성분 한번 측정해봐. 허벅지가 좀 굵어진 것 같은데.”
“네, 감독님.”
“그리고 지금 리 상대편 공격수로 넣어.”
“로드릭 반대편 말입니까?”
이미 제퍼슨은 미니게임에서 3골 1도움을 기록하고 벤치로 들어가 있었다.
“로드릭이 리도 막을 수 있나 보고 싶긴 하군. 또 의기양양한 것보단 어느 정도 기 좀 죽여야지. 저러다가 록하크 애들한테 두들겨 맞으면 멘탈이 흔들릴거야.”
“기죽이다가 그냥 자포자기할 수도 있을 텐데요.”
“···리보고 적당히 하라 해.”
“네, 감독님.”
**
“으라차! 덤벼보라고!”
저거 성격이 원래 저랬나.
그냥 낯가림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하는 짓은 바본데.
신날 만할 거다.
원래 실력이 늘었다는 게 체감이 되면 운동이 즐거워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수비수가 저렇게 너무 들뜨면 예상치 못한 실수가 나온다. 지금이야 미니게임이지만, 실전에서 그러면 골치 아프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기를 죽여줄 필요가 있다.
아마 질리먼이 이미 뛸 만큼 뛰고 쉬고 있는 날 다시 투입하는 이유가 그것이겠지.
“제대로 기죽일게요.”
“적당히 해, 리.”
“네.”
코치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거의 2주일 동안 팀에 녹아들었다. 코치진의 신뢰는 물론이고, 내가 훈련에 임하는 태도를 보고 질리먼 감독도 날 인정하기 시작했다.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국내리그에서 비운의 천재 취급을 받으며 화려하게 말년을 불태울 땐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전은 아니었다. 축구 인생 20년 중에 내가 신뢰를 받은 건 일 할도 되지 않으리라.
지금 찾아온 이 신뢰에 보답하는 플레이를 보여줘야지.
‘미안하다, 로드릭.’
경기에 투입되자마자 기회는 찾아왔다.
‘무조건 리에게 공을 줘!’
미니게임을 하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들어간 팀에서 통용되는 말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끊어낸 우리 팀의 허리에서 공이 빠르게 날아왔다. 하지만 힘이 부정확했다. 왼쪽 터치라인 쪽으로 너무 멀리 날아간 것이다.
“아차!”
롱패스를 뿌린 토마스가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뛰고 있었다. 미드필더가 공을 때리는 순간과 동시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허벅지에서 불같은 파괴력이 일시에 터졌다.
“뛰어!”
“잡아!”
“공 아직 안 나갔어!”
로드릭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너무 길어서 라인을 벗어나는가 싶던 패스.
한데 내가 미친 듯이 속도를 붙이며 뛰어들자 수비들이 황급하게 따라붙었다.
굵은 허벅지에서 일시에 폭발해버리는 스피드는 대단했다.
공이 떨어지는 지점까지 고작 40m 남짓. 난 그 40m를 4초대로 끊는 주력을 가졌다. 더구나 발에 공을 안달고 단순히 달리는 거 아닌가?
“세상에, 공이 안 나갔어!
“저걸 잡아?”
터치라인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공을 잡았다.
공이 가볍게 발등에 안착했다.
그다음 이미 올라올 대로 올라온 속도를 줄이지 않고 볼을 길게 차며 쭉 뻗어 나갔다.
공을 치고 달렸다.
수비진이 완전히 붕괴한 시점이었기에 치달을 해도 무리가 없었다.
“달려들어!”
뒤에서 따라붙는 뜀박질. 내 어깨쯤에서 가쁜 호흡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도저히 날 따라잡지 못한다.
이미 속도를 올린 대로 올린 나는 종횡무진이었다. 결국, 앞에서 막아오던 수비가 파울을 각오하고 깊은 태클을 들어온다.
공을 가볍게 위로 띄우며 태클을 피했다.
웃차, 하나 벗겨냈고!
“무슨 놈의 반사신경이······.”
“저걸 순발력이라 합니까? 반사신경이라 합니까?”
“······.”
앞을 막아서는 건 로드릭뿐이었다.
그나마 정신 차리고 수비라인을 지키는 유일한 선수였다.
로드릭은 다시 한번 나와 일대일 승부를 겨루게 됐다. 이번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듯 그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막는다, 막는다, 막는다!”
기를 죽여놓으랬으니까, 어쩔 수 없지.
미안해.
접근해오는 로드릭에게 빠르게 달려들며 상체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로드릭의 동공이 같이 흔들렸다.
동시에 왼쪽 발로 공을 오른쪽으로 툭 쳤다. 오른쪽으로 빠지고 달려가려는 움직임.
로드릭은 짧은 시간 내 움직임을 읽었다. 순식간에 발을 쭉 뻗으며 경로를 막았다. 그 순간 오른쪽으로 치고 나갔던 내 오른발이 공을 다시 정중앙으로 돌려놨다.
아주 찰나의 시간. 완벽한 팬텀드리블로 로드릭이 단숨에 무너졌다.
“우와아아!”
벤치에서 환호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철벽으로 군림하던 로드릭을 벗겨냈다.
그다음은 뭐겠어?
뻔하다.
앞으로 튀어나오는 골키퍼를 보고 공을 툭 차올렸다.
골키퍼의 머리를 넘어 그물을 철렁이는 공.
머리위로 넘어가며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공을 보며 골키퍼는 바닥을 때렸다. 로드릭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 사이 우리 팀원들이 내 이름을 외치며 달려왔다.
“리! 리! 리!”
“대단해! 리!”
“그걸 어떻게 잡은거야? 다 나간 줄 알았는데!”
패스를 실수한 토마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뭐, 그렇긴 했지.
근데 놓칠 것 같지는 않았다. 공이 날아가는 속도를 봐서는 잡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토마스의 힘이 좀 약해서 패스 속도가 느린 탓이기도 했다.
난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줬다.
“패스 좋았어.”
토마스는 멋쩍게 웃으며 좋아했다.
난 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바닥에 넋을 놓고 앉아있는 로드릭을 바라봤다.
아까까지의 자신감과 기합은 어디 갔는지 축 처진 모습.
음······너무 기를 죽였나.
**
질리먼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하라니까···.”
“로드릭 완전히 낙심했는데요.”
“그렇지. 세 골이나 먹혔잖아.”
“그 세 골도 농락당했지. 팬텀 드리블에, 알까기에, 몸싸움에 완전히 나동그라지면서 공 못 지키고······.”
“로드릭이 못한 거야? 리가 괴물이야?”
한 코치의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코치진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질리먼 감독이 헛기침했다.
“저놈이 괴물이야.”
허망하게 앉아있는 로드릭을 일으켜 세우는 제퍼슨이 눈에 들어왔다.
“드록바처럼 타겟형인 줄 알았는데, 발기술은 네이마르라니. 심지어 공을 잡고 드리블하면서도 속도가 안 죽어.”
“···그거 반칙 아닙니까.”
“반칙이지. 우린 반칙이란 카드를 가지게 됐어. 록하크 감독놈의 표정이 볼만하겠군.”
질리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