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화 (2/258)

2. NBA? MLB? (1)

‘신이 기도를 들어주긴 했는데.’

뭔가 잘못 들어준 것 같다.

정신을 차린 지 열흘.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그것도 약해빠진 내 몸이 아니라 건장하다 못해 괴물 같은 신체의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진작 받아들였다.

신은 분명 내 소원을 들어줬다.

피지컬 하나만으로 다 부술 수 있는 축구선수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

‘축구선수긴 한데.’

그게 미식축구일 줄이야.

고개를 떨어뜨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큼직하기 짝이 없는 내 손바닥과 밑으로 이어지는 두꺼운 팔뚝은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제퍼슨 리.

나도 이름 한번 들어본 유명한 스포츠 선수였다.

제2의 하인스 워드라고 한국 언론이 떠들어댔으니까.

괴물이나 다름없는 피지컬, 엄청난 민첩성으로 공간을 지배하던 러닝백.

‘내가 그 제퍼슨 리라니.’

미식축구는 잘 모른다.

미국에서야 4대 스포츠에 속하고,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지만 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딱 하나 알고 있는 사실은, 미식축구 선수들은 하나같이 피지컬 괴물이라는 점.

그리고 제퍼슨 리는 그런 괴물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던 정상급 선수였다.

솔직히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인다.

샤워 후에 거울을 보면 이게 사람이 가능한 몸인지 싶었다.

182cm.

몸무게 94Kg, 체지방 11%.

온몸이 근육으로 끈끈하게 짜인 조각을 보는 듯 완벽했다.

진짜 놀라운 점은 이 체격에서 나오는 스피드였다.

바로 어제, 훈련장에서 달리기 속도를 재봤다.

40야드(36.6m) 4.58초

100m 10.94초.

놀랍다.

내가 뛰어보고도 놀라워 입을 열지 못했다. 한데 코치는 이 기록을 보고도 고개를 갸웃했다.

‘리.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론데?’

순간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기록이 별로라니?

정상급 축구 선수 중에 이런 기록을 보일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지금 나는 고등학생이 아닌가.

진짜 신은 피지컬 하나만큼은 완벽한 축구선수가 되게 해줬다.

그 ‘축구’가, 내가 생각한 ‘축구’와는 다르다는 점이 문제였을 뿐.

심장이 뛰었다.

유리몸, 종이 인형.

현역 시절 늘 날 따라다니던 꼬릿말들.

치명적인 단점을 이겨내기 위해 난 부단히 노력했다.

단점을 없앨 수 없다면 장점을 극대화하기로 했다. 해서 발재간을 연습하고, 화려한 개인기를 연마했다. 몸으로 부딪쳐오는 수비수를 피하려고 탈압박 능력을 길렀다. 내가 돌파할 수 없으면 팀원에게 기가 막힌 패스를 찔러 주는 연습을 했다.

경기장 전체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단지 내가 원했던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는 되지 못했을 뿐이지.

그렇지만 이런 몸이라면,

정말 이런 괴물 같은 피지컬이라면,

‘정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결단을 내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난 제퍼슨이 아니다.

미식축구에 미쳐서 NFL에서 정상으로 군림하던 제퍼슨이 아니란 얘기다.

축구에 미쳐서 죽는 순간까지 아쉬워했던 학현이 내 정체성이었다.

그런 내가 미식축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주위의 반응이 정반대였을 뿐.

고등학교 풋볼팀의 코치님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해할 수가 없는데. 왜?”

“죄송합니다. 코치님.”

“이유라도 알고 싶다. 넌 우리 학교 최고의 재능이야. 최고의 러닝백이란 말이다.”

“다른 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뭐? 설마 헤딕이 접근했냐?”

헤딕은 농구팀 코치였다.

“아니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 못 하시는 거 압니다. 하지만, 더 대화해도 제 뜻은 변함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라. 너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시한 대학교가 무려 여섯 개다. 플로리다 주립대는 코치님이 직접 연락했다. 플로리다뿐이냐? 오하이오, 앨러베마, 펜실베니아 다 전액 장학금으로 널 모셔가려고 안달인데!”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다.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이해시키기도 힘들었다. 난 단지 미식축구가 아니라 축구를 하고 싶었으니까.

칼같이 대화를 잘랐다.

여기 더 있어봤자 코치는 날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할 것이 자명했으니까.

“그간 감사했습니다. 코치.”

넋을 잃은 표정으로 허망하게 날 바라보는 코치의 시선을 등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경기장에는 장비를 착용하고 거칠게 서로 몸을 부딪치는 풋볼 선수들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거칠다.’

축구도 엔간히 거친 스포츠였지만,

미식축구를 코앞에서 보면 그 생각이 쏙 들어갈 정도다.

몸무게가 100~120kg 되는 거구들이 거칠게 부딪치는 장면은 흡사 전쟁처럼 보였다.

‘확실히 마초들한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어.’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미국의 광적인 미식축구 열기를 언뜻 이해가 됐다.

징, 징.

구식 스마트폰이 징하게 울렸다.

슬쩍 뜬 화면을 보니 어머니다.

제퍼슨의 어머니, 그러니까 앞으로 내 어머니였다.

코치가 전화했겠지.

