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nyway, Happy Sexy Valentine's Day
진은 달달한 초코 냄새에 웃다가, 셔츠의 소매를 두어 번 정도 접어 올렸다. 그가 숟가락을 들기가 무섭게 다른 일행들도 자리에 앉았다.
“어? 진 코치님 거는 뭐예요? 뭐야, 나는 그 토핑 못 봤는데!”
“뭐야? 뭔데요? 어? 그러게? 코치님 요거트는 마시멜로우가 뭐 그렇게 많아요?!”
케이트와 조안나가 물었다. 두 사람은 방금 막 받아 온 자신의 요거트 그릇과 진의 그릇을 번갈아 바라봤다. 표정이 꽤나 불만스러웠다. 진도 두 사람의 그릇을 힐끗 봤다가, 제 그릇을 살폈다. 왜? 비슷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케이트는 토핑 담아 주는 곳을 돌아봤다. 바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그들이 앉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코치들끼리 몇 번 왔던 곳인데, 그때마다 아리송했던 게 지금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르바이트생이 진 코치를 좋아하는 것 같아.”
“네?”
“그렇잖아요! 이거는 심지어 토핑 바에 있지도 않은 거라고요. 이거, 이 오레오 쿠키요! 레드벨벳맛 오레오 쿠키!”
“에이, 그냥 자주 오니까 그렇죠. 그리고 두 분 거도 토핑 많아요. 저랑 비슷해요!”
“아니라니까요! 저번에도 진 코치님 것만 점보 사이즈로 업그레이드 해 준 거 까먹었어요?!”
케이트의 말에도 진은 그냥 허허실실 웃을 뿐이었다. 진이 케이트와 조안나를 처음 만난 게 스물여섯 살. 그 뒤로 함께 일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진은 충분히 알았다.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때에는 그냥 웃고 마는 게 최선이다. 이미 두 사람이 결론을 내린 거라, 제 말은 아무것도 들어 주지 않을 거였다.
“진 코치 결혼한 거 알 텐데, 상관없다 그건가? 대단하네. 자신 있다는 거잖아. 아닌가? 진 코치님 못 알아봐서 그런가?”
케이트가 금발의 머리를 뒤로 질끈 묶으며 말하자, 조안나가 답했다.
“못 알아본 거겠죠. 생각해 봐요. 케이트 같으면 여자친구가 제니퍼 로렌스나 마고 로비인 남자한테 대쉬할 수 있어요?”
“음……. 못 할 건 또 뭐야?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케이트가 능글맞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 그리곤 뇌쇄적인 눈빛을 해 보였다. 그 모습에 조안나가 꺄르륵 웃다가 사진 찍는 시늉을 했다. 아, 마고 로비 안 부럽네! 언 놈인진 모르겠지만 대쉬하러 가요, 우리!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진은 요란한 둘 사이에서 아무 말 없이 요거트를 퍼먹었다.
한참 장난을 치던 조안나가 진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짓궂은 미소였다. 그녀가 짧은 갈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진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곧 발렌타인데이라서 점점 더 대쉬의 강도가 세지는 것 같은데. 진 코치님은 저기 저 아르바이트생 어때요? 키도 크고 몸도 좋고, 괜찮은데요? 오늘 나갈 때 갑자기 코치님을 불러 세울 수도 있으니까 빨리 마음의 준비 먼저 해요.”
“네? 조안나, 저 결혼한 거 까먹으신 건 아니죠?”
“에이, 원래 결혼하고 나서 바람도 피우고 그러는 거예요. 누가 한 사람이랑만 자요! 100세 시대라는데, 한 사람만 만나면 지루하잖아요!”
“저 놀리는 건 그만하시고 얼른 드세요. 점심시간 곧 끝나요.”
진이 조안나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그 표정에 조안나가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케이트는 요거트와 토핑을 슥슥 섞으며 말했다.
“아, 예전에는 놀리면 막 어쩔 줄 몰라 해서 귀여웠는데. 요즘엔 안 그래서 좀 섭섭하네!”
“두 분 덕분에 저는 이제 웬만한 거엔 당황하지도 않아요. 면역력이 생겼나 봐요.”
“안 돼요. 돌아와요, 코치님! 전처럼 얼굴 빨개지는 거 보고 싶어요!”
“조안나, 전 이제 그럴 나이가 지났어요…….”
“에이,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진 코치 실망이네!”
“실망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언제까지 바보멍청이 같을 순 없잖아요…….”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나처럼 두 사람과의 대화는 시끌벅적했다. 그게 퍽 유쾌하고 즐거워서 그가 피식하니 웃었다. 진은 이럴 때면 나디아랑 알렉스가 보고 싶었다. 나디아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얘가 여우같은 새끼랑 살더니 진짜 여우 새끼가 다 됐네. 얘를 진짜 어떡하면 좋아! 예전의 귀염둥이로 돌아와, 진. 제발!
그녀는 지구 종말 뉴스를 들은 사람처럼 절망적으로 보였다. 진은 그때를 생각하다가 또 한 번 웃었다. 언제 그랬더라. 아마 나디아가 무슨 말을 했는데, 제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던 때였을 거다. 웃는 게 요상해졌다며 나디아는 진저리를 쳤었다. 그 망할 새끼처럼 웃지 말라면서 제 얼굴을 쿠키 반죽처럼 주무르기도 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진은 조안나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진 코치님은 남편한테 발렌타인데이 선물 뭐 줄 거예요?”
“오, 그러게?! 뭐 줄 거예요? 에이든 테일러면 딱히 뭐 줄 것도 없지 않아?”
“아, 저희는 기념일 선물은 웬만하면 생략해서요. 선물 대신 저녁을 맛있게 먹거나, 그냥 그렇게 챙기고 있어요.”
그 말에 케이트가 충고하듯이 대답했다.
“진 코치가 뭘 모르네. 원래 선물은 안 줄 것처럼 해 놓고 줘야 되는 거지. 기대 하나도 안 하고 있다가 받아야 기분 좋은 거 몰라요? 이번에 뭐 하나 해요!”
“아, 그런가요…?”
“당연하지! 흠, 에이든 테일러는 뭘 줘야 좋으려나…….”
중얼거리던 케이트가 입맛을 다셨다. 하긴, 에이든 테일러는 물질적인 걸로는 부족한 게 딱히 없을 테니, 두 사람의 발렌타인데이 선물은 여러모로 어려웠다. 아니지, 오히려 그래서 쉬울 수도 있다. 서로를 주고받으면 되지, 뭐. 진 코치 머리에 리본 하나 달아 주면 딱이겠네.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조안나가 음흉하게 웃었다. 두 사람 다 하는 생각이 그게 그거였다. 조안나는 제가 더 들뜬 낯으로 말했다.
“에이, 뭘 고민해요, 케이트! 제일 좋아하는 걸 줘야지.”
“조안나 코치님께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답을 알려줬네요, 진 코치.”
“네……?”
진이 어벙하게 눈을 깜빡이거나 말거나, 케이트는 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입에 물곤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입에 숟가락을 문 채로, 웅얼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근데 여러모로, 좀, 에이든 테일러는 좀…….”
케이트의 머릿속에 빨간 리본을 묶은 진 헤니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진 코치가 리본을 달면 예쁠 것 같긴 한데, 에이든 테일러는 리본 하나로 만족할 사람 같지가 않았다. 리본으로 다른 데를 같이 묶으면 모를까. 케이트가 숟가락을 얼굴 옆에 들고 휘휘 휘둘렀다. 허공에서 적당한 단어를 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좀 화려하잖아요. 뭐, 그러니까 외모든, 뭐든. 무난한 걸로는 취향 맞추기 힘들지 않아요? 선물을 해도 평범하면 좀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어, 그러니까 내 말은, 뭐든 좀 일반적인 걸로는 성에 안 차지 않을까 싶어서.”
“네……?”
진은 여전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말간 까만색 눈동자가 꿈뻑였다. 그 얼굴에 케이트는 괜히 죄책감이 들어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진 코치. 못 알아들었으면 말아요.”
“아, 좀 더 정확히 말을 해 주시면…….”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내가 주책이었네. 나는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지!”
