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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ehind Episode with Alex : I'm trying (15/16)

2. Behind Episode with Alex : I'm trying

통화 중이던 알렉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핸드폰을 한 번 바라봤다가, 정말 진심이냐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사이코패스 아니야?”

[ 야, 그럼 어떡해! 나 잠깐 현장 불려나가야 되는데, 얘를 집에 혼자 두라고? ]

“어, 혼자 둬.”

[ 뭐? 사이코패스는 너 아니냐?! 아, 진짜 쩨쩨하게! 네가 아담 잠깐만 맡아 줘! 다른 경호팀 애들도 전부 차출이란 말이야! 맡길 데가 정말 없어서 그래! ]

“쩨쩨? 이게 쩨쩨하다고 할 문제냐? 나더러 지금……. 됐다. 말을 말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샜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비참한 문장이었다. ‘나더러 지금 짝사랑하던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걔네가 키우는 개를 돌보라고?’라는 문장. 문장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가 처참하고 참혹한 수준이었다.

개를 돌보라니. 나더러, 에이든 테일러가 키우는 개를. 기분 더럽다는 듯 혀를 차던 알렉스는 이어지는 나디아의 말에 고개를 떨궜다.

[ 진도 너한테 맡기는 게 좋겠다고 했단 말이야!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네가 더 믿음직스러운 건 당연한 거 아니냐? 개 주인이 그러자는데 나더러 어떡하라고! ]

“하…….”

알렉스의 한숨이 서글펐다. 그가 신경질 섞인 손길로 갈색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질끈 감긴 녹색 눈이 야속하다는 빛을 냈다. 알렉스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진한테 야속하다 말할 수도 없다. ‘진, 너는 나한테 아담을 맡기자는 소리가 나와?’라고 묻고 싶었지만, 물어 봤자다. 왜 저 소리가 나오면 안 되는지 진은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몇 번이나 한숨을 푹푹 쉬던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서 언제 데리고 올 건데.”

[ 내일 바로 데리고 갈게. 너 저녁에 집에 있지? ]

“하…….”

아담이라는 이름의 골든 리트리버는 에이든 테일러의 개다. 그리고 동시에, 진 헤니의 개이기도 하다. 알렉스가 생각하기에 그건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절대로 싫어할 수도, 절대로 좋아할 수도 없는 이상한 존재니까. 그렇다고 차게 외면할 수도, 따뜻하게 껴안을 수도 없는 애매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사실 알고 있다. ‘진 헤니’라는 이름이 무언가에 스며들어 있는 이상, 결국 제게 거부할 기회나 선택지는 없다는 걸. ‘진’이라는 단어는 볼모로 붙잡힌 인질이고, 언제나 저를 무기력하게 항거하도록 만든다. 저는 인질을 구하기 위해서 뭐든 꺼내 보이며 이걸 다 줄 테니 제발 돌려 달라 사정할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그의 복잡한 속내를 다 이해한다는 듯이 서둘러 알렉스를 달랬다.

[ 아, 이틀이면 돼. 이틀! 나 진짜 존나 빨리 올게. 알겠지? ]

그는 무뚝뚝하게 알겠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몇 번째 한숨일지 모를 소리가 알렉스의 방을 울렸다. 침대에 풀썩 누운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휑한 책상과 책꽂이용 선반이 보였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서랍장들도 있었다. 그의 방 풍경은 전과 달랐다. 번쩍이는 메달도, 트로피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전부 서랍장 옆 종이 박스 하나에 들어 있었다. 곧 버릴 물건들을 대충 싸 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한 달 전, 부다페스트에서 딴 금메달 역시 박스행이었다. 금메달은 억울하고 서러웠겠지만, 어쩔 수 없다. 저보다 주인이 더 서럽고 쓸쓸하니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알렉스는 의미 없는 쇠붙이들을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목에 다른 것들이 걸리길 바란다. 누군가의 다정한 손, 혹은 팔. 장난스럽게 어깨에 걸어지는 얄쌍한 턱. 그런 것들. 알렉스는 그런 것들을 바라고, 가끔씩은 상상하기도 했다.

진이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면, 턱을 기대어 안긴다면, 귓바퀴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린다면……. 때때로 하는 상상은 달았고, 단내를 한껏 풍긴 뒤에는 역한 악취만 남기고 사라졌다. 악취는 자괴감,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에서 나는 냄새였다. 알렉스는 그 냄새가 싫었다. 역겨웠다.

알렉스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악취는 지금도 나는지, 아니면 이미 다 가시고 없는지. 저는 그 단내를 맡고 싶은지, 그것도 아니면, 미련하게 아직도 맡고 있는 중인 건 아닌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초록색 눈이 천장을 쏘다녔다. 눈은 답을 찾아 헤맸지만 애석하게도 천장엔 무엇도 쓰여 있지 않다. 그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일렁이는 스탠드의 빛이 그의 눈을 어지럽힐 동안,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였다. 그는 상대도 확인하지 않고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네.”

[ 알렉스, 자기 내일 저녁에 어떡할래? 엠마는 7시면 될 것 같대. 자기랑 나 먼저 만나고 있을래? ]

전화기에서 울리는 소리에 알렉스가 짧게 아, 하고 탄식했다. 그 탄식을 들은 건지 전화를 건 사람이 말했다.