‘후.’

코치와 결판을 짓는 건 어렵지 않다.

어쨌건 내 의사가 중요하니까.

하지만 가족을 설득하는 건 다른 문제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

“그 아이가 풋볼을 그만둔다고 했어?”

“코치한테 전화가 왔어.”

“허,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제퍼슨의 부친, 이성학은 아내 앨런 여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미식축구에 미쳐 살던 아들놈이 갑자기 그만두다니.

코치에게 전화를 받은 아내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식축구를 그만둔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가 걱정하는 점은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만둔다는 걸까? 부모가 되어서 그런 결단을 내릴 동안 아무것도 몰랐단 사실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저 왔어요.”

그때 문을 열고 제퍼슨이 들어왔다.

커다란 덩치. 마치 단단한 바위를 연상시키는 건장한 체격의 제퍼슨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성학은 그런 제퍼슨을 보고 느꼈다.

자신이 다음 올림픽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 저 표정이 아니었을까.

“코치님한테 들으셨죠?”

“음, 그래. 방금 막 들었다. 풋볼을 그만둔다고?”

“네.”

단호한 대답.

이성학은 느꼈다. 이미 결단을 내렸다고.

아내도 그 점을 느꼈는지 이성학과 시선을 교환했다.

아내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아들, 혹시 말해줄 수 있다면 엄마한테 이유를 말해줄래?”

아내 앨런 여사도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올림픽에서 100m 은메달, 400m 계주 동메달에 빛나는 기록을 지닌 선수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운동을 그만둔다고 할 때, 어떤 심경인지 잘 알았다. 아내는 아들의 심정이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재미가 없어요. 풋볼에 더 흥미가 없어졌어요.”

“음.”

“딱히 특별한 이유는 아니에요.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것처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너무나 단호한 어조에 부모는 제퍼슨을 가만히 쳐다봤다.

혹시 풋볼팀에서 동료들하고 트러블이 있나?

하지만 제퍼슨은 팀내 에이스를 넘어 수많은 명문대가 주목하는 러닝백 유망주였다. 또 풋볼팀의 코치는 뛰어난 코치였다. 누구를 차별하고 부조리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이성학을 쳐다봤다.

“아버지, 아버지도 원래 태권도를 하고 싶어서 했나요?”

“음, 글쎄.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러다가 재능이 있다고 그러더라. 그렇게 태릉에서 운동하다가 올림픽도 나갔지.”

“행복하셨나요?”

“글쎄. 운동이 행복하진 않았지. 여기 네 엄마를 만났던 올림픽에서만큼은 행복했지.”

아들과 이런 진지한 얘기를 처음 하는 이성학은 멋쩍은 표정이었다.

“저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풋볼을 계속하면 돈을 벌고, 유명해질 수는 있겠지만 행복할 것 같진 않아요.”

“음······.”

이성학은 침음을 삼켰다.

슬쩍 아내를 보니 그녀의 표정도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

서로의 시선이 오갔다.

제퍼슨이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였다.

‘단단히 마음먹었어.’

‘왠지 철이 좀 든 것 같은데?’

‘그러게. 그냥 몸만 큰 어린애였는데.’

‘하지만 풋볼을 그만두면 얘가 뭘 하려고······.’

‘당신도 알잖아. 좋아하는 운동이 아니면, 그건 운동이 아니라 고문인 거.’

태권도 올림픽 메달리스트 이성학.

미국 단거리 육상 메달리스트 앨런 여사.

부부 모두 이름을 날렸던 운동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더는 제퍼슨을 설득할 생각을 접었다.

행복하지 않으면 운동은 고문이 될 뿐이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나?’

다소 아쉽긴 하다.

미식축구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아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내 이성학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아직 고등학생이다.

인생이 시작되고 있는 지점에서 진로가 바뀌는게 무슨 문제랴.

“그래, 아들아. 네가 고심한 거니까 우리 부부는 더 왈가왈부하지 않으마. 근데···풋볼을 그만두고 뭘 할 생각이니?”

진로가 걱정 안 된다면 거짓이리라.

더구나 아들은 전형적인 운동선수였다.

왜 있지 않나.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운동잘하는 에이스 선수.

허영심 많고 자만심도 있고,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그리고 조금은 멍청한.

‘멍청한 건 아니야. 하지만 공부에 영 소질 있는 놈은 아닌데.’

부모의 운동신경을 고스란히 받았지만 공부머리까지 물려받은게 아들이었다.

“다른 스포츠를 할 거예요.”

“스포츠?”

역시, 공부는 아니구나.

하기야 미식축구 출신 선수가 다른 스포츠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미식축구는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괴물들이 하는 스포츠였으니까.

“농구? 야구? 아니면 육상?”

“하긴, 우리 아들이면 농구도 잘할 거야. 서전트가 1m나 되는데요. 좀만 노력하면 NBA도 될 거라고 엄마는 생각해.”

“야구도 괜찮지. 지금 당장 공 던지면 145 이상은 그냥 찍을걸? 제구가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NBA? MLB?”

“음, 축구(Soccer) 하려고요.”

“응?”

“어?”

아들은 머쓱하게 웃고는, 더 확실한 어조로 대답했다.

“축구요. 발로 하는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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