케이트가 잊으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조안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슬쩍 진의 기색을 살폈다. 진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여서, 그녀는 또 푸스스 웃었다. 아까 전에는 바보가 아니라더니 여전히 바보 맞았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재미난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아쉬움을 삼켰다. 조안나는 토끼 같은 낯을 하고 있는 진에게 말했다.
“얼른 먹어요, 코치님. 코치님 말대로 점심시간 다 끝나가요.”
“아, 네.”
부지런히 요거트를 퍼먹던 진은 케이트와 조안나의 그릇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곤 아직 섞지 않은 오레오 쿠키를 두 사람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두 사람이 진을 바라보자, 그가 방긋 웃었다. 드세요. 진이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안나는 꺄르르 웃었고, 케이트는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괜찮은 것들은 왜 다 게이인 거야? 그녀는 이 법칙 아닌 법칙을,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식타임이 끝나고 세 사람이 겉옷을 입을 때였다. 세 사람의 테이블 위로 슥, 하니 종이 하나가 올라왔다. 점퍼를 주섬주섬 챙겨 입던 진이 그 종이를 내려다봤다. 검은 눈이 의아함으로 꿈뻑거렸다. 그가 시선을 올리자 살짝 긴장한 기색의 갈색 눈이 보였다. 조안나의 말에 의하면 ‘키도 크고, 몸도 좋은’ 남자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환하게 웃었다. 남자는 그 뒤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종이를 들어 올린 건 조안나였다.
“유니폼 말고 다른 차림으로 만나고 싶어요, 라는데요, 진 코치?”
“네?”
“거봐! 괜찮은 것들은 죄다 게이라니까!”
“연락처 적혀 있네요. 남편 출장 갔다고 했잖아요! 딱이네요!”
진은 쪽지와 조안나, 케이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두 여자의 눈에 짓궂음이 넘실댔다. 조안나가 흐뭇하게 웃으며 쪽지를 접었다. 그 뒤에는 진의 점퍼 주머니에 쑥 하고 집어넣었다.
“혹시 모르니까 잘 챙겨요!”
“아니, 저는, 이게…….”
“안 돼요! 잘 챙겨 가요!”
“네? 아뇨, 전 괜찮은……!”
“나중에 후기 말해 줘요!”
진은 목부터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가 허둥거릴수록 두 사람의 웃음이 커졌다. 역시, 진 헤니는 이 맛에 놀리는 거였다.
***
집에 돌아온 진은 점퍼를 소파에 툭하니 걸쳐 놨다. 지친 기색이었다. 그 위로 풀썩 눕자, 아담이 기다렸다는 듯이 진에게 올라와 엎드렸다. 사랑스러운 금빛 털을 슥슥 쓸며 진이 통화를 이어갔다.
“나? 나는 아무 일도 없어, 에이든.”
[ 근데 목소리가 왜 그렇게 안 좋아. ]
“집이 넓은데 혼자 있어서.”
투덜거리는 소리에 에이든이 낮게 웃었다. 진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웃을 일이 아니야! 왜 그렇게 출장을 자주 가……!”
[ 그러게. 그냥 회사를 그만둘까 봐. 그게 낫겠어. ]
“그래, 회사를 그만두자. 새로 회사 세우고 그러는 거 다 그냥 다른 사람더러 하라고 해.”
[ 알겠어. 내일 당장 그만둘게. 앞으로 너한테 빌붙어 살면 되는 거지? 나 먹여 살려 줄 거야? ]
“당연하지.”
진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에이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든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흠……. 식비를 감당하기가 힘들 텐데. ]
“뭐야, 지금 나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는 거야?”
[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난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비슷한 대화를 언제 한 번 했던 것 같은데, 그치? ]
에이든이 능청맞게 대꾸했다. 진은 가늘어진 눈으로 핸드폰을 한 번 노려봤다. 끙, 하는 소리를 삼키던 진이 슬쩍 말했다.
“여태 벌어 둔 돈으로도 내 식비가 감당이 안 될까? 모아 둔 돈 많잖아…….”
의기소침한 진의 말에 에이든은 눈물까지 닦으며 웃어야 했다. 에이든과 통화할 때의 진은 밖에서와는 사뭇 달랐다. 진은 밖에서 어른스러워지는 만큼 제 연인에게 더 칭얼대는 것 같았다. 칭얼대는 쪽이 본모습과 더 가까운 건 당연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진이 제게만 아이처럼 구는 게 좋았다. 어린 시절, 유리무덤을 독차지했던 때의 기분과도 비슷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제게는 열어줬던 곳. 우월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에이든이 흐뭇한 웃음을 그칠 줄을 모르자, 진이 말했다.
“그만 웃어! 나 진지해……!”
[ 나도 많이 보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최대한 빨리 갈게. ]
“그래서 언제 올 건데…….”
[ 진, 그런 목소리로 빨리 오라고 하면 나 되게 곤란하고 힘들어. ]
난처함 가득한 목소리에 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상체가 깊은 숨으로 들썩이자 아담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제 아빠의 뺨에 고개를 기대어 누웠다. 진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꼬옥 안아줬다. 아담이라도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발렌타인데이 전에는 올 거지?”
[ 당연하지. ]
“알겠어…….”
[ 나 없다고 또 피자 시켜 먹지 말고. 제임스한테 부탁해서 냉장고 채워 놨으니까 하나씩 꺼내서 데워 먹어. 햄버거도 안 돼. 초코바 같은 걸로 때우는 것도 안 돼. 프링글스는 더 안 돼. 집에 가면 음식 얼마나 챙겨 먹었는지 다 확인할 거야. ]
“에이든, 내가 매번 말하지만 넌 잔소리가 너무 심해. 나디아보다 심해!”
[ 잔소리를 안 하게 하면 돼, 진. ]
에이든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진은 정말 대단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뒤에는 외로움에 축 쳐진 몸을 일으켰다. 음식을 채워 놓고 갔다니,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부엌을 향해 걷자 아담이 그 뒤를 따랐다. 슥슥, 하는 실내용 슬리퍼의 소리와 탁탁, 하는 강아지 발톱 소리가 울렸다.
냉장고를 열자 많은 플라스틱 통이 보였다. 음식을 소분해 넣어 둔 거였다. 진은 제일 앞에 있는 통 하나를 열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레드벨벳 케이크 하나가 있었다. 흰색 크림치즈 위에 꽂혀있는 귀여운 초콜릿이 진에게 인사했다.
「Happy Valentine's Day!」
“발렌타인데이 선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진이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케이트의 말이 맞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쁨은 언제나 배가 되는 법이다.
다시 한번 슥슥, 하는 발소리가 집을 울렸다. 발걸음 소리가 결연했다. 진은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뭘 준비하는 게 좋을지, 믿음직스러운 구글에게 묻기 위해서였다. 그는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으로 노트북을 켰다. 진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발렌타인데이 선물’을 검색했다. 화면 속, 제목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오래된 연인 혹은 부부를 위한 HOT SWEET SEXY 발렌타인데이 선물!」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눈이 도르륵 굴러다녔다. 칼럼을 읽던 그는 별안간 콧노래를 멈췄다. 검은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다들 대체 뭘 선물하시는 거예요?! 진의 검은 눈동자가 소리쳤다. 화면을 보던 그가 노트북을 급히 닫았다. 그 뒤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눈썹을, 그리고 뜨끈하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마지막으로 턱과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선물을……. 저런 거는……! 저런, 저런 거를 다들…….”
허공을 헤매던 검은 눈동자가 다시 힐끗 노트북을 바라봤다. 그의 손끝이 다시 조심스레 노트북으로 향했다. 검은 눈은 화면 속 내용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순진한 마음에 일어난 불순한 호기심은, ‘당황스러움’따위가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제시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에이든의 얼굴을 바라봤다. 출장 5일째, 에이든의 얼굴은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제시는 어이가 없었다. 6일째가 되면, 비유가 아니라 정말 활자 그대로 썩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표정이 어마어마했다.
에이든은 휙, 하고 신경질적으로 보고서를 넘긴 뒤엔 서걱거리며 만년필로 뭔가를 썼다.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양새를 보니, 만년필로 누구 하나 죽일 기세였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서걱서걱거리는 게, 제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앞에 앉아 있는 에이든에게 말했다.