[ 뭐야, 약속 까먹고 있었던 거 아니지? ]

알렉스는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아니, 까먹고 있었던 게 맞아. 그렇게 대답하기엔 너무 쓰레기 같았다. 알렉스가 통화 중인 사람은 연인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열심히’ 만나려 노력 중인 사람이긴 했다. 알렉스는 잠시 입술을 꾸욱 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선 허탈한 웃음이 샜다. 알렉스가 대답했다.

“나 내일 못 만날 것 같아.”

[ 뭐……? ]

“내일 못 만나.”

일방적인 통보에 상대방도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당황스럽다는 목소리가 핸드폰을 새어나왔다.

[ 지난달에는 헝가리에 있느라 못 만나고, 이번에는 뭐 때문이야? 알렉스, 부탁인데 사람 자꾸 구질구질하게 만들지 마. ]

알렉스가 대답하지 않자 상대방이 한 번 더 채근했다. 뭐 때문이냐고. 그런 질문에 알렉스가 답했다.

“내가 내일 저녁부터 개를 봐야 돼.”

[ …뭐라고? 너 지금 나랑 장난해? ]

“아니. 미안한데 나도 어쩔 수 없어.”

알렉스는 한 번 더 웃었다. 뭐가 웃긴지는 그 스스로도 몰랐다. 그냥 다 웃겼다. 허탈했고, 어이없었다. 아마 이번 만남도 이렇게 끝일 거였다. 길어야 몇 달, 짧으면 몇 주의 유통기한을 가진 관계들. 그것들은 저기 저 박스 속 쇠붙이들과 똑같이, 의미도 쓸데도 없어 버려진다. 열심히 하지만 결국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결과물은 굳이 필요치 않았다. 알렉스는 전화를 끊으며 이번 사람도 박스 안에다 넣고 뚜껑을 덮었다. 이번 노력도 처참히 종이 관짝 안에 들어갔다.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에선 외로움의 냄새가 났다. 그는 아까 했던 질문에 스스로가 답했다. 아직도 단내를 맡고 싶은지, 그렇다고. 아직도 악취가 나는지, 그렇다고.

알렉스가 스탠드를 껐다. 방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그가 눈을 감았다. 사실 ‘진’이라는 단어는 인질이 아니라, 범인일지도 몰라. 붙잡힌 건 나일지도 몰라. 알렉스의 생각 뒤로 단내와 악취가 어둠처럼 방 안을 채웠다. 언제나처럼 행복하고 역겨운 밤이었다.

***

나디아는 착잡했다. 그녀의 갈색 눈이 앞에 앉아 있는 알렉스를 살폈다. 이번에는 만나는 사람이랑 꽤 오래 가나 싶어서 안심했었는데, 아니었다.

어제 가십지는 또 한 번 난리였다. 요새 싸구려 잡지들은 알렉스 그레이에게 ‘플레이보이’ 타이틀을 붙이기 바빴다. 나디아가 생각하기에 그 두 대명사는 정말 안 어울렸다. 그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가운 핫초코 같은 거였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이 몇 번을 바뀐 건지. 나디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료와 밥그릇을 옆으로 스윽, 밀어 놓으며 말했다.

“야, 진짜로, 이번에 진짜, 진짜, 진짜 너한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 있는데, 안 만나 볼래?”

“넌 뭐가 좋다고 웃어.”

알렉스는 헤실거리는 아담에게 말했다. 나디아가 터그 놀이용 장난감과 목줄을 사료 봉지 옆에 놓으며 말을 덧붙였다.

“경호팀에 새로 들어온 신참 하나가 있는데, 너랑 딱이야. 진짜, 누나를 믿어 봐. 나 정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준다. 진짜, 농담 아니야. 애가 막, 성격이 막 좋은 건 아닌데 너랑 잘 맞는 구석이 많아. 어차피 너도 성격 별로 안 좋잖아, 솔직히.”

“그만 웃으라고 했다.”

알렉스가 경고하듯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의 말에 아담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담은 새로 온 집에도 금방 적응했다. 적응을 하다못해, 알렉스에게 애교를 피우기 바빴다.

아담은 앞발로 툭툭 알렉스를 건드렸다. 날 봐. 날 봐 줘. 난 아담이야. 넌 누구야? 누군진 몰라도 좋아. 엄청 좋아! 그런 인사처럼 보였다. 알렉스의 초록색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아담은 여전히 헤실거렸다. 눈치도 없는 게, 딱 제 주인이랑 닮아 있었다. 아담은 몇 번이나 알렉스의 손등을 툭툭 쳤다. 두툼한 앞발이 손과 허벅지를 건드릴 때마다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아, 진짜 한 번만 만나 보라고!”

“아,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시끄럽게.”

“네가 내 말을 개무시하니까 그렇지, 이 개새끼야!”

“개새끼는 얘지.”

알렉스가 아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디아는 환장하겠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불쌍한 제 친구를 때리지 않기 위해 분노를 내리눌렀다. 그녀는 코로 깊게 숨을 내쉬곤 눈을 떴다. 아담은 어느새 알렉스에게 매달려 안겨 있었다. 알렉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는 정말 싫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쭉 빼고 있었다. 나디아가 그 웃긴 꼬라지를 보며 말했다.

“야, 아무튼. 나 다녀와서 데리고 갈 테니까 이틀만 참아. 애 굶기지 말고, 때리지 말고.”

