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NBA? MLB? (2)
미국에서 축구에 대한 인식은 유난히 각박했다.
NFL, NBA, MLB, 아이스하키.
4대 스포츠에 밀려 위상이 낮았다.
어렸을 때나 하는 운동, 샌님 또는 여자들이나 하는 스포츠.
축구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었다. 축구를 바라보는 이런 시선 때문에 미국 여자축구가 세계최강이 된 것이기도 했다.
축구를 하겠다고 선언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황하신 눈치였다.
애당초 축구를 생각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는 어느 정도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태권도 선수 출신이지만, 그 나이대의 한국 아저씨들이 으레 그렇듯 축구 국대경기만 있으면 감독 빙의해서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니까.
어머니는 농구가 아닌 점에 다소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어머니는 NBA 팬이었다.
하지만 농구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스포츠는 아니다.
난 축구선수다.
내가 풋볼을 그만뒀다는 사실은 하루만에 학교 전체에 퍼졌다.
온갖 대학팀들이 넘보던 MVP 러닝백이 뜬금없이 그만둔 것이다. 그것도 이쪽 바닥에서 보기 힘든 아시안계 러닝백이 말이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학생들은 내 얘기만 했고,
특히 다른 스포츠 코치들이 두 눈을 번뜩였다.
“리, 오랜만이다.”
“헤딕 코치님. 안녕하세요.”
“어우, 여전히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니구나.”
농구팀의 헤딕 코치였다.
헤딕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이는 곱슬머리였는데, 악력이 장난 아니었다.
악수하는 데 일부러 힘을 주길래, 나 역시 힘을 줬다.
“역시. 악력 보면 농구공을 잡아야 한다니까. 안 그래?”
“하하······.”
“다 들었다. 풋볼 그만뒀다면서?”
“네.”
“그래. 풋볼 얼마나 거친 운동이냐? 특히 러닝백은 수명 짧은 거 다 알지. 264파운드(120kg) 넘는 거구들이 깔아뭉개는 게 러닝백인데. 잘 생각했다. 건강 생각하면 그것만큼 위험한 스포츠가 없지.”
헤딕의 말에 나는 그냥 웃었다.
한차례 말을 늘어놓던 헤딕은 다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나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래서 말인데, 농구팀에 들어올 생각 없니? 널 정식으로 스카우트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게 단호하게 끊지 말고. 너 정도 피지컬이면 당장 우리 팀에서 에이스 놀이할 수 있어. 공 던지는 거야 차차 연습하고, 키가 좀 작은 편이지만 서전트가 1m는 나오잖아?”
“죄송합니다, 코치님. 농구는 할 생각이 없어요.”
“리. 넌 NBA도 노릴 만해! 진짜야!”
“코치님, 전 농구 안 해요.”
“······.”
“그럼, 이만.”
헤딕 코치는 포기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마 속으로 무엇으로 유혹을 할까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어림도 없다. 농구는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
“여어! 리, 어딜 그렇게 바삐 가?”
헤딕 코치를 떨쳐내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가운데,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허, 이제 야구냐.’
야구팀의 코치였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레드먼 코치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네, 안녕하세요, 코치님.”
“음, 얘기는 들었다. 혹시 아직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죄송합니다만, 저 야구 룰도 몰라요.”
“아니, 아니 룰이야 차차 하면서 익히면 되고. 일단 공이나 한번 던져볼까? 아니면 배트라도 한번 휘둘러볼까?”
내가 선을 그으려고 하자 여유를 부리던 레드먼 코치는 황급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허.
대단하다 제퍼슨.
농구에 이어 야구팀 코치마저 매달릴 정도라니.
“리. 너 어깨를 보면 당장 공을 던져도 90마일(145km)은 그냥 찍을 거다.”
“던져본 적 없어요.”
“아냐, 확실해. 이 어깨를 봐. 이 근육을 보라고! 이 근육으로 던진 공을 맞으면 머리통이 깨질걸?”
“위험하네요. 전 제구 못합니다.”
“제구야 금방이지! 너 정도 운동신경이면 우리팀 1선발 투수 자리까지 금방 꿰찰거다!”
“죄송해요, 코치.”
“아, 그래. 홈런 타자가 되고 싶은 거냐? 하긴, 이 어깨로 한번 휘두르면 담장 넘기는 건 일도···”
“그만 가보겠습니다. 코치.”
“아니, 리! 잠깐만, 리! 잠깐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하자고! 제퍼슨!”
**
농구팀의 헤딕과 야구팀의 레드먼이 동시에 한 선수를 스카우트하다가 물을 먹었단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헤딕과 레드먼이 동시에 물을 먹었다며?”
“저기 지나가는 제퍼슨이잖아. 우리 학교 최고 러닝백!”
“우리 학교라니. 미네소타주 최고지. 저번 경기 봤어? 디펜스라인 혼자 때려 부수며 돌진하는 거?”
“그거 보고 다 소름돋았잖아. 세상에, 아시안계 러닝백도 말도 안 되는데, 그 러닝백이 MVP라니!”
“듣자 하니 대학교에서 이미 모셔가려고 하는데 왜 그만뒀을까?”