“너 진짜 적당히 안 할래?”
“뭐요. 불러다가 5일째 잡아 놨으면 이 정도는 감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앞으로 일주일 더 잡아 둘 건데, 그 전에 경호원이라도 고용해야지 안 되겠네. 만년필에 찔려 죽기 전에.”
“뭐? 일주일?”
일주일 더, 라는 말에 에이든이 인상을 구겼다. 말도 안 된다는 그의 표정에 제시가 들고 있던 볼펜을 내던졌다. 사실 에이든만 짜증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제시도 마찬가지였다. 제시는 며칠 째 쪽잠을 자면서 일한 상태였다. 그녀의 성격은 평소에도 거지같았는데, 지금은 거지 왕초 수준이었다. 거지는 배만 고프지, 지금의 제시는 잠도 고프고 배도 고팠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지금 그녀는 거지보다 처지가 못했다. 제시가 에이든만큼이나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너는 회사 인수하고 합병하는 게 애들 장난인 줄 알아?! 너는 애가 철이 든 것 같다가도 가끔씩 왜 이러니?”
“일주일? 개소리하지 말아요. 나 발렌타인데이 전에 갈 거예요. 그냥 그렇게 알아요. 해야 되는 일은 그 전에 다 할 테니까 걱정 말고요.”
“지금 발렌타인데이가 문제가 아니…….”
“나한텐 발렌타인데이가 문제예요. 그 전에 오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가. 지금 좆도 아닌 회사가 문제야?”
에이든이 뒤로 멀찍이 기대어 앉았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는 여태 휘갈겼던 문서들을 옆으로 빼두고, 나머지 종이를 플라스틱 화일에서 꺼냈다. 푸른 눈이 집요하게 활자를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처음부터 저렇게 검토했으면, 제시의 200달러짜리 사무용 볼펜이 책상 밖으로 내던져져 박살날 일도 없었을 거다. 꽤나 아끼던 거였는데, 젠장. 그렇게 생각하던 제시가 일렁이는 분노를 내리눌렀다. 제시는 제가 신경질이 나는 만큼, 앞에 앉은 새끼 역시 기분이 더러워지길 바랐다. 그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얘, 네가 출장을 오래 가 있어야 걔도 다른 사람도 좀 만나고 그럴 거 아니야. 원래 다 그런 거 모르니? 애 숨구멍을 만들어 줘야 같이 오래 살지.”
이번엔 에이든이 만년필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다른 사람’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가 보고 있던 서류에 검은색 생채기가 났다. 만년필의 촉이 긁고 지나간 자리가 엉망이었다. 그는 화를 참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가, 코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팔찌와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터지려는 쌍욕을 꾹 참은 에이든이 말했다.
“제시, 내가 결혼 전에도 제시 말 들었다가 아주 크게 낭패를 볼 뻔한 적이 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열 뻗치니까, 앞으로는 진이랑 나 사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게 왜 내 잘못이니? 그런 말 몇 마디에 흔들리는 네 마음이 잘못이지. 아직도 그렇게 자신이 없니, 넌?”
제시의 한쪽 눈썹이 뾰족한 각도로 올라섰다. 에이든이 답했다.
“예, 없어요.”
목소리가 낮고 진중했다. 여태 짜증과 신경질이 그득했던 푸른 눈이 흐릿한 색채로 가라앉았다. 제시는 한순간에 작게 위축되는 그를 보며 인상을 썼다. 에이든이 만년필을 다시 주워들며 말을 덧붙였다.
“자신 없다고요. 가끔 자신 있는 척하긴 하는데, 아마 평생 그 사람 앞에선 자신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 진짜 다 내팽개친 다음에 가 버리고 싶어지니까. 사실 지금도 많이 참고 있는 거예요.”
그 뒤에는 슥슥, 거리는 펜촉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의 눈썹이 우울한 각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제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봤다. 철이 든 건지, 안 든 건지, 참 애매하단 말이야. 그런 생각과 함께였다.
제시가 생각하기에, 에이든 테일러는 전만큼 놀리는 맛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진중해진 면이 있어서 낯설기까지 했다. 그는 전처럼 대책 없이 굴거나, 즉흥적으로 제 기분만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못나고 비루한 점을 묵묵히 인정하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바락바락 성을 내야 재미있는데. 제시는 아쉽다는 듯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다 말했다.
“얘, 너는 그냥 중간쯤 마무리되면 가.”
저렇게 말하는데, 뭘 어째. 제시가 혀를 차며 생각했다. 그녀는 뻗대고 재수 없는 낯을 짓밟는 게 좋았지, 저렇게 처연하고 불쌍한 얼굴엔 취미가 없었다. 에이든이 떫은 표정의 제시에게 말했다.
“왜요. 최대한 빨리 다 하고 간다니까요. 발렌타인데이 전에만 가면 돼요.”
“얌전히 보내 줄 때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제시가 펜 트레이에서 다른 펜 하나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포기했다. 그냥 다 내가 하면 돼. 저 새끼 없을 때도 혼자서 잘만 했어. 제시가 생각했다. 에이든은 그녀의 꿍꿍이를 계산하기 위해 제시를 살폈다. 그 눈빛에 제시가 버럭 소리지르듯 말했다.
“얘가 이젠 보내 줘도 지랄이야!”
“당신이 나를 그냥 보내 줄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
“그래. 빨리 가서 네 남편이 진짜로 다른 사람이랑 바람피우는지 아닌지 확인하라고 일찍 보내는 거야. 됐니?”
“하……. 그 씨발, 다른 사람이라는 소리 좀…….”
에이든이 다시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 뒤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커다란 손이 관자놀이와 눈썹을 꾹꾹 눌렀다. 에이든은 피곤하고 짜증나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에 빨리 서류를 보고, 하루라도 일찍 진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발렌타인데이. 그 전에 가야만 했다. 에이든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들여다봤다. 한동안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는 펜촉 소리만 들렸다.
그 뒤로 에이든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에만 매달렸다. 제시가 뭐라 말하거나 속 뒤집히는 소리를 해도 대꾸 하나 없었다. 나중엔 제시도 그에게 장난치기를 포기했다. 에이든은 잠자는 시간을 몽땅 쪼개고, 밥 먹는 시간을 전부 아꼈다. 아끼지 않은 시간은 진과 통화하는 시간뿐이었다. 그는 반송장 꼬라지로 일한 덕분에 대부분의 일을 3일 안에 끝낼 수 있었다. 발렌타인데이가 2일 남은 시점이었다.
그는 예정보다 빠르게 비행기에 올라탔고, ‘주문인: 진 헤니’라고 쓰인 택배 상자도 예정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좋은 마음으로 구매했으나, 그 물건들은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진을 질질 끌고 가는 중이다. 물건의 주인인 진은 아담과 저녁 산책을 하느라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인생은 가끔씩 불행을 일시불로 긁어간다. 행복과 즐거움은 다달이 조금씩, 할부로 가져오는 주제에 불행은 달랐다. 조금씩 그 크기와 재질이 다른 불운들은 야속하게도 한꺼번에 계산된다. 수면 부족 때문에 신경이 사포처럼 까칠해진 에이든 테일러, 하필이면 지금 도착해서 오해의 불씨를 당길 택배 상자, 그리고 아직까지 치워지지 않은 진의 점퍼. 그 모든 값은 차곡차곡 쌓여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띠리릭, 하는 소리가 났다. 무자비한 운명이 일시불을 긁어버린 소리, 그리고 에이든의 손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아무도 없는 집 안으로 에이든이 들어섰다. 품 안에는 박스 하나를 안은 채였다. 밖에 있던 택배 박스였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손가락으로 한 번 꾸욱 눌렀다가, 거실을 바라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나도 정리돼 있지 않은 거실이 보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사용한 컵들이 여럿 늘어서 있었고, 프링글스 통 몇 개와 벤앤제리 아이스크림 통이 보였다. 다행히 아이스크림이 안에서 질퍽하게 녹아 있진 않았다. 야무지게 다 먹은 빈 통이었다. 안에 숟가락을 그대로 꽂아둔 채이긴 했지만.