“넌 내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이냐?”

“미친놈, 지금 네 표정이나 보고 말해.”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

“네 표정? 어떻긴, 쓰레기 같지.”

나디아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몇 번이나 개를 굶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산책을 꼭 시켜야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다 떠났다. 나디아가 나갈 동안 아담은 장난감 하나를 물고 와서는 알렉스의 손에 가져다댔다. 물면 삑, 삑, 하는 소리가 나는 고무 장난감이었다.

“뭐, 나더러 어쩌라고.”

삑, 삑, 삑. 그런 소리가 났다. 놀, 자, 고. 말을 못하니 그렇게라도 대답하는 것 같았다. 아담은 알렉스의 손 위에 침이 흥건한 장난감을 내려놨다. 그리곤 초록색 눈을 빤히 바라봤다. 이거, 가지고 놀아. 나랑 놀아. 까만 눈동자가 알렉스에게 말했다. 반짝이는 눈이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렉스가 깊게 한숨을 쉬며 장난감을 휙, 하니 어디론가 던졌다. 그 뒤론 타다다닥, 하는 발소리가 울렸다. 던진 지 3초도 지나지 않아 아담이 삑삑거리며 돌아왔다. 그리곤 다시 알렉스의 손바닥 위에 장난감을 퉤, 하고 뱉었다. 침이 흥건히 묻어 고무가 축축했다. 알렉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귀찮아 죽겠네.”

알렉스가 또 무심한 손길로 장난감을 휙, 하니 던졌다. 삑삑거리는 소리에 그가 실없이 웃었다. 아담이 그의 앞에 앉아 꼬리를 살랑였다. 입에 장난감을 문 채였다. 삑, 삑. 그 소리에 알렉스가 정말 난감하다는 듯이 눈썹을 매만졌다. 삑, 삑. 이번엔 알렉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삑, 삑. 채근하는 소리에 알렉스가 포기한 낯으로 답했다.

“알겠어, 알겠어.”

아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겅중겅중 뛰었다. 제자리를 빙빙 돌기도 했다. 알겠다는 말을 알아들은 건지 검은 눈이 반짝였다. 알렉스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번에도 뭔가, 된통 잘못 걸린 기분이었다.

***

이어지는 일과는 평범했다. 금요일 저녁쯤에 그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이틀 동안 개랑 놀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굉장히 귀찮고, 무지막지하게 번거로운 것들 투성이였다.

금요일 밤엔 아담이 한참 동안 알렉스의 방문을 긁었다. 들여보내 줘. 같이 자! 벅벅거리는 발톱 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었다. 벅벅거리는 소리는 밤 12시쯤 되어서 멈췄다.

발톱 소리가 멈추고 나서는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량하게도 울어대는 소리에 알렉스가 이불을 발로 차 걷어 냈다. 이불은 엉망으로 구겨져 침대 구석에 뭉쳐졌다. 알렉스는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벌컥 열린 문밖에는 울망한 눈을 한 아담이 앉아 있었다. 들여보내 줘. 혼자 자기 싫어. 검은 눈이 호소했다.

“이제 그만 좀 자! 거실에서 자!”

알렉스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담은 슬금슬금 문틈으로 몸을 욱여넣으려 했다. 알렉스가 그 앞을 막아섰다.

“어딜 들어와. 밖에서 자라고.”

초록색 눈이 단호했다. 들어오지 마. 아무 데도 들어오지 마. 알렉스가 필사적으로 아담을 내보내려 했다. 그가 내어 줄 수 있는 곳은 거실뿐이다. 침실은 안 됐다. 그는 침대를 내어 주는 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처럼, 그것만은 또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렇게 아담을 밀어냈다. 낑낑거리던 아담은 결국 포기한 것처럼 문 앞에 털썩 앉았다. 정말 안 돼? 검은 눈이 알렉스에게 물었다.

“안 돼. 밖에서 혼자 자.”

문은 쾅, 하고 닫혔다. 아담이 닫힌 문틈으로 콧잔등을 가져다댔다. 엎드려 누운 개는 슬퍼 보였다. 금요일 밤은 둘 다 외로운 채로 막을 내렸다.

토요일 아침엔 산책을 갔다. 아담이 아침부터 하네스를 물고 온 집안을 뛰어다녔고, 알렉스는 정말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담을 데리고 나섰다.

토요일 아침의 센트럴 파크는 개판이었다.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뉴욕에 사는 개란 개는 다 나온 것 같았다. 아담은 겅중거리며 뛰다가 알렉스를 돌아보고, 헥헥거리며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알렉스를 돌아봤다. 잘 따라오고 있어? 살랑거리는 꼬리와 쫑긋대는 귀가 물었다.

“그래, 간다. 가고 있다고.”

권태로운 목소리가 답했다. 아담은 신난 발걸음으로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센트럴 파크를 누볐다. 가끔 아는 친구를 만나면 정신없이 방방거리기도 했고, 엄한 사람한테 안기려다 알렉스에게 혼나기도 했다. 넌 사람이면 다 좋냐고, 알렉스가 묻자 아담은 그의 허벅지에 고개를 부볐다. 알렉스는 저를 달래려는 듯한 개의 몸짓에 헛웃음을 쳤다. 이건 분명 개가 아니라 여우새끼야. 그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한 바퀴만 더 돌고 가는 거야. 어?”