“맞아. 전액 장학금에, 이대로라면 대학리그서 승승장구하고 NFL 드래프트 지명은 따놓은 당상일 텐데.”
“그러게. NBA를 꿈꾸는 것도 아니고 MLB 가려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지나치는 학생들의 속삭임은 아주 잘 들렸다.
이것들이 뒷얘기를 하려면 좀 조용히 말하던가. 되게 큰 목소리로 떠드네.
하이틴 영화처럼. 너무 대놓고 쳐다보면서 얘기하는 거 아닌가.
하긴, 학생들은 다 비슷한 생각이었다.
내가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농구나 야구를 할 줄 알았겠지.
농구와 야구.
어쩌면 미식축구와 관련 없어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에서 진짜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스포츠가 대부분 풋볼이었다.
일례로 NFL에서 뛰면서 동시에 야구 선수로 MLB나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있었다. 서로 시즌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NBA 선수들의 의 평균 서전트 점프 기록은 83cm이다.
그러면 풋볼은?
NFL 선수들의 평균은 무려 99cm!
‘괴물들이 노는 리그.’
그것이 NFL이었다.
더 강력한 운동신경을 타고난 천재들이 가득한 곳이 바로 미식축구였다.
나는 그런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MVP 러닝백 유망주였다. 농구와 야구에서 탐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학교의 가장 구석지고 좁은 훈련장을 배정받은 스포츠팀.
축구(Soccer)였다.
심지어 축구팀은 여자축구팀에 기생하는 처지였다.
미식축구와 농구, 야구보다 부족한 대우였다.
“음? 너는···풋볼 선수 아니냐.”
“안녕하세요, 코치님.”
“어, 그래. 무슨 일이냐?”
“질리먼 코치님을 뵙고 싶습니다.”
“감독님을?”
“네.”
훈련 도구를 준비하던 코치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감독님은 지금 안에 계셔. 한번 가봐.”
“감사합니다.”
사무실 안에 들어가니 고집스러운 얼굴의 백인 중년인이 보였다.
흡사 불도그처럼 보이는 인상.
그가 바로 축구팀의 감독 질리먼이었다.
질리먼은 잉글랜드 축구를 경험해 본 선수 출신이었다.
“실례합니다. 감독님.”
“누구?”
“제퍼슨 리라고 합니다.”
“···아 풋볼팀의 러닝백?”
“네.”
“그만뒀다고 들었는데?”
질리먼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외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풋볼은 그만뒀습니다.”
“아쉬운 일이군. 풋볼팀 코치가 NFL에서 성공할 거라고 그렇게 장담하던 친구가 자네였던 것 같은데.”
“과분한 칭찬입니다.”
“그래, 여기는 무슨 일이지?”
“감독님, 저···축구가 하고 싶습니다.”
“······?”
질리먼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질리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풋볼을 그만두고 축구를 하고 싶다고?”
“네.”
“···축구는 시시할텐데?”
“시시하다면 전세계가 공 하나에 열광할 수는 없겠죠.”
“······.”
축구가 시시하다니.
웃기는 얘기지만, 여기선 통용이 됐다.
풋볼이 상대적으로 너무 거친 스포츠였으니까.
축구도 발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되고 머리가 깨지는 부상이 간혹 있다. 한데 미식축구는 더했다. 오죽하면 축구를 여자들이나 하는 스포츠라고 깎아내리겠는가.
본래의 제퍼슨이었다면 저 말에 동감하겠지.
근데 난 아니다.
축구가 시시하기만 한다면, 전 세계가 월드컵에 열광할까.
유럽에서 열리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지구 반대편에서 열광하며 시청할까?
한데 질리먼 감독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불독이었다.
‘뭐지? 내가 뭐 말실수했나?’
특별히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자네······풋볼 좀 했다고 축구가 우스워 보이나?”
“···네?”
“거기서 최고였다고, 축구가 쉬워 보여?”
질리먼은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아차.
내가 풋볼을 그만두고 축구를 하겠다는 걸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내 태도가 너무 가벼워 보였나.
“아닙니다.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풋볼이 아닌 축구를 하고 싶습니다.”
“허. 어이가 없어. 풋볼 선수들이 우리 애들보고 샌님이라고 조롱하던데. 자네도 그랬잖아?”
“···죄송합니다. 그건 순전히 제가 철없이 내뱉은 실언입니다.”
그랬군.
본래 제퍼슨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허영심 가득하고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제퍼슨은 대놓고 축구팀을 비하했던 적이 있었다.
질리먼 감독으로서는 축구를 비하하던 놈이 갑자기 축구를 하겠다고 나서니 화가 날 수밖에. 아마도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전 진심입니다. 테스트를 볼 기회라도 주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이럴 때 별거 없다.
바짝 엎드리고 진심을 보여야 한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한 표정을 짓자 질리먼은 한동안 날 노려보다가 의자를 박차며 일어섰다.
“그래, 한번 보자고. 축구가 대충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게 아닌 걸 깨달을 거다.”
음,
지금껏 축구를 하며 난 몸으로 때운 적이 없었다.
팬들은 날 이렇게 평했다.
오로지 머리와 센스로만 공을 차는 선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