사실 하우스키퍼를 고용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에이든은 부득불 집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자신의 ‘가족’뿐이다. 가끔 오는 가족의 친구까지는 허용할 수 있으나 타인은 절대금물이다. 다른 사람이 진과 제가 지내는 침실에 들락날락한다거나, 진이 가끔 누워 잠들곤 하는 소파를 치우는 건 말도 안 됐다. 모든 건 제 손만 타야 했다.
그는 우선 들고 있던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둔 뒤, 소파에 있는 옷가지들을 들어올렸다. 남색 셔츠 하나, 까만 맨투맨 하나, 까만색 바지 하나, 점퍼 하나. 진의 옷을 잘 챙겨든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팔랑, 하며 운명의 영수증이 바닥에 떨어졌다. 푸른 눈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로 향했다. 그 종이는 실제로 영수증이다. 영수증 뒤를 활용한 작은 쪽지였으니까. 그리고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 두 사람에게 청구한, 시련의 영수증이기도 했다.
「유니폼이 아니라, 다른 차림으로 밖에서 만나고 싶어요. 곧 발렌타인데이잖아요.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불행은 일시불이다. 일시불.
***
부엌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에이든은 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진은 에이든이 톡톡 두드린 테이블 위의 종이를 보곤 얼어붙은 상태였다. 산책 후, 잔뜩 신이 나 돌아온 아담만 소리를 냈다. 두 사람 주변으로 대형견의 바쁜 발소리만 들렸다. 진은 그 타다닥, 하는 발톱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득해졌던 정신에 누가 부싯돌로 불을 켜 준 것 같았다. 진이 황급히 말했다.
“어, 아, 이게 그때 점심 먹고 조안나 코치님이 장난치신 건데…….”
“구체적으로 잘 말해 봐. 이런 게 왜 주머니에 들어있는지.”
에이든이 차분하고, 조금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은 당황한 것처럼 종이를 봤다가, 에이든을 한 번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진이 그렇게 생각할 동안, 에이든이 택배 상자를 진의 앞으로 스윽 밀었다. 테이프는 한 번 뜯겼다가 다시 붙여진 채였다. 안에 든 것들을 본 에이든이 무섭게 낯을 굳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도 같이. 이런 게 왜 집으로 왔는지.”
“이, 이거? 이거는…….”
“진 네가 직접 산 거야?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뭐 때문에 그러는데.”
진은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두 존재에 어쩔 줄을 몰랐다. 쪽지, 그리고 섹스토이. 검은 눈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다가, 우선 쪽지에서 멈췄다. 진이 정말 결백하다는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쪽지는 나, 내가 가지고 오려고 한 거 아니야. 코치님들이랑 자주 가는 디저트 바가 있는데 거기서……. 거기서 받은 건데, 조안나 코치님이 장난으로 꼭 챙겨가라고 주머니에 넣어 주신 거야. 근데 내가 까먹고 안 버려서…….”
에이든은 말없이 진을 빤히 바라봤다. 진은 그 시선에 입술을 씹다가,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급히 통화 목록을 뒤졌다. 진이 제 핸드폰을 에이든의 앞으로 내밀었다. 나 그 번호로 전화도 메시지도, 아무것도 안 했어.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 제스처에 에이든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에이든은 통화 목록이나 메시지창을 확인하지 않고, 다시 진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진은 의아한 낯으로 제 핸드폰을 바라봤다. 왜, 확인해 보면 될 텐데, 왜. 진의 표정이 입 대신 말했다.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인 안 해도 돼. 알겠어.”
“아냐, 여기 보면…….”
“진, 괜찮아. 알겠어.”
에이든의 말에 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손길이 초조하고 당황스러워 보였다. 테이블 위에 있던 영수증은 에이든이 수거했다. 영수증이 그의 커다란 손 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에이든은 그 영수증이 이름 모를 어떤 새끼의 멱살이라도 된 것처럼 쥐었다.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에이든은 진 헤니에 관해서라면 모든 걸 용납할 수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란 단어가 포함된, 모든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진은 사실 다른 새끼를 만나고 싶은 걸까? 그래서 그런 걸까? 밖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제 깨달은 걸지도 몰랐다. 사실 세상엔 에이든 테일러 같은 새끼보다 더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걸. 진이라면 충분히 누구나 입을 모아 ‘좋은 사람’이라 칭하는 놈을 찾을 수 있을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이 불쑥 솟아오르는 본성에 목울대를 울렸다.
그렇다면 진을 바깥에 내보내선 안 되는 거 아닐까? 나를 떠나려고 하잖아. 나를 버리려고 하잖아.
꿀꺽, 하는 목울대가 치솟는 포악함을 삼켜냈다. 에이든의 푸른 눈이 대상 모를 화에 잠식당할 동안, 진은 그의 눈치를 봤다. 진이 에이든과 눈앞의 박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건, 내 발렌타인데이 선물이었는데. 진이 우울한 낯으로 생각했다.
진은 에이든이 돌아오면 조금 쭈뼛거리면서라도 꼭 말하고 싶었다. 칼럼에서 그랬는데, 매번 비슷한 관계는 서로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대. 성적 긴장감이 떨어지면 연인을 더 이상 매력적이라 느끼지 않는댔어, 라고 말하며 슬금슬금 박스를 풀어 보고자 했다. 그럼 에이든은 어이없다는 듯, 혹은 정말 못 살겠다는 듯이 웃다가 능글맞은 미소로 입 맞춰 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상황은 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데다가, 에이든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저기, 에이든…….”
“너한테 뭐라고 하려던 거 아니야. 안 물어보고 넘어가면 내가 또 혼자 이상한 생각 할까 봐 그랬어. 알겠어.”
에이든은 딱딱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이 대화를 정리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직 저 박스에 대해 듣기도 전인데 일어선 걸 보면. 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진은 제 연인의 따뜻한 눈길을 바랐다. 그는 에이든이 저를 쳐다보며 예쁘게 웃어 주길 바랐다. 평소처럼 다정하고 아름답게 웃어 주기를 원했다.
“진, 나 먼저 씻을게.”
“아, 응.”
끼익, 하고 끌리는 의자 소리가 오늘따라 공허했다. 에이든은 진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시선을 내리깐 채 욕실로 향했다. 진은 집요하게도 에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냐, 돌아보고 웃어 줄 거야. 금방 나올게, 그렇게 말해 줄 거야, 진이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에이든은 미소도, 아무런 말도 없이 욕실로 사라졌다. 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당연하던 연인의 다정함이 사라졌다. 원래는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
발렌타인데이 하루 전이었다. 진은 꽤 유명한 베이글 전문점에 줄을 서 있었다.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가, 까치발을 들어 줄이 얼마나 줄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을 맞은 회사원들이 전부 이 베이글 가게로 모인 것 같았다. 줄이 줄어들 생각을 하질 않으니 그의 속이 타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은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빨리 사야 에이든이랑 같이 먹을 수 있는데, 진이 생각했다. 에이든은 연어가 든 베이글을 좋아했다. 크림치즈는 플레인으로, 다른 토핑은 없이. 커피는 사무실에 가면 있으니 괜찮았다. 식은 커피를 가지고 가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낫다. 까만 워커의 앞코가 초조함으로 들썩거렸다. 빨리 에이든을 만나서 평소처럼 얘기하고 싶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한시라도 빨리 그러고 싶었다.
진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어젯밤에 대해 생각했다. 진은 오랜만에 본 제 연인에게 입을 맞추고, 살을 섞고 싶었다. 아무 일도 아닌, 일시적인 냉랭함으로 그날 저녁이 지나가길 바랐다. 침대에 누운 뒤, 진은 에이든의 뺨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입술에도. 따뜻한 혀도 필요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나누어지고, 숨이 가빠질 때쯤이었다. 에이든은 진을 그의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 오늘은 그냥 자는 게 좋겠어.
단호한 목소리에 진이 물었다.
- 에이든, 아직 화났어……? 나 그거 정말 안 그랬어. 연락 안 했어. 그게, 내가 그 쪽지를 가지고 있으려고 한 게 아니라…….