아담이 헥헥거리며 앞장섰다. 한참이나 앞으로 뛰어가던 개가 어딘가에 코를 박았다. 뭘 발견했는지 정신없이 냄새를 맡았다. 킁킁거리던 아담은 와앙, 하고 입 안에 알 수 없는 걸 집어넣었다. 그 꼬라지를 발견한 알렉스가 놀란 낯으로 아담의 입을 벌렸다.

“야, 너는 아무거나 먹으면 어떡해!”

아담이 뺏기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빼려 했다. 싫어, 내 거야. 먹을 거야! 으르릉, 하는 소리가 불만스럽게 들렸다. 알렉스는 엄한 낯으로 몇 번이나 안 된다고 소리쳤다. 그는 아담의 턱을 잡아 벌렸다. 뱉어, 뱉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조급했다.

“뭘 먹었는데, 뭔데. 이상한 걸 왜 주워 먹어!”

다급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그가 아담의 입에서 동그란 초콜릿을 꺼냈다. 알렉스가 사색이 된 채 말했다.

“너 이런 거 먹으면 죽어! 너네 주인은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가르치지도 않아?! 넌 어떻게 주인이랑 하는 짓이 똑같아!”

크게 터지는 소리에 아담의 귀가 뒤로 쳐졌다. 풀이 죽은 귀와 꼬리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여전했다. 초록색 눈에서 짜증과 신경질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늦은 밤, 아담은 알렉스의 눈치를 힐끗 봤다. 그의 방문은 어김없이 쾅, 하는 소리와 닫혔다. 아담은 터덜터덜 그 문 앞으로 걸어갔다. 털썩, 하고 엎드려 누운 개가 문틈에 코를 박았다. 낑, 하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그 뒤에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문틈 새로 새어나왔다.

눈을 감고 있던 아담은 방 안에서 나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저벅저벅, 하는 그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곤 스르르 문이 열렸다. 짜증 섞인 초록색 눈이 아담의 검은 눈을 내려다봤다. 아담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퍽 불쌍한 몸짓에 알렉스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슬쩍 위를 올려보던 아담이 콧잔등으로 문을 밀었다.

고개를 아래로 잔뜩 내린 채 아담이 스멀스멀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가란 소리가 없어서, 아담이 다시 슬쩍 알렉스의 눈치를 봤다. 나 들어가? 들어간다? 아담이 눈빛으로 물었고, 알렉스가 졌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아담이 폴짝이며 침대 위로 올라간 건 잠시 뒤였다. 알렉스는 그 꼴을 보며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여태 풀 죽은 모습은 다 연기였던 게 확실했다.

***

아담이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이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알렉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몸 위에 엎드려 있던 아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알렉스가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을 킁킁거렸다. 알렉스가 다시 한번 나디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데리고 있겠다고.”

[ 됐어. 오늘 저녁에 갈게. ]

“아니, 내가 더 데리고 있겠다니까?”

[ 얘는 무슨 변덕이 이렇게 심해! 됐어! 내가 데리러 간다고! 짐이나 잘 싸 놔! ]

“걔네 돌아올 때까지 내가 더 데리고 있겠다고, 나디아.”

알렉스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했고, 얼핏 초조하게 들리기도 했다.

“나 어차피 저번 부다페스트 대회 이후로 잠깐 휴식기고, 다음 주까지는 훈련도 늦게까지 안 해. 내가 데리고 있을게.”

나디아는 잠시 대답하지 없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 사이에 정붙일 줄 알았으면 너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나디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그 중얼거림을 듣고도 모른 척을 했다.

[ 수요일까지 네가 데리고 있어, 그럼. 아담은 너랑 있다고 내가 진한테 말할게. ]

“그래, 알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어서 나디아의 한숨이 짙어졌다.

[ 정신 차리고 살아, 너. 진짜 등신새끼처럼 굴지 말고. ]

나디아가 작작하라는 목소리로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알렉스는 그저 제게 안겨 있는 아담을 쓰다듬었다. 슥슥 쓰다듬는 손길에 아담이 기분 좋다는 듯이 그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알렉스가 그 소리에 피식하니 웃었다. 더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그가 웃으며 생각했다.

아담은 천방지축이었고, 온 동네를 쏘다녔고, 거실과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땅을 파듯 침대를 벅벅 긁어 놓기도 했다. 초록색 눈이 아무리 엄하게 뜨여 있어도 헤실대며 웃었고, 저리 가라고 말해도 꼭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자려고 들었다. 그가 혼자 지낼 때는 나지 않던 소음들이 집을 요란하게 만들었다. 탁탁거리는 발톱 소리, 가끔 투정부리듯 ‘워!’ 하며 짖는 소리, 기분 좋을 때면 내는 ‘그르릉’하는 소리. 낯선 소음들이 외로웠던 공간에 생기를 북돋았다.

월요일, 아담은 사료 봉지를 마구 헤집어 놨다.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알갱이들을 보며 알렉스가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혼날래? 그렇게 물어도 아담은 발랑 배를 까고 누울 뿐이었다. 알렉스는 모든 전투의지를 상실한 채, 묵묵히 사료 알갱이들을 주웠다.