- 진 네가 그러지 않았다는 거 알아.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냥 지금 내가 좀, 심하게 할 것 같아서 그래. 오늘은 그냥 자자. 이리 와.
에이든은 진을 품에 꽉 안아줬지만, 진은 어쩐지 하나도 포근하지가 않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뒤엔 이래선 안 됐다. 오랜만에 봤는데.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런 애정 어린 말들을 하나도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진은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박동 소리를 양 대신에 세었다. 하나, 둘, 셋……. 일흔아홉, 여든……. 아흔아홉, 백. 하지만 세어 봤자였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분 주문하세요!”
굳은 낯으로 서 있던 진이 움직였다. 이제 제 차례였다. 진은 애써 씩씩하게 걸었다. 그는 에이든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오해도 풀고 기분도 풀고, 그러고 싶었다. 이제 곧 발렌타인데이니까. 계속 이렇게 애매한 기분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카운터로 가깝게 다가선 그가 메뉴판을 바라봤다. 검은 눈이 당황으로 우뚝 멈췄다.
「연어 - Sold Out」
“저기, 지금 연어는 안 되나요?”
“네, 방금 다 빠졌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진이 초조하게 생각했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어제부터 진의 맘처럼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고, 그건 서둘러 도착한 에이든의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은 뛰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황급히 슥슥 쓸어내렸다. 회사 직원 중 한 사람이 살갑게 웃으며 진을 안내했다. 에이든의 사무실은 여전히 통유리로 뚫려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안의 에이든은 무표정하고 차가운 낯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끔 만년필을 들어 무언가를 메모하기도 했다. 진은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다가, 품 안에 들고 온 봉투를 내려다봤다. 연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페스트라미를 넣어야 했다. 진이 아쉬운 기색으로 봉투 안을 뒤적거렸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날 때쯤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에이든!”
“진?”
에이든은 연락도 없이 등장한 연인에 놀란 기색이었다. 진이 활짝 웃으며 품에 품고 있던 봉투를 들어 보였다.
“점심 같이 먹으려고. 이거 사 왔어.”
“아, 점심.”
에이든은 봉투를 보고 웃었지만, 어딘지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애매한 낯에 베이글 봉투가 초라한 곡선으로 다시 내려갔다. 에이든이 난감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고, 그러기가 무섭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샌디에이고 쪽에서 바로 메일 넘어 왔어요.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아요. LA 쪽이랑은 10분 뒤에 화상으로 연결할게요. A팀에게 회의실로 다 모이라고 전달하겠습니다. 몇 번 회의실로 갈까요?”
진이 당황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봤다. 에이든이 봉투와 진, 그리고 뒤에서 화상 회의를 알린 사람을 바라봤다. 출장을 거의 억지로 정리하고 돌아왔으니, 여전히 일이 많은 게 당연했다. 집에 빨리 돌아오기 위해 부렸던 객기의 부작용이었다. 에이든이 짧게 한숨을 쉬다가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깐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그가 진에게 말했다.
“진, 미안해. 내가 지금 좀 급한 일들이 많아서. 점심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내가 미안. 사 온 거는 가서 다른 동료들이랑 먹어.”
“아……. 아니야, 내가 갑자기 와서……. 그럼 회의 끝나고 나서는? 나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은데. 오늘 오후 훈련이 늦게 시작해서 나는 괜찮아.”
종이봉투가 또 다시 바스락, 소리를 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리를 낸 건 종이봉투가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는 진의 손이었다. 검은 눈이 제 연인의 푸른 눈을 빤히 바라봤다. 푸른 눈이 잠시 진을 비껴갔다가 돌아왔다.
“진, 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마음 불편하고 미안해서 안 돼. 너도 얼른 점심 먹어야지.”
“아냐, 나는 신경 안 써도 돼. 난 괜찮아. 여기서 잠깐 기다릴게. 점심 같이 먹어.”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은 퍽 단호한 에이든의 목소리에 봉투를 꾸욱 눌러 쥐었다. 구겨지는 모양새가 지금 진의 마음과 비슷했다. 진의 마음은 꾸깃해지고 주름이 잔뜩 가서는 쪼그라들었다.
검은 눈이 에이든의 기색을 바삐 살폈다. 분명 살뜰히 저를 챙기는 말들인데도, 진은 이상하게 달갑지가 않았다. 왜, 왜 나를 밀어내.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가라고 해. 진의 속마음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진의 입 대신에 손에 꽉 쥐어진 봉투의 주둥이만 또 바스락 소리를 낼 뿐이었다.
“진, 이따 집에 가서 보자.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커다란 손이 달래듯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이든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 뒤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네, 그럼 3번 회의실에 바로 셋팅할게요.”
직원의 로퍼 소리가 바닥을 바삐 울리다 점점 멀어졌다. 에이든이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왔고, 그 때문에 진이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야 했다. 에이든이 진의 뺨과 목, 어깨를 쓸며 웃었다.
“점심 챙겨 줘서 고마워, 진. 어서 들어가. 이따 집에서 봐.”
진의 살갗에 닿았던 온기가 금세 멀어졌다. 진은 휑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에이든이 진을 남겨두고 회의실로 향했다. 진은 잠시 에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뒷모습. 어제 저녁, 에이든이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향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낯설었다. 두 사람이 재회한 뒤로 진은 에이든의 뒷모습을 본 적이 많지 않았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에이든이 먼저 등 돌려 걸은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나 진이 먼저 떠난 뒤에 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다가, 점처럼 작게 보일 때쯤에야 자리를 떴으니까.
에이든의 등을 바라보던 진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기시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방금 전, 제 뺨을 쓸며 웃었던 에이든의 표정. 그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분명, 평소와 같지만 평소와 달랐다. 미소, 그 미소는……. 에이든이 회의실로 사라졌을 때쯤, 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방금 전 그 표정은, 가짜야. 에이든은 가짜로 웃은 거야.
***
검은 눈이 멍하니 뜨여 있었다. 진은 한참동안 지난 2년간의 결혼생활을 곱씹었다. 제가 너무 안일했는지도 모른다. 너무 투정만 부리고 아이처럼 군 거였다. 에이든이 다 받아 주니까, 다 받아 주고 괜찮다고 해 주니 버릇이 잘못 든 거다. 오늘 점심이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아무런 약속을 잡고 가지 않아도, 그가 저를 위해 시간을 비운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렇게 대뜸 찾아갈 수 있던 거다.
소파에 앉아 있던 진이 착잡한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랬지? 바보같이 받는 거에만 익숙해져서는……. 진이 머리를 싸매며 생각했다. 소파에 함께 앉아 있던 아담은 그런 진을 살폈다. 왜 그래? 그런 기색으로 진의 뺨에 코를 킁킁거리기도 했다. 진은 아담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 오기 전에 저녁이라도 만들어 놔야겠다.”
아담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녁? 아빠는 요리를 못하잖아. 저녁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아담이 진의 등 뒤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따라갔다. 진은 부엌 찬장을 뒤져 레시피 책들을 꺼내고 있었다. 찬장 하나에는 두껍고 얇은 요리책 몇 권과 수첩 몇 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여태 에이든이 보고 공부했던 책들이었다. 많은 메모지들과 인덱스 스티커들이 책 밖으로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에이든이 요리책을 보지 않고도 척척 만들 수 있기까지의 흔적들이었다.
“뭘 하는 게 좋을까? 저녁이니까…….”
진이 팔랑거리며 종이를 넘겼다. 너무 어려워서도 안 됐고, 너무 간단해서도 안 됐다. 발렌타인데이니까 근사해 보이는 걸 만들고 싶었다. 이거랑, 이게 좋겠다. 진이 ‘준비 재료’라고 쓰인 부분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곤 냉장고로 갔다. 열린 문에서 서늘한 공기와 흰색 백열등의 빛이 차갑게 쏘아져 나왔다.
“아, 토마토가 여기 있나……?”
그는 첫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
진은 처참한 표정으로 개수대를 바라봤다. 액체 괴물처럼 생긴 검붉은 것이 툭툭 싱크대로 낙하했다. 에이든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토마토를 나무 주걱으로 긁어내 싱크대에 버리는 중이었다. 드륵, 드륵, 하며 나무 주걱이 냄비를 긁을 때마다, 진은 제 속이 벅벅 긁혀진다 생각했다. 에이든에게 창피하고 미안했다. 진이 멋쩍은 낯으로 서 있자, 에이든이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진, 저녁은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아담이랑 쉬고 있어.”
“그게, 너 오기 전에 내가 저녁을 해 보려고 했는데…….”
“응, 원래 스튜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아담이랑 가 있어.”
에이든은 그렇게 말하고 옅게 웃어 보였다. 진이 살짝 인상을 구겼다.
가짜 미소. 저건 가짜야.
“에이든, 내가 뭐 도와줄 거는 없을까? 나 이거라도 자르고 있을까?”
“아냐, 진. 내가 할게.”
“아니야, 나도 할 수 있어. 이거 먼저 씻고 네모 모양으로 자르면 되지?”
에이든은 진의 말에 난감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진이 살짝 인상을 구겼다.
이번에도 가짜였다.
“진, 내가 할게. 괜찮으니까 밖에 있어.”
에이든이 진의 손에 들린 감자를 뺏어들며 말했다. 그는 웃었지만, 또 다시 가짜였다. 가짜 에이든이 가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은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멍한 낯을 했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초라한 불쾌함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진이 텅 비어 버린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진의 머릿속에서 옅은 상실감이 주절거렸다. 원래 내 손에 있었던 것. 내가 가져야 하는 너의 온기와 애정. 내 몫으로 내어지는 네 미소와 눈빛. 전부 다 내 거야. 왜 자꾸 나를 밀어내? 왜 내 것을 뺏어가. 네가 주고 있는 건 가짜잖아.
그 뒤로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가짜 에이든과의 저녁식사였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에이든이 초콜릿 박스를 어디선가 가져왔고, 초콜릿을 먹으며 TV를 봤다.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옅게 웃기도 했다. 초콜릿은 진짜였기에 달았지만, 에이든은 여전히 가짜였기에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진의 옅은 미소가 사라질듯 희미해졌다.
곧 발렌타인데이다. 뭣도 아닌 기념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진은 진짜 에이든을 되찾아 오고 싶었다. 초콜릿처럼 달짝지근하고, 조금은 찐덕거리는 그의 애정을 입에 넣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것이고, 자신이 그의 것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진이 씻고 나온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에이든은 언제나처럼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었다. 그는 진이 방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곤 책을 덮었다. 달칵, 하며 옆에 있던 스탠드를 끄기도 했다. 진은 어두워진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랍장 옆에 있던 박스를 들어올렸다. 에이든은 그 박스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문제의 박스였다. 진이 살짝 긴장한 낯으로 입을 뗐다.
“어디서 봤는데, 오래 만난 사람들은 가끔 새로운 것도 시도해 보고 그러면 좋다고 해서……. 곧 발렌타인데이이기도 하고…….”
진의 말꼬리는 자신 없는 기색으로 축축 쳐졌다. 에이든은 어색하게 서 있는 진을 봤다가, 그의 손에 있는 박스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 넌 그런 거 안 해도 돼.”
“왜……?”
“안 해도 되니까.”
진은 미적지근한 온도로 맞춰진 에이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서늘하지도, 그렇다고 따뜻하거나 뜨겁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안 해도 되는 게 어디 있어, 진이 생각했다. 뭐든 안 해도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가는 가짜 에이든만 남을 게 뻔했다.
넌 안 해도 돼. 어차피 지금껏 안 해왔잖아. 진의 몰지각한 양심이 스스로에게 빈정거렸다. 그 빈정거림 위로 얄팍한 오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갔다. 아냐, 나도 다 할 수 있어. 할 거야. 진이 진지한 눈빛으로 박스를 내려다봤다. 살짝 뜯겨 있는 틈새로 물건들이 보였다.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건 검은색 실크로 된 천, 그리고 그 옆에 살짝 보이는 것은 얇지만 단단해 보이는 붉은 로프. 아래에는 여러 플라스틱 토이들이 있었다.
검은 눈이 다시 제 연인을 향했다. 오기 섞인 시선을 받은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에이든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뭐든……. 나도 뭐든 노력할 수 있어.”
진의 목소리는 결연하게까지 들렸다. 그 말에 에이든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아직도 목구멍에서 펄떡거리는 목소리 하나를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치졸하고, 한편으로는 난폭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며칠 째 에이든의 목 안에서 널을 뛰었다. 그네를 타듯 뒤로 한참이나 물러섰다가, 앞으로 불쑥 치솟아 올라가기도 했다. 목젖을 치는 그 음성을 내리누르고, 또 내리누르다 에이든이 어금니를 물었다. 목젖까지 올라선 것은 슬금슬금 혀를 잡아먹었다. 한계였다.
말해. 네 진짜 속마음을 말해.
결국 꽉 다물려있던 에이든의 입이 열렸다.
“이리 와. 그거 가지고.”
***
에이든의 손에 잡혀 있던 진의 성기 끝에서 툭, 툭, 하며 정액이 울컥 새어 나왔다. 진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크게 벌어진 입이 헐떡이고, 한껏 벌린 채로 꿇어앉은 무릎이 덜덜 떨렸다.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아랫배가 거친 숨으로 오르내렸다. 검은 눈 끝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지만, 그건 눈가에 두르고 있는 검은 천이 모두 흡수해 갔다.
“허리가 다시 멈췄잖아. 움직여.”
“소, 손……. 손은, 하으, 손은 놔 줘…….”
“싫어.”
싫다는 대답은 단호했다. 에이든의 목소리는 서늘했고, 동시에 뜨거웠다. 아까 전 미적지근하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진은 제 귀 뒤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목을 움츠렸다. 목과 귓바퀴가 동상을 입은 것 같다가도, 화상을 입은 것도 같았다. 욱씬거리고 화끈했다.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진의 어깨와 목 뒤에 솜털들이 곤두섰다.
“움직여.”
진의 뒤에 앉아 있던 에이든이 그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잡아 끌었다. 그는 진을 제 위에 앉힌 채,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대 앉아 있었다. 한 손은 진의 배를 끌어안고, 한 손은 진의 성기를 쥔 채였다. 움직이란 말에 진이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찌걱, 찌걱, 하는 음란한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허리는 다시 멈췄다.
“아……! 에이, 든 이거… 손……. 놔 줘, 으응……!”
할딱이는 숨소리와 보채는 건지, 칭얼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애원했다. 두 번의 사정 뒤, 진은 성기를 비비고 문지르는 손길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커다란 손은 제 뱃속을 들들 끓게 만들었다. 성기는 마찰로 인해 반강제로 다시 부풀었고, 전신의 살갗도 함께 바짝 긴장했다.
“아흐……! 이제 그, 만. 앞은 이제 그만……!”
깃털 하나가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신음할 지경이었다. 진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하지만 에이든은 진의 성기 끝을 쥐고, 조금 전 정액을 사출한 작은 구멍을 괴롭히기 바빴다.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진의 아랫배가 함몰했다.
“아! 에이든, 그만……! 그, 만! 손은……!”
“왜, 이 상태로 허리 흔들면 박고 있는 데랑 좆이랑 다 기분 좋잖아.”
에이든이 진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땀은 목덜미에서 떨어져 등의 깊은 골을 타고 흘렀다. 주륵, 하고 떨어진 것이 얄쌍한 허리쯤으로 내려왔다. 뒤로 모아져 속박된 손목이 보였다. 진이 손가락 끝으로 붉은 로프를 잡아 뜯는 중이었다. 그 처연한 손 아래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엉덩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엉덩이 사이에는 에이든의 성기가 틀어박혀 있었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허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명령에 진이 몸을 다시 움직였다.
“아, 으응! 아흐…! 아……! 아! 에이, 든!”
에이든이 말한 대로였다. 진이 허리를 흔들면 앞과 뒤가 모두 자극됐다. 사정한 뒤 예민하게 달아오른 성기가 커다란 손 안에서 비벼졌다. 뒤에 들어찬 에이든의 성기는 안을 뭉근히 휘저었다. 찔꺽, 하는 젖은 소리가 앞과 뒤에서 모두 울렸다. 진은 허리를 비틀어 보려 했지만, 뒤에서 꽉 안고 있는 탓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전신이 속박되고, 눈에 보이는 것은 까만 어둠뿐이었다.