화요일, 아담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서 발소리가 날 때부터 꼬리는 요란뻑적지근한 박자로 흔들리고 있었다. 알렉스가 돌아왔단 걸 아는 거였다. 빨리 와, 빨리! 빨리 들어와! 아담이 컹컹거리며 알렉스를 반겼다. 그 뒤엔 삑삑이를 물고 와서는 저 혼자 던지고 달려가고, 던지고 달려가기 바빴다. 알렉스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요일, 아담은 알렉스의 핸드폰을 힐끗 훔쳐봤다. 알렉스는 진에게 ‘그럼 금요일로 알고 있을게.’라는 메시지를 전송했다. 진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LA에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경황이 없어 보였다. 알렉스가 옆에 앉아 있던 아담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는데, 참길 잘했어. 알렉스가 아담에게 말했다. 아담은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알렉스의 품에 안겨 들었다.

아담이 있는 일주일 동안, 그의 집에선 허구의 단내도, 악취도,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개를 부지런히 씻기고, 밥을 먹이고, 산책을 나가고, 털을 빗어주고, 저질러 놓은 사고를 수습하고, 그러다 보면 멍하니 생각에 잠길 시간 따윈 없었다. 단내와 악취는 거처를 잃었고, 그 자리를 개 냄새가 대신 채웠다. 적당히 꼬릿하고 고소하게까지 맡아지는 그 냄새. 알렉스의 이름을 따라 회색 빛깔이던 공간엔 금색의 털이 날리기도 했다. 자주 빗어 주지 않으면 그 금색 털들은 공간 여기저기를 날아다녔다. 개도, 그 주인도, 참 손이 많이 간다고 알렉스가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 알렉스는 빗에 엉킨 털을 뽑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곤 작은 가방 안에 빗을 챙겨 넣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중얼댔다.

“곧 오겠네.”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 아담이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알렉스는 굼뜬 움직임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죄수라도 된 것처럼, 그의 모든 동작이 느렸다. 걷는 것도, 문을 여는 것도,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모두 다 그랬다.

“알렉스! 아담!”

이게 얼마만이야, 진.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차마 나오질 않았다. 반갑게, 살갑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활짝 웃는 낯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에 달린 기도와 성대가 비참함으로 녹아 문드러진 모양이었다.

“알렉스, 잘 지냈어? 저번에 같이 저녁 먹고 나서 엄청 오랜만에 본다, 그치?”

진이 성큼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알렉스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저 웃었다. 그러게. 그런 웃음에 진이 따라 미소 지었다.

초록색 눈이 진을 꼼꼼히 살폈다. 생기를 가득 담고 있는 검은 눈, 웃느라 살짝 들려 올라간 뺨과 광대, 행복과 사랑에 겨워 반짝이는 피부. 그는 많이 행복해 보였고, 알렉스는 그게 슬펐다. 화가 났다. 난 너 없이도 괜찮아.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어? 난 네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진의 행복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담 맡아 줘서 고마워.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빨리 못 데리러 와서 미안해.”

“아냐, 같이 있어서 나는 좋았어.”

알렉스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진은 탁한 그의 목소리에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검은 눈 역시 알렉스를 차분히 살폈다. 그새 많이 마른 얼굴, 탁해 보이는 초록색 눈, 지친 듯 내려가 있는 입꼬리가 보였다. 진이 알렉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말했다.

“알렉스, 저번 달에 부다페스트에서 경기한 거 TV로 봤어. 그때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요새 좀 지쳐 보여.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냐고? 알렉스가 걱정 어린 진의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무슨 일, 있지. 네가 결혼했잖아. 난 뭐 때문에 수영하는지도 이젠 잘 몰라. 원래도 잘 몰랐지만. 그가 머릿속으로 주절댔다. 하지만 알렉스의 입은 머리와 다른 소릴 내뱉었다.

“아냐, 없어. 이제 나이 들었다고 그러는 거지, 뭐. 이제 막 대학 나온 어린 애들이랑 경기하려니까 힘드네.”

“너무 무리하면서 하지 마. 아직도 로봇처럼 훈련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안 그래.”

“그래, 다행이다.”

진은 걱정된다는 기색으로 알렉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렉스는 그의 손이 닿는 어깨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토닥토닥, 하는 그 손길에 알렉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몸에 이는 작은 진동이 전신을 망가뜨리고 주저앉히려 했다. 그러기 전에, 꼴사납게 이상한 말을 쏟아내기 전에 알렉스가 진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그 손길에 진이 당황한 낯을 하다가 머쓱하게 손을 치웠다.

“진.”

낮은 목소리는 현관 밖에서 들렸다. 에이든 테일러였다. 채근하는 목소리에 진이 서둘러 아담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곤 알렉스가 쥐고 있던 목줄을 가져갔다. 알렉스는 왜인지 몰라도, 빼앗긴다고 생각했다. 진은 제게서 빼앗아가는 중이다. 뭘? 진이 무엇을 빼앗는지는 알렉스도 잘 몰랐다. 초록색 눈이 공허하게 뜨였다. 그 모습을 본 진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말했다.

“알렉스, 너무 무리하면서 하지 마, 뭐든. 너부터 잘 챙기고. 네가 제일 우선이니까. 다음에 꼭 나디아랑 같이 저녁 먹자. 나 어차피 곧 센터로 복귀하니까 알렉스 너랑은 금방 만나겠다. 곧 봐!”

아담이 진을 따라나서다, 알렉스를 한 번 바라봤다. 알렉스는 제 집을 떠나는 둘을 바라봤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 라는 단어 하나가 제대로 나오질 않아서 목이 텁텁했다. 진은 한 번 더 활짝 웃고는 곧 보자고 말을 덧붙였다. 그 미소는 현관문이 닫히고도 마치 그을린 것처럼 초록색 눈 안에 남았다. 진이 웃는데, 이상하게 행복하질 않았다. 그가 웃어도 전처럼 기분 좋지가 않았다. 알렉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집 한복판에. 가진 거라곤 쓸모도 없는 쇠붙이뿐인, 거지같은 공간에.

알렉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진, 나는 이제 네가 미운 것 같아. 네가 밉나 봐. 넌 나한테서 전부 다 가져가기만 하잖아. 넌 나한테서 너를 뺏어가. 너를 뺏어가는 걸로도 모자라서, 나까지도 뺏어가. 너한테 몽땅 다 뺏기고 나서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넌 나쁜 사람이야. 네 마음 중 한 조각이라도 나한테 준 것처럼 굴지 마. 아니면서,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면서. 난 네가 미워, 네가 싫어.

혼자 좋아했다가, 혼자 싫어하는 건 참 무의미했다. 진의 다정함을 사랑했지만, 진의 다정함을 증오했다. 부주의하고 무분별한 그의 다정함에 알렉스는 병들었다. 하지만 다정함은 결백했고 무고했다. 그래서 어떤 고발의 말도 소용없었다. 알렉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허무하게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적막한 거실에 쓸쓸한 공기가 가득했다. 집은 다시 회색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름처럼.

***

“문 열라고 했다, 알렉스 그레이.”

현관문 밖에서 나디아가 말했다. 알렉스는 소파에 누워 들은 척도 안 하는 중이었다. 연락도 무엇도 안 되는 상태로, 그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금요일 저녁, 진이 아담을 데리고 간 뒤로 꼬박 이틀을 잔 상태였다. 핸드폰에는 많은 연락들이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전담 코치가 보낸 것도 있었다.

「훈련 센터를 옮기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척 코치님」

나디아의 것도 있었다.

「진짜 뒤지기 싫으면 전화 받아 - 세계 최강 핫걸 나디아」

「알렉스, 뒤지고 싶어? :) - 세계 최강 핫걸 나디아」

「씨발, 넌 뒤졌어 - 세계 최강 핫걸 나디아」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는 몇 분 전에 온 거였다. 일요일 밤인 지금, 나디아는 씩씩거리며 그의 집 현관을 발로 차고 있었다.

“문 열어! 다 부셔 버리기 전에! 너 이거 내가 못 부실 것 같아? 어?!”

“하…….”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이 등신 새끼야! 아오, 진짜! 다 왜 이래?! 내가 얼마나 더 네 새끼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

진짜 부신다, 부실 거야. 밖에선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현관으로 나갔다. 벌컥 열린 문 밖으로 화난 낯의 나디아가 보였다. 신경질로 이글대는 갈색 눈이 알렉스의 상태를 진단했다. 정신? 나갔음. 상태? 미쳤음. 진단은 초고속으로 끝났다. 깊게 들여다볼 것도 없이 알렉스의 꼬라지는 미친놈, 그 자체였다. 나디아가 가관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최소한 너는 이렇게 멍청이처럼 안 굴 줄 알았는데 왜 이러냐?”

“멍청이인가보지.”

“됐고, 너 빨리 들어가서 씻고 제대로 챙겨 입고 나와.”

“왜.”

“아, 그러라면 좀 그래! 닥치고 가서 얌전히 씻고 나와!”

“싫어.”

싫다는 말에 나디아가 낯을 굳혔다. 그녀가 알렉스의 멱살을 잡았다. 나디아는 그 상태로 그를 질질 끌고 들어갔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알렉스가 반강제로 걸음을 뗐다. 그녀는 욕실의 문을 열고는 알렉스를 그 안에 던져 넣었다. 차가운 낯의 나디아가 말했다.

“당장 씻어. 30분 내로 나와. 죽기 싫으면.”

***

밝은 갈색 머리, 밝은 갈색의 눈동자. 어두운 방에다가 촛불을 켜면, 그 주변으로 둥그렇게 생기는 빛의 잔상을 닮은 색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색에 가까웠지만 어딘지 권태로워 보였다. 게을러 보인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재미없게도 사네.”

남자는 담배를 질겅이느라 발음이 부정확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였다. 아까 자켓 주머니를 몇 번 더듬더니 아, 하고 탄식을 터뜨린 것으로 보아, 라이터가 없는 것 같았다. 알렉스를 향해 뱉어진 말은 꿍꿍거리는 음악이 절반 정도 잡아먹었다. 바 내부의 음악 소리가 너무 컸다. 선곡도 구리다고 알렉스가 생각했다. 그에겐 지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다 구렸다.

“그냥 좀 편하게 살아요, 마음 편하게. 살다 보면 맥주 한 병 정도 먹고 그러는 거지. 누가 봐도 술 필요하게 생겼는데. 그거 먹는다고 인생 안 망해요.”

알렉스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듯이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시선은 저 멀리 어딘가로 던졌다. 그가 꽤나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있거나 말거나, 앞에 있는 검은 수트의 남자는 상관없어 보였다. 남자가 입고 있는 건 나디아의 말로 ‘작업복’이라 칭해지는 그 옷이었다.