“진, 이래서 내가 언제 싸. 아깐 할 수 있다며.”
“아흐……!”
“이러다간 내일모레까지 뒤에 꽂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성기를 물고 있는 곳이 꽈악 조여들었다. 에이든은 하, 하고 숨을 터뜨렸다가 진의 뒷목을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진의 몸을 앞으로 밀어 눕혔다. 갑자기 주욱 빠져나가는 성기에 진이 신음했다. 성기가 빠져나가자 꽂고 있던 곳이 엉망으로 움찔거렸다. 에이든이 그 야한 꼬라지를 보며 말했다.
“진, 네 구멍에 저 장난감들을 넣을 일은 없을 거야.”
진이 고개를 처박고 엎드려 있는 주위로 전동 딜도와 플러그들이 보였다. 에이든은 그 깜찍하고 맹랑한 물건들을 보다 피식 웃었다. 웃음이 사나웠다. 그는 높게 들린 엉덩이 사이에 질척하게 젖은 성기를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좆을 넣을 일도 없어야 할 거야. 알겠지?”
“흐으……!”
“대답해.”
진이 급히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성기는 넣어질듯, 넣어지지 않았다. 바깥을 문지르고 끝으로 쿡, 찔렀다가 멀어지는 것에 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잔인할 정도로 길었던 전희, 푹 주저앉은 채 움직이느라 전혀 해소되지 않은 아랫배 속의 감각, 다시 꼿꼿하게 서버린 성기까지. 전신의 성감은 다시 터질 듯 부풀어 있었지만, 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묶인 손을 바르작대는 것뿐이었다. 침대에 고개를 처박은 채, 진은 한참 끙끙거렸다.
검은 천은 다시 눈물로 척척히 젖어들었다. 어찌할 바 모르는 몸이 눈물로 호소했다. 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둠 속에 벗은 몸뚱어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손을 뻗어 에이든을 그러잡을 수 없었고, 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었다.
새빨간 로프 말고도 암적색의 침묵이 전신을 속박하듯 옥죄었다. 진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헉헉거리는 제 낮은 숨소리만 귓구멍 속을 가득 채웠다. 흥분에 헐떡이는 그 소리에 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에이든, 넣어……. 넣어 줘, 응?”
“싫어.”
싫다는 말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에이든이 진과 가깝게 상체를 숙여 내렸다. 등 뒤를 압박하듯 덮어 오는 몸에 진의 숨이 거칠어졌다. 에이든의 커다란 손바닥이 진의 허벅지 뒤, 엉덩이, 그리고 골반과 아랫배, 마지막으로 다시 바짝 서 있는 성기를 훑었다. 진이 몸을 뒤틀며 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가 숨을 급히 집어먹었다.
“하…….”
진이 숨을 헉하니 들이쉴 동안, 한숨처럼 탄식을 뱉은 것은 에이든이었다. 낮게 떨어지는 숨소리 다음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뒤따랐다. 진은 제 엉덩이 사이에 비벼지는 것에 어깨를 움츠렸다. 축축한 소리를 내는 곳은 눈앞에 훤히 보이게끔, 손으로 우악스럽게 벌려진 채였다.
“아흐……! 아! 으응……!”
애가 절절 끓는 진의 신음이 찔꺽, 하는 소리, 그리고 쩍, 찌걱, 하는 소리와 함께 뭉개졌다. 예민한 곳을 통해 단단히 선 성기가 느껴질 때면 진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며 오가다가, 쿡, 하고 끝이 들어올 듯하면 코끝에서 신음이 새어 나갔다. 안으로 들어설 듯하던 것은 다시 빠져나갔고, 그럴 때면 울먹이는 소리가 진의 입에 고였다.
“에, 이든……!”
“싫어.”
고열로 탁해진 목소리였기에 싫다는 대답은 신뢰도가 떨어졌다. 얼른 넣으라는 것처럼 오물대는 곳을 느끼며, 에이든이 낮게 신음했다. 그가 진의 어깨와 목덜미에 이를 세워 물었다. 허리를 뭉근히 움직이던 에이든이 진의 귀에다 속삭였다.
“아냐, 사실 좋아.”
심술 맞은 속삭임과 함께 성기가 처박혔다. 처음부터 강하게, 끝까지 처박히는 것에 진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눈이 가려져 있어서 그런지 모든 감각이 충격적으로 커다랗게 쏟아졌다. 가려진 시야 가운데로 퍽퍽 불꽃이 터졌다. 뒤에서 에이든이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에 맞춰, 그 불빛이 점멸하고 또 다시 터지기를 반복했다.
“아! 아흑…! 아! 아응…! 아! 너무, 아…! 너무 빨, 라!”
“하……. 알아. 그래서, 좋잖아.”
전신이 마구 흔들릴 정도의 힘이었다. 진은 모든 감각이 아랫배 아래, 그 어딘가로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에이든의 성기와 마찰하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게 야한 소리를 내며 입구가 난폭한 침입을 반겼다. 몸 안이 들쑤셔지고, 여린 점막들이 몽땅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에이든은 진의 몸 구석구석, 심지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몸 안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건 진에게 행운이자, 지금 이 순간에는 황홀한 불행이었다. 에이든은 진이 자지러지는 곳만을 쑤시고, 문질러댔다. 비명 같은 신음이 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의 허리가 무너지려하면 에이든이 잡아 세우고, 몸이 비틀리려하면 에이든이 뒷목을 눌러 잡았다.
푸른 눈이 아래로 향했다. 소유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이 진의 몸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눈가를 가리고 있는 검은 천, 팔을 묶고 있는 붉은 끈. 에이든이 휘발되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네가 아무도 보지 못했으면 해. 네가 나 말곤 아무도 만지지 않았으면 해.
그는 진의 눈과 손을 모두 앗아간 지금이 만족스러웠다. 에이든의 푸른 눈이 열기로 달아올랐다. 내 거야, 내 거, 전부 다. 푸른 눈이 연인의 전신을 잘근잘근 쪼개어 먹어치웠다. 에이든의 손바닥이 진의 어깨와 뒷목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진의 몸 안이 에이든의 성기를 쥐어짜고, 균일하지 못한 내벽과 성기가 마찰하며 서로를 긁어댔다. 퍽, 퍽, 하고 쳐올리는 허리에 맞춰 에이든의 생각 역시 난폭해지고 있었다. 폭력적이게까지 느껴지는 성감에 에이든이 낯을 일그러뜨렸다. 성감이 치고 오르는 단전, 그 위로 불쑥 치솟는 목소리가 명치를 채우고 목울대를 꺾고 올랐다.
말해. 네 진짜 속마음을 말해.
에이든이 어금니를 문 채 퍽, 하니 몸을 쑤셔 넣었다. 입 밖으로 새려는 말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진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질러졌고, 그 소리에 에이든의 손과 팔뚝에 핏줄이 툭툭 솟아올랐다. 에이든의 상체 역시 가쁜 숨으로 들썩였다. 그는 제 성기가 진의 몸속을 오갈 때마다, 저 말고는 그 누구도 몰라야 하는 곳을 깊게 찔러댈 때마다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말해.
진의 허리를 쥔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에이든은 눈 뒤에서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쾌감과 머리 꼭대기를 치고 오르는 본성을 삼켜낼 수 없었다. 포기였다. 에이든은 제 아래에 엎드려 있는 연인을, 속박당한 채 몸을 열고 있는 진의 뒷목을 꾸욱 잡아 내렸다. 이미 도망갈 수 없는 상태가 확실했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처럼. 결국 그의 잇새 사이로 사나운 목소리가 흘렀다.
“내가 널, 가둬 놓고 싶게 만들지 마.”
명백한 열기, 그리고 선연하게 느껴지는 소유욕. 그 목소리에 진의 몸이 강하게 수축했다. 진은 입을 크게 벌리고 벌벌 떨었다. 새된 신음이 목 뒤에서 질러졌다. 바짝 서 있던 진의 성기가 꺼떡거리고, 그 끝에서 왈칵 정액이 뿜어졌다. 진이 앓는 것처럼, 흐느끼는 것처럼 신음했다. 진은 전신으로 끼쳐 들어오는 에이든의 열기가 정신이 나갈 만큼 좋았다. 진이 허리를 비틀며 울어댔다.