“지금도 그렇잖아. 물론 나도 누나가 갑자기 없어져서 굉장히 당황스럽긴 하지만, 뭐 어때요. 이왕 나온 거 기분 좋게 있다가 가는 게 낫지.”

이름은 리버 볼드윈. ‘리버’는 L이 아니라 R로 시작한다고, 남자는 반지 낀 검지손가락으로 허공에 철자를 써 보였었다. 강, 호수, 할 때 ‘리버’ 맞아요. 그렇게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어차피 열심히 사나 대충 사나 인생 좆같은 거 매한가지인데, 뭘 그렇게 불편하게 살아요? 매사 꽉꽉 막혔다는 소리 많이 듣죠?”

그 말에 알렉스가 리버를 바라봤다. 초록색 눈이 어이없다는 듯이 리버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는 사회가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경호원’의 모습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는 알렉스보다 몸집이 작고, 키 역시 약간 작았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폼이 꽤나 불량스러웠다. 믿음직스럽거나 험악하거나, 둘 중 무엇도 하지 못했다. 대신 경박해 보였고 기운 없이 나른해 보였다. 리버는 다리를 꼰 채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알렉스가 생각했다.

‘가벼운 사람.’

여태 리버의 말을 무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생각 없이 사는 거 안 좋아해요.”

“난 생각 없이 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마음 편하게 살라고 했지.”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그거지?”

리버가 눈을 꿈뻑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깜빡, 깜빡, 그렇게. 알렉스가 말을 덧붙였다.

“딱 봐도 그쪽이 마음 편하게, 대충,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데 뭘 아닌 척이에요? 결국 그 소리가 그 소리지.”

빈정대는 낯에 리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리버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놨다. 그는 잠시 테이블을 빤히 바라보다가,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가 담배 대신 꽤나 신경질적인 미소를 입에 물고 말했다.

“아, 뭐, 맞긴 한데. 그렇게 들으니까 기분 좀 더럽네.”

“누가 초면에 나한테 꽉 막혔다고 해서, 기분 더럽다보니 말이 막 나갔네.”

“그러게, 말을 막하네. 싸가지 없단 소리 많이 듣죠?”

“네, 그래도 그쪽보다는 덜 들을걸.”

리버는 뭐라 대꾸하려다 피식 웃었다. 대신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담배를 잡고는 테이블 위로 톡톡, 쳤다. 리버의 눈이 약간 우그러진 담배 필터를 향했다. 여태 나른한 색을 내던 갈색 눈이 사나워진 채였다. 한참을 톡, 톡, 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던 담배가 멈췄다. 리버는 다시 나른한 눈으로 돌아와 말했다.

“생각 없이 사는 게 잘못이에요?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지. 다들 기를 쓰고 인생에 의미 찾으려고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라, 재미있는 취미를 가져라, 그러는데 솔직히 웃기지도 않아.”

알렉스의 눈썹이 리버의 담배 필터처럼 우그러들었다. 리버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 그런 게 있는 놈들은 즐겁겠지. 근데 좋아하는 게 없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게 내 잘못이에요? 맨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네가 즐거워야지!’ 씨발, 속편한 소리하네. 돈 벌려고 하는 일이 다 좆같지 뭘 즐거워.”

“…….”

“근데 꼭 사람 불쌍하게 여기고 바보 취급하잖아, 짜증나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하고, 응원하고. 나는 지금 이 상태로 괜찮은데 자꾸 지들이 더 지랄이야. 계속 바보 취급당하다 보면 나는 좋아하는 일이 뭘까? 그러면서 뭐라도 찾아야 될 것 같고. 결국 또 없으니까 기분 좆같아지고.”

리버가 잡고 있던 담배를 툭, 하니 테이블에 던졌다. 그가 혀로 입 안의 점막들을 슥 쓸었다. 매캐한 회색 연기를 빨아들이고 싶은 기색이었다. 여기저기를 초조하게 보던 리버가 앞에 있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가늠하듯이, 혹은 뭔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그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수영을 좋아하기는 하는 거지?’라던 아주 오래 전의 질문. ‘즐거워 보이지 않아서 묻는 거야.’라던 걱정 어린 목소리.

리버는 알렉스의 눈이 저를 평가하고 있다 느꼈다. 짜증난다는 듯이 찌푸려진 초록색 눈. 아마 저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태도에 리버가 허, 하는 헛웃음을 치곤 말했다.

“예, 일요일 밤에 맥주 한 병 마시는 것도 철저히 관리하시는 그쪽이랑은 다르게, 저는 인생 존나 생각 없이 살고, 맘 편하게 대충 살다 뒤지는 게 꿈입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리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못 참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는 떫은 표정으로 구겨진 수트 상의를 툭툭 털었다. 그리곤 미련 없이 테이블을 떴다. 그가 바에서 나가는 동안, 알렉스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리버는 걷다 중간에 멈춰 섰다. 그리곤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옆에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세우더니 뭐라 이야기를 했다. 아마 라이터를 빌려달라는 것 같았다. 남자가 리버의 담배에 불을 붙였고, 리버는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그는 밝게 웃으면 뺨 위쪽에 인디언 보조개가 들어갔다. 불을 빌려준 남자는 제 일행에게 가다가 리버를 한번 돌아보기도 했다. 리버는 바의 문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귓구멍을 때리는 듯한 빠른 비트의 노래와 그의 발이 박자를 맞췄다.

바의 문을 열고 나가서 그는 잠시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주황빛의 전등이 그의 이마와 콧대, 물고 있는 담배 위로 빛을 떨어뜨렸다. 그는 밤하늘을 잠시 올려다봤다가 문 쪽을 돌아봤다. 바의 문은 절반 정도가 유리라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탁한 초록색 눈과 시선을 맞출 수도 있었다.

리버는 여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알렉스를 발견하곤 묘한 낯을 했다. 그가 물고 있던 담배의 끝이 붉게 타들어갔다. 회색 연기를 깊게 머금었던 그가 훅,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매캐한 공기 사이, 리버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엿이나 먹어.’

혹시 못 알아먹을까 걱정이 됐는지, 친절하게 가운데 손가락도 함께 들어 보였다. 그는 알렉스에게 엿을 먹이곤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뿜어낸 연기의 회색 잔상만이 주황빛 아래에서 일렁거렸다.

***

락커의 철제문이 쾅, 하고 닫혔다. 짐을 모두 챙긴 뒤에 알렉스가 핸드폰에 대고 말을 이었다.

“나디아, 넌 양심이 있으면 어디 가서 사람 보는 눈 좋다고 하지 마.”

[ 왜? 너네 둘이 딱이야. 누나를 믿어 봐. 내가 촉이 딱 왔어. 네 지랄 맞은 성격엔 리버 볼드윈 정도는 돼야 해. 진 헤니 아닌 진 헤니 찾기는 이제 그만하고. 평생 못 찾는다. ]

“걔 성격 엄청 이상한 거 너도 알지?”

근데도 나한테 딱이라고 말해? 그런 뉘앙스의 목소리였다. 나디아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 걔도 너 존나 이상하대. ]

“뭐? 누가 누구더러 이상하대.”

[ 그래, 내가 그래서 ‘알렉스는 널 이상하다고 할걸.’이라고 했었는데, 걔도 그랬어. ‘누가 누구더러 이상하대.’라고. 둘 다 이상해서 너무 잘 어울려. ]

“무슨 개소리야.”

나디아는 대답은 하지 않고 끅끅거리며 웃었다. 한참 웃던 그녀가 말했다.

[ 아, 어디 숨어서 구경할걸. 가관이었을 텐데. ]

“가관이었을 거 알면 앞으로 그딴 헛짓거리 하지 마. 짜증나니까.”

알렉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고, 핸드폰 너머에선 작게 잡음이 섞여 들었다.

[ 누나, 이번 스파링 순서 저 아니에요. 에릭 선배예요. 진짜예요. ]

[ 야! 리버 볼드윈 너 이 새끼! 날 팔아먹어?! ]

[ 팔아먹다뇨. 에릭 선배 순서 맞잖아요. 전 사실만 말했어요. ]

그 목소리였다. 빈정거리는 동시에 나른하게 이어지던 리버 볼드윈의 목소리. 알렉스가 기분 잡쳤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는 나디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걸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까만 벤츠에 몸을 실은 그가 집으로 향했다.

항상 똑같은 루틴, 매일 똑같은 훈련, 매번 비슷한 식단, 별다를 것 없는 하루. 또 하루가 끝났고, 내일도 이렇게 또 하루가 갈 거라고, 알렉스가 생각했다. 재미없어. 집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나른하고 권태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 돈 벌려고 하는 일이 다 좆같지 뭘 즐거워.

알렉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그날 어지간히 기분이 나빴던 모양인지,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

또 한 마디가 생각났다.

- 그냥 좀 편하게 살아요, 마음 편하게.

그리고 두 마디, 아니, 세 마디라고 치는 게 옳을지도.

벤츠가 도로를 매끄럽게 달렸고, 뉴욕의 밤이 차와 속도를 맞춰 질주했다. 화려한 빛이 차창 위에서 퍽퍽 부서졌다. 빛이 제 빛깔을 뽐내 보기도 전에 차는 빠르게 그들을 지나쳤다.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위 없다는 듯 달려 나갔기에, 차 안은 마냥 회색으로 어두웠다. 이제 멈춰. 신호등이 별안간 경고했고, 빨간 빛을 받은 자동차가 지랄 맞은 성질을 죽였다.

목적지 하나를 두고 정신없이 달리던 그가 멈춰 섰다. 마구잡이로 부서지던 빛은 그제야 온전히 차창을 비췄다. 알렉스는 제 눈 위로 쏟아지는 주황빛을 바라봤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 빛은 특유의 나른한 색채로 초록색 눈을 물들였다. 회색 어둠으로 물든 방 안, 누군가 작은 촛불을 켠 것처럼, 그렇게.

“누가 누구더러 이상하대. 지가 제일 이상하면서.”

알렉스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초록불이 켜졌다. 이제 다시 가도 돼, 다시, 어디로든. 신호등이 말했다. 차는 조금 전보다 느긋한 속도로 도로를 빠져나갔다. 온갖 곳에서 빛이 번쩍거리는 뉴욕의 밤거리, 차가 사라진 도로엔 여전히 주황빛이 넘실댔다.

사는 데 재미랄 것 하나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예측 불가능한, 그리고 때로는 짜증나고 종종 신경질 나는 재미가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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