“나, 아응! 아, 나 좋, 아…! 아! 아! 아흐…! 나, 아흑…! 아!”
두 단단한 몸이 서로 맞붙었다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살결이 마찰하며 철썩이는 소리와 두 남자가 신음하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진이 자지러지는 것처럼 질러대는 소리, 에이든이 낮게 신음하며 욕을 짓씹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진의 성기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묽은 물과 정액이 핏, 하고 새어나왔다. 몇 번째인지도 알 수 없는 사정에 진의 입에서 타액이 늘어졌다. 땀에 젖은 몸이 강하게 조여들자, 에이든이 뒤에서 성기를 빼냈다.
검은 천이 벗겨지고, 눈물로 번져 있는 진의 시야에 빛이 들었다. 눈을 떴지만, 떴다고 볼 수 없었다. 날아가 버린 정신 때문에 진은 그 무엇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엎드려 있던 몸이 뒤집히고, 상체에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뒤에는 타액과 눈물로 흥건한 얼굴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진이 혼몽히 풀린 눈을 들어 위를 바라봤다. 푸른 눈. 열기에 절어 있는 푸른 눈이었다.
에이든은 땀으로 젖은 진의 뒷머리를 손으로 강하게 잡았다. 그리곤 사정 직전의 성기를 진의 얼굴에다 문질렀다. 진은 정신이 없는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다가, 제 얼굴에 문대지고 있는 것을 힐끗 바라봤다. 단단하게 일어서 핏줄이 불거져 있는 성기. 축축하게 젖은 얼굴과 성기가 서로 문질러지자, 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에이든은 집요한 시선으로 제 연인의 낯을 내려다봤다. 에이든이 삽입하듯 허리를 움직이는 것에 진의 표정이 흥분으로 무너져 내렸다. 에이든이 그 표정을 보며 목 안으로 탄식을 삼켰다. 진의 머리칼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고, 단단하게 자리잡힌 근육들이 터질듯 부풀었다.
“하, 씨발……!”
진의 검은 속눈썹은 원래도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그 위로 비린 정액이 가세했다. 끈적하게 얼굴을 흐르는 것에 진이 아, 하고 작게 신음했다. 마치 자신이 사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진의 숨이 가빠졌다. 할딱거리는 숨이 발갛게 달아오른 입에서 뱉어졌다. 흐리게 풀려 있는 검은 눈, 얼굴을 뒤덮고 있는 흰 정액,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혀. 에이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모습을 감상했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얼굴 위에 흩뿌려진 흔적을 스윽 쓸었다. 그의 손가락은 정액을 쓸어서는 진의 입술로 향했다. 빨아, 그런 말이 없었음에도 진은 알아서 입을 벌렸다. 뜨겁게 달궈진 입 안이 에이든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손가락에 질척하게 묻어 있던 정액은 진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입을 지나 목으로, 몸 안으로 삼켜졌다.
진은 뇌가 전부 흐물하게 풀어진 상태에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진짜 에이든이야. 쾌감으로 조각난 신경 세포들이 그렇게 알려 줬다. 저녁에 입 안에 넣었던 초콜릿보다, 지금의 에이든이 더 달고 끈적였다. 그러니 그는 진짜 에이든이 맞다. 진짜 에이든은 내 거야, 내 거. 네 모든 열기는 내 거야. 진이 생각했다. 뇌가 중탕된 초콜릿처럼 녹아 흘렀다. 진이 풀린 혀로 작게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어…….”
에이든이 급히 입을 맞췄다. 그는 여태 묶여 있던 진의 손목을 황급히 풀었다. 두 손이 속박에서 풀려나자 진이 에이든의 목을 껴안았다.
내 거야. 내가 다 가질 거야.
두 사람의 입에선 달짝지근한, 동시에 조금은 비릿한 냄새의 소유욕이 오갔다. 너는 전부 내 거야. 그렇게 목구멍을 채우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불필요했다.
***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부엌에서 울렸다. 두 사람은 새벽 4시에 환히 불을 켜놓고는, 뭔가를 뚝딱이며 만들고 있었다. 진은 위태하지만 조심스러운 손으로 토마토를 잘랐다. 스튜를 만들 예정이다. 에이든은 냉장고 고기 칸에서 스테이크용 고기 두 덩이를 꺼냈다. 그리고 찬장에서 로즈마리와 핑크색으로 빛나는 소금통 하나를 꺼냈다. 그는 로즈마리가 든 병의 뚜껑을 따다가, 힐끗 진의 눈치를 봤다.
- 내가 널, 가둬 놓고 싶게 만들지 마.
에이든은 제가 말한 것을 떠올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 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 그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며 몰매를 맞아도 시원치 않았다. 험하게 굴까 봐, 미친 새끼처럼 이상한 말을 지껄일까 봐 계속 조심해 왔는데, 망한 거였다. 에이든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토마토를 썰던 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이 좋지 않은 표정의 연인을 살폈다. 진도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토마토를 엉성하게 썰던 그가 칼을 주춤주춤 내려놨다. 그리곤 에이든에게 조심히 다가섰다. 에이든은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품에 가득 안겨오는 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은 에이든의 허리를 꼬옥 붙잡아 안았다. 에이든의 어깨에 뺨을 부비던 그가 말했다.
“아직도 화났어……?”
에이든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화낸 적 없어, 진.”
“화냈잖아…….”
“아냐, 그게 아니라…….”
에이든이 말을 흐렸다. 화가 났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이상했다. 에이든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치졸하고 부끄러운 단어 하나를 제 입으로 말했다.
“그냥 질투 나서 그런 거지, 뭐…….”
‘질투’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너무 사나운 감정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에이든은 제가 말해 놓고도 머쓱하고 어색해져서 눈썹을 매만졌다. 진은 그 말에 눈을 꿈뻑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사랑스러운 각도로 눈꼬리가 접혀 내려갔다. 꽤나 야살스러운 미소에 에이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은 환히 웃으며 에이든의 뺨과 턱에 입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쪽, 하니 입을 맞춘 뒤에 진이 말했다.
“에이든, 해피 발렌타인데이.”
“해피 발렌타인데이, 진.”
에이든이 진을 꽈악 껴안았다. 그 뒤에는 언제나처럼 검은 머리칼과 눈썹, 속눈썹과 이마, 광대뼈 위로 입술을 내렸다. 진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에 한참을 웃었다. 우여곡절은 좀 있었지만 발렌타인데이 선물은 나름 성공이었다. 성공이었나? 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든, 발렌타인데이 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응?”
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검은 안대와 붉은 로프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안 해도 돼. 안 해도 충분해.”
“그래?”
되물었던 진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좋았는데…….”
“응, 그럼 나도 좋아. 엄청 좋았어.”
에이든이 곧바로 말을 바꿨다. 능청맞게 웃으며 진의 엉덩이를 토닥이기도 했다. 진이 장난스럽게 제 연인을 흘겨보다가 방치돼 있는 토마토를 돌아봤다. 해가 뜨도록 둘 다 열심히 몸을 썼으니, 빨리 밥을 먹어야했다. 토마토 스튜, 잘할 수 있겠지. 진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생각했다.
그날 진이 만든 토마토 스튜는 질퍽질퍽거렸다. 에이든은 끅끅거리며 그 스튜를 퍼먹었다. 진은 웃지 마, 먹지 마, 둘을 번갈아 소리쳤다. 에이든은 한 입 먹고는 푸스스 웃고, 또 한 입 먹고는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스튜 아닌 스튜는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들뜬 에이든의 위에 차곡차곡 들어갔다. 그리고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준비한 엄하고 섹시한 박스는 진이 차곡차곡 정리했다. 박스는 두 사람의 침대 아래에 놓였다. 박스를 정리해 넣던 진이 흐뭇한 낯으로 박스를 토닥였다.
진이 박스에게 인사했다. 어쨌거나, 해피 발렌타인데이!
<포가튼 머맨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